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2회 고신총회 부산 포도원교회당에서 20일 부터 22일 까지 개회

 

72회 고신총회가 부산 포도원교회(담임 김문훈 목사) 본당에서 20일 오후 1시 시작되었다.

제72회 고신총회가 열리고 있는 부산 포도원교회당
제72회 고신총회가 열리고 있는 부산 포도원교회당

총회장 강학근 목사의 인도로 드려진 1부 예배는 부총회장 김재현 장로가 기도하고 서울시민교회 찬양대의 찬양 후 부총회장 권오헌 목사가 갈라디아서 56절을 본문으로 사랑으로써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기도하는 김재현 장로
기도하는 김재현 장로
서울시민교회 찬양대의 찬양
서울시민교회 찬양대의 찬양

강학근 목사의 집례로 성찬 예식을 거행한 후, 고려신학대학원을 위해서 헌금하고 총회장 강학근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72회 총회 성찬예식
72회 총회 성찬예식
성찬받는 총대원들
성찬받는 총대원들

총회 서기 강영구 목사가 회원점명한 후 총대 522명 중 519명 출석하여 총회장 강학근 목사가 개회를 선언했다. 72회 고신총회는 22일까지 포도원교회당에서 진행될 예정이다.

다음은 72회 개회 예배 설교 전문.


성경봉독하는 강학근 목사
성경봉독하는 강학근 목사

본문 / 갈라디아서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설교하는 권오헌 목사
설교하는 권오헌 목사

1.할례받은 그리스도인과 할례받지 않은 그리스도인

할례의 유익

할례의 언약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다. 할례를 받은 이들은 아브라함 언약의 복과 책무를 함께 가진다. 예수님도 열두 제자도 할례를 받았다. 할례를 받은 이는 율법을 지킬 의무를 지닌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할례를 받으셨기에 율법을 준행하셨다. 바울도 유대인이기에 할례를 받았고 아버지가 헬라인 인 디모데도 복음을 위하여 할례를 받았다. 할례로 아브라함의 언약에 참여하는 자는 그 언약을 귀하게 여긴다. 할례의 유익이 있고 언약의 복이 있다. 반면에 할례를 받은 이는 자신의 언약을 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할례받지 못한 이들을 무시하거나 배격할 수 있다.

 

무할례의 자유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의 구주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이들의 구주로 오셨다. 할례받은 이의 구주이기도 하시지만 할례받지 않은 이들의 구주와 주님이기도 하시다. 할례받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할례받은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는데 안디옥에 와서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게 되었고 초대교회에 할례 없는 신자들이 생겼다.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 신자들은 율법에 대한 책무가 없었다. 초대교회는 몇 가지 필수적인 규정 외에는 강제로 짐을 지우지 않았다.

 

할례자와 무할례자가 함께 하는 교회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면서 초대교회에는 할례자와 무할례자가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게 되었다. 할례자와 무할례자는 자신이 선 자리와 신앙적 배경에 따라서 서로 입장이 다르다. 베드로는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들에게도 성령께서 임하셔서 자기백성으로 인치시는 것을 보았고 할례가 구원에 필수적이지 않음을 증거했다. 바울은 할례자이면서 무할례자의 사도로서 복음을 전하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할례자를 부르신 것처럼 무할례자를 부르신 것을 보았다.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아야 하는가의 문제로 초대교회에 신학적 논쟁이 있었지만 예루살렘 공회에서 성령과 교회는 할례 없이 부름받은 신자들에게 할례의 의무를 지울 필요가 없다고 결정한다. 할례받지 않은 이들은 모세의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다. 성령께서 복음 안에서 말씀을 따라 살도록 인도하신다. 할례가 없어도 성령의 인도를 따를 때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다.

 

2. 그리스도 안에서는 할례와 무할례가 소용이 없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할례와 무할례가 소용이 없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할례의 의의를 완성하셨기 때문이다. 할례받은 유대인들에게도 할례는 그냥 육체의 표시로 자신의 다짐과 경건의 훈련에 조금 유익한 정도이지 할례를 받는다고 완전함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반면에 할례 없는 이방인들도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거하면 육체의 할례가 없어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다. 율법의 요구를 완수하신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은혜를 할례와 상관없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누린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는 이전의 모든 것이 배설물로 여겨진다.

전에 귀중하게 여기던 모든 것이 배설물과 같이 여겨진다고 바울은 고백했다. 주님이 주실 수 있는 구원을 다른 어떤 것도 줄 수 없다. 예수님만이 나를 구원하신다. 예수님이 주신 구원의 크고 영광스러움에 비하면 어떤 귀중한 것도 배설물과 같을 뿐이다. 할례의 유익도 무할례의 자유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복음과는 족히 비교할 수도 바꿀 수도 없다. 할례의 유익을 자랑하거나 무할례의 자유를 자랑한다면 나는 아직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천국의 영광을 발견하지 못한 자이다. 밭에 감추어진 보화를 발견한 사람처럼 천국의 영광을 위하여 나의 모든 것을 사소하게 여기게 된다.

 

형제를 진정으로 용납할 여유가 생긴다.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은혜와 사랑은 우리를 너그럽게 한다. 너무나 큰 은혜를 받았으니 내가 가진 것을 자랑하지도 않고 못 가진 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상하지도 않고 다른 이들이 가진 것을 탐내지도 않는다. 함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들 사이에는 다른 차이가 너무 사소해진다. 한 하나님 한 예수님 한 성령님을 모시고 사는 하나 됨의 기쁨과 위로가 너무 커서 다른 것으로 비교하거나 나누거나 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 한 하나님을 모신 가족이고 우리의 차이는 우리의 공통점에 비하면 사소하다.

 

3.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특징은 사랑이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우리를 놀라게 감격하게 애통하게 거룩하게 한다. 다른 이를 용납하게 사랑하게 희생하게 만든다.

 

사랑을 위해 자유를 주신 하나님

자유가 있어야 사랑을 할 수 있다. 사랑은 선택의 자유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쌈해서 데리고 사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고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을 선택하기를 기대하신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도 하나님의 선택과 의지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기로 선택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 사랑의 선택은 우리의 구원이 되고 거룩이 되고 영광이 된다. 그가 선택하셨고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다. 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바도 사랑이다. 우리가 하나님 사랑의 초대에 스스로 반응하고 우리도 주를 사랑하기를 선택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은혜의 제일 첫 번째 줄에 있는 것이 자유다. 이 자유는 에덴에서 있었다. 심지어 선악과를 따먹을 수 있는 자유까지 주셨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먹은 후로는 한 가지 자유가 상실되었는데 생명나무의 길이 막혔다. 그 이후로 인생들이 누리는 자유는 하나님 없는 자유요, 사망의 자유다. 자유는 자유로되 생명의 누림이 없는 자유다. 마치 아버지 집을 떠난 탕자가 누리는 자유와 같은 자유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아담이 잃었던 자유가 회복되었다. 더 이상 하나님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 분이 우리 아버지가 되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는 더 이상 두려움이 없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다.

 

종으로서 율법을 행할 것인가? 자유하는 자로 사랑할 것인가?

종으로서 사는 것과 자유자로 사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종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그 일을 해야 하는 자입니다. 종에게는 그 일을 하지 않을 자유가 없습니다. 종은 시키는 대로 일하고 얼마나 받을는지 알지 못합니다. 주는 대로 받아야 합니다. 아들은 먹고 싶은 대로 먹고 쓰고 싶은 대로 쓰지만 일은 하고 싶은 만큼만 합니다. 자유자는 자신의 의사에 따라서 그 일을 하는 것이지 억지로 하지 않습니다. 이를 구약에서는 자원하는 종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매임으로 인하여 자유케 되었습니다. 자유자는 종과 대립되는 개념입니다. 종은 마땅히 해야 할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 벌을 받게 됩니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해도 벌을 받습니다. 반면에 해야 할 일을 아무리 잘해도 하나만 못하면 꾸지람을 받기 십상이고, 하면 안 될 일은 하나만 해도 꾸지람을 받습니다. 이것이 종입니다. 칭찬과 상은 없고 책임과 꾸지람만 있습니다.

 

어리석은 인생들은 이 자유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선택을 하지 않고 육체의 정욕을 선택하고 죄와 마귀의 꾀를 선택한다. 그래서 망한다. 자유는 사랑에 필수적이지만 위험한 능력이다. 하나님이 주신 자유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성령 보혜사를 사랑하고 성령으로 감동된 말씀을 사랑하고 한 성령을 받은 교회를 사랑하고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세계를 사랑하자.

 

사랑으로서 역사하는 믿음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한다. 사랑이 없으면 할례도 무할례도 믿음도 의미가 없다. 사랑은 우리를 자유케 한다. 우리의 믿음과 충성은 사랑에 근거하고 자유로운 것이다. 사랑 안에서 주님과 동행하고 사랑 안에서 형제와 연합한다. 그래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다.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가? 사랑받았기에 사랑할 수 있다. 사랑받았으니 사랑해야 하고 사랑으로 행해야 한다. 우리의 사랑은 어디까지 가는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 또한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세계를 사랑으로 돌보고 다스려야 한다.

 

미움이 동기가 되어 열심을 내는 이들이 있다. 운동권의 동력은 가진 자들에 대한 미움이고 불의와 부조리에 대한 분노이다. 예수님은 불의에 대해서 분노하지만, 죄인에 대한 연민과 사랑의 마음을 가지셨다. 아버지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신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하셨다. 그러므로 미움을 자극하고 상대에 대한 분노를 동기로 하는 열심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

 

나의 충성과 헌신을 평가하는 시금석은 사랑이다.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이 말을 하는가?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열심을 내는가?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비판하는가? 나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배하는가? 옥합을 깨뜨리고 하염없이 눈물을 뿌리던 여인처럼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은 연고니라고 하신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가? 우리의 총회를 섬김이 형제와 토론하고 소리를 높이는 것이 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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