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사의 입장에서 -

   

필자가 어느 교회 임시당회장으로 있던 때의 이야기다. 그 교회가 담임목사 청빙을 위해 사방팔방으로 목사들을 알아보고 있을 때였다. 하루는 장로들이 모여, 목사들이 스스로를 천거하며 제출한 이력서들을 펴놓고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 분은 이력서도 쓸 줄 모르는 것 같애....” “하아, 이 분은 경력이 화려하구만. 경력이 화려한 사람치고 제대로 일 잘하는 사람 드물지. 안 그래?” “이 분은 내가 잘 아는 목사님을 통해 자기를 좀 잘 소개해 달라고 몇 번이나 부탁을 했다더군.”

필자는 그 자리에 앉아 있기가 참으로 민망하였다. 사실 그 교회는 담임목사를 청빙한다고 어떤 광고도 낸 일이 없었다. 그런데도 이력서가 20통 가까이 들어왔다. 목사들이 잡(job)을 구하는 사람들처럼 행동하여 스스로 청빙의 의미와 무게를 추락시키고 있었다.

1. 청빙의 의미

청빙은 하나님의 부르심(calling)에 근거한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교회가 대행하는 것이 청빙이다. 성령강림 이전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직접적으로 나타났다. 선지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파송하셨다. 또 선지자들에게 계시로 말씀하셔서 그가 세우실 자들에게 기름을 붓게 하시고 일을 맡기셨다.

그러나 성령강림 이후에는 달라졌다. 직접적인 부르심이나 제비뽑는 방법이 교회를 통하여 선택케 하는 방법으로 바뀌었다.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각 사람에게 성령께서 임재하셔서 언제나 함께 하심으로 모두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모인 것이 교회임으로,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찾고 받드는 권위 있는 공동체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개개인에게 성령으로 말씀하시고 인도하시지만, 역시 개인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일에 온전치 못할 가능성이 많다. 그러므로 교회가 모여 기도하고 함께 하나님의 뜻을 찾고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고, 또 이것이 더 완전하고 객관적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하여 사람을 부르시고 세우시는 일을 하신다. 개인적으로 소명을 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교회를 통하여 그 소명이 확인되고 확정된다.

이것은 목사청빙뿐 아니라 일반 직분자들을 선택하고 세울 때도 똑 같이 적용된다. 교회가 직분자를 선택할 때 투표를 하는 것은 단순히 민주주의를 따르는 행위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주권재민 사상에 따라 백성들이 그들의 대표자를 선택하고 세운다는 목적과 의미를 가지고 투표한다. 그러나 교회가 회의를 하거나 투표하는 것은 여론을 모으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찾고 확인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타락하고 세속화되어 이런 경건을 잃어버리고 인본주의에 깊이 물들어 있다. 사람을 세우는 교회도, 세움을 받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부르심과 세우심에 대한 신앙과 경외심이 없다. 그러기에 심지어 선거운동을 하는 기이한 일까지 벌어지고, 그것이 당연한 것인 것처럼 인식되고 있는 실정이다. 또 자신이 선택되지 못하면 사람들을 원망하고 물의를 일으키는 희한한 일까지 희한하지 않게 일어나고 있다.

청빙이 무엇인가? 청빙은 교회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인하고 수행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이런 과정에서 믿음과 경건을 잃어버리면 그것은 한갓 인간 놀음에 지나지 않게 된다. 청빙의 진정한 의미를 찾으려면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교회에서 일꾼을 세울 때 기본적으로 갖는 신앙고백은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세우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청빙은 그것을 받는 자나 하는 자 모두가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것을 수행하는 자로서의 믿음과 경건이 있어야 하며, 거기에 합당한 품위가 있어야 한다.

2. 목사들이 먼저 청빙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있다.

근년에 이르러 한국교회는 성장을 멈추었다. 그러나 교회가 한창 성장하던 7-80년대에 우후죽순처럼 세워진 신학교들은 계속 성장(?)하여 지금은 연간 일만 명에 가까운 졸업생들을 배출하고 있다. 이 중에서 목사로 임직하는 사람들이 6천명이 넘는다고 한다. 이러다 보니 목사들은 많고 교회는 적어 갈 곳 없는 목사들이 많다.

사실 신학교를 나왔더라도 교회의 부름이 없으면 장립을 시켜서는 안 된다. 비록 본인은 사명감을 가지고 신학수업을 했다하더라도 교회를 통하여 그 소명은 확인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개인적이고 내적인 부르심은 교회적인 외적 부르심을 통하여 확정된다는 원리이다. 그런데 오늘 날 교회 - 장로교의 경우 노회와 총회를 포함하여 - 는 이런 중요한 기능과 권위를 상실하거나 방기하고 있다.

물론 아직까지는 그래도 법적인 요건을 갖추려는 노력은 남아있다. 예를 들어 지교회의 부름이 없으면 노회가 어떤 특정 지역이나 기관이나 사역에 전도자로 파송할 수가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것이 크게 남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어디에서도 부름이 없고, 또 노회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 무조건 전도목사라는 명칭으로 장립을 시키는 것이다. 목사로 안수를 해 줄 터이니 스스로 책임지고 일하라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목사직의 경박함과 타락(?)이 일어나고 문제는 심각해진다.

구체적인 부름 없이 안수는 받았고 갈 곳이 없으니 억지 개척을 하거나, 어느 교회가 한 곳 비면 그 교회에 청빙을 받으려고 취업을 하듯이 치열하게 노력을 하게 된다. 중대형 교회들에는 덜 하지만 소형 교회들에는 담임목사가 비면 지원서[이력서]가 수십 통씩 들어온다고 한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믿음도 경건도 다 뒷전이 된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교회 역시 하나님의 부르심을 찾아 그 일을 수행하는 조심성과 경건을 잃어버리고 고용주와 같은 행세를 하게 되었다.

3. 교회가 자신들을 위하여 다시 청빙의 품위를 살려야 한다.

1) 목사청빙의 현실
근래에 일반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청빙과정을 보면 회사들이 직원을 채용하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 중소교회들은 대개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목사를 청빙한다.

우선 교단 신문 등에 청빙광고를 낸다. 거기 보면 요구하는 제출서류가 있는데, 이력서, 자기소개서(여기다 목회철학, 비전 등을 진술해 달라고 요구하기도 한다), 주민등록등본, 신학교졸업증명서, 목사장립확인서, 추천서 등이다.

이런 서류들이 들어오면 청빙위원들이 모여 서류를 검토하고, 일단 청빙대상자를 압축한다. 압축된 명단을 가지고 위원들이 각기 여러 루트를 통해 정보를 수집한다. 그리고 그분들을 설교자로 초청해서 설교를 들어보고, 면담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주로 이런 과정에서 일어난다. 어떤 교회들은 일차 선정된 목사들을 차례로 초청해서 설교를 듣고, 면접(?)을 한다. 청빙위원들은 심사위원처럼 되고, 목사는 지원자가 된다. 필자가 아는 교회들 중에는 같은 날 청빙 대상자들을 다 초청해서 차례로 면접을 한 교회도 있고, 심지어 어떤 교회는 설교 후 교인들이 다 모인 가운데 청문회(?)를 한 교회도 있다.

목사청빙이 이렇게 품위 없이 이루어지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우선 목사의 권위가 추락했기 때문이다. 목사들이 많고 지원자도 많으니 교회로서는 어떤 방법으로든 잘 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장로들은 "믿을 수 없는 목사들이 많은 것이 현실 아니냐"고 말한다. 이해가 된다.

그러나 목사는 교회의 영적 지도자이다. 성경은 목사를 양무리의 목자로 비유한다. 이런 지도자를 청빙하는 일은 그 직분과 권위에 합당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 교회가 유익하다. 교회가 직원을 채용하는 것 같은 방식으로 목사를 청빙하고서야 어떻게 그를 존중하며 그의 가르침에 순종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영적인 권위가 서지 않는 목사로부터 어떻게 신령한 유익을 얻을 수 있겠는가?

2) 품위 있는 목사청빙 방법은 없나?
특별한 방법이 따로 있는 건 아니겠지만 어떻게 하면 경건과 예절을 갖추어 합당한 사역자를 선택하여 청빙할 수 있을 것인지를 기도하며 노력해야 한다. 이에 그 절차와 유의할 점들을 생각해 보자.

청빙위원회가 구성되면 무엇보다 먼저 기도회를 가져야 한다. 교회는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께서 합당한 자를 보내주시도록 전심으로 기도해야 한다. 목사를 가리켜 "하나님의 사자"라고 한다. 이것이 지금은 목사를 구별하고 높이는 말로 사용되고 있지만 본래 의미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란 뜻이다. 우리는 교회의 직분자를 세우시고 파송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의를 하거나 투표를 할 때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찾는 기도와 깊은 경건이 있어야 한다.

둘째는 동역자들의 추천을 받는 것이 좋다. 청빙광고를 통해 들어오는 이력서에 의존하기보다 주변에 있는 목회자들로부터 추천을 받는 방법이 안전하다. 혹은 자원해서 보내온 이력서를 참고한다 할지라도 그분들을 잘 아는 분들은 역시 동역하는 목사들이므로 천거를 받을 수 있다. 어떤 교회는 스스로 이력서를 보내온 목사에 대해서는 아예 고려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을 보았는데, 목사청빙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아는 교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목사에 대한 천거를 받으려면 선배, 연배, 후배 목사들에게 다 물어봄이 좋겠고, 현 시무교회나 이전 시무교회의 교인들에게 알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부목사의 경우는 담임목사가 추천하고 당회(혹은 청빙위원회)가 결정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때론 담임목사를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부목사를 청빙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교회에 아무 유익이 없고 문제만 더 커질 수 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누구든 의도를 가지고 사역자를 이용하려는 것은 잘못이다.

셋째로 목사의 설교를 들어보는 것도 한 방법이나 가능하면 초청해서 들어보기보다는 시무하는 교회를 방문하거나 인터넷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알아보는 것이 좋고, 더 중요한 것은 한번의 설교보다 평소에 그의 말씀사역이 어떠하며 그 열매가 어떠한가를 알아보는 것이다. 설교 한번 들어보고 판단하기는 일은 매우 어렵다. 평소에 성실한 설교자인데도 어떤 경우는 반응이 좋지 않을 수도 있고, 평소에는 말씀 사역이 약한데도 한두 번은 매우 은혜로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넷째로 청빙대상이 압축되고 접촉순위가 대략 정해지면 청빙위원들이 해당 목사를 만나 대화를 갖는 것이 필요하다. 서로의 형편을 이해해야 청빙여부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을 진행함에 있어서 언제나 살피고 조심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주권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경건의 자세이다.

결언
교회의 영성이 추락하니 인본주의가 크게 득세하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의 신전의식(神前意識)은 점점 사라지고 경건은 말만 남은 상황이 되고 있다. 특히 교회가 사람을 세우고 부르는 일이 세상 정치세계와 비슷하게 진행되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어지니 교회의 모든 법과 제도도 껍데기만 남았다. 한국교회가 본류에서 너무나 크게 벗어나고 있다.

그리고 의식이 있다는 사람들, 소위 교회 갱신론자들 가운데도 교회를 하나님의 신이 주재하시는 신령한 공동체로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적고, 교회갱신을 단순히 민주화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만 많다. 주의 일에 말씀과 기도로 나아가기보다 세상적인 자를 가지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접근한다.

먼저 교회가 말씀과 기도로 거룩성을 회복해야 한다. 민주적인 방법이나 절차 자체보다 그것을 통해 당신의 뜻을 나타내시고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다스림에 대한 신앙과 경건을 회복해야 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곳에 “청빙”인들 어찌 “구직”이나 “채용”으로 전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런 것이 없으면 청빙은 머지않아 현대판 시모니가 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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