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호 목사와 손재익 강도사의 글에 대한 반론

오상호 목사는 유럽 고신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고, 현재 마인츠 중앙교회(박의석 목사)에서 부목사로 봉사하고 있다. 하이델베르그 대학에서 삼위일체로 학위 논문을 쓰다가 잠시 중단하고 있다. 

 

최근 코람데오닷컴을 통해 흥미로운 가지 글을 읽었다. 첫째는 이성호 목사의  " 선거운동을 하십니까?"라는 글이고 둘째는 손재익 강도사의 " 선거를 하는가?"라는 글이다. 글들과 관련하여 필자 "총회의 임원들의 선출과 관련하여 선거운동을 있다거나 혹은 없다" 것과 혹은 "오늘날 개체교회에서 직분자들을 선택하는데 투표를 있다거나 없다"라는 것에 대한 논의와 주장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글에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첫째 "총회의 임원직들이 교회의 직분들로 이해될 없다" 것과 둘째 "개체교회에서 직분자들을 선택하는 방법으로서의 투표는 사도행전 6장과 14장에 근거할 없다" 것이다. 번째 주장은 이성호 목사의 글에 대한 것이고, 번째 주장은 손재익 강도사의 글에 대한 것이다.

 

우선 이성호 목사의 선거운동을 하십니까?“라는 글은 배경이 총회에서의 선거이다총회장, 부총회장을 비롯한 선거를 통해 선출되는 총회의 임원들 혹은 임원직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주장의 근거를 교회의 직분론에 두고 있다. 글의 논지는 "교회의 모든 직분은 하나님의 은사"이기 때문에 총회의 임원직선출에서 선거운동이 있어서는 않된다 것이다. 이런 논지에 따르면 총회의 임원직은 교회의 직분에 속한다. 그러나 총회장직을 비롯한 "총회의 임원직들" 하나님이 교회에 세우신 "직분"인가?

 

이성호 목사가 "교회의 모든 직분은 하나님의 은사"이다 라고 지적하는 것은 손재익 강도사가 " 선거를 하는가?"라는 글에서 언급하듯 에베소서 4 7-12절에 대한 올바른 이해라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에베소서 4 7-12절에서  언급되는 직분은 "사도, 선지자, 복음전하는 , 목사, 교사"뿐이라는 점이다. 구절에 대한 이해와 관련하여 질문은 우리는 구절에서 언급된 직분들이 수많은 직분들 중의 일부만을 예일 뿐인가 라는 점이다. 만약 그렇게 해석한다면, 어떤 이들이 주장하듯, 오늘날 교회는 수많은 직분들을 이야기할 있고 만들 있다는 것인가이성호 목사의 글의 핵심인 "선거운동의 어리석음"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총회의 임원직이 교회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인 직분들에 속한다" 라는 생각에는 동의할 없다.

 

다음으로 손재익 강도사의 " 선거를 하는가?"라는 글은 교회의 직분자선택에 있어 구약의 제비뽑기라는 방법은 구속사적 흐름을 따라 교회의 시대에서는 투표와 선거라는 방법으로 대체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근거를 사도행전 6 3절과 5절에서의 집사선택의 방법과 사도행전 14 23절의 장로선택의 방법에 두고 있다.

 

사도행전 6장에서 집사를 세우는 것을 살펴보자.

우선 손재익 강도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대표적으로 6장에서는 예루살렘 교회가 직분자를 선출하는데, 그동안에 주로 사용되되던 제비뽑기가 사용되지 않는 것을 있습니다. 오히려 택하라, 택하여 라는 말이 6 3절과 5절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택하다'라는 것은 일종의 투표형식이라는 것이었음을 있습니다"라고 주장하면서 근거를 사도행전 14 23절에서 장로들을 택하는 것에서 찾는다. 사도행전 14 23절은 조금 있다가 살펴보고, 우선 사도행전 6장을 살펴보자.

 

사도행전 6장에서 집사들을 세우는 것은 다음과 같다: 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επισκεψασθε) ….5 무리가 말을 기뻐하여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εξελεξαντο) 6 사도들 앞에 세우니(εστησαν)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προσευξαμενοι επεθηκαν αυτοις τας χειρας)

여기에서 3절의 "택하라“ (επισκεψασθε) 단어는 에피(- 대하여) 스켑포(주시하다) 합쳐져서"- 대하여 주시하다, 관찰하다, 조사하다, 찾다" 의미이다. 사도들은 교회에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듣는 사람 일곱을 조사하고 찾아라" 말한다. 이것은 5절의 "택하여"(εξελεξαντο) 함께 " 무리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듣는 사람 일곱을 찾아 택하였다" 의미를 이룬다. 문제는 여기에서 일곱을 선택하는 방법이 "선거"의 방법이었는지는 없다는 점이다. 3절의 택하라는 의미가 관찰하고 조사하고 찾다 라는 것임을 , 단순히 무리가 투표하여 선택한 것이라기 보다는 무리 중에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일곱을 찾았다는 의미가 좋을 같다. 문제는 무리가 찾아 선택한 것으로 교회의 직분자가 임명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무리가 찾아 선택한 사람들은 사도들 앞에 세워진다. 전체 문맥은 " 무리가 믿음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조사하여 선택하고 그들을 사도들 앞에 세웠다" 것이다. 이것은 사도들이 기도하고 안수하였다는 설명을 통하여 집사를 세우는 것의 최종적인 판단이 사도들에게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내가 여기에서 지적하고자 하는 핵심은 구절들에서 소위 "투표에 의한 직분자의 선출"이라는 의미를 찾아볼 없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사도행전 14 23절에 대해  살펴보자.

손재익 강도사는 "택하다"라는 번역에 해당하는 헬라어 "케이로도네오"(χειροτονεω) 대한 어원분석에서 접두어 "케이르" 손이라는 의미이고 어원적으로 손을 들어 표시하게 해서 선택하다 라는 의미를 가진다 라고 주장하면서 이것을 "거수투표를 통해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해석은 잘못되었다. "케이르" 손이라는 어원적 의미를 가지는 것은 맞지만, "토네오" "뻗다"라는 의미이다. 이렇게 보면 "케이로도네오"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손을 뻗었다" 의미이다(BAGD, 881; TDNT IX.437.) 단어만으로는 장로들을 선택한 방법이 소위 손을 들어 표시하는 투표였는지를 우리는 확정할 없다. 이것을 확정하는 것은 "손을 뻗은 주체" 누구인가 이다. 사도행전 14 23절에서 언급한 "택하다"라는 말의 주체는 " 개체 교회의 전체 성도들" 아니라, " 사도들"(바울과 바나바)이다. 14 19절과 20 상반절에서의 행동의 주체는 "바울" 사람이었기에 동사가 단수로 사용된다. 그러나 20 하반절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이하에서부터는 행동의 주체가 "바울과 바나바" 사람이었기 때문에 동사가 복수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손을 뻗었다"라는 동사의 주체는 사도들이며, 구절은 " 사도들이 손을 뻗었다"라고 해석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손을 뻗은 것" 단순히 "선택" 의미하는지, 아니면 "안수" 의미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구절에서는 의미를 확정할 없지만, 적어도 바울서신의 다른 구절들, 예를 들어 딤전 4:14; 5:22 등을 , "손을 뻗어 안수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해석은 디모서 1 5절에 의해 지지된다: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 이유는 부족한 일을 바로잡고 나의 명한대로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여기에서 장로들을 "세운다"라는 동사의 주어는 단수로서 디도이다. 바울은 디도로 하여금 성에서 장로들을 세우도록 명령하였다

 

이상에서 논의한 사도행전의 부분에 대한 해석과 함께, 더욱 중요하게 지적하고 싶은 것은 만약 구절이 손재익 강도사의 해석대로 "투표라는 방식으로서의 선택과 선출" 의미한다고 하더라도, 부분을 교회의 시대에서의 직분자 선택의 방법으로 일반화시키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만약 이것을 일반화시킨다면, 우리는 다른 직분들(예를 들어 목사직, 교사직 ) 관련해서도 투표라는 방식을 사용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손재익 강도사가 지적하듯 에베소서 4장에 나오는 직분들에도 우리는 투표라는 선거방식을 적용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손재익 강도사의 주장에 따르면, 사도행전 1 이후의 시대는 모두 "교회의 시대" 속하기 때문에 에베소 교회를 비롯한 바울 서신에 나오는 신약 교회들은 모두 투표의 방식으로 직분자들을 선택했다는 결론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손재익 강도사가 언급한 벨직신앙고백서 31조에 대해 지적하고자 한다. 손재익강도사는 "16세기에 작성된 벨기에 신앙고백서 31조에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자들과 장로들과 집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규정된 대로 기도와 선한 질서로 교회의 합법적인 선거를 통하여 선출되어야 함을 믿습니다 라는 언급이 기록되어 있습니다"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원문은 다음과 같다: Wir glauben, dass die Diener, Ältesten und Diakonen zu diesen ihren Ämtern berufen und befördert werden müssen durch gesetzmäßige Berufung der Kirche bei ernster Anrufung Gottes und durch Abstimmung der Kirche und dass sie nachher in ihren Ämtern durch Handauflegen bestätigt werden, in der Art und Weise, welche uns im Worte Gottes vorgeschrieben wird(www.calvinianum.de).

 

직역을 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방법으로 목사들과 장로들과 집사들이 하나님의 진지한 부름과 교회의 동의로 교회의 정당한 부름을 통하여 이런 직분들에 초빙되고 임명되어야만 하고 그후 안수를 통하여 그들의 직분들에 확인되어야 한다 라고 믿는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durch Abstimmung der Kirche"이다. 여기에서 사용된 Abstimmung 오늘날 흔히 "투표"라는 말로 번역되지만, 원래는 "동의" 의미한다. 어떤 결정에 대한 동의를 표시할 사용된 말이다. 따라서 직분자들의 초빙과 임명에 대해 하나님의 진지한 부르심에 대하여 교회가 동의하느냐 하지 않느냐를 표현하는 것이다. 이것은 손재익 강도사가 표현한 "교회의 합법적인 선거를 통하여 선출되어야 함을 믿습니다"라는 번역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표현이라고 있다.

 

이 글의 처음에 언급하였듯, 이 글은 "총회의 임원들의 선출과 관련하여 선거운동을 할 수 있다거나 혹은 할 수 없다"는 것과 혹은 "오늘날 개체교회에서 직분자들을 선택하는데 투표를 할 수 있다거나 할 수 없다"라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니다. 나는 이성호 목사의 "선거운동의 문제점들에 대한 지적"에 동의한다. 그러나 나의 동의는 총회의 임원직들이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직분들"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소위 "선거운동"이라는 것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경쟁심을 비롯한 우리의 죄의 습관들로 인해 비롯되는 잘못된 모습들 때문에 적어도 교회들의 모임인 총회를 섬기는 임원직들의 선출에 있어 "선거운동"은 없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또한 나는 오늘날 개체교회 내에서 이루어지는 "직분자들에 대한 투표"를 거부하거나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이유는 "직분자들에 대한 투표"가 성경적 기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사도들의 시대 이후 오늘날의 교회에서 "직분자들을 선택하는 것과 관련하여 가장 현실적이며 또한 하나님의 뜻을 잘 반영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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