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여행기(1)

 

 

 

동기회장은 더 늦기 전에 35 동기회를 한 번 모이게 해보고 싶었다. 동기회 한다고 하면 고작 10여 명 늘 모이던 그 얼굴들만 판박이 증명사진을 들고 나타나니 좀 새로운 얼굴을 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무엇이 그리도 바쁜지 다음날 아침까지 남아 있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이니 깊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없었다.

 

궁리 끝에 큰 맘 먹고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함께 돌아보는 여행을 마련하고 불렀더니 와 이거야말로 시쳇말로 대박이 터졌다. 사모님까지 무려 36명이 넘는 회원이 오케이 사인을 보내온 것이다. 그러나 신종 인플루엔자가 유행하고 고 위험군에 속한 동기들과 공무로 말미암아 어쩔 수 없이 빠진 동기들이 생겨 최종적으로 26명이 여행에 동행하게 되었다.

 

그래도 어딘가? 적어도 닷새 동안은 날마다 얼굴을 맞대며 동기를 확인할 기회를 잡았으니 말이다. 인천공항에서 부터 우리는 들떴고 옛날 초등학교 때 수학여행 가던 어린애 마냥 흥분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창밖은 또 다른 세계가 펼쳐저 있었다. 중국 대륙을 지나 4시간 정도를 날아 육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베트남이다. 물과 숲과 집들은 우리를 긴장시킬 만큼 이국적이었다. 베트남이 이렇게 아름다운 나라였는지 그 환상은 하늘에서만 유효하다는 것을 몰랐다.

 

그런데 저건 무언가? 한반도 지형이 아닌가? 베트남에도 한반도 지형이 있다? 돌고 도는 물길은 분명 한반도 지형을 그려내고 있어 더욱 반가운 마음이 일었다.

 

 

학교와 집들이 숲과 함께 잘 어우러져 있는 마을은 부럽다는 생각을 들게 했다. 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잠시 접어두고 그들의 외형적인 모습에만 반하고 있었다. 그리고 잘 정돈되어 있는 그들의 농토는 사시절 씨뿌리고 자라고 거두는 3모작이 진행되고 있었다

 

 

우리 중에는 베트남(그때는 월남전이라 했다) 전쟁에 참여한 동기가 있어 그들의 베트남 여행은 남다른 감회가 있어 보였다. 처음으로 베트남을 향하고 있는 우리는 거기서 시집온  아담하면서도 야무진 사람들을 단체로 볼 수 있는 나라를 향해 날아가는 몇 시간을 눈 감고 있을 여유가 없어 보였다,

 

비행기는 하노이 공항에 내려앉는다. 드디어 도착이다. 입국심사를 마치고 화물을 찾으려다 베트남의 기대와 환상이 조금 깨어졌다. 그 더운 날씨에 짐이 나오지를 않아 무려 3-40분을 하릴없이 앉아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도착해서 짐을 찾아 공항을 나서는 시간이 무려 한 시간 정도 걸렸으니 왕짜증이 막 터져 나오기 직전이었다.

 

 

그런데 공항에 나오니 우리 글로 된 금호고속 버스 두 대가 서 있었다. 웬 금호고속이 공항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나 했는데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베트남 사람들이 한국을 동경하고 좋아해서 버스를 구입하면 일부러 한글로 저렇게 쓴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로 하여금 버스를  한 차원 더 높게 봐준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왕짜증으로 갔던 것이 오히려 호감으로 돌아서는 것이 아닌가. 나를 좋아한다는 데야 어찌 비호감일 수 있으랴. 베트남 인들은 한국의 제품을 가장 선호하고 믿으며 한국을 배우려고 열심이란다. 우리는 하노이 시내를 향해 달려갔다. 월남이 아니라 베트남 하노이다.

 

 

 

하노이 시내를 향해 달려가는 와중에 차 안에서 차창 밖을 향해 연신 셔터를 눌렀다. 속 사정을 모르고 보이기만 하는 그들의 주거문화가 어쩌면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계속 해댔다.

 

하노이 시내의 거리는 프랑스 문화가 베어 있었다.  우선 집들이 그러한데 도로를 접한 집의 가로면적에 따라 세금을 부과하던 프랑스 문화가 스며들어 폭 4m로 분배되었다. 그리고 세로길이는 10-20m가 되어 단독으로 지어진 것을 보면 좁고 길쭉한 모양 나쁜 집이 된다. 저렇게 붙어있기는 하지만  임자가 각기 다른 집들이다.

 

 

 

 

1층은 대체로 상가나 사무실이고 그 뒤쪽으로 거실 및 침실이 있고 자식이 자라 방이 필요하면 2층을 지어 살게 한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 3층 4층을 올린다. 건물의 앞쪽은 화려하게 치장을 하고 어느 집이나 꽃이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창문 하나 없는 건물의 옆벽은 페인트칠도 하지 않는다. 언젠가 옆집에서 건물에 붙여 집을 지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거리를 따라 전깃줄과 전화선이 한데 어우러져 달리고, 거리 끝까지 달리고 있는데 아마도 전화선이 고장이 나면 고장난 선을 걷어내지 않고 다시 깔아서 그렇게 된 것 같다는 가이드의 설명이다.

 

베트남의 종교

베트남은 공산주의지만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들었는데 교회당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어쩌다 십자가를 만나면 그리도 기쁠 수가 없었는데 그곳은 천주교회라고 한다. 그렇다고 개신교가 없는 것은 아니다. 있기는 하지만 개신교는 십자가를 달 수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선교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십자가를 다는 자체가 선교가 되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천주교회는 왜 십자가를 허용할까? 그것은 천주교회가 16세기 때부터 들어와 웅장한 교회당을 지으면서 애초부터 십자가는 상징처럼 되어 버렸지만, 개신교는 1911년경에 들어오면서 교세도 약하고 또한 남부 지방에만 조금 강세를 보이지만 하노이와 같은 북쪽에는 그 세가 아직은 미약하기 때문이다.

 

 

저렇게 지어진 건물의 앞 쪽은 좁지만 뒷쪽은 길다.

어쩌다 돈 많은 사람이 옆터를 사면 조금 넓은 집을 지을 수 있다. 대신 세금을 많이 낸다.

 

베트남에서 가장 강세를 보이는 종교는 단연 불교이다. 이는 중국과의 지리적 관계에서 그 영향을 받은 탓이기도 하다. 하지만, 베트남 사람들의 의식속에 녹아 있는 것은 유교 사상인데 그 영향으로 일상생활에서 나타나는 의무와 예의, 미덕의 강조, 조상숭배 등이다.

 

베트남을 한국의 선교지로 하나님이 낙점하신 것일까. 동기 중에 인도에 선교사로 간 친구와 천국에 먼저간 친구는 월남전에서 하나님께 서원한 것이 동기가 되었다고 말하는데 베트남 전쟁에 참가하여 서원하고 목사가 된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병사 가운데 기독신자들과 군목들을 중심으로 선교회가 결성되었는데 이것이 베트남 선교의 시작이 되었고 후일 정식으로 참전용사들이 창립한 베트남 선교협회가 있다.

 

베트남 개신교의 특징은 박해와 개방이라는 이중성에 있다. 개방 정책으로 일부 교회들이 정부의 허락으로 교회를 재건하여 베트남 전역에 약 200여 개의 교회가 문을 열고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신자의 참석은 평균 100여 명이 된다고 전한다. 

 

 

그런데 하노이를 중심으로 하는 북베트남의 사정은 더 형편없다. 북베트남에는 13개의 교회가 있고 3명의 목사가 있으며 하노이 교회의 담임목사이며 북베트남 복음성회 부회장 겸 서기이며 하노이 신학교 교장인 터목사(79세)만이 실질적인 목회를 하는 실정이라고 한다. 

 

베트남의 헌법에는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고 있지만, 그 시행령에는 교회의 모든 것을 사회주의 이념과 활동에 존속시킬 것을 요구하며 모든 교회의 활동은 교회당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이제 베트남도 서서히 깨어나고 있다. 자본주의식의 계발이 진행되고 의식구조가 점점 바뀌면서 기독교도 언젠가는 껍질을 깨고 봇물처럼 터져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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