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평과 정의가 넘치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려는 신실한 하나님의 의지

   
▲ 이세령 목사
노테르담사랑의교회 담임목사
지난 주간에 코펜하겐에서 유엔기후변화 협약 회의가 폐막되었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지금은 말할 때가 아니라 행동할 때라고 역설했다. 지구의 기후를 높이는 온실 가스를 줄임으로 온도 상승을 억제하는 구체적인 행동을 요청했다. 그러나 선진국과 개도국 간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되어 각 국이 이행해야 할 강제적인 조항이 포함된 구체적인 합의 도출이 되지 않았다. 선진국은 개도국의 노력을 감시하겠다고 하고, 개도국은 선진국에 돈을 많이 내 놓으라고 요구한다. 자국의 이익들이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다. 그런 동안 아프리카의 저지대 주민들이나 방글라데스의 다카는 지구 온난화로 해수면이 상승하여 물에 잠길 상황이다. 당장 이주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의 탐욕을 자극시켜 경쟁으로 발전된 오늘의 현실은 이제 전쟁의 방식이 아니라 기후 문제로 다시 공멸의 위기를 가지게 되었다. 경제적 위기에 기후적이며 환경적인 위기가 겹치는 현실이다. 근본은 인간의 탐욕스런 현실을 유지하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세상에 성탄의 복음은 어떤 소망을 주는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시는 사건을 구약 성경 이사야의 말씀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마태복음은 말씀한다. 보라 처녀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루었다고 마1:23절은 선언한다.

임마누엘의 예언은 이사야 선지자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7:14절의 말씀이다.

예수님의 임마누엘로 오심을 이해하기 위해서 어떻게 임마누엘의 예언이 나오게 되었는지 그 배경을 살펴보자. 그리고 그 임마누엘의 예언이 오늘 성탄을 맞은 하나님의 교회에게 어떤 소망을 주는 것인지 살펴보자.

1. 임마누엘 예언의 배경(사7:1-16)

당시 유다의 통치자는 아하스 왕이다. 아하스는 북왕국 이스라엘과 아람 나라의 연합국의 침략을 받고 있다. 마치 북한과 중국이 힘을 합쳐서 남한을 공격하는 상황이다.

아주 두려운 상황이다. 아직 수도 예루살렘을 정복하지는 못했지만 거의 모든 유다를 정복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왕과 백성들의 마음은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다(사7:2). 그래서 왕은 예루살렘에 물을 공급하는 수로를 3절에서 확인하고 있다. 이 수로는 성이 포위되었을 때 생명 줄과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북 이스라엘과 아람 나라 연합국이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이유를 5-6절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아람과 이스라엘이 악한 꾀를 가지고 있다. 악한 계획이고. 도모이고 경영이다. 그들의 꾀는 유다를 쳐서 무너뜨리고 다윗 왕조를 끊고 다브엘의 아들을 허수아비 왕으로 세워 새로운 왕조를 만드는 일이다. 말하자면 유다의 정통성을 말살 시키는 일이다. 다윗에게 맺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정면적인 도전이다.

군사력을 통해서 힘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언약에 대한 도전을 시도한다. 이것이 이 전쟁을 성경이 언급하는 본질적인 이유이다. 다른 정치 경제적인 이유가 이 전쟁에 개입되어 있을 수 있지만 그러나 성경이 관심을 가진 것은 다윗의 정권을 무너뜨리려는 도모이다. 다윗의 씨를 말리고 다윗의 등불을 끄자.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세우심으로 아브라함을 불러서 세우는 한 나라를 이루어 가신다(아브라함에게 민족과 가나안 땅과 이름의 창대함을 약속했는데, 그것이 다윗에게서 온전히 성취된다. 이름의 창대에 대해서 창12:3과 삼하7:9 비교). 다윗의 나라를 통해 타락한 창조 세계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약속이 머물러 있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북왕국은 아람은 연합해서 다윗 왕국을 무너뜨리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먼저 선지자 이사야에게 말씀을 하신다(3). 아들을 데리고 물길 정비를 감독하는 아하스 왕을 만나라고 한다. 그리고 그에게 7절에서 말씀하신다. 그 일은 서지 못하며 이루지 못한다고 말씀한다.

그 일이란 바로 다윗의 아들을 왕으로 세우는 일을 폐하려는 것이다. 대신에 8절에서 오히려 아람과 에브라임의 멸망이 임할 것을 말씀하신다. 큰 기세로 덤벼드는 두 연합국 세력이 망할 것이다.

그리고 9절에서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믿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믿지 않으면 유다가 다윗의 왕조가 굳게 서지 못한다. 굳게 서지 못한다는 말과 2절에 왕과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리는 것과 대조가 된다.

현실은 흔들리는 상황이고 위급한 상황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굳게 믿으라고 제시한다. 그러면 굳게 선다. 9절에서 굳게 믿으라고 하면서 믿어야 하는 구체적인 내용은 일차적으로 분명히 북 이스라엘과 아람의 계획, 즉 다윗의 자손을 폐하는 일이 이루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굳게 믿는다는 말의 의미를 좀 더 살펴보아야 한다.

굳게 믿으라는 말을 확신하도록 하기 위해서, 즉 여호와께서 두 연합국의 세력이 다윗의 왕을 폐하려는 도모가 서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신시켜 주시기 위해서 징조를 구하라고 하신다. 그 징조를 깊은 데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고 하신다. 구하라는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하신다. 그리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라고 하신다. 네 하나님 여호와는 아하스 왕과 여호와간에 맺어진 언약적 관계를 상기시키는 표현이다. 그리고 깊은 데와 높은 데라도 하나님이 구원을 행하시는 자리이다.
사51:10 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 얻은 자들로 건너게 하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
시139: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따라서 징조를 구하라는 요청은 언약의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것이다. 다윗에게 주신 언약의 약속을 믿고 그것을 방해하는 악한 꾀가 이루지 못하도록 구하라고 하심이다. 어떤 일이라도 해서 이루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 주심이다. 언약의 약속은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것은 겔26:35절에 잘 나타나 있다.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이런 징조를 구하라 즉 기도하라고 하심은 아하스에게 믿으라는 9절의 요청에 대한 구체적인 반응을 요구하심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아하스의 잘못에 대한 적발이 있다.

아하스 왕은 북 이스라엘과 아람 나라의 연합국을 대적하기 위해서 이미 북방의 세력 앗수르에게 도움을 구했던 것이다. 이것이 대하28:16절 이하에 나온다. 이사야서 전체를 통해서 유다를 향한 책망의 중심에 있는 것이 바로 애굽과 같은 세력에 대한 의존이다. 대표적인 본문이 사30:1-2, 31:1절이다.
애굽에 도움을 구하고 말을 의지하면서 여호와께 묻거나 구하지 않는다고 하신다. 사7:11절에서 징조를 구하라고 하신다. 이 구하라는 말이 바로 사30:2절에 나오는 여호와께 묻지 않았다는 말에서 묻는다는 말과 같다. 그리고 31:1절의 구한다는 말과는 다른 단어이지만 같은 뜻을 전달하는 동류의 단어이다.

하나님께서는 전쟁의 위기에서, 다윗의 등불이 꺼져가는 것 같은 위기에서 굳게 믿으라고 하시면서 믿음대로 굳게 서게 해 주시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믿음으로 언약의 하나님께 구하기를 바라고 있다. 하나님께 구하라고 요청하심은 아하스의 불신앙을 지적하고 돌이키시는 것이다. 아하스가 앗수르에 도움을 구하는 본문 즉 대하28:16절을 보자.

그때에 아하스 왕이 앗수르 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도와 주기를 구하였으니.

여기서 이미 도움을 얻기 위해서 앗수르에게 사람을 보낸 아하스의 행위를 적발하시기 위해서 징조를 구하라고 하신다. 즉 내게 도움을 구하라고 권면하심이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굳게 믿어야 하는 구체적인 징조가 바로 하나님께 구하는 것 즉 기도하는 것이다. 그런 하나님께 구함이 없는 아하스의 계획을 적발하심인데, 이는 사29:15절에서도 저주를 받게 된다.
자기의 계획을 여호와께 깊이 숨기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여호와를 시험하지 않는다는 좋은 명분으로 자기의 계획을 깊이 숨기는 아하스를 적발하심이다.

앗수르에 도움을 구하고, 애굽에 도움을 구하는 깊은 계획을 적발하심이 바로 징조를 구하라고는 하나님의 요청이다. 왜 내게 구하지 않는가?

그러나 앗수르에 도움을 구한 아하스는 이미 마음이 든든하다. 굳이 하나님께 아쉬운 소리 할 것 없다. 그런데 여기에는 더욱 감추어져 있는 아하스의 통치에 대한 판단이 개입되어 있다. 하나님을 구하지 않는 아하스의 불신앙을 적발하심과 동시에 한 가지 더 중요한 지적이 하나님께로부터 선언된다.

징조를 구하지 않는 아하스에게 이사야 선지자가 이렇게 책망한다.
13절에 다윗의 집이여,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을 적게 여겨서 하나님을 괴롭히느냐?

다윗의 집이란 표현을 통해서 왕인 아하스를 겨냥한다. 그리고 사람들을(복수 형태이다) 괴롭히는 것을 넘어서 이제는 하나님까지도 괴롭힌다고 선언한다.

여기서 괴롭힌다는 말을 관심있게 보자.
괴롭힌다는 단어는 사람을 실증나게 만들고 지치게 만든다는 뜻을 가진다. 완전히 지쳐서 염증을 내고 돌아서게 만드는 의미다. 이미 아하스 왕의 잘못된 통치로 말미암아서 사람들 즉 백성들의 상태가 피폐해져 있다(참고 대하28:1-15, 사1:2-31). 그런데 이제 하나님에 대한 태도마저도 노골적으로 거절하면서 지치게 만들고 있다.

그러면 괴롭힌다는 이 표현, 즉 하나님마저 진저리 나게 만든다는 말의 실체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 시대의 특징을 소개하는 본문을 보자.

사1:14절을 보자.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으니라.

여기서 곤비하다는 단어가 바로 7장에 언급된 괴롭힌다는 단어와 동일하다. 무엇이 하나님을 피곤하게 만들고 진이 빠지게 하는가? 바로 1:13절에 언급된 말씀이다. 절기와 함께 악을 행하는 것이다. 이것을 위선이라고 한다. 절기, 제사를 드리면서 종교적 형식은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형식이 담아내어야 할 내용인 선을 버리고 악을 행하는 현실이다.

더 구체적으로 15절에서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신다. 손에 피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악한 행실을 버리라고 한다. 회개하여야 한다. 이제 적극적으로 악을 버리고 17절에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고 한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피곤해 하시고 괴로워하시는 무거운 짐은 구체적으로 불의한 통치와 삶의 방식이다. 그리고 정의롭지 못한 통치를 가리는 종교적인 위선이다. 그런 예루살렘 성읍을 21절이 말하기를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런 모든 찌끼와 더러운 불의를 제거하신 후에 다시 신실한 성읍, 의로운 성읍으로 회복하신다는 약속을 26절에서 주신다. 여기서 신실한 성읍이란 표현과 의의 성읍이 병행되어서 사용된다.

신실한 성읍이란 말은 믿는 성읍이란 말과 같다. 믿음의 성읍. 굳게 믿는 성읍이 된다.

이것이 바로 아하스 왕이 다스리던 예루살렘 성을 부르던 원래의 칭호이다. 그래서 사7:9에서 위기에 놓인 예루살렘을 향해서 바로 그 신실했던 성읍답게 그 신실함 즉 믿음에 굳게 서라고 요청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괴로우신 이유는 바로 종교적인 의식을 통해서 불의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힘의 통치, 보이는 권세의 통치, 약자를 억압하는 통치이다. 그래서 이런 불의한 통치자가 드리는 제물과 제사, 절기가 얼마나 하나님을 괴로우시게 하는가?

하나님께 구하지 않는 아하스 왕에게 이제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의 통치의 중심에 있는 불의한 현실을 적발하심이 바로 백성들과 하나님을 괴롭게 한다는 선언이다. 실제로 구하라는 기도와 관련해서 이미 사1:15절에서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않으신다고 하신다.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즉 불의한 통치를 벗어버리고 선행과 의를 행하라고 하신다. 고아와 과부를 변호하라고 하신다(사1:16). 그렇게 할 때 비로소 너희 죄가 주홍 같고 진홍 같이 붉어도 희어진다는 약속이 선언된다(사1:17).

신실한 믿는 의의 성읍으로 돌아오도록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아하스 왕에게 권면하신다. 그런데 믿지 않는다. 즉 구하지 않고 또한 불의를 버리지 않는다. 자신의 힘과 세력의 통치 방식에 대한 고집이 바로 징조를 구하지 않는 아하스의 태도의 본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나라, 다윗의 나라를 회복하시기 위해서 임마누엘의 징조를 주신다. 구하지 않았음에도 주신다. 은혜이다. 이방의 모략, 악한 꾀와 함께 아하스의 은밀한 계획을 무너뜨릴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과 모략이 선언되는 순간이다. 임마누엘. 아이의 탄생이다.

이 아이와 관련해서 유다의 회복과(15) 아람의 연합국이 파괴된다(16).

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징조인 임마누엘 아이의 탄생은 현재의 전쟁의 위기와 다윗의 자손의 끊어짐을 막아낸다. 그리고 이 아이를 통해서 사9:6에서 영원한 공평과 정의의 왕권이 굳게 선다. 그가 사11:1절 이하에서 이새의 줄기에서 나는 자로 온 세상에 사자가 풀을 먹게 되는 종말론적인 평화를 만들어 낼 메시야이다.

이제 임마누엘을 주시는 배경을 정리해보자.

다윗의 왕권이 끊어지는 하나님의 언약의 위기 속에서 그 대적을 물리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징표가 임마누엘 아이의 탄생이다. 그리고 그런 위기를 맞은 아하스 왕 시대의 믿음 없음 즉 불신앙을 적발함이다.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기도 하지 않고) 앗수르나 애굽과 같은 세력을 의지하고, 보이는 세력을 탐하면서 불의를 행하는 신실하지 못한 다윗의 통치와 다윗의 성에 대한 적발이 바로 임마누엘 아이의 탄생의 징조이다. 그러나 이 아이가 불의한 아하스의 통치를 하나님의 의와 공평의 통치로 만들고 그가 베푸는 지혜와 모략으로 세상의 모든 악한 꾀를 물리치고 결국은 평화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도래하게 한다. 이것이 이사야에게 보인 평화의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전망이다.

2. 임마누엘이신 예수님(마1:1-25)
이제 임마누엘의 궁극적인 목표인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장면으로 가 보자.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다(마1:1, 17). 예수님의 족보는 구약을 정리한다. 아브라함을 불러서 온 세상에 복이 되는 나라를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다. 그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아브라함과 다윗을 부르셨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께서 온전히 이루신다. 창조한 세상을 복으로 채우는 나라, 천국을 가지고 오시는 예수님이시다. 이런 복의 나라는 죄를 극복하여야만 이루어진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이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마1:21절이 선언한다.

죄를 극복함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상 가운데 가지고 오시는 예수님이시다(마4:17). 이것의 성취가 아이의 탄생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선언하고 이의 성취가 임마누엘이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다. 아이의 탄생을 통해서 죄를 극복하고 그를 통해서 죄의 나라를 이기고 의와 생명의 나라인 천국이 도래한다.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나라, 다윗을 통해서 구현하려고 했던 그 나라가 바벨론 이래로 로마에 의해서 좌절된 것 같은 시대였다. 그러나 이제 임마누엘이신 예수님 오신다. 그가 와서 새로운 나라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이루신다. 이것이 임마누엘의 오심이다.

임마누엘의 징조를 아하스 왕은 믿지 않고 받지 않았지만 그러나 요셉은 순종하여 아들을 낳고 이름을 예수라 한다. 요셉의 순종을 통해 임마누엘이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임마누엘의 성취의 못자리인 요셉의 순종의 본질이 무엇인가? 순종은 말씀을 믿는 믿음의 행위이다. 그런데 그런 믿음을 구성하는 실체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것은 요셉과 마리아를 통해서 태어난다. 누가는 마리아에게 강조를 두어서 예수님께서 탄생하시는 자리를 설명한다면 마태는 강조가 요셉에게 있다. 그리스도 메시야가 요셉을 중심으로 도래한다. 16, 17절 족보에서 요셉이 언급된다. 그 요셉을 19절에서 의로운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그런데 그런 요셉의 의로움의 증거로서 마리아의 잉태 소식을 처리하는 과정을 언급한다. 자기와 약혼한 여자가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처리해야 하는가? 여기서 그를 의롭다고 한 마태의 평가가 시험대에 오른다. 아직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모든 것을 설명하시기 전이다.

요셉은 그 사실을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파혼하기로 한다. 요셉에게는 권리가 있다. 마리아를 간음한 여인으로 몰아버릴 수 있는 권리가 있다. 그러면 돌에 맞아서 마리아는 죽게 된다.

그러나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여자가 성폭행을 당하는 경우에 두 가지를 구별한다. 도시나 마을 안에서 그런 일이 있으면 이것은 간음으로 간주해서 죽인다. 그러나 벌판에서 그런 일을 당한 경우는 책임을 묻지 않는다. 소리 질러도 누구에게도 도움을 얻지 못할 상황이기 때문이다(신22:23-27).

요셉은 아이를 잉태한 약혼녀 마리아를 법정에 고소하고 그녀를 죽임으로 모든 것을 새로이 출발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마리아에게 가장 유리한대로 사태를 이해해서 가만히 정리를 하려고 했다. 이런 요셉의 모습이 바로 의롭다라는 증거가 된다. 의로움은 옳고 그름의 문제를 넘어서서 약자에 대한 배려의 문제이다. 자기를 방어할 수 없는 사람에 대한 배려가 의로움의 실체이다. 힘을 숭상하고 돈을 의지하고 세력에 의지하는 자들이 불의한 이유가 이런 배려에 대한 깨어있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의로움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이신 임마누엘이 태어나셨다. 비록 마구간이지만 연약한 목수의 아들이지만 그런 의로움의 자리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하게 순종하는 요셉에게서 예수님, 임마누엘은 오신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동정녀의 탄생이지만 그러나 임마누엘로 오신 아기가 만들 나라가 의와 평화의 나라임을 증거한다. 그런 연약한 자들의 믿음과 의로움으로 인해서 바벨론의 권세, 로마의 권세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이제 그 임마누엘의 약속이 마태복음 마지막에서 다시 한번 울려 펴진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네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임마누엘의 약속은 의와 공평의 나라를 세우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이다. 그래서 그 나라를 통해서 세상의 모든 제국들과 힘들을 꺾으시고 종말의 평화를 가지고 오신다. 바로 천국이다. 이런 나라에로 우리를 부르셨고, 또한 우리가 부른다. 천국 복음의 증인으로 우리를 이 성탄의 계절이 부른다. 우리에게 믿음으로 기도하도록 요청한다. 그리고 또한 의로움의 열매를 맺도록 부른다. 신실한 고을, 의로운 고을로서 하나님의 교회를 꿈꾸어 본다. 교회는 힘과 세력과 돈이 아니다. 비록 마구간과 같은 예배당이고 목자와 같은 연약한 인생들이 모인 교회이다. 그러나 그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의와 공평의 나라가 온전히 세워짐을 꿈꾸도록 임마누엘께서 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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