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 교수 / 고신대학교 역사신학, 신학박사

인간의 고통에 대한 사랑과 간호
고대인들은 사후세계를 준비하는데 온갖 관심을 기울였으나, 예수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시작된 초대 기독교 공동체는 인간의 지상에서의 삶도 중시하기 시작했고, 건강을 돌보는 간호, 혹은 치료행위도 그리스도인들의 소중한 봉사영역이었다. 이것은 마태복음 25장 35-45절에 하신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에 대한 설교가 교회와 신앙적 삶에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기독교의 사랑과 자비에 관한 고전적인 연구는 Uhlhorn, Die christliche Liebestatigkeit in der alten Kirche (ist. ed., 1882)인데, Christian Charity in the Ancient Church (Edinbourgh, 1883)로 영역되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기독교 공동체의 사회봉사에 관해 신학적, 역사적 연구를 시도했으나 하르낙은 당시의 이방세계의 자선과 봉사에 대해 공정하게 다루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Harnack, 147.).

육과 영을 이원론으로 파악하는 신플라톤주의적 헬레니즘이나, 초기 기독교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던 영지주의(Gnosticism)나 마니교(Manichaeanism) 또한 이원론적 기초에서 육체(물질)에 대해 지나치게 과소평가 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회는 육신의 아픔에 대해서도 방관하지 않았다. 질병을 불경건과 혼돈했던 후기 기독교의 수도원적 경향에도 불구하고 치유자 그리스도상은 교회사의 중요한 모범으로 남아 있었다.

이런 점에서 의사인 프로본샤는 “정신면에서 희포크라테스는 ‘의학의 아버지’였고, … 고대 의학계의 진정한 정상(頂上)인인 뛰어난 그리이스인이 현대의 의료인들에게 모범을 보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의학에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은 히포크라테스가 아니라 예수였다는 점이 종종 무시되고 있다. 바로 이 겸손한 갈릴리 사람이 역사상의 어떤 다른 인물보다도 많이 의술에 그 본질적 의미와 정신을 남겨주었다. … ‘의학의 정신적인 아버지’는 코스 섬의 히포크라테스가 아니라 나사렛의 예수였다.”(J. W. Provonsha, "The Healing Christ," Current Medical Digest (Dec. 1959), 3.)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의 병약자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의학 분야에서도 영향을 끼쳤고,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건강에 대해 공자(孔子)를 거쳐 부처, 이슬람교 지도자들에 이르기까지 그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만큼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감독 코넬리우스(Cornelius)에 의하면 250년경(?) 로마교회의 경우 1,500명의 과부와 가난한 이들을 도왔고 특히 병든 자를 간호하고 치료해 주었는데, 치료가 불가능했을 경우 교회는 기도하고 방문하여 간호해 주고 물질로 위로하였다고 한다. 이 일을 감당했던 이들이 집사(deacons)와 과부들(widows)과 여집사들(deaconesses)이었다.

파라볼라노이
사랑의 계명, 곧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최고의 윤리였고 기독교의 중핵을 이루는 실천적인 윤리이다. 참된 사랑, 그것은 세월의 흐름과 관계없이 어느 사회에서나 어느 시대에서 동일한 의미를 지니는 거룩한 힘이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의 여정을 가면서도 이 힘의 위력을 보여주었다.

4세기 이전의 기독교회는 탄압받는 집단으로서 공개적인 회집이나, 전도, 증거가 불가능했고, 온전한 신자들만의 은밀한 예배와 교제를 나눌 뿐이었다. 그들은 공개되지 않는 곳에 모였고(행12;10-17), 공개적으로 전도하지도 않았다. 이브 콩갈(Yves Congar)는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자연인들의 번영과 안녕을 위한 기도는 했지만, 그들의 회심을 위해서 기도한 적은 거의 없었다.”고 말했다. 선교에 대한 저명한 연구가인 노버트 브록스(Norbert Brox)는 초대교회에 선교명령에 대한 반응이 없었다는 것은 대단히 놀랄만한 일이라고까지 말 했다.

즉 초기 기독교 교부들의 문헌 속에는 전도에 대한 목회적 권고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북아프리카의 주교이자 순교자였던 키프리안(Cyprian)은 그의 저서 <에드 큐리눔>(Ad Quirinum)에서 이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의 책 제3권에는 새 신자들을 위한 신앙생활에 필요한 120 항의 거룩한 교훈을 담고 있는데, 형제들끼리 서로 도와야 하고 그리스도인은 항상 깨어서 기도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은 있지만, 전체 교훈 중에서 불신자들에게 전도를 촉구하는 내용의 구절은 단 하나도 없었다(Cyprian, Ad Quirinum, 3, preface, 9, 120.).

이처럼 전도하거나 증거 하는 일을 권면하지 않았던 것은 공개적인 증거가 불가능했고, 그럴 경우 심각한 희생을 지불해야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로마제국 하에서 기독교가 급속도로 확산될 수 있었을까?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의 순정한 사랑의 실천 때문이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삶 속에서 형상화했기에 그 실천적 사랑은 힘을 지니고 사람들에게 감동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사도시대에는 교회 안에 여러 직분이 있었다. 사도들의 공궤하는 일에 메여있을 수 없으므로 집사를 선출했고, 여러 지역에 교회가 설립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장로직분이 생겨났다. 후일 장로 직의 분화가 나타나 지금의 목사가 세워졌다. 그런데 성경에는 언급이 없으나 초기 기독교 공동체 안에는 중요한 한 가지 칭호가 있었다. 그것이 파라볼라노이(παραβολάνοι)였다(F. L. Cross and E. A. Livingstone,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Oxford Univ. Press, 1977), 1029-30.). 그 의미는 ‘위험을 무릎 쓰는 자’라는 뜻이다.

251년 말에는 엄청난 전염병이 유행했다. 이때는 데시우스의 박해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교도들에 의해 희생을 당하던 시기였다. 이 병은 종교에 상관없이 수많은 이들의 인명을 앗아갔다. 부유한 이교도들은 달아났으며 전염된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해 다녔다. 도시에는 죽은 이들의 시체가 쌓이고 있었다.

키프리안의 전기 작가인 폰티우스에 따르면 키프리안은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에 저들의 소명에 신실해야 한다고 권고했다고 한다. 즉 그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을 설명하면서, “우리가 단지 우리(그리스도인)들만을 소중히 여기고 우리끼리만 자비를 베푼다면 그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지만, 세리나 이교도들이 하는 것 이상으로 선으로 악을 이기고, 하나님께서 관용을 베푸신 것 같이 관용을 베풀고, 원수조차도 사랑하며, 주님께서 권고하신 대로 핍박하는 자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한다면 우리는 온전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변함없이 태양을 떠오르게 하시며 비를 내리셔서 씨앗들을 기르시고 이러한 모든 선하심을 그의 백성들에게 보이실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그렇게 하신다. 만일 누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다면 그 사람은 아버지를 본받아야 함이 마땅하지 않은가?”(Pontius, Vita Cypriani, 9.)

키프리안의 설교는 전염병이 돌고 위험한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을 실천하라는 가르침이었다. 키프리안은 마태복음 5:43-48의 말씀을 그들이 처한 위험한 상황 속에 적용하면서 동료 그리스도인들이 이교도들과는 다르게 행하라고 가르쳤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최근에 자신들을 핍박하던 원수들을 사랑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동료 그리스도인만이 아니라 이교도들에게도 지극한 사랑을 베풀었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없이 사랑을 실천했다. 이들에게 영예로운 이름이 붙여졌다. 그것이 ‘파라볼라노이’였다. 감염될 위험 앞에서도 병든 이를 돌보았던 이들에 의해 많은 이들이 목숨을 구했고, 이 위기상황을 통과하면서 이교도들은 기꺼이 신자가 되기를 자청하였던 것이다. 자신들의 종교와는 달리 기꺼이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에 마음을 열었던 것이다(Rodney Stark, The Rise of Christianity, 81ff. 260년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있었던 이와 유사한 사건에 관해서는 Eusebius, HE 7.22.2-10을 보라.).

 

저작권자 © 코람데오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