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인권위원회가 기획하여 만든 동화 중에 ‘블루시아의 가위바위보’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준호라는 아이의 고모는 1960년대에 독일로 건너간 간호원이셨다. 40년 만에 고국을 방문한 고모는 추석명절에 동네 가게에서 만난 이웃의 ‘동남아’ 친구를 집으로 초대하였다.

블루시아라 하는 이름의 인도네시아 친구가 처음 한국에 와서 말이 통하지 않아 겪었던 어려움을 털어놓자 고모도 독일에서 겪은 이야기를 들려주며 서로를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국에서 처음 배운 말이 ‘제발 때리지 마세요’였다는 블루시아.

준호는 블루시아에게 ‘콩 먹고 가위바위보’ 게임을 가르쳐 준다. 그런데 어느 날 프레스 작업 중이던 블루시아가 너무 피곤하여 깜박 졸다 손가락 세 개를 잃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젠 가위바위보 못하겠네요’ 울먹이는 준호는 꿈속에서 블루시아와 가위 바위 보를 하다 다툰다. 블루시아가 보를 내고서는 자꾸 가위라고 우기는 것이다. 고모가 나타나 간단한 해결 방법을 가르쳐 준다.

“손가락 다섯 가진 사람이 둘 가진 사람의 처지로 돌아가면 되잖아” ‘바위, 보!’ 그렇다. 자르고 나누는 가위가 없으면 어떤가? 그런다고 게임이 안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동화작가까지 나서서 우리 민족이 지금 가난을 극복하고자 찾아온 외국인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상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독일의 경제지원을 받기 위하여 6,70년대 간호사 광부로 건너가 죽도록 고생한 분들의 이야기를 동남 아시아인들의 경험과 비교하며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반성을 촉구하고 있다.

차별대우를 받은 경험을 가진 민족이면서도 어느 새 우리 앞에 나타난 수십만 명의 외국인 노동자들 인권에는 나몰라라식이다. 대다수 한국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외국인을 억울하게 만드는 나쁜 국민으로 낙인찍히고 있다.

근년까지 우리는 일제 침략 하에서 강제로 혹은 자의로 일본으로 건너갔던 한국국적을 가진 교포들이 그곳에서 당하는 차별 소식을 들으며 분노를 발하였다. 그런 역사를 가진 우리민족이 이제 제법 잘살게 되었다고 이 나라를 찾아온 가난한 자들의 인권을 예사로 짓밟고 있는 것이다.

그게 말이 되는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 탈북자들은 다른 문화, 언어, 관습에서 발생하는 차별 때문에 쉽사리 한국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미국이 정책적으로 탈북자들에게 문을 열기 시작하자 그들은 미국으로 가려고 애를 쓰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나 탈북자들만이 외면당하는 것이 아니다.

국가 간에 자유무역 협정(FTA)을 맺는 과정에서 보는 대로 세계화의 조류, 흔히 신자유주의로 일컬어지는 시대사상은 사람과 물자의 국경 없는 자유로운 유통을 강조하지만 결국 사회 속에서 약자들이 설 자리를 빼앗는 결과를 빚고 있어 세계 곳곳에서 저항이 끊이지 않고 있다.

대한민국은 여전히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 유죄(無錢有罪)다. 북한은 극단적 독재정치가, 남한은 극단적 자본주의가 인권의 사각지대를 확대해 가고 있다. 그나마 일부 시민단체들이 눈에 불을 켜고 거대 재벌들과도 싸움을 걸고 나서는 용기를 보이고 있다.

교회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가?
그렇다면 오늘의 교회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있는가?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음을 강조한다. 예수님은 우리를 ‘천하보다 귀한 생명’이라고 부르신다. 그렇다면 교회는 인간의 정당한 권리를 보호하는 데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런데 역사를 돌아보면 인권은 진보주의자들의 관심사일 뿐, 원색적인 복음과 구원의 은혜를 강조하는 개혁주의 교회들은 별로 관심이 없다. 세상의 사법부는 끊임없는 개혁 작업을 벌이고 있으나, 교회는 정당한 법치의 개념도 없다.

교회 안에 ‘괘씸죄’라는 엉터리 죄명이 자주 언급되고, 엄연히 재판규례에 포함된 ‘행정건’을 재판 절차도 없이 악용, 개인의 명예와 권리를 짓밟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걸핏하면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 받은 사람들을 이단이니 자유주의니 하며 두들겨 잡으려 한다.

교단 정치에도 힘이 있으면 잘못을 저질러도 그만이다. 힘없는 교인들의 청원은 아예 기각되기 십상이다. 이름이 알려진 인사들 문제는 모두가 맡기를 기피하려 한다. 그러는 사이에 고통은 교회의 몫으로 남는다. 죄를 지적한다면서 설교를 통해 개인의 명예를 짓밟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여성도들을 비하하는 것도 예사롭게 여긴다. 공교회의 의사결정에 젊은층과 여성층의 견해를 반영할 구체적 장치를 마련할 시도조차 않는 것은, 그들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신앙은 말이 아닌 행동이다. 보이는 형제, 아파하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증거일 가능성이 높다. 날카로워 뼈만 부딪히는 개혁주의가 아니라, 불의를 몰아내고 정의를 확립하여 마침내 평화를 이루는 데 한 몫을 감당하는 아름다운 개혁교회를 보고 싶다.


윤 희 구 목사
창원한빛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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