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

태초부터 있었던 하나님의 말씀으로 태어난 교회는 복음을 세상 끝날까지 순수하게 보존하고 선포할 사명을 가지고 있다(마28:19-20, 막16:15).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생각에 현대교회는 거의 눈치 채지 못한 한 가지 심각한 결핍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다. 즉, 하나님 말씀의 설교를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이 거의 없는 것이다. 설교자들을 위한 설교의 기술 또는 설교학 책들은 학문의 세계에서 계속적으로 출판되어 쏟아져 나오지만, 설교를 바르게 듣기 위한 청중들을 위한 책은 거의 없는 것이다.[1] 설교자나 목회자의 입장에서 본 전하는 설교학이 아닌, 청중의 입장에서 본 듣는 설교학이 필요한 것이다. 청중이 설교를 바르게 들을 준비가 되어 있을 때, 설교자는 더욱 좋은 설교를 위한 도전과 격려를 받는 것이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설교자나 목사를 위한 것일 뿐 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설교를 바르게 듣는다는 주제는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필자는 이 주제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하여 다루고자 한다. 


4 가지 중요 포인트

하나님의 말씀의 설교는 ‘하늘의 만나’ 또는 ‘영혼의 양식’ 등으로 바르게 일컬어진다. 우리는 설교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연주하는 바이올린의 사현줄처럼 네 가지 중요 포인트를 기억해야 한다. (1) 설교란 무엇인가? (2) 설교자에 대한 청중의 자세 (3) 설교를 바르게 듣기 (4) 설교의 실천.


I. 설교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의 설교에 대한 정의는 불링거(H. Bullinger)가 작성한 제 2 스위스 신앙고백서(1566)에 선명하게 그리고 바르게 표현되어 있다: “하나님 말씀의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기쁘신 뜻을 따라 친히 말씀의 수종자를 불러 그의 말씀을 선포하기에 적합하도록 만드시는 것이다(고전1:21, 롬1013-14, 17). 하나님의 말씀은 죄인들을 위한 것이므로 하나님 말씀의 설교는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의 방편이다. 동시에 설교는 하나의 역동적 사건으로서 성령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우리의 마음을 여시고 그 가운데 역사하신다. 설교자가 청중에게 복음을 선포할 때, 성령은 그의 마음과 영혼에 말씀하신다. 설교에서 가장 우선적인 것은 성령 하나님으로서 친히 하나님께서 설교자를 사용하시어 말씀하시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인간이라는 섬기는 자를 통해 그의 신성과 능력을 드러내시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인간적 의사소통의 수평적 차원은 신적 의사소통의 수직적 차원과 만나게 된다. 그 만남에서 설교자와 청중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로 말미암아 말할 수 없는 기대와 놀람, 갱신으로 충만하게 채워지는 것이다. 


II. 설교자에 대한 청중의 자세

설교자와 청중의 관계는, 우리 각자의 개인적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듯이, 설교청취에 있어서 매우 민감한 요소이다. 만약 우리가 설교자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 또는 좋지 못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의 마음과 귀는 설교자의 메시지에 대하여 이미 닫혀 지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가 설교자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올바른 자세를 가지는 것은 중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설교자를 통해 그의 말씀을 계시하신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만일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거나, 천사를 통해 말씀하신다면 그제야 그 메시지를 믿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연약하고 죄성을 가진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심으로써 그분의 사랑과 지혜를 증거하신다. 첫째로, 설교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깃들여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면, 흙으로 빚어진 불완전하고 연약한 인간은 하나님의 위엄을 감당할 수가 없다. 따라서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고 마침내 죽고 말 것이다.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요청하기를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기보다 모세를 통해 말씀하시도록 요청하였는데, 이는 그들이 죽임을 면하기 위함이었다(출20:18-19). 그러므로 설교자를 통한 설교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은혜의 방편으로서, 하나님께서 친히 극진하신 사랑을 따라 자신을 우리에게 낮추어 적응하기 위한 것이다. 즉, 하나님은 인생 삶의 걱정과 고달픔뿐 만 아니라, 기쁨과 즐거움을 알지 못하는 천사를 사용하시기보다, 희로애락을 몸으로 체험하여 아는 사람을 사용하신다는 점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이 잘 드러난다.

둘째로, 설교에는 하나님의 지혜가 담겨있다. 하나님께서 천사가 아닌 설교자의 입을 통해 말씀을 선포하시는 것은 우리를 위한 것이다. 만일 천사가 오늘 우리에게 복음을 증거한다면, 우리는 그 천사의 능력과 영광스러움 때문에 그 전하는 멧세지를 믿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복음이 동일한 성정을 가진 연약한 사람을 통해 선포되기를 기뻐하셨다. 이는 하나님의 지혜로서 우리의 믿음이 선포하는 자에게 의존되는지 아니면, 멧세지 자체에 두는지를 시험하시기 위한 것이다. 이는 질그릇에 담긴 보배와 같은 것이다(고후 4:7).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이 전하는 자의 탁월함이나 인간의 연약함에 세워지기 보다는 그의 약속의 말씀에 세워지기를 원하셨다.

요컨대, 우리는 사도 바울이 가르친 것처럼 설교자를 “그리스도의 종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요(고전 4:1), “화해의 말씀”의 대사로 여겨야 할 것이다(고후 5:18-20).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우리는 설교자를 이야기꾼으로 멸시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은 하나님의 택하신 방편인 설교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이다(롬1:16, 10:13-17). 우리는 또한 설교자를 마치 하나님처럼 우상시해서도 안 된다. 루스드라 사람들은 바울과 바나바가 걷지 못하는 사람을 고친 것을 보자 바나바를 제우스로 바울을 허메로 숭배하려는 잘못을 범하였다(행14:8-18). 그러므로 우리는 설교자를 이야기꾼으로 무시하거나 신으로 우상시해서는 안 된다. 설교자는 단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이기 때문이다. 


III. 설교를 바르게 듣기

성경에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가에 대한 지침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주의하라”(눅 8:18). “귀 있는 자마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2-3장). 그러므로 우리는 설교를 바르게 듣기 위하여 마음의 4 현줄을 맞추어야 한다: 경외감을 가지고 듣기, 기도함으로 듣기, 사모함으로 듣기, 그리고 분별하여 듣기.


1. 경외함으로 듣기

경외심으로 설교듣기란 무엇인가? 성경에 그 선명한 예가 나타나 있다. 데살로니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설교된 말씀을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 (살전 2:13). 즉, 경외함과 겸손함, 그리고 믿음으로 들었다는 의미인데, 이는 그들이 바울의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설교를 들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의 존전(Coram Deo)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는 우리는 종종 잊고 만다. 필자의 생각에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함이 부족하거나 또는 때때로 거의 없는 것이 현대교회가 직면한 큰 함정이라 여겨진다. 사람들은 설교를 하나의 일상적인 연설로 여긴다. 이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예배 시간에 전능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두려움과 떨림이 없이 서로 속닥거리며 잡담하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서 하나님 사랑의 증거를 찾기란 더더욱 불가능하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설교시간은 우리 영혼의 천국과 지옥, 영생과 영벌이 가름되는 심각한 시간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과 심판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구원의 말씀을 사소한 인간의 이야기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 롯의 사위들은 롯의 경고를 농담으로 여겼다가 소돔 성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가 없었다!(창19:14).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것을 항상 요구하신다. (히11:6).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때 구원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믿지 않는 것은 아무런 유익이 없다(히4:2). 


2. 기도함으로 듣기

기도함으로 설교를 듣는 일 역시 우리 시대에 절실하게 필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성령 하나님의 비추심을 위한 기도 없이 우리의 자연적 능력으로 신령한 것들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고전 2:10-14). 청중은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그리고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설교를 전하도록 기도해야 할 뿐더러, 본인 자신과 이웃 자녀들이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 받기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다윗이 기도했던 것처럼 기도해야 한다. “내 눈을 열어 주의 기이한 법을 보게 하소서” (시119:18).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는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서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요16:13). 따라서 설교는 최우선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성경을 열어 설명하실 때에 그들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았다 (눅24:32). 오늘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그의 말씀을 열어 우리 마음이 불붙게 하신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의 설교와 성령을 연관시켜 두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밝히고 있다. “성령을 소멸치 말며 예언을 멸시치 말고”(살전 5:19-20). 이런 점에서 사도행전 16장에는 주목할 만한 성경구절이 나타난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가 바울의 설교를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행16:14).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여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주의 깊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심이다. 누가 복된 자인가? 오로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1:2).

만일 우리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라면, 하나님께서 설교의 방편을 통해 우리 마음에 말씀하실 때 우리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필수사항이다. 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돌 같은 마음이 변하여 부드러운 심성이 되고, 불평하는 마음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되는 것이다. 불평만 늘어놓는 사람에게서 조그마한 감사를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고 개인적으로 적용하는 일이 또한 필요하다. 기도 없이 설교를 듣는 청중은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하여 잘못 적용할 수 있다. 만일 설교에서 죄악 된 삶의 행실이 경책을 받게 될 때, 어떤 이들은 설교자가 자기들을 두고 하는 말이라 생각하고 결국은 스스로 시험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기도로 잘 준비된 성도는 동일한 경책의 말씀을 들을 때에, 스스로 자기의 마음을 살펴 자기의 잘못을 하나님께 고백하며 용서를 구하게 된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부드러운 마음을 받아 설교에서 항상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된다.

하나님 말씀의 설교를 들을 때에, 우리는 나름대로 각자의 근심과 문제들을 가지고 하나님의 면전에 오게 된다. 이 때 하나님께서 하나의 성경말씀을 사용하시어 각기 다른 상황에 있는 자들을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 속한 설교의 신비요 비밀이여 기적이다.


3. 사모함으로 듣기

우리가 설교를 들을 때에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사모함으로 들어야 한다. 시편기자는 하나님의 율법을 향한 그의 사모함을 진실되게 고백한다. “주의 규례를 항상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시119:20). 그 시인은 더 나아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계명을 사모함으로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시119:131). 마음이 상한다는 것과 헐떡인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사모하는지 잘 말해주는 표현이다. 우리도 시인처럼 그러한가? 아니면 그와는 정반대로 이 땅의 물질적인 것들을 사모하여 헐떡임으로 마음이 상하는가? 다른 시편에서 한 시인은 동일한 간절함을 표현한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곡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시42:1-3).

신약에서 베드로 역시 구약의 선지자들이 “영혼의 구원”을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 상고하였다고 기록한다(벧전1:9-11). 심지어 천사들조차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마리아가 주 예수로부터 칭찬을 들은 것은, 그녀가 주님의 발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이다(눅10:42).

설교를 들음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이다. 설교청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지식의 축적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설교는 최우선적으로 마음에 연관된 내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4. 분별함으로 듣기

사모함으로 듣는다는 것은 우리의 지적인 사고 작용을 제한하는 것은 아니다. 설교청취란 긍정적 의미에서 분별력을 가지고 듣는 것이다. 실은 듣는다는 행위는 결코 수동적 일이 아니라, 능동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거저 듣는 것이 아니라, 온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해 집중적으로 듣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분별력 있는 청취를 통해 설교자가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고 증거하는지를 살펴야 한다. 베뢰아의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바울의 설교)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고 한다(행17:11). 양들은 그 주인의 목소리를 알고 따른다(요10:4). 성도가 주님의 목소리를 구별하는 것은 오직 기록된 말씀, 설경을 통해 가능하다. 그러므로 그러한 구별을 하기 위해 우리는 성경을 개인적만 아니라, 이웃과 함께 더불어 읽어야 한다. 더 나아가 성경을 찬찬히 세밀하게 읽는 동시에 성경 전체를 읽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읽기에 있어서 나무와 숲을 동시에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 우리 자신의 경험에서 알 수 있듯이 매일 성경을 읽는 성도는 주일의 설교에 최대한의 은혜를 누릴 수 있지만, 성경을 규칙적으로 읽지 않는 사람은 설교를 통해 은혜 받기가 힘들다.

분별력 있는 설교청취를 위해 설교를 들을 때에 요점 적기를 추천할 만하다. 16, 17세기의 영국과 북아메리카의 청교도들은 설교 시간에 ‘설교요점 적기’로 유명하다. 이것은 ‘가정예배’, 즉, 각 가정에서 행하는 예배를 돕는데 매우 유용하였다. 청교도들에게 있어서 잘 알려진 관습은 가장(家長)이 주일에 들은 설교를 가족들과 하인들에게 다시금 전달하고 설명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예배시간에 기록한 설교요점은 다시금 설교를 회상하는데 도움을 주는 방편이었다. 


IV. 설교의 실천

마지막으로 설교는 항상 실천에 옮겨져야 한다. 설교는 듣는 자가 실천함으로써 비로소 설교의 본래적 의미의 마침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설교가 성도들의 삶에서 실천되기까지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은 말씀을 들은 대로 순종해야 한다.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1:22). 들음은 중립적이거나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 선택과 순종을 항상 드리고 반드시 요구한다. 설교의 유익은 설교가 실천될 때에야 비로소 열매를 맺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히 듣고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약1:21-24). 마치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약2:26). 어리석은 자의 특징은 그 집을 모래 위에 짓는 것인데, 이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것이다(마7:26). 만일 누군가가 예수를 구주로 모신다면, 그는 반드시 그의 말씀을 따라 행동하여야 한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눅6:46).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마다 예수의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다(막3:35). 예수를 밴 태와 먹인 젖이 복이 있다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눅11:27-28).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1:3).

요컨대, 설교는 단지 교회당 안에서 이루어지는 예배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정, 학교, 직장, 사회의 실제 현장에서 실천되어야 한다. 매 주마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산 예배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면전에서 사는 삶이다 (Coram Deo)! 


연변 기독교인의 모범

필자는 한 중국 선교사가 찍은 잊지 못할 사진을 기억하고 있다. 그 선교사는 예배의 한 장면을 사진에 담았는데, 교회당은 거의 황무하고 눈에 띄는 장식도 없었다. 거기에는 심지어 의자조차 없었다. 약 30여명의 남녀 기독교인들이 오래되고 누추한 옷을 입고 바닥에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사진은 그들이 어떻게 설교를 듣는가를 선명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나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청중들이 모두 한 결 같이 설교단을 향해 몸을 앞으로 비스듬히 구부린 채 열중하여 듣는 것이었다. 필자는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설교를 그렇게 듣기를 기도해 마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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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교청취에 대한 실제적 지침들을 제시하는 Jay Adams의 A Consumer’s Guide to Preaching (Wheaton 1991), 설교는 이렇게 들어야 합니다. 김성웅 역 (서울 1993) 을 참조하라. 신민규의 ‘설교 어떻게 들어야 하나’ 교회와 신앙 1993, 11월호. 74-77.

필자 박태현 목사는 신대원 졸업하고 아뻘도른에서 설교학으로 학위를 마치고, 현재는 화란한인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연구위원장 이세령 목사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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