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빙: 말씀을 영접함

 직분론에 있어서 청빙의 위치

   
▲ 이성호 교수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졸
고려신학대학원 졸.
Calvin Theolgical Seminary
(Th. M. 및 Ph. D)
합동신학대학원 대학교 조직신학 교수(역임)
고려신학대학원 역사신학 교수(현)
종교개혁 이후 개혁교회는 순수한 말씀의 설교와 그 말씀에 따른 성례의 시행을 참 교회의 표지로 보았다. 그러나 말씀의 설교와 성례의 시행은 그것을 시행하는 직분자, 즉 목사가 없이 이루어 질 수 없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목사가 없이 가시적인 참 교회는 존재할 수 없다. 말씀 자체가 참 교회와 거짓 교회를 구분한다면, 말씀의 봉사자인 목사는 건강한 교회와 약한 교회를 결정짓는 역할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개혁교회는 직분(권징)도 참 교회의 제3의 표지로까지 간주하는 전통을 발전시켰다.

이런 이유 때문에, 개혁교회는 만인제사장 교리뿐만이 아니라 세 직분(목사, 장로, 집사) 사이에 권위의 평등성을 받아 들였다 하더라도, 역할이나 가치에 있어서 목사는 세 직분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목사가 장로나 집사보다 권위에 있어서 높은 지위에 있지 않고, 따라서 다른 직분들을 통솔할 수는 없지만 장로나 집사보다 중요한 직분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목사가 장로나 집사 보다 중요하다는 것은 목사를 세우는 절차에 있어서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다. 왜냐하면, 개혁교회에 있어서 장로와 집사와는 달리 목사는 회중 가운데서 선출되는 것이 아니라 청빙이라는 독특한 절차를 통해서 임직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신자들은 목사 청빙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사실상 이것은 오랫동안 끈질긴 투쟁의 결과로 개혁교회 안에 정착된 제도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 왔던 청빙의 제도의 정신이 올바르게 이해되거나 제대로 실시되고 있지 않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많은 교회가 목사 청빙에 있어서 실패하고 있고, 그 결과 튼튼했던 교회가 하루아침에 큰 어려움을 겪는 것을 우리는 주위에서 너무나 쉽게 보고 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목사 청빙에 대한 평소의 무관심과 무지가 나은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불평과 원망보다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통회와 자복이어야 한다.

 

청빙의 존재 이유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교회는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교회이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지금 하늘에 계시기 때문에 자신의 종들을 통하여 교회를 다스리신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왕이시기 때문에, 교회에 있어야 할 직분의 종류를 정하시고, 그 직분에게 필요한 자질을 규정하고, 더 나아가서 직분자 자체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세우신다. 따라서 목사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종이다. 성도들은 이 말을 강단에서 귀가 아프도록 들었을 것이다. 실제로 여기에 대해서는 개혁교회 뿐만이 아니라 지상에 있는 모든 교회(로마 가톨릭 교회까지) 동의하는 바이다.

그러나 문제는 교회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목사를 교회에 세우는가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교회마다 다른 답을 가지고 있다. 종교개혁 전까지 로마교회는 오직 사도권을 이어받은 주교만이 이 일을 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마태복음 18장의 지상명령이 열 한 사도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그들의 후예들인 주교만이 목사를 세울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재세례파와 같은 이들은 목사도 장로나 집사와 똑같은 방식으로 각 개체 교회 회원들 중에서 투표로 선출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이것이 초대교회의 전통에 더 맞는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직업을 가지지 않고 교회의 생활비를 받는 목사들을 삯군 목자라고 비난하였다. 퀘이커 교도 같은 이들은 더 나아가서 직분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는데, 그런 인간적 제도가 성령의 사역을 방해하기 때문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배 중에서 누구든지 성령의 직접적인 감화를 받은 사람은 그 순간 목사가 되어 설교를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사실, 하나님께서 직접 세운 사람보다 더 좋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청빙이 지닌 3가지 의미

그러나 개혁교회는 이런 모든 비성경적 제도들을 거부하고 청빙이라는 독특한 전통을 발전시켰다. 이것은 크게 세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말씀의 봉사자는 은사의 하나로서 하나님께서 위에서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목사는 교회의 성도들이 자신의 취향에 맞는 사람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교회에 파송하는 자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재침례파나 퀘이커 교도들보다 오히려 로마 가톨릭 교회에 가깝다. 오늘날 개혁교회의 청빙제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현대의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청빙을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둘째, 목사는 그 교회를 위한 직분이기 때문에 그 교회 회원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주교 한 사람의 권위에 목사직을 의존시키는 로마교회의 직분관도 단호히 거부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만이 교회에 목사를 파송하시는데, 그 사실을 청빙이라는 수단을 통하여 교회는 확인하는 것뿐이다. 따라서 청빙은 교회 회원들이 투표를 통하여 목사를 “확정”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이미 파송하신 사역자를 “확인”하는 것이다. 즉, 청빙의 본질은 주께서 보내신 말씀을 영접하는 절차이다.

셋째, 목사를 자기 교회 회원 중에서 뽑지 않고 다른 곳에서 청빙하는 이유는 공교회의 하나됨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개혁교회에 있어서 교회의 하나됨은 말씀의 하나됨인데, 이 말씀의 하나됨은 구체적으로 노회를 통해서 유지된다. 즉 청빙은 동일한 신앙고백과 신학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 교회가 자신들의 교회에 말씀의 봉사자로 영접하는 행위이다. 오늘날 성도들이 특별한 설교를 하고, 특별한 비전을 가지고, 특별한 프로그램에 능숙한 목사를 찾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교회의 하나됨에 심각한 손상을 주는 것이다. 청빙은 특별한 말씀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보편적 말씀을 신실하게 전할 자를 영접하는 것이다.    

청빙이 말씀을 영접하는 것이라면, 교회가 이것을 신중하게 시행해야 할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교회의 생명력은 말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청빙은 자신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자를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할 자를 영접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여기에서 개혁교회의 "믿음의 확신"(assurance of faith)이라는 교리가 매우 중요하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청빙에 있어서, “청빙위원회나 당회에서 잘 살펴서 했겠지”라고 생각하면서 청빙 투표에 임한다. 이런 태도를 신학적으로 맹목적(implicit) 믿음이라고 하는데, 로마교회는 이것도 일종의 믿음이라고 주장 하지만 우리는 확신이 없는 믿음은 전혀 믿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목사 청빙에 있어서 성도들은 말씀의 분별력을 가져야 하고 예정된 목사의 설교를 듣고 확신이 없을 경우에는 반드시 반대표를 던져야 한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지금도 예수님께서 사도 시대처럼 어떤 사람을 직접 지명하여 보내시면 더 좋지 않을까? 그러면 청빙 때문에 골치 아픈 일들이 없을 텐데.” 이 점에 있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우리에게 아주 큰 도움이 된다. “예배와 교회 정치에 대하여 주변적인 것들은 ......  본성의 빛과 신자의 사리분별에 의하여, 항상 지켜져야 하는 말씀의 일반적 규칙들에 의해 정해져야 한다.”1) 예수님은 교회에 어떤 직분이 있어야 하는지, 그 직분의 본질적 기능이 무엇인지는 성경을 통해서 명시적으로 다 알려 주셨다. 그러나 그 일을 구체적으로 누가 잘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성도들의 자유에 맡기셨다. 따라서 신자들은 자신의 이성과 분별력을 잘 사용하여 말씀을 분간하여 참된 목사를 영접하여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직분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선물(gabe)임과 동시에 이루어 가야 할 사명(aufgabe)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참된 목사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거나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 점에서 한국교인들의 이중적 태도는 시정되어야 한다. 좋은 목사를 청빙하는 데는 관심이 많지만, 좋은 목사를 키우는 데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천안에 있는 고려신학대학원은 교단의 목사들을 양성하는 못자리와 같은 곳이다. 정말로 좋은 목사를 5년이나 10년 뒤에 청빙하기를 원한다면 지금부터라도 신대원에 대한 교회 성도들의 관심과 기도와 투자가 훨씬 많이 이루어져야 한다.


1) 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제1장 6절. 본인이 직접 번역한 것임. 제1장은 성경에 관한 것인데,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원리가 이성이나 신자의 사리분별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주목하는 것은 장로교 정치 원리상 대단히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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