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4:34-35와 디모데전서 2:11-12는 무엇을 말하는가?

최갑종((미국 Evangelia University 신약학 교수/ 전 백석대 총장, 현 미국 조지아 센트럴 대학교 신약교수) 고신대(1974)와 고려신학대학원 졸업(1977), 미국 Reformed 신학대학원, Calvin 신학대학원, Princeton 신학대학원, Iliff 신학대학원과 Denver 대학교대학원에서 신약(부전공 구약)을 전공(M.A. Th.M ., Ph.D. in Biblical Studies).
최갑종((미국 Evangelia University 신약학 교수/ 전 백석대 총장, 현 미국 조지아 센트럴 대학교 신약교수) 고신대(1974)와 고려신학대학원 졸업(1977), 미국 Reformed 신학대학원, Calvin 신학대학원, Princeton 신학대학원, Iliff 신학대학원과 Denver 대학교대학원에서 신약(부전공 구약)을 전공(M.A. Th.M ., Ph.D. in Biblical Studies).

 

1. 들어가는 말

2022년도 예장 합동 교단과 고신 교단 총회 개최에 즈음하여 여성안수를 촉구하는 장문의 글이 뉴스엔조이코람데오닷컴에 게재되었다. 글을 쓴 한 분은 합동 교단 소속 목사로서 총신대학교 재단 이사인 전주 열린문교회 담임 이광우 목사이고, 다른 한 분은 고신 교단 소속 목사인 부산 평화교회 담임 한성국 목사이다. 나는 두 분이 오랜 연구와 묵상과 함께 소속 교단과 총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고한 글을 읽으면서 그 연구와 용기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합동 교단과 고신 교단에 새로운 바람이 불기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합동 총회는 여성안수 촉구를 수용하는 대신 신대원 여성 동문회조차 반대하는 준목 제도 도입을 1년간 연구하자는 안을 채택했다. 고신 총회는, 한성국 목사와 평화교회 교인들이 총회가 모이는 교회당 앞에서 여성안수 제도 도입을 촉구하는 캠페인까지 벌였지만, 미래정책연구위원회가 청원한 여성안수 제도 도입을 1년간 연구하자는 안마저 논의 없이 그냥 기각하였다.

이 일련의 일들을 지켜보면서 나는 한평생 성경을 연구하고 신학생을 가르쳐 온 신약성경 학자로서 심히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두 분 목회자 이광우, 한성국 목사와 평화교회 교인들이 나서기 전에 성경을 가르치는 교수들이 먼저 나서야 하는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종의 속죄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기고하게 되었다. 나는 이 글이 두 분의 목사와 그들과 함께 한 신학생들, 그리고 앞장을 서지는 못했지만, 마음으로 동조한 모든 분에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고, 또한 용기를 잃지 않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나는 이 글에서 여성 안수와 관련된 전반의 문제를 논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두 분 기고자의 글과 관련된 몇 가지 핵심적인 문제를 누구나 이해할수록 에세이 형식으로 쓰려고 한다. 전문적인 학술 논문을 필요로 하는 자는 이미 필자가 발표한 다음의 글을 참조하기 바란다: 최갑종. “한국 기독교와 사회에서의 여성의 인권 신장을 위한 초기 기독교와 고대 헬라, 로마, 유대 사회에서의 여성의 역할과 위치에 관한 연구.” 성경과 신학38 (2005), 421-501; -.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해야 하는가.” 목회와 신학193 (2005), 168-177; -. “신약성경과 여성안수: 사도 바울은 여성안수에 관하여 말하고 있느나가?” 류효준 엮음. 여성이여 영원하라(서울: 대서, 2010), 131-172; “여성의 역할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제 493주년 종교개혁기념 학술 자료집: 오직 기록된 말씀으로(10/2010), 30-75; -.“여성안수 반대할 성경적 근거 없다.”코람데오닷컴(7/25/2017).

 

2. “여성 안수는 성경관의 문제인가, 성경해석의 문제인가?

오늘날 유감스럽게도 종종 여성안수 지지자를 성경의 영감과 권위를 부정하고, 성경 본문을 특정한 시대적 산물로 보는 자유주의 신학자 혹은 목사로, 이와 대조적으로 여성안수 반대자를 성경의 영감과 권위를 지키고 성경 본문을 모든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정통보수주의 혹은 정통 개혁주의 신학자나 목사로 간주하는 자들이 있다. 그래서 신학생과 목회자는 말할 것도 없고, 교수들마저 여성안수 문제를 거론하는 것을 주저한다. 하지만 누가 여성 안수 문제가 자유주의 신학과 보수주의 신학과, 성경을 특정한 시대적 산물로 보는 자와 성경을 모든 시대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눌 수 있는 잣대나 기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매우 잘못된 이분법이요, 흑백논리이다. 나는 이번에 여성안수 촉구 글을 투고한 이광우, 한성국 목사 두 분이 교단 신학교인 총신대학원과 고려신학대학원을 졸업한 자로서 교단 신학교에서 배운 그대로, 성경의 영감과 권위를 받아드리며, 성경의 본문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권위 있게 적용되어야 함을 주창하는 정통보수 개혁신학을 견지한 목사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들이 같은 교단의 여성 안수 반대자들과 의견을 달리한 것은 성경관이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성경을 보는 관점과 해석이 달랐기 때문이다.

나 역시도 고신 교단 목사의 아들로 출생하여 고신대학교와 고려신학대학원에서 정통보수 개혁신학을 배웠고, 지금도 성경의 영감과 신적 권위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신앙과 행위의 최종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변함없이 믿고 있다. 신학교 시절 누구보다도 정통 개혁신학을 사랑하였고, 이 개혁신학을 지키고 발전시키려는 강한 열망을 가지고, 요한 캘빈의 기독교강요, 헤르만 바빙크의 개혁신학, 워필드의 성경관, 루이스 벨코프의 조직신학, 코넬리우스 반틸의 변증학, 헤르만 리덜보스의 바울신학 등을 열심히 읽었다. 주옥같았던 고 한상동, 이근삼, 오병세, 홍반식 교수들의 강의를 사랑하였고, 박형룡, 박윤선 박사의 책도 늘 나의 곁에 있었다. 나는 지금도 이분들에게서 배운 개혁신학이 나의 신학 토대를 형성하고 오늘의 나를 있게 하였다고 자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러 차례 기고하거나 발표한 글을 통해 여성안수가 성경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것을 주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재직하고 있던 백석대학교 동료 교수들과 백석 교단 목사들을 설득하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누가 나를 자유주의 신학자로, 성경의 권위와 영감을 신봉하지 않고, 성경이 모든 시대에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지 않는 자로 단정하거나, 나를 그렇게 매도한다면, 그것은 지금도 나의 존경스러운 은사로 받아드리고 있는 앞의 열거한 분들은 말할 것도 없고, 내가 26년간(1992-2017) 재직한 백석대학교에서 나의 가르침을 받은 많은 학생, 나의 저서와 논문들을 읽은 수많은 독자를 모욕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은 또한 내가 수년간(2006-9, 1113) 총무로, 회장으로 섬겼던 한국복음주의 신학회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일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 보수주의 신학자들의 모임인 한국복음주의 신학회는 백석대학교와 고신대학교와 총신대학교 교수들도 정회원으로 참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고신대학교와 고려신학대학원에서 배운 정통보수 개혁신학을 변함없이 견지하면서도, 내가 40년 이상 배우고 연구하고 가르친 바울 서신이 여성 안수를 결코 반대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갖게 된 주된 이유는, 내가 여성안수 반대자들과 다른 성경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성경을 보는 관점과 성경해석의 방법이 달랐기 때문이다. 나는 성경을 마치 하나님이 인간 저자에게 불러주는 대로 인간 저자가 받아 적은 것으로 보는 소위 기계적 성경 영감론이 아닌, 하나님께서 성경의 인간 저자를 사용하시되, 그들의 지적, 언어적, 문학적 능력을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성경을 기록하도록 하셨다는 유기적 성경 영감론이 옳다고 믿고 있다. 기계적 성경 영감론이 아닌, 유기적 성경 영감론이 내가 7년간 고신대학교와 고려신학대학원에서 배운 성경관이다.

일찍이 화란의 저명한 개혁신학자 바빙크는 성경의 유기적 영감을 그리스도의 성육과 비교하였다. ,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구속을 위해 성육하여 우리의 시공간과 우리의 언어와 문화의 제약을 받는 참된 사람이 되신 것처럼, 이와 똑같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우리의 언어와 문화와 사회의 제약을 받는 우리의 언어로 주어졌다는 것이다. 나는 바빙크의 이 주장이 옳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접근하고 해석할 때, 그 성경 본문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과 함께, 또한 특정한 시대에 사는 인간 저자를 통해 특정한 상황 가운데 사는 독자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항상 잊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특정한 성경 본문을 해석할 때는 반드시 그 본문을, 누가 어떤 상황 가운데, 어떤 목적으로, 누구에게, 무슨 이유로, 어떻게 썼는가, 그 본문을 듣는 첫 번째 독자들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으며, 그들은 그 본문을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하는 질문들을 고려하여야 한다. 더구나 여성안수 문제를 거론할 때마다 항상 논쟁의 초점이 되는 고린도전서 14:34-35과 디모데전서 2:11-12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와 에베소 교회를 목회하고 있는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 속한 본문이다. 편지에 속한 본문이기 때문에, 그 본문의 본래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사도 바울이 왜, 무슨 의미로, 어떤 목적을 위해, 어떻게 그와 같이 썼는가를 진지하게 물어보아야 한다. 그 성경 본문을 해석자의 시대와 상황에 끌어와서 해석자의 신앙과 경험과 지식을 기준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본문 저자와 독자의 시대와 상황에 돌아가서, 왜 사도 바울이 그렇게, 무슨 의미로, 무슨 목적을 위해, 그리고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그런 다음 해석의 과정을 통해 발견한 그 본문의 메시지를 오늘 우리의 상황과 독자에게 어떻게 적용시켜야 할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잘 알려진 것처럼, 여성 안수 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항상 주목을 받는 성경 구절은 고린도전서 14:34-35의 본문과 디모데전서 2:11-12의 본문이다. 여성 안수 반대자들은 이 두 본문을 여성안수 반대 주장을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성경 본문으로 삼는다. 즉 고린도전서 14:34에 있는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와 디모데전서 2:11-12에 있는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찌니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사도 바울이 교회의 여성도들을 향해 교회에서 말하지 말고 잠잠하여야 하고,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금했으니, 당연히 여성들은 목사나 장로로 안수받을 수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여성이 안수를 받아 목사나 장로로 임직하게 될 경우, 자연히 교회에서 말하거나 가르치게 되고, 남자를 주관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직하게 말해서 이 두 본문 어느 곳에서도 여성에게 안수를 하지 말라, 혹은 그 반대로 여성에게 안수를 하라든 명시적으로 직접 말하지 않고 있다. ‘안수라 말 자체도 언급되지 않는다. 성경 본문은 일반여성들이 아닌, 어떤 특정한 여성들을 대상으로, 교회에서 말하지 말고, 교회에서 가르치거나 남자를 주관하지 말라고 말할 뿐이다. 여성안수 반대자도 이 점을 솔직하게 인정하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여성 안수 반대자들은 아래와 같은 일종의 삼단논법을 통해 이들 본문으로부터 여성 안수 반대의 주장을 성급하게 이끌어낸다.

 

A. 성경(고전 14:34-35; 딤전 2:11-12)은 교회에서 여성은 잠잠하고, 가르치는 것 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B. 여성을 목사나 장로로 안수할 경우 그 여성은 교회에서 말하거나 가르치게 되고, 남자를 주관하게 된다.

C. 그러므로 성경 대로 여성을 교회의 목사나 장로로 안수해서는 안된다.

 

위의 삼단논법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C의 주장은 어디까지나 성경이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 B의 주장을 A에 적용시켜 이끌어낸 것이다. 내가 여성 안수 문제가 성경관의 문제라기보다 성경해석과 적용의 문제라고 주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과연 고린도전서 14:34-35와 디모데전서 2:11-12의 성경 본문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여성안수 반대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이 본문으로부터 여성안수 반대의 주장을 이끌어낼 수 있는가? 그리고 이것이 성경 본문의 가르침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3. 고린도전서 14:34-35와 디모데전서 2:11-12은 과연 여성안수를 반대하고 있는가?

3.1. 고린도전서 14:34-35

한글 개역개정 성경 본문에 따르면 고린도전서 14:34-35의 본문은 다음과 같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

 

이 본문을 어떻게 접근하고 해석할 것인가? 이 본문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좁게는 본문의 직접적인 전후 문맥에서, 넓게는 고린도전서 전체의 문맥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본문은 좁게는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교회 예배 중에 방언과 예언 등 성령의 은사를 발휘할 경우 교회의 덕을 세울 수 있도록 질서 있게 하라는 교훈을 담고 있는 14장의 한 부분에, 넓게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고린도 교회를 위한 바울의 목회적 권면으로 볼 수 있는 고린도전서 전체의 한 부분에 속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왜 고린도전서를 썼으며,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보낼 당시 고린도 교회는 어떤 상황에 직면해 있었으며, 고린도전서 14장에서 그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잘 알려진 것처럼,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이 2차 선교 여행 기간인 AD 51-52년 사이에 개척한 교회였다.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3차 선교 여행 기간(AD 53-56) 에베소 지역에 있을 때 인편으로 고린도 교회가 여러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는 상황을 듣고, 그러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보낸 목회적인 편지이다. 우리는 고린도전서를 통해 바울이 편지를 보낼 당시 고린도 교회 안에는 바울의 사도직과 그의 권위에 도전(9:1-2; 15:3-11), 바울파, 베드로파, 아볼로파, 예수파 등 계파 간의 분쟁(1:11; 3:1-9; 11:18), 지식을 자랑하는 교만(1:18-2:5), 성도 상호 간의 소송(6:1-11), 계모와 더불어 사는 패륜(5:1-8), 창녀들과 성적 문란(5:9-13; 6:15-20), 부부간의 성생활조차 반대하는 금욕주의(7:1-7), 불신자 배우자와의 관계(7:8-17),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8, 10), 성만찬 오용(11:18-34), 예수님의 몸의 부활과 성도의 몸의 부활을 부인(15), 예배시에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착용하는 문제(11:2-16), 교회 안에서 여성의 올바른 역할(14: 34-36), 방언 등 영적 은사에 대해 잘못된 인식(12-14), 헌금에 대한 논란(16:1-3) 등 다양한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왜 고린도 교회 안에 이와 같은 복잡한 많은 문제가 일어나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바울이 고린도전서 4장에서 당시 자신의 상황과 대조가 되는 고린도 교인들의 상황을 말하고 있는 내용으로부터 그 당시 고린도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 원인을 어느 정도 추론할 수 있다.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 내가 생각하건 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같이 되었도다”(4:8-13).

 

위에 언급된 내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당시 고린도 교인들은 모든 것을 가진 자처럼 자신들을 자랑하였다. 이와 대조적으로 바울은 아직 모든 것을 가지지 않은 가난하고 비천한 자로 자처한다. 여기서 우리는 고린도 교회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의 근본 원인이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고린도 교인들의 곡해, 다시 말해, 바울의 복음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근거를 둔 믿음으로 이미구원에 참여하였지만, 완전한 구원을 기다려야 하는 아직의 기간에는 거룩한 삶을 이어가야 하는 수평적이며, 시간적이며, 역동적인 종말론 및 구원론을 제시하였지만(고전 1:18-25; 2:1-2; 고후 5:14b-18), 고린도 교인들은­특별히 다수를 차지하는 여성 교우들을 중심으로­바울의 복음과 그의 구원론을 당대 고린도 지역에 풍미하던 헬라 사상의 이데아와 현상, 영혼과 육체, 상층부와 하층부를 나누는 수직적이며, 정적이며, 존재론적인 이원론을 토대로 그들이 성령과 그 은사를 체험하였을 때, 이미 모든 것을 소유하거나 상층부에 도달한 것처럼 곡해하려 한 데 있다는 것이다.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의 복음을 듣고 새 시대의 선물인 성령 체험을 한 것은(고후 1:22; 5:5), 구원의 완성이나 완전에의 도달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구원의 시작이며, 부분적인 것(고전 13:8-12)을 지칭하며, 그래서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십자가의 복음에 따른 삶을 통해 성장과 완성을 향해 계속 나아가야 하는 아직을 여전히 필요로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를 망각하고 이미이 세상에서 완전한 구원의 상태와 영적인 상태에 도달했다고 생각하였다(고전 3:20; 4:8). 그래서 그들은 방언 등 영적 은사를 자랑하고, 남용하였다. 남성 교우들의 일부는 자신들이 이미 상층부인 영적 존재에 도달하였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무슨 짓을 해도 죄가 되지 않는 것처럼 성적 부패에 빠졌으며(6:12-20), 이와 대조적으로 여성 교우들의 일부는 결혼과 부부 생활까지 거부하는 극단적인 금욕주의에 빠졌다(7:1-40). 바로 이 때문에 바울은 고린도전서 전반에 걸쳐 십자가의 복음을 재강조하고, 잘못된 구원 및 성령 이해와 함께 고린도전서의 중심부인 12-14장에서 방언, 방언 통역, 예언 등 성령의 은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표현인 사랑으로 질서 있게 사용하여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바울이 무엇 때문에 13:34-35에서 여자들은 교회에서 말하지 말고 잠잠하고, 무슨 질문이 있을 때는 집에 돌아가서 자신의 남편에게 물으라고 말하고 있는가? 바울이 왜 여성 교우들에게 이와 같은 권면을 하고 있으며, 이 권면을 받는 당자자는 누구인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 본문은 방언, 방언 통역, 예언 등 성령의 은사를 질서 있게 사용하여야 함을 교훈하는 14장에 속해 있고, 좁게는 방언, 통역, 예언, 계시 등 성령의 은사를 사용할 경우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질서 있게 사용하여 함을 말하는 전 문단(14:26-33)과 모든 것을 품위 있게 질서를 지키면서 하라는 후 문단(14:36-40)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말하자면 13:34-35의 본문은 질서 있는 은사 사용을 말하는 두 문단 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이것은 바울이 교회 예배시 여성들의 침묵을 질서 있는 영적 은사 사용의 구체적인 실례로 보고 있음을 뜻한다.

우리가 분명히 볼 수 있는 것처럼, 14:34-35의 본문 자체는 남성 교우들은 교회에서 방언, 통역, 예언, 계시, 찬송 등 말을 할 수 있지만, 여성 교우들은 일체 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이미 전문단(14:26-33)과 후 문단(14:36-40)에서 고린도 교회 남녀 전체 교인들을 통칭하는 형제들아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는 질서를 지키는 한, 누구나 방언, 통역, 예언, 방언, 기도 및 찬송 등 말을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14:34-35 본문은 전 문맥과 후 문맥과 달리 여자들을 향해 교회에서 일체 말하지 말고 조용히 하라고 말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들 여성을 행해서 교회에서 전문단과 후 문단에서 말하는 성령의 은사 사용을 금하고 있다. 그러므로 14:34-35의 본문으로부터 바울이 모든 여자는 교회에서 일체 말하지 말고 잠잠하여야 한다는 교훈을 주고 있는 것처럼 결론을 내려서는 아니 된다. 그럴 경우 전 문단과 후 문단에서 말한 바울의 교훈과 모순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또한 이 구절로부터 바울이 어떤 것은 말할 수 있고 어떤 것은 말할 수 없다는 식의 인위적인 선을 긋고 있는 것처럼 보아서도 아니 된다. 바울은 이 본문에서 어떠한 인위적인 선을 긋거나 조건을 제시하지 않고 조건 없이 여자들이 교회에서 말하지 말고 잠잠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14:34-35의 본문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바울이 왜 고린도 교회 여자들을 향해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말하고 있으며, 바울이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는 대상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14:34의 헬라어 본문은 여성들 앞에 여성 복수 정관사 하이를 부쳐 이들이 특정한 여인들을 지칭하고 있다는 것과, 다음 절인 35절에서 바울이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으라고 말하고 있는 사실로부터, 이들이 또한 결혼하여 가정을 가진 성인 여성 교우들을 지칭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14:34-35의 직접적인 문맥인 14:26-3314:36-30에서 바울이 여성을 포함하여 누구든지 교회 안에서 방언, 통역, 예언 등 은사를 사용할 경우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질서 있게 말하고 있는 사실로부터 이들에게 말하지 말라는 금지 명령이 주어진 것은, 이들이 전 문단과 후 문단이 말하는 교회의 질서를 어기고 덕을 세우지 못하고 있는 자들임을 확인할 수 있다.

거듭 말하지만, 14:34-35의 본문과 전후 문맥에서 바울이 남성 교우들은 방언, 통역, 예언 등 성령의 은사들을 교회에서 사용할 수 있지만, 여성 교우들은 이러한 은사를 사용할 수 없다고 말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 바울은 예배시 은사 사용의 질서 문제를 시작하는 14:26에서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여성을 포함하는 통칭 언어인 형제들아라고 호칭하고, 그리고 질서에 대한 교훈을 마감하는 14:39-40에서 다시 통칭 언어인 내 형제들아라고 호칭하면서, 남여를 포함하는 모든 교인을 향해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 결론을 맺고 있다. 말하자면, 남자든 여자든 누구든지 교회 안에서 질서를 어기지 않는 한 말을 수반하는 방언, 통역, 예언 등 은사를 적극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11:34-35에서 바울로부터 교회 안에서 말하지 말고 잠잠할 것을 명령을 받는 기혼 여성 교우들은, 그들이 단순히 남성이 아닌 여성이기 때문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은사 사용을 잘못 사용하거나 남용하여 교회 덕을 세우지 못하고 질서를 어겼기 때문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왜 이들 기혼 여성 교우들이 은사 사용에 있어서 질서를 어겼는가? 왜 바울이 이들 여성을 향해 교회에서 말하지 말고, 무슨 질문할 것이 있으면 집에 가서 남편에게 물으라고 말하고 있는가? 바울이 고린도 지역에 복음을 전할 당시 헬라-로마-유대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예속되어 있었으며, 남자들이 있는 공중 장소에서 여자들이 함부로 나서거나 말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여자들의 활동 영역은 거의 가정에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녀의 차별이 철폐되고 동등하다는 바울의 복음(3:28)이 고린도 지역에 선포되었을 때, 이와 같은 바울의 복음이 특별히 여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가져다주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고린도 교회 여성도들이 사도 바울로부터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자신들의 당대 사회와 가정에서 누릴 수 없는 자유, 곧 남녀가 동등하게 예배에 참여할 수 있고, 동등하게 방언, 예언 등 성령의 은사에 참여할 수 있고, 부부 생활에서도 남편과 아내의 동등한 권리와 의무가 주어졌다는 가르침을 받았을 때(고전 7:2-6), 그들 중에 일부가 자신들에게 주어진 자유와 남녀의 동등권을 남용하여, 하나님께서 창조 때부터 세우신 남녀의 차이는 물론, 결혼과 부부 생활까지 거부하고, 심지어 가정과 교회를 혼동하여 교회 안에서까지 남자와 꼭 같이 행동하려고 한 것 같다. 특별히 남녀가 함께 모이는 가정교회의 공예배 때에, 그들이 당시 사회에서 금기로 여겨지고 있는 통념을 깨고, 자신들의 남편을 제쳐두고 다른 남자들에게까지 질문을 제기함으로써, 큰 혼란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 같다(참조, T. Paige, “The Social Matrix of Women’s Speech at Corinth. The Context and Meaning of the Command to Silence in 1 Corinthians 14:33b-36,” BullBibRes 12 [2002], 217-242). 바로 이와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 바울은 교회 질서를 혼란스럽게 하는 이들 기혼 여성들을 향해 자기 남편들이 함께 있는 교회의 모임 중에는 다른 남자들에게 말하지 말고, 잠잠하고, 오히려 궁금한 점이 있으면 집에 가서 남편에게 물으라는 특수한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이다(참조, L.A. Jervis, “1 Corinthians 14.34-35: A Reconsideration of Paul’s Limitation of the Free Speech of Some Corinthian Women,” JSNT 58 [1995], 51-74).

그러므로 우리는 고린도전서 14:34-35의 본문으로부터 바울이 모든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여 모든 여자는 노소의 구분 없이 교회에 와서는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어떠한 상황에서도 일체 말하지 말고 잠잠하라는 규범적인 명령으로 주고 있는 것으로 보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14:26-3316:36-40에서 바울이 여성을 포함하는 모든 교인을 향해 교회에서 반드시 말을 사용하여야 하는 방언, 통역, 예언, 찬송 등의 은사 사용을 허용하고 있는 교훈과 분명하게 모순된다. 따라서 우리는 14:34-35의 본문이 머리에 수건을 쓰는 문제(11:3-16)처럼 특수한 문화적, 사회적 상황과 관련하여 교회 예배 때에 질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고린도 교회 일부 기혼 여성도들에게 주는 특수한 명령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14:34-35에서 마치 바울이 마치 시대와 장소와 여건을 초월하여 여자들은 교회에서 무조건 말하지 말고 잠잠하라고 교훈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바울이 본문으로부터 여성안수 금지 명령을 하는 것처럼 해석하는 것은, 본문과 전후 문맥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는 잘못된 성경해석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14:34-35의 본문으로부터 한가지 더 궁금한 것은 바울이 왜 이들 기혼 여성들을 향해 교회에서 말하지 말고 집에 가서 자기 남편에게 물으라고 명하고 있는가이다. 바울이 남존여비 사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가? 잘 알려진 대로 바울 당대 헬라, 로마 유대 여인들은 남자들보다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거나, 제한되어 있었다. 유대 여인들은 회당이나 학교에서 율법을 배우는 기회 조차 갖지 못했으며, 헬라-로마 사회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공교육의 내용인 수사학의 교육도 여인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이처럼 고대 헬라, 로마, 유대 사회에서 여자들은 오늘 현대사회의 여성들과 달리 남자들에 비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여자들은 대체로 남자들에 비해 이해의 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회 문화에서 고린도 교회 여성도들이 성경의 가르침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남자들보다 이해의 수준이나 능력이 뒤떨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여 성도들의 일부가 예배 중에 터무니없는 질문도 제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여기서 바울이 여자들은 본성적으로 남자들보다 이해의 수준과 능력이 뒤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서는 아니 된다. 바울은 어디까지나 그 당대의 사회와 문화적 관습 아래서 말하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당시의 여인들이 정보와 지식을 대체로 자신들의 남편에 의존하고 있는 것처럼, 교회의 여 성도들도 교회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를 만날 때는 가정에 돌아가서 자신들의 남편에게 물으라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여자들이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여야 하는 당대의 사회적 문화적 규범에서 볼 때, 교회 여 성도들이 교회 안에서 자신의 남편을 제쳐두고 다른 남자들에게 질문을 제기하는 것은, 일종의 성적 유혹으로 간주될 만큼 자신은 물론 자기 남편에게도 대단히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일이 되기 때문이다(참조, David Cohen, Law, Sexuality and Society: The Enforcement of Morals in Classical Athen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1], 40-147). 만일 이런 이들이 일어날 경우 당대 사람들로부터 교회가 부도덕한 집단으로 오해를 받아 선교에도 커다란 장애를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에 호소하여 남편과 아내 사이에, 남자와 여자 사이에 유지되어야 할 올바른 질서를 회복하여야 할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바울이 한편으로 복음 안에서 주어지는 남녀의 동등성의 자유를 인정하지만,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그 자유가 신자들이 사는 당대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 환경에서 부도덕한 일로 간주될 수 있는 상황에서는, 그래서 가정과 교회 안에서 문제가 될 수 있을 때는 그 자유 사용을 부분적으로 제한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여성안수 문제와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3.2. 디모데전서 2:11-12

개역개정 성경에 따르면 디모데전서 2:1-12의 본문은 다음과 같다.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사도 바울이 왜 디모데전서 2:11-15에서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11),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 한다”(12)고 말하고 있는가? 그가 이 본문에서 말한 여자는 누구를 지칭하고 있는가? 여성 일반인가? 아니면 에베소 교회에 속한 어떤 특정 여성을 가리키고 있는가? 사도 바울이 이러한 교훈을 줄 당시 에베소 교회는 어떤 상황에 있었으며, 이러한 상황은 2:11-12에 해당하는 여성과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가? 이 여성이 도대체 무슨 언행을 하였기에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런 금지 교훈을 주고 있는가? 문맥적으로 보면 2:11-12는 바울이 교회 여성들과 관련하여 주는 교훈인 2:8-15에 속하고 있다. 그런데 2:8-15의 문단을 보면 2:8에 언급된 복수 남자들과 대조하여 9절부터 10절까지 복수인 여성들을 언급하고, 이 여성들에게 대한 단정한 의복, 머리, 장식, 선행 등 품행에 대한 교훈을 준다. 그런 다음 11절부터 어떤 특정한 여성을 지칭하는 단수 여성명사 구네를 언급하고, 이 여성과 관련된 교훈을 14절까지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 절인 2:15에서 일종의 반위 접속사 와 함께 9-10절에서 말한 복수인 그 여성들을 지칭하는 3인칭 복수 동사들을 다시 사용하여, 여자들이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2:8-15의 문단에서 복수 여성명사와 단수 여성명사를 사용하여 11-14절의 어떤 특정 단수 여성과 2:9-102:15절의 일반 기혼 여성들과 구분을 한다. 이러한 구분은 15절의 접속사 그러나9-10절의 복수 여성들이 8절의 복수 남성들과 평행하는 것과 대조하여, 11-12절의 단수 여성이 12절의 단수 남성과 평행하고 있는 사실에서 분명해진다. 따라서 우리는 2:11-12에서 언급된 어떤 여성이 마치 에베소 교회 전체 여성을 대변하거나, 일반여성 전체를 대변하고 있는 것처럼 확대하여 해석하지 않아야 한다. 심지어 9-10-절과 15절에 언급된 복수 여성들도 여자 어린아이나 처녀나 노인 여성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들에게 어린아이의 출산을 말하고 있는 사실에서 분명하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2:11-12에 언급된 어떤 단수 여성은 누구인가? 왜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 여성으로 하여금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고,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금하고 있는가? 이 여성을 지칭하는 헬라어 단수 명사 여성이 일반적으로 남편이 있는 기혼 여성을 가리키고 있고(딤전 3:2,12; 5:19; 1:6), 그리고 이 여성과 짝을 이루는 12절의 단수 남성명사 남자역시 기혼 남자를 지칭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들이 서로 부부관계에 있는 자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단수 여성 구네와 단수 남성 아넬이 나란히 사용될 경우 일반적으로 아내와 남편을 지칭하기 때문이다(10:2, 12). 이들이 아내와 그 남편을 지칭하고 있다는 것은 13-14절에서 남편과 아내 관계인 아담여자’ (, ‘구네))와 비교하여 말하고 있는 점에서 부정하기 힘들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이 디모데전서 2:11-12에서 여성 교우 전체를 지칭하여 교회에서 일제 순종하여 조용히 배우고,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금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에베소 교회의 어떤 특정 여성과 관련하여 가르치는 것과 자기 남편을 주관하지 않아야 할 것을 교훈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디모데전후서에 대한 수준 높은 주석을 쓴 큐인과 와커(Jerome D. Quinn and William C. Wacker)는 그들의 주석, The First and Second Letters to Timothy (Grand Rapids: Eerdmans, 2000), 199에서 이 본문을 “Moreover, I do not allow a wife to teach in the public worship and to boss her husband”(‘게다가 나는 그 아내가 공 예배 시에 가르치는 것과 자기 남편을 흔드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라고 번역한다.

그렇다면 왜 이 여성을 향해 교회 안에서 가르치는 것과, 자기 남편을 교회 안에서 주관하지 말라(헬라어 아우덴테인은 일종의 강제성을 띠고 자기 남편을 마음대로 흔드는 것을 뜻한다)고 말하고 있는가? 이 구절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울이 여기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어떤 여성의 자기 가정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를 지칭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디모데가 목회하고 있는 교회의 공적인 모임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라는 것과, 그것도 아직 자체의 교회당 건물을 갖지 못하고, 50-60명 정도의 남녀가 함께 모이는 가정교회 안에서 일어난 문제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우리는 이 본문에 대한 일종의 거울-독법(Mirror-Reading)을 통하여 에베소교회의 기혼 여성들 가운데 어떤 특정한 여성이 거짓된 교훈에 빠져 교회 안에서 잘못 가르치려고 하거나, 회중들 앞에서 자기 남편을 자기 마름대로 주관하려는 자가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참고, Catherine, Kroger, “1 Timothy 2:12-A Classicist’s View,” ed. Alvera Mickelsen, Women, Authority & the Bible [Downers Grove: InterVarsity, 1986], 225-44). 디모데전서에 거짓된 교훈에 대한 경계가 많이 나타나고 있고(딤전 1:3-7, 19-20; 4:1-3; 6:3-5,20), 그리고 여자에 대한 교훈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 이점을 뒷받침하고 있다(참고, Linda L. Belleville, “Teaching and Usurping Authority. 1 Timothy 2:11-15,” eds. Ronald W. Pierce and Rebecca Merrill Groothuis, Discovering Biblical Equality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2005], 206-207). 사도행전 19:28-37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당시 에베소 지역의 여성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던 여신 아데미 제식이 남성에 대한 여성의 우위를 강조하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 할 때, 에베소교회의 기혼 여성들중에 어떤 여성이 이러한 영향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개연성이 있다. 거듭 말하지만, 여기서 주목하여야 하는 것은, 바울이 에베소 교회 여성 전체를 지칭하거나, 일반여성 전체를 염두에 두고 교회 안에서 여성은 남을 가르치거나 자기 남편을 마음대로 주관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만일 바울이 여기서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일절 순종하고, 남자를 가르치거나 주관하는 것을 금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면, 이것은 고린도 교회에서 브리스길라가 아볼로를 가르친 경우(18:26)와 사도 바울이 여성 동역자 자매 뵈베에게 로마서를 지참시켜 로마에 가서 로마교회 전체 앞에서 낭독하고 설명하는 중요한 책임을 맡긴 경우(16:1-2)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바울의 사역에 있어서 남자를 가르치고 지도한 적지 않은 여성 사역자가 있었다는 사실과 정면적으로 대립될 수밖에 없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런 교훈을 준 것은 아마도 에베소교회 여성도 중에, 고린도 교회의 어떤 여 성도들의 경우처럼, 복음이 가져다 준 자유를 남용하고, 거짓 된 교훈에 빠져 하나님께서 창조시에 세운 부부관계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교회 공예배를 혼란스럽게하고, 그로 인해 선교의 문까지 막는 부도덕한 일을 하는 어떤 여성이 있었던 것과 같다. 그래서 디모데의 목회를 어렵게 한 것 같다(참조, P.B. Payne, “Liberian Women in Ephesus,” TJ 2 [1981], 169-97; I.H. Marshall,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Pastoral Epistles [Edinburgh: T & T Clark, 1999], 459).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 예배의 질서가 무너져 혼란이 일어났고, 급기야 이 문제는 가정과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문제로 부각되었던 것 같다.

이처럼 디모데전서 2:11-12의 본문이 에베소교회 여성도 중에 가르칠 수 있는 자격도 갖추지 못하고, 오히려 거짓 교사들의 유혹에 빠져 잘못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남편이나 다른 사람들을 그릇된 길로 오도하려고 하는 특정 여 성도를 대상으로 교훈하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디모데전서 2:11-12의 본문을 에베소교회의 상황과는 전혀 다른 상황에 있는 여성도들 전체에 적용을 시켜서, 여자는 무조건 교회에서 가르치거나 남자를 주관하지 않아야 함을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지 않아야 한다. 더구나 이 본문이 전혀 말하지 않는 여성 안수 문제까지 이 본문에 가져가 마치 바울이 이 본문에서 여성 안수를 금하고 있는 것처럼 확대해서 해석하지 않아야 한다. 성경 본문에 대한 올바른 해석은 그 본문의 저자가 독자에게 전하려는 본래 의미를 찾는 것이지, 해석자가 가진 주장이나 의미를 그 본문에 가져가 저자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본문을 왜곡시키는 것이 아니다.

 

4. 나가는 말

우리는 지금까지 소위 여성 안수 반대자들이 자신들의 결정적인 성경적 근거로 삼고 있는 고린도전서 14:34-35와 디모데전서 2:11-12의 본문이 가진 본래의 의미를 추적함으로써 이들 본문이 결코 여성안수 반대자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바울이 어떤 특정한 기혼 여자들을 대상으로 교회에서 잠잠하고, 가르치거나 남자를 주관하지 말라는 교훈으로부터 마치 바울이 모든 여성 교우들을 향해 그러한 교훈을 주고 있는 것처럼 확대하여 바울이 여성안수를 반대하고 있다는 결론을 유추해 내면,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여 성도들에게 예배에서 이미 기도나 예언에 참예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고전 11:5; 14:5, 26)는 사실과, 바울의 선교사역에 여러 여성 사역자들이 있었다는 사실과 정면으로 대립될 수밖에 없다. 교회에서 말하지 말고, 잠잠하고 가르치지 못하면서 어떻게 교회에서 방언과 기도와 예언을 할 수 있으며, 바울과 함께 복음의 동역자가 되거나 교회 지도자가 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고린도전서 14:34-35와 디모데전서 2:11-12의 본문들을 여성안수 금지를 위한 규범적인 본문으로 활용할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와 에베소교회의 여 성도들 중에 복음의 자유를 남용하거나 곡해하여 남자와 여자의 구분, 남편과 아내의 질서, 영적 은사 사용의 질서까지 부정하여 가정과 교회를 혼란스럽게 함은 물론, 선교의 문까지 닫게 하는 위험을 초래하는 특정 여성들에게 준 바울의 특별한 교훈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가 이들 구절을, 예배 시에 머리에 수건을 쓰라는 권면이나, 혹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문안하라는 권면처럼(16:16; 고전 16:20), 특수한 역사적 문화적 종교적 사회적 정황에 비추어 해석하여 그 의미와 메시지를 오늘에 적용을 시키지 않고, 모든 시대의 여성들에게 말하는 보편적이고 규범적인 구절들로 받아들여야 한다면, 사실상 오늘 교회 안에서 여성이 가르치고 말하는 모든 행위는 일체 중지되어야 한다. 교회는 여성 성가대원, 주일학교 여교사, 여전도사들을 일체 세우지 않아야 하며, 신학교는 여성 신학도를 입학시키지 않아야 함은 물론, 목사 후보생을 가르치는 여하한 여성 신학 교수들을 세워서도 아니 된다. 여성들은 교회에 올 때 반드시 머리에 수건을 써서 자신의 얼굴을 노출시키지 않도록 당부하여야 하며, 교회 안에서 여 성도들은 어떤 경우에서든 말하지 말고 잠잠할 것을 가르쳐야 한다.

물론 이와 함께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하라’, 여자들은 교회에서 가르치지 말라, 여자는 교회에서 자기 마음대로 남편을 주관하지 말라는 교훈을, ‘여자들은 예배 시 머리에 수건을 쓰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인사하라는 바울의 권면처럼, 오늘 우리 교회 안에서 그대로 시행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고 해서, 마치 우리가 이들 구절을 시대와 문화를 초월한 영원하신 하나님의 권위 있는 말씀의 한 부분으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처럼 오해해서는 아니 된다. 바울은 이 구절들을 통해서도 모든 시대에 적용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다. ‘머리에 수건을 쓰라는 권면으로부터 예배 시에 여자가 갖추어야 할 마땅한 태도에 대한 메시지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인사하라는 권면으로부터 성도 간의 우의와 사랑에 대한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는 것처럼, ‘교회 안에서 모든 여 성도들이 말하지 말고 가르치지 말고 남자를 주관하지 말라는 교훈으로부터도, 모든 시대를 초월하여 선포되는 남녀의 구분과 가정과 교회 안에서 지켜져야 할 남녀의 질서에 대한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다.

어떤 성경 구절을 문화-사회학적으로, 혹은 역사-문학적으로 접근하여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을, 성경의 권위와 영감을 도전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은, 마치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강조를 신성에 대한 도전으로 오해하는 것처럼, 잘못된 것이다. 예수님의 인성에 관한 올바른 이해가 없이는 예수님의 메시아 인격과 그 사역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성경에 대한 역사-문화적, 문화-사회학적 접근 없이는 성경의 메시지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참조, Gordon D. Fee, “Hermeneutics and the Gender Debate,”eds. Ronald W. Pierce and Rebecca Merrill Groothuis, Discovering Biblical Equality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2005], 364-381).

이런 해석학적인 관점과 함께 우리가 또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바울의 어떤 서신의 특수한 구절들을 해석할 때, 이 구절들을 바울의 일반적이고 통일성 있는 교훈과 연관시켜 이해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바울의 서신에서 이해하기 힘든 다양한 교훈을 만난다고 하더라도, 바울이 스스로 모순을 범하고 있는 비논리적이고 비체계적인 사람이 아니라, 일관성과 통일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우리가 느끼는 모순과 비일관성은 어떤 점에서는 바울의 문제라기보다도, 접근하는 우리 자신의 문제 때문에 일어나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나는 바울 신학을 연구하면서 전체 바울 신학을 묶는 어떤 일관성과 통일성을 가진 중심 사상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바 있다. 그것은 창조”, “타락”, “구속”, “재창조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구속사에 입각한 종말론과, 이 종말론의 내용을 형성하고 있는 그의 기독론과 성령론이다. 바울은 인간과 세계 역사의 모든 문제를 이러한 관점에서 보고 있다.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역할 문제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바울은 남녀 관계를 포함하여 모든 인간사회의 문제들이 아담의 범죄로 타락하였고, 죄로 오염되었으며,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구속되었으며, 이제 그리스도와 그의 보내신 성령 안에서 새롭게 회복되는 새 창조 사역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새 창조는 단순히 아담의 타락 이전으로 복귀하는데 머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타락 이전보다 더 고차원적인 새로운 창조이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5:17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원문의 뜻은 새로운 창조’)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선언할 때, 이것은 그야말로 옛 창조와 대비되는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새로운 창조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6:15에서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원문의 뜻은 새 창조’) 만이 중요하니라라고 선언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바울은 이 새 창조의 구체적인 내용을 갈라디아서 3:28에서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3)라고 표현하였다. 이와 같은 바울의 가르침은 신약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역할 문제를 첫 창조나 구약 시대의 관점에서만 보아서는 아니 된다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여성의 역할 문제를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새 창조의 관점에서 보아야할 것을 가르쳐준다. 사실상 바울은 그의 목회와 선교사역에 있어서 그가 살고 있던 헬라와 로마와 유대의 가부장적이고 남성 위주의 문화를 뛰어넘어 적지 않은 여성 사역자들을 동참시킴으로써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새 창조를 이미 부분적으로 적용하고 실천하였다.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옛 창조의 관점이 아닌 새 창조의 관점에서 보았던 것은 비단 사도 바울만이 아니다. 베드로전서 저자와 계시록 저자와 히브리서 저자로부터도 동일한 관점을 발견할 수 있다. 사실 구약에서는 모든 제사 직분이 남성인 제사장들에게 한정되어 있었다. 여성들은 제사직 분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남자나 여자의 구분 없이 이제 모든 사람이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4:16),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10:19)고 말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저자도 우리[남자와 여자를 다 포함하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았다”(1:5, 5:10),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었다”(20:6)라고 말하고 있으며, 역시 베드로전서 저자도 너희도...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5),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다”(벧전 2:9)고 말하고 있다. 바울이 로마서 12:1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말할 때도 남녀 모든 신자가 제사장임을 전제하고 있다. 루터를 위시하여 종교개혁자들이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만인 제사장직을 주장한 것도 이 때문이다(참조, Stanley J. Grenz, “Biblical Priesthood and Women in Ministry,” eds. Ronald W. Pierce and Rebecca Merrill Groothuis, Discovering Biblical Equality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2005], 274-75).

그렇다면 고린도전서 14장과 디모데전서 2장에 나타나 있는 어떤 여성 교우들에 대한 바울의 강한 부정적인 교훈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것 역시 바울의 구속사적이고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접근하고 이해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새 창조를 말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새 창조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옛 세계와 함께 공존한다. 다시 말하자면 이미”(새 창조 세계)아직”(옛 창조 세계)이 함께 공존한다. 이 사실 때문에 비록 어떤 것이 이미의 관점에서 보면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아직이라는 세계와 문화와 역사의 구조를 함부로 뛰어넘을 수는 없을뿐더러, 오히려 때때로 제약을 받을 수도 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고린도 교회의 다수를 차지하는 여성 교우 중에 적지 않은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과 성령 체험을 통하여 자신들이 마치 이 세상을 완전히 초월할 수 있는 천사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고 착각하면서 결혼과 부부 생활까지 거부하고, 교회 안에서 당시 고린도 교회가 처해 있었던 문화와 사회적 정황을 혁명적으로 뛰어넘는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구조를 만들려고 하였다. 이것은 결국 가정의 파괴와 교회의 무질서는 물론 교회의 선교까지 부정적인 영향을 가져다주는 상황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어떤 여성 교우들에게 특수한 교훈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원리적으로 여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남자와 차별 없이 동등하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여자들이 누릴 수 있는 원리적 자유 됨이 특수한 교회의 상황에서 오히려 교회와 가정을 혼란스럽게 하여 선교의 장애가 되는 부작용을 초래할 경우, 그것은 당연히 유보되거나 제한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성에 관한 바울의 이미와 관련된 교훈과 아직과 관련된 교훈이 서로 상치가 될 때 오늘 우리 교회는 어떤 교훈을 우선시하여야 하는가? 이 문제에 대한 답은 교회와 교단과 그리고 교단이 서 있는 시대적 정황에 따라 다소 달라질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아직에 대한 교훈을 이미에 대한 교훈의 빛 아래서 이해하고 적용하도록 해야지,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 다시 말하자면, 고린도전서 14장과 디모데전서 2장에 나타나 있는 어떤 여성의 역할과 위치에 관한 부정적 교훈은 갈라디아서 3:28, 고린도후서 5:17, 고린도전서 12:13의 긍정적 본문에 비추어 해석되어야지,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 옛 창조가 새 창조의 빛 아래서, 특수적 교훈이 보편적 교훈 아래서, 과거가 미래의 빛 아래서 해석되어야지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 왜냐하면, 오른편으로 돌아가는 시계가 왼편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옛 창조는 새 창조를 향해, 아직은 이미를 향해 가고 있지, 그 반대로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주후 1세기의 헬라-로마-유대의 남존여비와 가부장적 사회구조 안에서도 초기 기독교가 여성의 문제에 관하여 혁명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이미앞서 나갔다고 한다면, 이미 남녀평등과 여성의 인권이 보장된 현대사회에서 기독교가 일반사회보다 아직뒤떨어져 가고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인 것이다.

나는 합동, 고신, 합신 교단이 교단 신학교 운영하고, 여 신학도를 받아들이고 있으면서도 그들의 안수를 거부하고 있는 현실을 매우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 내가 서울에 있는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로 있었던 어느 날 세 명의 여 신학도 임원들이 내 연구실을 찾아온 적이 있다. 그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교수님, 저희들이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있도록 제발 힘써 주세요. 저희들도 남성 학우들처럼 똑같이 소명을 받고, 똑같이 입학시험에 합격하고, 똑같이 등록금을 내고, 똑같이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데, 어떻게 저희들이 여성이라는 점 때문에 안수를 받지 못하도록 하나요. 그럴 것이면 처음부터 저희를 입학시키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라고 하소연 하였다. 결국 그들의 눈물 어린 하소연과 기도가 학교와 소속 교단을 변화시켜, 2009년 총회에서 여성안수 청원이 결정되었고, 2011년부터 시행되었다. 나는 그 눈물 어린 하소연과 간구는 비단 내가 가르쳤던 신학대학원 여학생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고 본다.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과 고려신학대학원에 재직했거나 현재 재학하고 있는 여학생들과 여 동문들에게도 있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이들 학교에도 여학생들의 하소연을 듣고 가슴 아파하는 교수들이 있다고 믿는다. 나는 이들 학교에 있는 교수들, 특별히 성경을 가르치고 있는 교수들에게 간곡하게 부탁하고 싶다. 단순히 여 신학도들의 하소연과 눈물의 기도에 가슴 아파서가 아니라,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를 다시 한번 진지하게 살펴보고, 학생들의 하소연과 기도가 응답될 수 있도록 말과 글을 통해서 보다 적극적으로 교단 목사들과 장로들을 설득시켜 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신학교 교수들이 바르게 가르치고 설득을 계속한다면, 여성 안수 문제를 해결하는 그 날이 보다 빨리 도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날의 조속한 도래를 소망하면서 이 글을 마친다.

 

※나의 주장은 전적인 기고자의 주장임으로 본사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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