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째 아침, 우리는 호치민 시를 향해 달려갔다. 가는 도중 차 안에서 베트남의 농촌풍경에 빠져 혼자서 열심히 셔터를 눌렀다. 하롱베이에서 본 그 산들과 비슷한 산들이 땅에서도 펼쳐진 듯했다. 그리고 일터로 나가는 농부들의 모습이 정겹다.

▲ 하롱베이의 섬들이 들판에도 흩뿌려 있는 듯 이채롭다.
▲ 야자수를 뒤로 하고 삼삼오오 일터를 향하는 베트남인들.
▲ 집단농장에 가는 것일까. 일하러 가는 일터가 있다는 것 만으로도 행복한 것이다.
가다가 길 옆에 비석같은 것이 보여 가이드에게 물었더니 그것이 무덤이란다. 그들은 유교적인 사상으로 조상숭배가 지극해서 집 옆이나 길가, 혹은 경작하는 논이나 밭에다 묘지를 조성한다고 한다. 아마 보이는 저곳은 공동묘지가 아닌가 싶다. 그 묘지에도 빈부의 차가 보이는 것 같다.

 

▲ 집단농장에 가는 것일까. 일하러 가는 일터가 있다는 것 만으로도 행복한 것이다.

호치민 바딘광장

호치민 바딘광장에 내려 우리는 호치민이라고 큼직하게 써진 건물 하나를 만난다. 그것은 호치민의 묘소였다. 호치민의 시신은 러시아에서 방부처리를 해 보관하고 있다고 했다. 1년에 한 차례씩 방부처리를 위해 한 달 동안 비게 되는데 다행인지 모르지만 우리가 도착한 때가 방부 처리를 위해 러시아에 가고 없는 때라 그의 시신은 볼 수 없었다.

 

▲ 베트남의 묘지. 늘 일하는 일터나 집 주변에 있다.
▲ 호치민의 묘소. 그는 무덤을 만들지 말라 했지만 후세는 오히려 큰 무덤으로 그를 잊지 않으려 하는 것 같다.
이 묘소는 1075년 9월 2일 건국기념일에 맞춰 조성되었다. 짙은 갈색의 대리석으로 된 사각형의 웅장한 건물은 독립과 통일이라는 두 가지 과업을 이룩해 낸 위대한 지도자로 추앙 하고 있는 증명서이기도 했다.


우리가 갔던 날은 마침 이명박 대통령이 베트남을 방문하여 찾았던 때이기도 했다. 호치민 묘소 앞에 대통령 화환이 놓여 있었다. 만감이 교차하는 것을 느꼈다. 월남 전에서는 적대적으로 그렇게도 치열하게 싸웠는데 이제는 우방국이 되어 대통령이 방문하고 옛날의 적장에게 화환으로 화해의 손길을 내밀고 있으니 말이다.

 

베트남 사람, 특히 북부 지방 사람들에게 호치민은 영웅이다. 그가 1945년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곳이 바딘광장이기 때문에 건국기념일이면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호치민을 기린다.


베트남의 영웅 호치민은 누구인가?

베트남의 독립과 통일을 이룩해 낸 그는 1858년에 베트남이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 지 32년이 지난 때 1890년 5월 19일 베트남 중부 Nghe An(또는 Kim Lien?) 에서 선비 농민(또는 왕조 관리?) 아버지의 3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명은 Nguyen That Thanh.  “후에”에서 명문 국립 학교(프랑스 설립?)다녔고 졸업 전에 나와 작은 어촌에서 교사 생활을 거쳐 Saigon 으로 내려가 직업학교에서 조리사 수업했다.

 

▲ 호치민의 동상
그는 혁명 활동기에는 응웬 아이 꾸옥(Nguyen Ai Quoc)과 리 투이(Li Thuy), 아인 바(Anh Ba), 브엉 선 니(Vuong Son Nhi), 짱 브엉(Chang Vuong), 똥 반 서(Tong Van So), 호 꽝(Ho Quang), 터우 찐(Thau Chin)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활동했다고 한다.


21세 때에 프랑스 외항선에 조리사로 승선하여 미국, 유럽 항구 전전했고 24세 때는 1차 대전 발발로 런던에서 배를 내려 호텔 요리사로 생활을 한다. 그러다가 27세에 파리로 나와 식민지 독립운동을 위해 사회주의 운동가들과 교분을 쌓는다.


그의 이름이 유명해진 동기가 29세 때에 발생한다. 베르사유 강화 회담장에 Nguyen Ai Quoc(愛國)이란 이름으로 “베트남 독립 청원서”를 들고 가 미국 대통령에게 전하려다 비록 실패하지만, 이 사건으로 베트남 내외에 유명 독립투사로 인식되는 계기가 되었다.

30세 때는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하나, 식민지 해방에 무관심한 것에 반발, 32세에 식민지 해방을 주장해 주는 레닌을 추종해 모스크바로 가서, 국제 공산당 콤민테른(Communist International)에 가입하여 동남아시아국 상임위원이 된다.


1924년 34세에 그는 중국에 대한 러시아 고문단의 통역자격으로 중국 남부 광저우에 와서 공산화 조직활동을 시작하면서  그곳에 있는 베트남 독립 운동가들과 접촉을 하게 된다. 이어 베트남 청년 혁명당을 조직하고 그 안에 청년 공산 연맹을 만들고 모스크바에서 배운 혁명 전술을 전수하여 동남아 공산당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1927년 37세에 장개석 집권 후, 중국에서 공산주의자 추방으로 다시 모스크바로 피신하고 이듬해 콤민테른 동남아시아 대표 자격으로 태국에 파견, 공산주의 조직활동에 들어간다.


그의 나이 40세가 되자 인도차이나공산당(ICP)을 결성하고 세계경제공황으로 피폐해진 베트남 농민들을 조종하여 폭동선동을 하나 프랑스군이 진압하게 되고 그는 수배를 받는다. 그리고 그 이듬해 홍콩에서 영국경찰에 체포된다. 프랑스가 인도 요청했으나 정치망명자 신분을 주장하여 인정을 받아 넘겨지지 않고 석방 후 모스크바 귀환한다.

1932-1938 동안 그는 7년간 레닌 대학에서 연구와 교수로 조용히 지내다가 1938년 48세에 중국 연안으로 와 중국 공산당 항일투쟁 고문단이 된다. 이때 중국식 이름인 “호치민”(胡志明)으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끊임없이 조국의 식민지 해방을 꿈꾸던 그에게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프랑스가 순식간에 독일에 점령되는 것을 보고 독립의 호기로 판단, 중국 남부로 들어가 “지압”(Vo Nguyen Giap), 팜 반 동과 유격대 결성한다.

그런데 1940년 9월 뜻밖에 일본이 베트남에 침공하는 일이 발생한다. 하지만, 독일 점령하의 프랑스 비쉬 정부는 일본군과 합의하여 식민지 행정은 프랑스가 계속하기로 한다.

그의 나이 51세가 되던 날 베트남을 떠난 30년 만에 귀국하여 베트남 독립연맹(월맹)결성 하지만 중국 국민당에 체포되어 2년 형을 받고 1944년에 석방된다.

1945년 그의 나이 55세가 되던 해 3월 재미있는 상황이 전개되는데 독일이 패전하자 이제 일본이 프랑스군을 무장 해제하고,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식민지령을 폐기하여, 베트남의 독립을 선포하면서 일본의 식민지화 조치를 시작한다. 마치 1905년 청일 전쟁 후 대한제국에 대한 조치와 흡사한 것이었다. 이 해에 기근으로 베트남 사람 2백만 명 굶어 죽었다고 전한다. 

1945년에 역사가 일어났다. 그의 나이 55세에 8월 15일 프랑스군의 무장해제를 하고 베트남 독립을 선언해 준 일본이 항복선언을 했다. 이를 보고 월맹은 8월17일에 하노이를 점령하고 부하들을 보내 바오다이 황제로부터 국권 인수 절차를 밟는다.


그리고 호치민은 8월 28일 사이공을 점령하면서 “베트남 민주공화국(DRV)”을 선포하고 대통령(主席) 겸 외무장관을 자임한다. 그리고 1969년 사망까지 24년 동안 대통령직 유지한다.

1945년 9월 2일 그는 미국 독립선언문과 프랑스 인권선언문을 베껴 만든 독립선언문 낭독한다. 그런데 이로써 모든 것이 끝난 게 아니었다. 일본 패망 후 북부는 장개석이 압박하고, 남부에는 프랑스가 재상륙 한다. 또한 남부 불교단체와 우익정당들이 DRV(호치민 정부)의 독주를 반대하고 나선다.  

1946년 타협안으로 남북 총선거를 합의한다. 그러나 프랑스가 북부 진입 후 하노이를 점령하고 월맹군 무장해제를 명령하면서 소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된다.(지금은 “프랑스 전쟁”이라 한다.)

1948년에 호치민 월맹은 즉각 재집결하여 반격을 시도한다. 그러나 1949년 7월 1일 프랑스 지원으로 사이공 정부가 수립된다. 1950년 미국이 이 사이공 정권을 승인하고, 아시아에서의 공산화 도미노 방지를 위해 프랑스군을 지원하고, 중공의 모택동은 아시아 공산주의 맹주로서 월맹을 지원, 국경 도로를 정비하고 무기 지원을 하며 7만 명의 월맹군을 훈련  시킨다.
          

이 지원이 결국 이후의 1차 전쟁(프랑스)과 2차 전쟁(미군) 승리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역사가들은 말한다.  

그런데 1950년 10월 중공은 한국전 참전결정으로 베트남 지원을 중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다.

1951년 61세에 인도차이나 공산당(ICP)을 베트남 노동당(VWP)으로 재건하지만 수세에 몰린 호치민은 1954년 제네바에서 협상을 제의한다.

1954년 5월 8일 제네바 협상을 앞두고 라오스 국경 부근의 디엔비엔푸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군 15,000명을 유격대 십만 명과 징용 십만, 합계 20만 명으로 포위하여 식수와 보급을 끊어 5월 7일 항복을 받고 나서 5월8일 제네바에서 협상을 시작했다. 프랑스의 완전 철수와 17도 경계로 공산주의는 북쪽으로, 우익은 남쪽으로 집결, 분리하고, 1956년에 총선을 하기로 합의, 7월에 서명하고  비로소 “프랑스 전쟁”이 끝이 난다.

이 협상의 당사자는 DRV, 프랑스, 영국, 중국, 소련 5자였고 미국과 사이공 정부는 배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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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호치민은 영웅인가?”
이 질문에 대해 베트남 국민은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역사를 아는 사람들은 아무도 선뜻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로 말미암아 희생이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30년간 전쟁에 대략 5백만 명의 목숨이 희생되었다. 물론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일했기 때문에 전적 호치민 개인을 비난할 수 없다고도 말하는 사람도 있다.  

“프랑스 전쟁(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1946-1954)”의 희생자 통계를 보자. 이 전쟁에서 무려 425,000 명이 전사했다. (프랑스연합군 75,000명, 월맹군 200,000명, 민간인 150,000명)

1955년부터, 베트남 공산당이(이후에 그 잘못을 인정하기도 했지만) 토지개혁 과정에서 지주의 제거 등으로 5만 명을 처형했고 1957-1972년에 남과 북에서 서로 토벌과 암살로 각각 2만 명과 3만 5천 명이 희생되기도 했다.

“미국 전쟁(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1959-1975)”의 희생자는 더 크다. 자국민의 희생을 살펴보면 월맹군과 베트콩 1,000,000명, 민간인 1,500,000명, 월남군 250,000명 모두 2,750,000명이 사망했다. (전쟁 기념관에는 월남인 3백만 명이 희생되고 4백만 명이 다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외국인 통계를 보면 미국군이 58,226명(실종 포함), 한국군 5,000명, 필리핀 1,000명, 태국군 1,000명, 호주군 506명, 뉴질랜드 38명, 캐나다군 55-100명 모두 65,870명이 희생되었다.

1975년 4월 30일 월맹군이 사이공 대통령 궁을 점령하고, 1976년 7월 2일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을 선포하고 “베트남 노동자당(VWP)”은 “베트남 공산당”으로 개편된다.  호치민이 유언으로 또한 남부를 통일하면 절대 보복을 하지 말라고도 했다지만 남부인 6만 5천 명을 처형하였고, 모택동의 문화혁명과 같이 재교육이란 이름으로 농촌 수용소로 내려 보내 수용소에서 십만 명이 사망했다.  

남부 점령 때 5십만 명이 국외로 탈출하면서 그 중 2십만 명이 사망했고, 또한 전쟁기간 동안 인접 라오스와 캄보디아인, 1백만 명이 희생되었다.  

공산주의자 핵심 요원들이 불리해 지면 그는 어김없이 화해를 요청했다.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북부를 완전히 장악하게 되고 남부의 베트콩 세력까지 조종할 수 있게 되자 핵심 당원이 위협받지 않는 한 얼마가 희생되는가에 상관 않고 밀어붙였다. 미국의 제공권과 물량이 절대 우세했기 때문에 희생이 더 많이 난 것은 사실이다.

후일 역사가들은 그토록 많은 여행을 했던 그가 1914년에 런던에서 하선하지 않고 뉴욕에서 하선 했었더라면 그토록 많은 월남인은 희생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회상한다.

수많은 희생자들의 터 위에 오늘을 건설하고 있는 베트남 하노이를 자전거 관광을 하면서 매연과 먼지 속에 그들의 우상이며 영웅인 호치민을 다시 생각하며 과연 그의 선택과 집요한 투쟁이 옳았는지 되짚어 본다.


삶의 흔적

그 웅장한 묘소 옆에는 호치민의 삶을 살펴 볼 수 있는 흔적들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그는 프랑스가 귀빈실로 쓰던 건물을 사용하라는 주위의 권유를 뿌리치고 그 옆에 있는 마구간을 수리해서 그곳을 주거지로 하여 살았다고 한다.

 

▲ 호치민이 거주하고 집무를 보았던 사무실의 집기들.
그가 사용하던 검소한 가구들이며 책상들이 보는 이로 마음을 울컥하게 한다. 철저히 자신을 채찍질하며 살았던 것이 분명했다. 그러기에 그는 베트남인들에게 영웅이 될 수밖에 없었다. 웅장한 묘소는 그의 뜻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을 화장하여 전국에 뿌려달라고 유언을 했지만 그렇게 되지 못했다. 후세가 그의 유언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것은 호치민 이후 구심점이 사라지면 통치의 어려움을 예상한 때문일 것이다.

 

▲ 호치민이 살았던 집 뒤로 호수가 하나있어 그는 그곳을 늘 산책했다고 한다.

칼빈의 묘소는 그의 유언대로 누가 알려주지 않으면 쉽게 찾을 수 없도록 초라하게 묻혀 있다. 죽고 난 뒤 무덤이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새삼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그리고 죽고 난 뒤에는 어떤 모습으로 세상에 보일지 숙연한 마음을 가누어 본다. 우리는 한 인생의 질곡의 삶을 통해 많은 교훈을 안고 다음 여행지로 발길을 돌린다. 더 큰 슬픔의 나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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