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엔립은. 

베트남의 마지막 일정은 호치민 광장에서 끝났다. 우리는 곧바로 공항으로 이동하여 캄보디아 씨엔 립으로 가는 비행기에 탑승했다. 그런데 씨엠립 공항이 가까워지자 창밖이 궁금했는데 아뿔사 홍수가 나서 마을이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한 줄로 서 있는 것은 분명 가로수였다. 가로수가 거기가 길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런 불편을 참고 살아가는 캄보디아 씨엠립에 온 것이다. 그러면 씨엠 립은 어떤 곳인가. 씨엠 립은 시엠리아프라고 한다. 인근에 앙코르와트 유적, 동남아 최대의 톤레사프 호수, 앙코르 국제공항(씨엠 립 공항) 등이 위치해 있는 유명한 관광도시이다.

 

▲ 공항 근처의 마을. 비에 고립된 마을.
▲ 물에 잠겨 가로로 죽 늘어선 가로수가 거기가 길임을 말해 주고 있다.
씨엠 립의 립은 격퇴하였다는 뜻인데, 붙여 쓰면 씨엠을 격퇴했다는 뜻이다. 씨엠은 시암, 샴으로 태국(타이)을 의미한다. 우리는 몸이 붙은 쌍둥이를 샴쌍둥이라고 한다. 그 유래는 이렇다. 샴'이 태국인데 태국 출신의 몸이 붙은 쌍둥이가 서커스로 세계무대를 돌며 유명세를 탔기 때문에 이때부터 이런 쌍둥이를 태국 쌍둥이라는 뜻으로 샴쌍둥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원래 이 지역은 9~15세기 사이에는 캄보디아 크메르 왕국의 중심지로 한 때는 100만 명이 거주하는 대도시였는데, 15세기경에는 태국에 의해 수도가 함락되어 오늘날의 프놈펜으로 수도를 옮기게 된다. 17세기에들어와 캄보디아는 태국과 전쟁을 벌였고 승리하게 된다. 그리하여 태국을 격퇴하고 이곳을 탈환했다는 것을 영원히 기념으로 남기기 위해 우리가 태국을 격퇴했다는 뜻으로 씨엠 립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결국은 그것이 지명이 되었다고 한다.


캄보디아와 태국은 수백 년간 전쟁을 치르는 앙숙이었고, 요즘에도 미묘한 대립을 벌이고 있다. 국경지역에 위치한 유적의 소유권을 두고 다툼을 벌이고 있으며, 최근에는 부정부패 혐의로 쫓기고 있는 탁신 전 태국총리를 캄보디아가 받아들여 경제고문까지 맡기고 보호해주면서 탁신 전 총리의 신병인도를 바라는 태국과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캄보디아는.

캄보디아는 입헌군주국가로 국왕은 노로돔 시하모니(2004년 10월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이 갑작스레 퇴위하여 같은 달에 즉위했다), 총리는 훈센이다.


면적 18만여㎢(남한의 1.8배)로 동서 최대 길이 560km, 남북 최대 길이 440km이며 동남아 최대 하천인 메콩(Mekhong)강이 북쪽 라오스(Laos)로부터 흘러와 프놈펜 근교에서 역시 동남아 최대 담수호인 톤레샆(Tonle Sap) 호수 물과 합류하여 베트남(Vietnam)으로 들어간다.


공무원들은 7시에 출근해서 오후 4시쯤 퇴근한다. 쌀국수는 0.5$로 저렴하나 이용하는 사람들은 중상층이상이나 가능할 정도로 국민들은 가난하다.


총 인구는 2007년 통계가 1400여만 명으로 크메르인이 95%를 차지하고 있다. 종교는 소승불교(90%), 화폐는 리엘(Riel, US$ 1 : 3800∼4000R), 고온다습한 열대몬순 기후(우기 5∼11월, 건기 12∼4월)이며 특이하게도 5진법을 사용하고 있다. 즉 ‘여섯’이후는 ‘다섯 하나’ ‘다섯 둘’ ‘다섯 셋’ 등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 캄보디아가 왜 슬픔의 땅이라고 부르는가? 바로 킬링필드이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국민 대다수가 아직도 가난을 숙명처럼 지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캄보디아 사람들을 만나기 전에  적어도 킬링필드의 슬픔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들의 표정과 행동을 읽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폴 포트가 저지른 킬링필드.

▲ 이 사람이 폴 포트이다. (사진은 인터넷 검색에서)
킬링필드는 캄보디아 공산혁명의 지도자 폴 포트에 의해서 저질러진 인간학살을 말한다. 폴 포트는 어떤 사람일까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왜냐하면 그를 알아야 킬링필드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폴 포트는 (Pol Pot)는 1928년 5월 25일 프놈펜 북부에서 90여 마일 떨어진 캄퐁톰 (Kampong Thom) 주 프랙 스바우브(Prek Sbauv) 마을에서 양부모가 크메르족인 아버지 팬랙 스바우브 (Pen Saloth)와 어머니 속 넴 (Sok Nem) 사이에서 9남매중 여덟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부농으로 마을의 유지였고 어머니는 자비심이 많아 마을에서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의 원래 이름은 살로수 사 (Saloth Sar)이며 폴 포트는 공산혁명 이후 1976년에 '민주 캄푸치아'국 선포와 함께 만든 이름이다.

 

 

1935년 그는 왕궁 근처에 있는 바트 보툼배디 (Vat Botum Vaddi)라는 불교사원에 행자승으로 들어가 캄보디아 글과 불교의 기초 경전을 공부하였다. 당시 캄보디아는 불교사원에서 초급교육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는 불교사원의 유치원 과정을 마치고 형의 학자금 지원으로 에껄미르 (Ecol Miche)라는 프랑스계 초등학교에 들어가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기독교 교리를 접하며 정상교욱을 받았다.


1942년에는 캄퐁참 (Kampongcham)에 새로 개교한 노로돔시아누크 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신입생은 20명이었는데 이들은 각 주에서 선발되었고 살로쓰 사는 캄퐁톰의 대표였다. 여기에서 그들은 모두 프랑스어로 공부를 하였고 그는 여기에서 바이올린을 교습받기도 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크반 시판 (Khvan Siphan)이라는 선생님이 앙코르 제국의 영화를 상기시키며 식민통치하의 연약한 조국의 현실을 토로할 때 그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고 후에 사립 고등학교의 교사가 되기도 하였다.


1948년 그는 캄보디아 최고 명문 고등학교인 리씨 시소와쓰 (Lycee Sisowath)에 입학시험을 보았으나 실패하고 기술 고등학교인 에꼴태 끄니끄 (Ecole Technigue)에 입학하여 수학하다가 다음 해 정부 장학생으로 파리 유학을 떠나게 된다.


1949년 9월말 그는 파리에 도착하여 싸뜨 대학 (Cite Universitaire) 전파전기학과에 등록하였는데 1950년 여름방학을 맞아 인생의 전환점을 가져다주는 중요한 경험을 하게 된다. 여름방학이 다가오자 그는 사회주의 서클 조직의 홍보에 매료되어 유고슬라비아를 위한 자원노력 봉사대에 참여하여 1개월 동안 유고슬라비아에서 노력 봉사활동을 벌였다. 그는 여기서 당시 유고슬라비아의 강력한 지도자 조시프 브로즈(Josip Broz)가 이끄는 전 국민을 동원한 나라 복구 정책에 매료되게 된다. 후에 그는 프랑스 공산당원이 되어 학업은 점점 멀리하고 공산주의 사상에 몰두하게 된다.


1952년 12월 그는 공산주의자가 되어 파리를 떠나 학위도 없이 새해 1월 캄보디아로 돌아왔다. 1953년8월 그는 인도차이나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55년 총선이후 시아누크의 좌경 및 공산주의자 강경탄압으로 활동이 제한되자 프놈펜의 시립고등학교 참라온 비치아에서 교편을 잡았다.


1960년대에 그는 캄보디아 노동당 중앙 위원회 서기장이 된다. 1972년 미국과 베트맹의 파리 종전 협정으로 캄보디아 내 베트맹군이 철수하고 1973년 미국의 공산게릴라기지에 대한 대대적인 공중폭격으로 크메르 루즈 공산게릴라군은 잠시 주춤거렸으나 이후 베트남에 주둔했던 미국군이 철수하자 공격을 가속하여 마침내 1975년 4월17일 프놈펜에 입성하였다. 이후 그는 공산혁명 정권의 최고지도자, 큰 형으로 캄보디아 현대사의 비극을 연출하게 된다.


킬링필드의 이야기서는 여기서 부터 시작되었다 1975년부터 약 4년간 200만 명을 학살하게 되는데 주로 사회주의화에 방해된다고 간주되는 공무원, 교사, 상인 등 화이트 컬러를 골라내어 무차별로 학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캄보디아에는 곳곳이 학살로 죽은 사람들의 해골을 모아두고 교훈을 삼고 있다.
그의 집권 3년 8개월 동안 캄보디아 인구 200만 명이 학살로 사라졌다. 국민 5명 당 1명  꼴이다. 그 후 베트남의 침공으로 크메르 공산당이 북쪽 산악지역으로 물러가며 그도 역시 그때부터 산악에 묻혀 사는 은둔생활과, 간혹 있는 게릴라전으로 활동을 벌였지만 역부족이었고, 현대사의 새로운 비극을 연출했다. 태국 국경의 한 정글 지역에서 이름도 없이 2003년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조금 더 범위를 넓혀서 캄보디아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씨엔립을 방문한 중요한 목적인 앙코르와트를 볼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를 모르고 보면 유물에 지나지 않지만 알고 보면 역사가 될 것이다. 고대 앙코르와트에 관련된 역사만 간단하게 살펴본다.


캄보디의 역사

서기 802년 자바왕국의 볼모로 갔던 자야바르만 2세가 그때까지 여러 소국으로 나뉘어있던 나라를 통일하였다. 그때부터 이 지역을 크메르 왕국이라 불렀다.


고대 크메르 시대(802 - 1431)

우리가 흔히 이야기 하는 앙코르시대이다. 자야바르만2세가 서기 802년에 앙코르의 북쪽 프놈쿨렌에서 ‘나는 크메르왕 중의 왕’이라고 선포하고 국명을 ‘크메르’로 부르게 된다. 이때부터 1431년까지 통치하다가 시얌(후에 태국)에 의해 앙코르가 점령당한 후 1432년 폰헤야얏왕이 앙코르를 포기하고 수도를 남쪽으로 옮겨가는데 이시기를 고대 크메르왕국이라 이른다.

 

이 시기에는 총 37 명의 이름이 등장한다. 그중 28명의 왕만을 정식 왕조로 인정하며, 2명의 왕은 단명에 그쳐 26명의 왕만을 공식 왕으로 보고 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왕이 크메르왕국을 세운 자야바르만2세와 앙코르왓을 세운 수리야바르만2세 그리고 바욘을 세운 자야바르만7세이다. 수리야바르만2세와 자야바르만7세 시대가 고대 앙크르시대에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었으며, 크게 융성하였던 시절이었다.

 

앙코르 이후 잃어버린 역사 (1432 - 1863)

앙코르를 포기한 후의 캄푸챠 역사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심지어 왕의 치적 년대를 모르는 경우도 많다. 초기에는 시얌의 잦은 침공으로 수도를 옮기지 않을 수 없었으며, 내부적으로는 왕위 찬탈 등의 싸움으로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1431년 폰헤야얏왕이 프놈툴바로 수도를 옮겼다가 1432년 프놈펜으로 다시 옮겼다. 1505년 수도를 다시 프놈툴바로 옮겨가고 그후 롱엑, 오동 등지로 전전하다 1866년 프랑스 식민시절에 노로돔왕에 의하여 프놈펜으로 수도를 다시 옮기게 되었다.


타이(이 시기부터 시얌은 타이로 국명이 바뀌었다)뿐 아니라 15세기에 들어서는 베트남이 강성하여 동북부를 넘나들었으며 1628년에는 프레이노꼬가 정식으로 베트남에 이양되어서 사이공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타이와 베트남의 종주권 다툼으로 캄푸챠 영토 안에서 타이와 베트남이 6년간 전쟁을 치르기도 하였다. 앙두엉 왕은 두 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프랑스에 보호를 요청하다 발각돼 타이에 의해 폐위 되며 그 아들 노로돔이 왕이 되었다. 노로돔 역시 아버지와 뜻이 같아 프랑스에 보호 요청을 한다. 노로돔은 그 대가로 시엠립과 바탐방을 타이에 이양하였다.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프랑스 군대가 캄보디아에 상륙하여 프랑스 식민시대(1864-1953)가 시작되고 1953년 프랑스로부터 독립 - 시아누크 국왕이 주도하는 왕정 사회주의가 도래한다. 그러다가 1975년까지 미국과 크메르루즈 그리고 베트남이 뒤엉킨 전쟁을 치른다. 폴 포트를 중심으로 한 크메르루즈는 미국과 론놀 정권에 대항하는 게릴라전을 벌이다가 미국이 베트남전에서 철수한 후 론놀 정권을 붕괴 시키고, 내전에서 승리한 폴포트가 '민주 캄푸치아(Democratic Kampuchea)'정부 수립한다.

 

▲ 호수에 반영되어 아름다운 앙코르 와트

 

그리고 자신의 정책에 방해가 된다는 지식인 200만 명을 학살하기에 이른다. 당시 캄보디아 인구가 800만이었으니 1/4의 인구를 죽인 셈이다. 캄보디아 곳곳이 그런 킬링필드의 잔해와 그림자가 남아있어 캄보디아는 그야말로 슬픔의 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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