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례의 개혁으로 예배갱신을

   
  ▲ 성희찬 목사
    마산제일교회 담임
    코닷연구위원
    네덜란드 아펠도른
    신학교에서 수학
    고려신학대학원
   <교회정치> 강사
최근 개혁가 칼빈이 저술한 <기독교강요> (초판: 양낙흥 교수 번역>을 읽고 뜻밖에 <성례>를 다룬 내용이 전체 지면에 거의 1/3이나 되는 것을 알게 되었다. 4장과 5장에서 다루고 있는데, 특히 5장은 당시 교회에 만연한 거짓 성례를 비판한 내용이다. 성례가 신앙생활과 교회개혁에서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한 기회였다.

 개혁가들과 개혁주의 신조들이 성례를 바르게 시행하는 것을 참 교회의 표지로 본 것이나, 전통적으로 예배당 구조에서 강단 좌우에 세례반과 성찬쟁반을 함께 둔 것이나, 장로교정치원리 중 제3조가 교회의 직원을 다루면서 교회의 머리이신 주 예수께서 교회에 직원을 세우는 목적 중 하나로서 성례 거행을 말하고 있는 점에서 그 중요성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복음 전파와 권징 시행과 함께).

 성례의 개혁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로마천주교가 교회의 표지로서 기적이 일어나고 있는가, 교회가 얼마나 오래되었는가, 다수가 거기에 있는가 등을 주장한 것에 대하여 비롯되었다.  

 우리의 예배지침에서도 교회를 예배공동체로 정의하며, 예배의 중요한 요소로서 성례를 올바르게 집행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는 교회정치 혹은 교회질서와 무관하지 않다. 교회의 왕이신 주 예수의 다스림은 바로 이러한 예배의 질서를 통해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교회의 현실은 어떠한가?

 성례가 교회에서 바르게 시행되고 있는가?

 성례는 말씀과 더불어 그리스도께서 자기 교회에 주시는 은혜의 도구다. 성도의 귀에 들려주시는 복음에 대한 표와 인이다. 세례의 물과 성찬의 떡과 포도주를 통해서 이 복음을 시각과 촉각과 미각으로 보이고 확증하셨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례를 은혜의 도구로 알고 부지런히 활용하고 있는가? 천주교처럼 표만 붙잡거나 혹은 이 표를 경시하고 있지는 않는가?

 한국교회의 갱신과 개혁을 말할 때 적어도 성례의 개혁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확신하고 있다. 교회역사에서 교회의 부패는 항상 예배의 부패, 특히 성례의 부패를 동반하였기 때문이다.

 교회는 은혜로 살아가며 이러한 은혜는 복음의 전파와 함께 성례의 바른 시행을 통해서 우리에게 온다. 그러나 이러한 은혜는 기피하고 대신에 교회가 다른 음식을 찾는다면, 또 만약 거기에 독이 들어있다면 어찌 될까? 교회는 영적 허약과 영적 질병을 앓지 않을 수 없다.

 성례의 바른 시행과 관련해서 몇 가지를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유아세례는 제때에 베풀지 않으면서 대신 목사가 아이를 안고 유아축복기도를 하는 의식을 시행하는 것은 속히 시정되어야 한다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침례교에서 행하는 헌아식을 흉내낸 것으로 보인다). 교회에 처음 출석하는 유아에게 축복기도를 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언약의 자녀가 받는 가장 중요한 의식인 유아세례는 베풀지 않은 채 이를 행하는 것은 분명 은혜의 수단인 성례를 바르게 시행하는 것이라 할 수가 없다. 교회에 처음 출석하는 유아에게 세례와 축복기도를 병행하면 좋으리라 생각한다.

 둘째 세례를 남발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목사로서 가장 후회하고 뉘우친 것 중에 하나는 사도신경에 나온 대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분명치 못한 사람에게 세례를 준 일이다. 교회의 출입을 쉽게 만들면 마귀가 들어온다는 것을 명심하자. 당회는 이를 감독하기 위해서 세워진 치리회이다.

 셋째 성찬의 횟수를 최소한 1년에 4번 이상은 늘여야 한다. 주께서 자기 백성을 친히 초청하여 배설하는 신령한 식사인데, 우리가 왜 마다할 수 있으며 수를 줄일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다 성찬에 합당하지 못한 자이나, 성찬에 가는 것은 성도의 선택이 아니라 의무이다. 가라고 명하셨다. 그 이유는 성도의 허기진 영적 생명을 부양하기 위해서이다. 필자는 매월 성찬을 시행하는 교회에서 수년을 목회한 적이 있다. 나를 포함하여 다수의 교인들이 성찬을 통해서 영혼이 회복되고 신령한 위로를 체험하였다. 성찬 시행 주일 전후로 십자가의 복음을 설교할 수 있은 것 역시 큰 유익이었다.

 넷째 세례와 성찬에서 주 예수님은 성령을 통하여 교회에 임재하시며 그래서 성도와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따라서 성례는 성도에게 주신 구원을 즐거워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예배가 장엄하면서도 잔치와 같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배에서 성도는 죄 때문에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주께서 주시는 구원의 표징인 세례와 성찬을 통해서 즉 구원을 먹고 마시며 즐거워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거행하는 성례에서 구원을 노래하는 이 신령한 즐거움이 자리 잡고 있는가? 세례의 물이 뿌려지고 떡을 떼고 포도주가 부어질 때 감사와 감격이 있는가? 혹시 메마르고 빈약하지 않는가?

 성례의 올바른 시행을 통해서 예배가 갱신되어 교회가 다시 말씀과 생명과 은혜로 풍성하고 구원의 즐거움과 감격을 회복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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