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령 목사(복음자리교회 담임)
이세령 목사(복음자리교회 담임)

에덴 밖에서 가인과 아벨은 경작하는 수고를 하면서 살았다. 그 수고의 끝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그런데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되지 않았고,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되었다. 그 이유를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선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선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상태이고, 다른 사람의 먹거리를 지키는 삶을 의미한다. 가인의 삶은 경작은 했지만 지키는 삶을 사는 일에는 실패하였다. 계속해서 보려는 것은 선에 대한 실패는 죄에 대한 갈등을 포기한 것임을 확인한다.

 

1. 선을 행하지 않으면 죄가 문에 엎드린다.

가인은 자신의 제물이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자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였다. 얼굴을 땅에 떨어뜨리면서 하나님에 대한 적의감을 표현한 것이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왜 분해하고, 안색이 변하는지를 물으신다. 그리고 그 답도 하신다.

가인에게 질문을 하시고 나서 가인의 답이 없다. 하나님이 계속 말을 이어 가신다. 답을 제시한다. 이것은 앞서 선악과를 먹은 사건과 비교해 볼 수 있다. 남자와 여자에게 물으신다. 그때 남자와 여자는 답을 한다. 하나님이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주었기에 내가 먹었다. 또는 뱀이 나를 속임으로 내가 먹었다. 답이 있다. 그런데 뱀의 경우에는 질문도 없고 답이 없다.

가인에게는 질문이 있지만 답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답을 하신다. 답이 질문의 연속처럼 보인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떻게 낯을 들지 못하는가? 선을 행하지 않으면 죄가 문에 엎드린다. 선을 행하지 않았음을 확실히 하고, 그 결과 죄가 문에 엎드린다고 선언하신다. 계속해서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신다.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선을 행하지 않으므로 죄가 호시탐탐 가인의 삶을 노리고 있다. 마치 사자가 먹잇감을 노리면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다. 앞서 선을 행하지 않은 것은 자신이 경작한 열매 중에 다른 사람의 몫을 인정하는 것을 거부한 것이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와 다르지 않은 결과이다. 선이 없는 곳에 죄가 지배하고 다스리는 현실로 나아간다. 죄가 주인 노릇을 하려고 하는 형국이다.

 

2.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나님의 이 선언은 죄가 주인 노릇을 하는 현실에 대한 경고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땅 위에 선을 채우길 원하시는데, 선을 채우지 못하면 죄가 주인 노릇을 한다. 그래서 죄와의 갈등을 하라고 말씀하신다.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4:7c)

이 표현은 여자에게 주신 말씀과 동일한 어휘들과 구조를 가지고 있다. 죄와 너(여자)를 교환한 것 외에는 나머지는 같다.

‎וְאֵלֶ֙יךָ֙ תְּשׁ֣וּקָת֔וֹ וְאַתָּ֖ה תִּמְשָׁל־בּֽוֹ׃ (Gen. 4:7 WTT)

그것의 덮침이 너에게로 향하지만

너는 그것을 지배해야한다.

‎וְאֶל־אִישֵׁךְ֙ תְּשׁ֣וּקָתֵ֔ךְ וְה֖וּא יִמְשָׁל־בָּֽךְ׃ (Gen. 3:16 WTT)

너의 덮침이 너의 남편에게로 향하지만

그는 너를 다스려야 한다.

하나님의 엄중한 말씀이고, 선악에 대한 판단이기에 강한 의무로 번역을 해보았다. 두 구절은 인칭대명사의 차이 즉 주어와 목적어와의 차이만 있을 뿐 문장 구성이 똑같다. 3장에서 여자가 남자에게 선악과를 주어 먹게 하였다는 사실과 순서로 인해서 네가 남자를 이기려고 하지만 그러나 실상 남자가 여자를 다스려야 한다고 선언하셨다. 선악과를 먹는 순간의 질서를 사진 찍듯 찍어서 그 장면을 들어 경고하신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두 사람의 갈등이 옳다. 여자의 요구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선언이다. 남자와 여자의 성적인 갈등을 말하기보다는 죄에 순응하려는 일에 대한 갈등이 필요함을 말한다.

마찬가지이다. 선을 행하지 않을 경우 죄가 웅크리고 앉아서 너를 집어삼키려고 한다. 그러므로 그것의 덮침은 죄의 덮침이다. 죄가 너를 이기기 위해서 덮치지만 너는 죄에게 끌려가지 말고 죄를 다스려야 한다. 죄의 종이 아니라 주인 노릇을 해야 함을 말한다. 죄의 주인 노릇이란 말은 죄를 물리치란 말이다. 핵심은 죄와는 상응하는 것이 아니라 죄는 물리쳐야 한다. 제어해야 한다는 선언이다. 죄를 제어하지 않고서는 에덴 밖에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는 없다. 죄를 제어하는 힘이 참된 지혜이고, 사람의 최고의 기쁨이다. 여기서 생명이 의미가 있게 된다.

 

3. 죄의 실체로서 지키는 삶의 결여

3장에서 여자와 남자의 관계에서 갈등을 말하지만, 4장은 더 구체적으로 죄와 가인(사람)과의 갈등을 말한다. 선을 행하지 않음으로 문에 웅크리고 앉은 죄의 실체는 무엇인가? 경작함으로 수고한 삶의 열매가 추수이다. 추수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통해서 수고의 삶이 담아야 할 것을 제대로 담았는지 하나님 앞에서 검증을 받는다. 그런데 거절되었다. 수고의 삶에 담아야 할 것이 무엇이었기에 거절되었는가? 그것을 선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수고의 삶, 경작하는 삶은 지키는 삶과 함께 가야한다. 수고가 생존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나의 수고를 통해 내가 지켜야 할 사람들을 지키는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 수고는 즉 경작은 지키는 일을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선을 행하지 않은 것이 다른 사람의 먹거리를 남겨두지 않은 채로 선악과를 따 먹듯이 하고,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게 될 때, 그 제사를 하나님이 열납하지 않으신 것이다.

내가 수고한 것이다. 맞다. 그러나 그 수고의 결과에는 다른 사람의 몫이 들어있다. 함께 돕고 살기 위해서다. 4장에 나타난 가인의 삶이 무엇이 그렇게 잘못되었는가를 항의할 수 있다. 열심히 경작해서 때가 되어 추수를 했고, 그 추수한 열매를 가지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뭐가 문제냐라고 물을 수 있다. 그러나 지켜야 할 선이 없었다는 하나님의 선언이다. 칠십인역 번역자들은 그 선을 바르게 나누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이런 이해는 창1-3장의 문맥에서 적절한 이해이다. 남의 몫을 정당하게 나누는 선을 행하는 지킴이 없는 것이다.

왜 남의 먹거리를 지켜야 하는가? 다른 사람의 생명이 먹을 것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가인은 자신이 땀 흘리는 수고를 하면서 경작은 하면서도 그 열매로 다른 사람을 지키는 일에 관심이 없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가 다시 나타난다.

하나님이 4:7절의 경고를 하신 이후에 가인의 반응이 8절 이후에 나타난다. 가인은 아벨에게 말한다. 개역개정은 말한 내용을 각주에 적고 있다. 우리가 들로 나가자. 고대 번역이 이렇게 번역했다고 진술한다. 그 고대 번역은 칠십인역이다(διελθωμεν εις το πεδιον). 여기 들은 사냥을 하거나 양 떼를 치거나 혹은 곡식을 기르는 밭이 있는 곳이다. 가인과 아벨이 일을 하는 즉 수고를 하는 삶의 자리이다. 수고하는 삶의 자리로 가인이 아벨을 데리고 갔다. 그리고 거기서 가인은 그의 아우 아벨을 쳐 죽였다. 소위 때려죽인 셈이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이 가인에게 말씀하신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있느냐? 그때 가인은 대답한다.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4:9)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나이까? 이것은 수사의문문의 반문이다. 부정의 답변이 명확한 질문이다. 결국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가 아니라는 선언이다. 가인은 아벨을 지키는 일을 포기했다. 나아가 오히려 죄가 웅크리고 앉았다가 가인을 삼키듯이, 가인이 아벨을 삼켰다. 선을 행하는 아벨은 악에게 삼켜진 가인이 삼킨 사건이다. 죄와 갈등을 가지고 거리를 두고 다스리는 일을 실패한 삶이다.

하나님은 에덴에 아담을 두시면서 경작하고 지키게 하셨다. 지키다는 것은 삶의 자리에서 다양한 의미를 함의한다. 아담은 처음에 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을 지켜야 했다. 가인의 경우 수고함으로 얻은 곡식으로 가족들과 집안 식구들을 지켜야 했다. 그런데 먹을 것을 탐내면서 남의 먹거리를 지키지 않는 수준을 지나서 남의 생명까지 해치면서 지키지 않았다. 가인은 다른 사람의 먹거리와 삶을 지킬 의지가 없었다. 하나님의 경고가 무색하였다.

가인의 죄의 본질은 수고는 하지만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남의 먹거리를 지키지 않았고, 다른 사람의 생명을 지키지 않았다. 서로 돕는 삶의 관계를 지키지 않았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이런 지킴이 있는 제사를 받으시기를 원하신다. 아무리 많은 수양의 기름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불의와 함께 드려지는 제사가 하나님의 마당만 밟을 뿐인 것을.

다음은 아우의 핏소리를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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