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로서, 신학교수로서 가장 갈등이 일어나는 문제중의 하나가 바로 정의와 평화의 상관관계에 관한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심판과 구원, 정죄와 용서의 극단적 관계에 대하여 성경적 原理를 세우면서 인간적 情理를 무시하지 않을 수 있는 길이 있느냐는 것이다. 아마도 누구나 끊임없이 겪는 어려움이 아닌가 한다. 잘못된 일을 두고 잘못되었다고 하면 아무리 잘못을 저지른 사람도 웬만해서는 그 잘못을 인정하려하지 않고 오히려 잘못을 지적한 사람에게 원망을 갖는 일이 허다하게 일어나고 있다. 최근의 노대통령의 행보를 보면 남들이 잘못했다고 하면 멈추려던 일도 그 강하게 밀어부치려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성경이 말하는 용서는 회개 뒤에만 주어지는 것인가? 일반적으로는 분명히 그러하다. 니느웨 성이 회개하니 하나님은 마음을 바꾸셨다. 탕자가 회개하고 돌아오니 아버지는 여전히 아들로 받아주었다. 그러나 과연 그것만이 성경의 모습인가?

아모스 이후 예언자들은 끊임없이 이스라엘의 국가적 심판을 경고했다. 포로가 될 것을 예언한다. 그러나 선지자들의 설교를 듣고 돌아온 흔적이 전혀 없다. 결국은 선지자들의 경고대로 망하고 말았다. 그것이 예견되고 있다. 그런데 예언자들은 결코 심판만으로 예언을 끝내는 경우가 없다. 정의의 선지자로 알려진 아모스조차 예언의 끝에는 무조건적이다싶은 구원의 메세지를 담고 있다. 흔히 비평주의 학자들이 아모스 예언의 마지막 부분, 혹은 군데군데 담겨있는 구원의 메시지는 후대에 추가된 것이라고 단정짓지만 어림없는 소리이다. 심판의 예언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내포하고 있다고 해야 예언서를 제대로 말하는 셈이다. 모든 예언이 다 그러하기 때문이다.

나는 흔히 이것을 두고 '아버지의 마음'이라고 표현한다. 자식들이 부모를 괴롭힐 때 흔히 '집을 나가라'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고 하지만 정작 그렇게 행동하는 부모는 없다. '나가라'고 한 자식이 보이지 않으면 돌아올 때까지 찾아해매는 것이 부모라는 존재다. 심판을 통한 구원, 정죄를 통한 용서, 정의를 바탕으로 한 평화라야 그 긍정적인 언어들의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공의는 반드시 세워져야 한다. 심판은 반드시 행해져야 한다. 회개가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 인간이 동원할 수 있는 언어는 이것이다. 회개를 초월한 일방적인 은혜는 하나님 몫이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신학교와 고신교회에 지금 필요한 것은 단죄와 심판을 통한 정의의 확립이요 그를 통한 회개운동이다. 그런다음에야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 평화의 은총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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