이신철 목사, "한상동과 고신의 정체성, 그리고 과제" 발표

2022 미래교회포럼(대표회장 권오헌 목사) 1차 대구포럼이 3월 25일 대구 샘물교회(담임 소재운 목사) 당에서 열리고 있다. 

사회하는 미포 사무총장 이세령 목사
사회하는 미포 사무총장 이세령 목사

 고신교회 70주년을 기념하면서 미래지향적으로 70년을 돌아본다는 취지로 열린 미포 첫 번째 강사로 이신열 목사가 나섰다. 이신열 목사는 "한상동과 고신의 정체성, 그리고 과제"라는 제목으로 발제했다. 

기도하는 미포 전임 회장 오병욱 목사
기도하는 미포 전임 회장 오병욱 목사

이 목사는 고신교회 역사 가운데 한상동과 송상석의 공과를 점검하며, "교회가 너무 인물 중심으로 치우치지 않게 지도자들은 스스로 조심해야 한다."고 전했다. 이 목사는 "지도자 중심의 분파"에 대해 경고하며, "교회의 정치적 분파가 노골화되어 갈등의 요인이 되지 않도록 각별히 경계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다음은 이신철 목사 발제문 전문. 

발표하는 이신철 목사(우)와 논찬 준비하는 임채호 목사(좌)
발표하는 이신철 목사(우)와 논찬 준비하는 임재호 목사(좌)

2022 미래포럼

한상동과 고신의 정체성, 그리고 과제

이신철 목사 (청주등대교회)

한상동은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주창자였고, 해방을 맞아 출옥한 후에는 주남선과 함께 고려신학교를 설립하였고, 승동측과 합동의 선봉에 섰다가 돌연 고려신학교 복교를 선언하여 환원의 전환점이 되었고, 환원 이후 총회 직영이 된 고려신학교 학장이 되어 이사장이었던 송상석과의 대립 구도 속에서 반고소파의 고신 이탈을 쓸쓸히 지켜보았던 인물이다. 한상동은 고신 이전의 신사참배반대운동 시기와 고신의 태동기, 초창기, 합동기, 재건기 등 고신의 정체성 형성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다. 본고에서 우리는 한상동이 고신 역사의 전환점에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간단히 살펴보고 그가 고신의 정체성 정립과 개혁을 위해 남긴 과제를 제시해 보고자 한다.1)

 

1. 신사참배 반대운동과 한상동

일제 조선총독부의 신사참배강요는 1930년대 초에 먼저 각급 학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신사참배는 종교행위가 아니라 국가의식이라고 가르치면서 제국의 신민이면 누구나 신사참배를 해야 한다고 강요하였다. 선교부가 운영하던 기독교학교들도 신사참배의 명령을 회피할 수 없었고 이에 불복하던 학교들은 폐쇄되었다. 그리고 식민세력은 로마 가톨릭교회, 7일 안식일교회, 성결교회, 구세군, 성공회, 감리교 등을 차례로 무너뜨렸고 1938년에는 한국장로교회 총회마저 공개투표를 통하여 신사는 종교가 아니요”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한다고 선언함으로써 그 압박에 굴종하고 말았다.

총회의 결정을 앞세워 신사참배에 굴종한 교회들은 미숙하나마 힘겹게 지켜온 개혁주의 장로교회의 정체성을 뒤로 던져 버렸다. 주일예배가 시작되기 전에 목사가 동방요배를 선도하였다. 목사는 정부의 지침에 맞는 설교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하여 설교하거나 가르칠 수 없었다. 예배 중에 세례와 성찬이 희귀하였다. 신학교는 황국에 충성하는 일본식 기독교를 가르칠 교사를 양성하는 기관이 되었다. 선교부들은 한국장로교회로부터 탈퇴를 선언하였고, 기독교학교를 폐쇄한 후 선교사들은 농촌에서 전도를 하려고 했으나 교회로부터 배척을 당하였다. 한국에서 더 이상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한 대다수의 선교사들은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 교회는 말씀과 성례 예배 그리고 전도가 훼손된 교회였다. 한국장로교회는 1943년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으로 이름을 바꾸어 달게 되었고, 결국 다른 교파들과 함께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 흡수통합되었다.

이렇게 신사참배강요 앞에 철저히 무너진 한국장로교회 안에 신사참배강요에 저항한 대표적 인물은 주기철이었다. 그는 일제의 위협과 회유에도 흔들림 없이 강단에서 그리스도의 왕권을 굳건히 선포하였다. 신앙의 절개를 지키며 신사참배를 거부한 그는 그 교회의 성도들 뿐 아니라 전국의 많은 성도들과 목사들에게 큰 격려가 되었다. 주기철 외에도 신사참배를 하지 않은 목사들과 성도들은 여러 명 있었다. 그 중에 특히 신사참배반대운동을 주장한 대표적인 분들로서 평북의 이기선, 경남의 한상동이 있었다. 신사참배반대운동은 정치적 항거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니고, 신사참배를 용인하고 독려하던 타협한 교회로부터 성도들을 불러내어 그 죄에 참여하지 않게 함으로써 성도들을 지키려 함에 초점이 있었다.

이기선은 1940년에 신사참배에 대한 반대운동을 다음과 같이 천명하였다. “1. 자녀들을 신사참배하는 학교에 보내지 말 것, 2. 타협한 교회를 떠남으로써 그 교회에 대한 반대를 분명하게 할 것, 3. 따로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신실한 성도들을 모으고 그들을 교회로 조직할 것.”2) 이것은 반대운동을 넘어선 교회설립운동이었다.

마산문창교회 목사 한상동과 그의 동지들3)19401월에 다음과 같은 신사참배반대운동을 제안한다. “1. 현 노회 해체운동, 2. 신사참배 목사의 수세불능, 3. 신사불참배주의 신도들만의 신노회 조직 4. 신사 불참배 동지의 상호원조 도모 5. 그룹 예배의 여행과 함께 동지 획득에 주력할 것.”4) 타협한 교회를 떠나 따로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을 모아 새 교회를 조직할 것을 제안한 이기선과 비교해 볼 때 한상동은 더 나아가 현노회의 해체와 신노회의 조직을 주장한 것이 명시된 차이점이다. 그러나 주기철은 교회나 노회를 따로 세우는 조직적인 신사참배반대운동보다 각 사람이 자기의 양심대로 행동하도록 일임하는 것을 선호하였다.

주기철과 한상동의 신사참배반대와 관련한 입장의 차이에 대하여 이상규는 주기철은 신사참배를 반대하였으나 신사참배에 항거하는 반대운동을 또한 반대하였다”5)고 주장하였다. 주기철은 개인이 신사참배에 참여하지 않는 결정을 하면 되지 조직적으로 반대운동을 벌이는 것은 좋다 않다는 입장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상규는 주기철이 설교에서도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권고한 사실이 없다”6)고 강조하였다. 우리는 주기철이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주도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설교에서 신사참배가 죄라고 분명히 밝힘으로써 성도들이 그 말씀대로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권면한 것이라고 보아야 하며 신사참배 반대 여부를 그냥 개인의 판단에 일임한 것은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이상규는 이기선의 새 교회 설립 또는 한상동의 신노회 조직의 주장을 분리주의적 입장7)이라고 보았으나 허순길은 제도적 교회가 배교로 흘러갔을 때 새로운 교회를 원했던 것은 분리주의가 아니라8)고 반박하였다. 허순길은 주기철도 성도들이 타협한 교회들 안에 계속 머물러 있기를 원하지 않았으므로 새교회 설립과 신노회의 조직을 원리적으로 반대할 리 없었을 것”9)이라고 보았다.

우리는 이기선과 한상동의 신사참배반대운동에 동의하면서 그들이 새 교회 또는 신노회의 조직을 좀 더 유연하게 제시했으면 좋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먼저 신사참배하는 교회로부터 따로 나온 성도들이 비록 소수이고 모일 장소를 확보하지 못하였더라도 가정이나 임시처소에서 하나의 예배 회중으로의 형성 단계를 우선 제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섣불리 교회 또는 노회의 조직을 내세워서 기존 교회들과 대립 구도를 짜려 한다는 오해를 일으킬 필요는 없다. 장로교회로서 제도적 구조를 갖추려고 서둘기보다 장로교 조직의 기초적 요소인 가정을 중심으로 하는 원초적 예배공동체로 핍박의 때를 견디며 살아남았다가 때가 되면 회중의 구조를 갖춘 장로교회로 조직하도록 제시할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2. 고려신학교의 설립 및 고신파의 분열과 한상동

신사참배의 죄를 범한 교회들이 어떻게 회복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은 해방을 맞은 한국교회들의 최대의 과제였다. 일본 교단의 탈을 벗어 던지고 싶었던 목사들로서는 옛 교회의 이름을 다시 걸고 옛 노회, 옛 총회의 모습으로 복귀하는 것이 당연해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1945920일 출옥 성도들은 한국장로교회의 회복을 위해 제도적 교회의 환원 또는 재조직에 앞서 영적 회복이 우선임을 주장하고 목사와 장로들은 신사참배의 죄를 회개하고 권징을 받은 후에 교역으로 회복되어야 할 것과 신실한 교역자 양성을 위하여 신학교를 복구 재건할 것을 촉구하였다.10) 일반 성도들도 신사참배의 죄를 범하였지만,11) 한국장로교회는 먼저 노회 그리고 총회가 앞장서서 신사참배를 가결함으로써 전체 교회를 신사참배로 끌고 갔던 것이기 때문에 목사 장로들의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한 것은 적절한 것이었다.

그러나 자책 또는 자숙 그리고 최소 2개월간의 휴직 등의 권징은 교회를 우상 숭배의 죄로 몰아간 목사와 장로들의 엄중한 죄에 대한 권징으로 보기엔 매우 가볍고 부적절하였다. 교회의 영적 회복을 위한 공적 권징의 정점에 수찬정지가 있다. 한국장로교회는 처음부터 성찬에 참여하면서 회개하고 회복하는 데 익숙하지 못하였다. 게다가 신사참배에 굴종한 후 공예배 중에 성찬식을 행하는 교회가 드물었기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신사참배의 죄를 범한 목사와 장로들의 권징에 수찬정지를 적용하지 않았던 것은 반성해 볼 일이다. 수찬 정지를 적용하되 목사와 장로에게는 일반 성도보다 더 길게 적용하고, 금지 기간 중에 오직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을 받은 후에 공적으로 회중 앞에 죄를 자백하고 그리스도께 대한 헌신을 공포한 후에 교역으로 회복하게 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개체교회, 노회 및 총회의 조직을 복구해 나갔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실제 한국장로교회의 복구는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1946년 초까지 경남노회를 필두로 여러 노회들이 하나씩 그들의 옛 노회가 재조직되었음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612일 남북 왕래가 점점 어려워지던 상황에서 각 노회의 대표들이 서울 승동교회에 모여 남한에 있는 노회들로 남부대회의 조직을 우선 선언하고 추후 이북의 교회들과 노회들이 참여한 총회를 재조직하기로 하였다. 남부대회는 제27차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가 잘못되었으므로 삭제하기로 결정하였으나 신사참배자들의 권징 문제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황국에 충성하는 목회자를 양성하는데 앞장섰던 조선신학교를 대회가 직영하기로 결정하였다. 소위 재건파는 신사참배의 죄를 철저히 회개하지 않고 겉모양만 다시 갖춘 한국장로교회를 현실교회 또는 사탄의 회라고 정죄하고 철저한 단절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출옥 성도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목사들은 일단 한국장로교회의 노회와 대회의 제도적 복원을 수용하였다. 한상동, 주남선, 이인재, 손명복, 최상림, 조수옥 등의 출옥성도들을 배출한 경남노회는 19459월에 출옥성도들의 자숙안에 의거하여 목사들과 장로들의 자숙을 결의를 하였고, 특히 주남선과 한상동은 한국장로교회의 미래를 짊어질 목사들의 양성을 조선신학교에게 맡길 수 없다고 보고 바른 신학에 입각한 목회자와 전도인 양성을 위하여 1946920일에 고려신학교를 부산에 설립하였다.

남부대회와 여러 노회들이 고려신학교의 독자적 행보에 대하여 못마땅하게 생각했으나 경남노회의 회원 다수는 고려신학교에 동정과 지지를 보내 주었다. 그러나 같은 노회 안에 자숙을 거부한 목사들은 고려신학교에 대한 노회의 지지를 철회하는 결정을 이끌어내기도 하였다. 자숙파와 반자숙파로 대립하던 경남노회가 고려신학교 측과 반고려신학교 측으로 나뉘어 한 때는 다섯 개의 노회 그룹으로 분열되기도 하였다. 고려신학교 측인 소위 경남법통노회와 반 고려신학교 측인 나머지 노회 그룹은 각각 총회에 총대를 파견했으나 법통노회 총대들은 총회로부터 삼 년 연속 문전박대를 당하였다. 이렇게 냉대를 당하게 되자 경남법통노회에 소속한 교회들을 중심으로 1952911일 진주 성남노회에서 별도의 총노회를 조직하였는데 이것이 한국장로교회의 첫 분열이자 소위 고신파의 시작이었다.

경남노회는 심사참배 죄에 대한 자숙 문제로 서로 대립하다가 고려신학교의 인정과 불인정의 문제로 반목이 격화되어 결국 교회의 분열로 귀결되었다. 총회가 세 차례나 경남법통노회의 총대를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단독으로 총노회를 조직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좀 더 인내를 가지고 몇 년 더 문전박대를 받더라도 총대 수용을 거듭 탄원했으면 어떠했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또 하나의 이슈는 주남선과 한상동이 총회 직영이 아닌 고려신학교를 사설로 설립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 당시 총회의 직영 신학교는 조선신학교였다. 주남선과 한상동이 한국장로교회의 목회자 양성을 자유주의 신학에 물든 조선신학교에 맡길 수 없어서 정통 보수신학에 기초한 신실한 목회자와 전도인 양성을 위해 고려신학교를 세운 것이었다. 이것은 한상동이 옥중에서부터 쉬지 않고 간구한 기도의 응답이었다. 하지만 총회가 고려신학교를 직영신학교로 지정하지 않은 한, 노회의 입학 추천이나 총회의 강도사 인허를 보장받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려신학교는 지원자들에게 노회 추천서를 제출하라고 요구하기보다 당회장 추천서를 받아 오도록 하고 졸업생들이 고려신학교에 대해 우호적인 노회들에게 강도사 인허를 신청하면서 점차 총회 인준 또는 직영 신학교로 키워 나갔다면 어떠했을까? 이렇게 했다면 고신의 분열을 거치지 않고 오히려 고려신학교가 한국장로교회 안에서 보수신학의 보루로 자리매김할 여지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3. 합동 및 환원과 한상동

1952년 진주 성남교회에 경남법통노회 소속 목사 50, 장로 37명이 모여 고신 총노회를 출범하였다. 1951년 경남노회 소속 교회는 모두 344개였는데 그중에 276개 교회가 이듬해 고신 총노회에 가입하였다. 총회가 창립되던 1956년에는 568개의 교회로 급성장하였다. 이는 한국장로교회의 정체성 회복에 앞장선 고신 교회의 순수한 열정과 회개에 이끌린 교회들이 고신에 편입함으로 일어났다.12) 하지만 1956년 이후 고신에 가입하는 교회들이 크게 감소한 이유는 시간이 지날수록 전체 한국장로교회에 대한 고신의 신선한 영향력이 희미해졌기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1950년대에 교회들이 한국장로교회 주류 또는 타교단으로부터 고신으로 옮기는 중에 교회 재산권에 대한 분쟁이 일어났을 때 법정고소가 일어나기도 했는데 고신 내부에서 세속 법정에 신자를 고소할 수 있느냐는 의견 충돌과 갈등을 언급할 수 있다. 한상동은 초량교회 담임목사였지만 고신에 속하였다는 이유로 주류 노회가 그 교회를 떠나달라고 했을 때 교회재산에 대한 아무 요구 조건없이 목사를 따르는 성도들을 데리고 나와 삼일교회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다른 교회들 특히 송상석이 담임목사로 있던 마산문창교회는 교회 재산권 문제로 오래 동안 법정분쟁에 빠져 있었다. 법정 시비가 오래 계속되자 고려신학교 초대 교장이었던 박윤선은 교회재산을 둘러싼 법정송사가 합당하지 않다고 지적하였고 이 문제가 하나의 신학적이고 교회법적인 논쟁으로 비화되었다. 한상동은 법정송사를 동의하지 않으나 적극적으로 그것이 부당하다고 주장하지도 않은 것 같다. 1957년 총회 중에 경기노회 총대들은 성도의 법정고소에 대한 항의가 관철되기까지 행정보류를 선언하였고 결국 고신에서 이탈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런 불미스러운 갈등 이후에 고신으로 편입하는 교회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법정소송 문제가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가운데 19605월 어느 주일에 박윤선이 안식년을 위해 미국으로 떠나는 스푸너(Arthur Boyce Spooner) 선교사를 전송하러 다녀온 것을 두고 고려신학교 이사회는 박윤선이 주일예배를 참석하지 않고 부두로 전송하러 갔다 온 것을 사과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박윤선은 자기 신양양심에 거리낌이 없다 하면서 이를 거부하자 이사회는 그를 해임하였고 그해 9월 그는 고려신학교와 고신을 떠나갔다. 한상동은 박윤선의 양심 선언을 이해하면서도 강력하게 그를 변호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은 한상동에 대해 섭섭하게 생각한 것 같다. 그가 떠난 후 고려신학교는 빈 집과 같았고, 고신은 큰 상실감과 당혹감을 겪어야 했다.

19601213일에 고신측과 승동측이 합동총회를 열고 양측의 합동을 선언하였다. 이 합동을 이해하려면 위에서 언급한 고신측의 갈등 배경과 함께 19599월과 11월에 연동측과 승동측이 각각 총회를 따로 조직하고 분열하게 된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 총회신학교 교장 박형룡의 교비(3,000만환) 손실에 연루된 의혹, WCC 가입에 대한 연동측과 승동측의 의견대립, 경기노회 총대에 대한 양측의 충돌 등을 알아야 하지만 간략히 언급하는 데 그치고자 한다.

19608월에 승동측은 고신측에게 한국장로교회의 보수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양측이 합동할 것을 제안하였다. 고신은 한국장로교회로부터 영구히 분리할 의도가 없었기 때문에 승동측이 조선신학교를 중심으로 하는 기장측과 WCC 가입을 추진한 연동측을 떠난 승동측과 합동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히고 별 주저함 없이 승동측의 합동제안을 환영하였다. 양측합동추진위원들은 합동총회에서 4개 분야에 대한 합동 원칙을 발표하였다. 1. 웨스트민스터 신도개요와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에 명시한 12신조를 합동의 기준으로 하고 2. 칼빈주의 신학을 합동의 원칙으로 하며 3. 신학교는 총회 직영의 신학교로 일원화하고 4. 장로회 규칙에 일반교회행정은 과반수로 가결하고 재정 특히 부동산 처리는 공동의회 정족수의 2/3이상으로 가결하고 교리 및 신학 신앙 문제는 전원의 1/3의 거부권 행사를 실시한다는 취지였다.13)

허순길은 합동 결의과정에 있어서 노회들의 수의과정을 최대한 간소화하거나 생략한 것은 개혁주의 정통신앙과 생활에 맞지 않는 과오라고 지적하고 있다.14) 양측이 과거에 겪었던 갈등의 주요 원인을 바로 인식하고 이에 대한 예방 방안을 충분히 준비하지 못한 것도 부적절하다 하였다. 특히 양측에게 가장 예민한 문제였던 고려신학교 승인, 그리고 총회신학교와의 통합의 문제에 대해서 좀 더 신중한 논의를 거치지 못하였다고 비판하였다.

한상동은 고신측 합동추진 위원으로, 합동총회의 총회장으로, 그리고 신학교 통합이사회 이사장으로 이 합동의 진행 과정에 처음부터 가장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한상동은 신학교 통합이 더 진행되면 그가 가지고 있던 고려신학교에 대한 법적소유권을 총회에 넘기려고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그런데 19621017일에 한상동은 돌연 고려신학교의 복교를 선언하였다. 왜 그가 갑자기 마음을 바꾸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승동측에 대한 그의 신뢰가 깨어졌기 때문일 것이라는 점이다. 고려신학교가 더 이상 신입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곧 자동폐교될 것인데 그렇게 된다면 신실한 목사를 배출하여 한국장로교회를 개혁하고자 했던 비전도 사라질 것이라는 절박한 위기의식을 갖게 되었을 것이었다. 그는 사전에 어떤 공적 의논이나 해명 없이 단독으로 복교를 선언하였다. 그가 단독 결정에 따르는 비난을 충분히 예상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강행한 것은 합동 이후 진행되어 온 신학교 통합 추세 속에 정상적인 논의 과정을 통하여 고려신학교의 폐교를 막을 수는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고려신학교 학우회는 1031일 학생들 대다수의 서명이 담긴 성명서를 통하여 합동과 신학교 일원화 구조의 유지를 재확인하면서도 한상동의 복교선언을 지지하였다. 고려신학교 5기 졸업 동기였던 홍반식, 오병세, 이근삼 등은 19632월에 고려신학교 복교선언에 대해 우리는 고려신학교 복구의 방법은 가하지 않았다고 하겠으나, 그 동기는 순수하고 그 정신은 한국교회를 사랑하는데 있는 것을 인정합니다.”15)라는 입장을 밝히고 복교된 고려신학교에 교수로 봉직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허순길은 한상동이 단독적 행동 때문에 받을 비난을 감수하더라도 적어도 고려신학교만은 건지려”16)고 한 속마음을 이해하려는 입장을 취했다.

우리는 그의 복교의 단독 결행을 어떤 논리로도 정당화할 수 없고 비난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가 고려신학교 복교선언을 통하여 고려신학교만 안고 합동 교회를 탈퇴하려 하였다거나 고려신학교를 살리기 위해 합동을 폐기하고 고신을 다시 합동 이전으로 되돌리려고 했다는 비방은 지나친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 하면 고려신학교의 복교선언은 합동된 교회 내에 직영신학교를 하나만 두고자 하는 입장 외에 두 개의 직영신학교를 둘 수도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서 합동의 양측이 상이한 입장을 인내를 갖고 조율해 나갈 수 있는 문제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려신학교의 복교는 합동 양측 사이에 불신의 골을 더 깊게 만들었고 1963년 총회 고시부는 고려신학교 졸업생 5명에게 강도사 고시 참가를 불허함으로써 고신측의 불만을 더욱 자극하였다. 승동측과 고신측이 합동 이후 일어나는 불만과 갈등을 조율하지 못하고 분열이라는 파국에 이르게 된 것이 너무 안타깝다. 합동 선포의 순간에 합동이 완결되었다기보다 그 이후 합동의 완성을 위하여 부단히 서로 이해하고 신뢰를 구축해 나가는 과정이 남아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인데 양측 모두 이런 후속적인 과정에 대한 진지하고 구체적 노력이 너무 미흡했다.

이제 합동이 파국을 맞은 결과로 고신은 환원되었다. 19639177개 노회 435개 교회 116명의 목사들이 합동총회에서 분리하여 고신 환원총회에 가담하였다. 그 교회수는 합동 당시의 교회수보다 155개 감소된 것이었다. 고신측이었던 48명의 목사들이 합동총회에 남았다. 환원한 교회들의 총 세례교인수는 합동 당시보다 10,623명이 감소하였다. 고신 총노회가 조직될 때는 회개 자복한 교회로서 자부심이 있었지만, 환원한 고신은 합동의 실패로 크게 상처 입고 수치를 당한 모습이었다. 환원한 고신은 본래의 고신을 자동적으로 승계할 수 있는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진지하게 반성하였다. 합동을 주도한 한상동, 송상석, 황철도 등의 지도자들은 합동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시인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환원 총회 앞에 사과하였다. 1964년 두 번 째 환원총회에서 한상동은 고려신학교의 법적소유권을 총회에게 양도하였고 총회는 고려신학교를 직영으로 삼았다. 1965년 총회는 한상동을 총회장으로 선출하였으나 그는 스스로 사양하고 자숙하였다.

양낙흥은 고신의 환원은 환원이라 할 수 없고 재분리라고 주장하였다. 합동으로 승동측과 고신측은 그 실체가 없어졌기 때문에 현재의 합동에서 분리해 나온 현재의 고신은 옛 고신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정당한 이유없이 분리하기를 일삼는 분리주의자라는 오명을 벗기 어렵다고 혹평하였다.17) 하지만 합동 이후 합동의 남은 과정을 이행하던 중에 깨어졌기에 옛 고신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 환원 의식을 가지고 다시 결속된 총회였기에 환원 총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제 말기 한국장로교회도 일본기독교단에 흡수되었어도 해방 후에 다시 한국장로교회로 복귀 또는 환원된 것이 아니겠는가? 합동 실패는 합동 양측에게 그 책임이 있다. 고신측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고신측을 분리주의자라고 한다면 합동측은 무엇이라고 해야 하는가?

비록 고신이 합동 총회에서 환원하여 지금까지 고신 교회로 계속 나뉘어 있지만 영구히 분리된 채로 남아 있기 위해 환원한 것은 아니다. 다시 합동한다면 그때처럼 미숙하게 불신과 갈등을 방치하지 않고 그때그때 합동을 유지하고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서로 다른 입장들을 조율하고 합의점을 찾아 나가야 할 것이다. 합동총회와 환원총회가 다시 합동할 수 있는 때를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시기를 기도한다.

 

4. 고신 재건기와 한상동

고신이 환원하여 새로운 도약을 위해 와신상담하고 있던 그때는 한국사회가 산업화와 도시화로 막 경제성장의 가도에 올라 힘차게 달리기 시작하던 때였다. 1963년 일 인당 국민소득이 100달러에 불과했으나 1975년에는 253달러, 1980년에는 1,579달러로 성장하였다. 합동측은 고신의 환원 후에도 큰 어려움 없이 합동의 유익을 누리면서 경제성장에 따른 사회적 변화에 잘 적응하여 1964년부터 1975년까지 전체 교회 수가 66.0%나 증가하였다.18) 하지만 고신은 도시화와 산업화의 사회적 변동에 발빠르게 대처하지 못하여 같은 시기에 전체 교회수는 22.9%의 성장에 그쳤다.19) 고신은 상대적으로 많은 미조직 상태의 교회들을 돌보기에 바빠 교회개척을 통한 새로운 도시와 지역으로의 확산이 느렸다. 하지만 불탄 폐허의 허탈함과 같은 환원의 후유증을 겪으면서도 고신은 교회와 신학교의 재건에 힘을 집중하고 있었다. 환원 이후 고신은 고려신학교를 직영화하여 고려학원을 설립하고 칼빈대학과 복음병원을 고려학원의 우산 아래로 집결하였다. 이사장 송상석과 함께 한상동이 고려신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고려신학대학으로 대학 인가를 받았던 1970년은 이제 환원의 상처도 어느 정도 아물고 고신의 새로운 미래가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 열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고신은 이런 희망을 짓누르는 몇 가지 심한 어려움을 겪었다. 경기노회는 1970년부터 총회에다 고려신학교를 서울과 수도권 지역으로 옮기되 우선 분교를 열어주기를 거듭 청원하였으나 여러 해 논의 끝에 1974년 무기한 보류되었다. 고려학원 이사장 송상석의 임기만료 후 인장의 인계 거부로 새 이사장으로 선출된 김희도가 송상석을 법정에 고소하였고 1973년 법정 판결로 그의 이사장직은 몰수되었다. 송상석을 법정고소한 것에 대해 1975년 총회에서 찬반 논쟁이 벌어져 결국 송상석을 목사 제명하자 이에 항의한 경남법통노회의 반고소파와 서울 경기노회의 반고소파가 각기 노회를 따로 조직하였고 197610월에 그들의 총회를 결성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1975년은 고신 교회가 와신상담 끝에 합동 이전의 교세인 598개 교회로 회복되고 있었지만 법정고소의 시비로 인하여 경남법통노회의 약 70개의 교회와 경기지역의 몇 교회들의 이탈함으로써 고이 간직하며 키워오던 고신의 재도약의 희망은 무참히 깨어졌다. 재건운동이 큰 난관에 봉착했던 것이다. 한상동은 송상석과의 불편한 관계를 참아 왔으나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라 여기고 이런 분열의 아픔을 고스란히 받아 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문제들을 반성해 볼 때 고신의 소위 지도자라 할 수 있는 한상동과 송상석,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목사 장로들의 갈등은 고신 교회에 또 다른 시련을 남겨 주었던 것이다.

한상동은 환원한 고신이 분열로 치닫고 있던 197616일에 자신은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하면서 모든 교단의 문제들을 하나님 앞에 맡기고 소천하였다.

 

5. 결론: 고신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한상동이 남긴 과제

한상동은 고신 교회의 정체성 형성에 골격을 이루는 역사적 현장에 중심적 인물로 자리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그의 영적 감화와 결단은 고신이 어려운 고비를 넘을 때마다 문제를 타개해 나감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는 자기 스스로 의도하고 기획함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고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그를 세우시고 사용하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제 세월이 많이 흘러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고신 교회가 그의 영향 아래 이루어진 일들에 대해서 반성적으로 돌아보고 더 나은 방향을 찾아야 하겠다.

첫째, 그의 신사참배반대운동에 있어서 신노회 조직 제안은 일제치하에서 핍박을 받던 교회적 상황에 맞지 않고, 오히려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 성도들이 은밀히 모이는 예배 공동체를 형성해 가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장로교회가 외부의 핍박을 받을 때는 그 안에 내제되어 있는 가정을 중심으로 하는 작은 예배공동체로 전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평소에 교회의 회중 예배와 교육만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가정예배와 교육을 진작시키고 믿음의 가정 또는 작은 신앙공동체를 세워나가기를 병행해야 할 것이다. 믿음의 가정 단위를 기본으로 하는 소그룹 운동은 대교회의 유지를 위한 수단이 아니고 어떤 상황에서도 핍박과 난관을 견딜 수 있는 핵심을 견실하게 한다. 이런 필요는 최근 펜데믹 상황에서도 제기되고 있다.

둘째, 한상동을 포함한 출옥성도들이 제시한 교회회복의 5원칙에서 신사참배한 목사와 장로들의 회개와 자숙, 일시적 사역 중지 등을 정확하게 시행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음을 생각하게 된다. 중한 죄를 범한 사람에게 회개와 자숙을 개인적 차원이 아닌 교회적 차원에서 공적으로 시행하기 위해서 수찬정지를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회의 목사나 장로뿐 아니라 성도들까지 하나님 앞에 범죄한 것이 있을 때 막연히 자숙과 회개를 권징의 방법으로 앞세우기보다 일정한 기간 성찬을 제한한 다음 다시 성찬에 참여하게 함으로써 참된 영적 회복에 이르는 과정을 구체화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평소에 성찬을 바로 시행함으로써 수시로 예수 그리스도의 죄사함의 은혜를 교회 안에서 누리도록 해야 할 것이다.

셋째, 주남선과 한상동이 교회의 목사 양성을 신사참배에 굴종한 조선신학교와 총회 교권주의자들에게 맡길 수 없다고 하여 소위 사설 신학교인 고려신학교를 설립하였고 이것이 노회의 분열과 고신의 분열로 이어졌던 것을 보며 고려신학교가 직영이 아니면서도 교회로부터 원만한 인정을 받기까지 교회와 노회와 총회의 관계에 있어서 좀 더 유연한 자세를 취했다면 좋았겠다고 반성하게 된다. 그리고 조선신학교밖에 직영 신학교가 없었던 상황에서 총회가 고려신학교가 직영 신학교가 아니라는 이유로 고려신학교 자체를 불법적 존재로 치부한 것은 지나치다고 생각한다. 노회가 목사 고시와 안수를 관장하므로 직영 신학교 출신이 아니더라도 적절한 고시와 검증을 거쳐서 수용할 수 있고, 필요에 따라 한 총회 안에 복수의 신학교가 있을 수 있음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총회가 신학교를 너무 교권적으로 장악하려 해서는 안 된다. 이런 점은 선교지에서 적용할 수 있다. 우리 선교사가 개척한 교회의 목사를 키우기 위해 우리가 직접 신학교를 직영하지 못하더라도 개혁주의 신학적 입장에 부합하는 어느 신학교를 인준해서 그 학교에 학생을 파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넷째, 합동 후에 한상동이 고려신학교 복교를 선언한 것과 그 후의 환원이 그의 분리주의적 경향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주장이 논의할 수 없는 주제는 아니지만, 그 주장으로 고신 교회가 마치 부끄러운 교회인 양 지괴감에 빠질 필요는 없다. 한상동은 고신 교회의 형성이나 고려신학교의 복교 선언에 깊이 관여되어 있으나 분리된 상태를 영구화하려 한 적이 없었고 언제나 때가 오면 교회가 서로 하나가 되고 합동하는 것을 늘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오늘 고신 교회도 앞으로 교회 합동을 내다보면서 관계를 개선하고 서로의 예민한 문제들을 이해하고 갈등을 해소해 나갈 수 있도록 예비적 논의들을 계속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서로 다른 의견이나 입장 때문에 쉽게 분열로 치닫지 않고 합의점을 찾아 합동을 유지할 수 있는 자세를 갖추어 가야 할 것이다.

다섯째, 한상동과 송상석은 본의 아니게 고신 재건운동에 있어서 서로의 갈등 때문에 큰 폐해를 남기게 되었다. 교회가 너무 인물 중심으로 치우치지 않게 지도자들은 스스로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지도자 중심으로 분파가 형성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교회의 정치적 분파가 노골화되어 갈등의 요인이 되지 않도록 각별히 경계해야 할 것이다.


▼미주

1) 이 글은 주로 졸저 한국장로교회와 교회개척 (서울:생명의 양식, 2013), 150-209를 참고하여 작성되었음을 밝힌다.

2) “부록:21인 예심과 질문.” 태양신과 싸운 이들, 안용준편 (부산:칼빈문화출판사, 1956), 263-389

3) 한상동의 동지들은 조수옥, 손명복, 배학수, 염애나, 이찬수, 주남선, 이현속, 황철도, 최덕지, 김영숙, 최상림 등과 호주선교사 메이지 테이트 (Maysie G. Tait) 등이었다.

4)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 II (서울:생명의 말씀사, 2004), 725.

5) 이상규, “주기철의 신사참배 반대와 저항기독교사상연구 제4(1997), 227.

6) ibid., 229

7) ibid.

8) 허순길, 한국장로교회사 [서울: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고신) 역사편찬위원회, 2002], 265.

9) ibid.

10) “1. 교회의 지도자(목사와 장로)들은 모두 신사에 참배하였으니 권징의 길을 취하여 통회 정화한 후 교회에 나아갈 것. 2. 권징은 자책 혹은 자숙의 방법으로 하되 목사는 최소한 2개월간 휴직하고 통회 자복할 것. 3. 목사와 장로의 휴직 중에는 집사나 평신도가 예배를 인도할 것. 4. 교회 재건의 기본 원칙을 전국 각 노회 또는 지교회에 전달하여 일제히 실행케 할 것. 5. 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복구 재건할 것.” 김양선, 한국기독교 해방10년사 (서울: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교육부, 1956), 45.

11) 선교사들이 운영하던 기독교 학교에 자녀를 둔 일반성도들이 자녀교육에 지장을 받지 않게 하려고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학교를 폐교하려던 선교부에 항의하였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신철, 한국장로교회와 교회개척 [서울: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총회출판국, 2013], 152-153.

12) 이신철, ibid., 182-183.

13)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회록(고신): 11-20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고신)출판부, 1971], 19.

14) 허순길, 한국장로교회사, 447.

15) 홍반식, 오병세, 이근삼, “성명서허순길, 한국장로교회사(고신), 291.

16) ibid., 463.

17) 양낙흥, 한국장로교회사 (서울:생명의 말씀사, 2008), 690-691, 693,

18) 이정근, “한국문화 안에서의 기독교교육의 한 연구신학사상 (17, 1977), 363.

19) ib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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