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효(朴泳孝, 1861-1939). 그가 나의 관심을 끈 것은 최근의 일이다. 그는 김옥균, 서재필 등과 함께 개화파인사로서 갑신정변의 주역의 한 사람이었지만 그가 친일적 인물이었다는 점 때문에 그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미약했다. 우연찮게도 내가 그에 대한 일본측 문서를 열람하는 중에 그가 22년간의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할 때인 1907년 6월 부산의 미국북장로교 선교사였던 어빈(Ch. Irvin, 어을빈)의 집에 일주일간 체류했다는 기록을 발견하게 되었다(大阪每日新聞, 1907. 6. 14일자).

그가 어떻게 부산의 선교사 어빈 집에 체류하게 되었을까?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라 일주일간이나 묵을 수 있었을까? 이 점을 확인하는 중에 그의 기독교에로의 관심과 선교사와의 교류의 실마리를 풀게 되었다.

우리가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박영효는 한말의 정치가이자 개화사상가였다. 그는 1882년에는 제3차 수신사로 일본 방문했고, 이듬해 한성순보를 창간(1883년 10월)했던 인물이다. 특히 그는 태극팔괘의 도안을 기초로 태극기를 처음으로 제작했던 인물이다. 1884년에는 갑신정변을 주도했던 인물인데 후일 친일적인 성향을 보였다고 하여 최근의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와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3090명의 친일인사 명단 중에 포함되었다는 정도이다.

사실 그는 양반신분의 세도가 출신이다. 그는 판서(判書) 원양(元陽)의 아들로서 철종(哲宗)의 사위였다. 박영효는 북경과 천진을 오가는 오경석(吳慶錫)을 통해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고, 그의 일가인 박규수(朴珪壽)를 통해 개화사상을 접하게 된다. 그의 형인 영교(泳敎),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도 이런 영향권 안에서 개화사상가로 발돋움 하게 된다. 박영효는 김옥균보다 꼭 십년 연하였으나 문벌이나 지위가 높아 항상 어른 대접을 받았다.

박영효는 당시 정치 현실에서 일본과 교류하면서 개화당의 중심인물로 부상했다. 당시 민영익 등 수구파과 서구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으면서도 청과 지속적인 관계를 갖기를 원해 친청(親淸) 입장을 견지한 반면, 미국이나 근대 일본을 경험했던 개화파 인사들은 일본 세력을 등에 업고 급진적인 개화정책을 추진하고자 했다. 외국인이었던 그리피스의 눈에도 양측의 대립은 심상치 않았다. 그는 “1884년 10월 말에 이르러 서울의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쓰고 있다. 일본의 지원을 받는 개화파와 친청 정책을 고수하는 보수파의 갈등은 갑신정변의 원인이 된다.

물리적으로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한 거사를 감행했던 박영효를 비롯하여 김옥균(金玉均), 서광범(徐光範), 서재필(徐載弼) 등 개화파 지도자들은 1884년 12월 4일의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 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 일본 공사관이 민중의 습격을 받게 되자 개화파 지도자들도 “일본인으로 가장하고” 일본으로 망명을 떠났다. 일본에 도착한 이들 일행은 곧바로 요코하마 성서공회의 헨리 루미스를 찾아 갔고, 루미스는 그들에게 숙소를 제공해 주었다(C. D. Loomis, Henry Loomis, Friends of the East (NY: Fleming H. Revell Co., 1923), 84.).

이것이 박영효가 기독교선교사와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계기가 된다. 개화파 인사들이 선교사인 루미스를 찾아간 것은 신변 안전에 도움이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었을 것이고, 일본 체류보다는 미국행이 자신들의 장래에 유익하다고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루미스와 지내는 동안 이들은 한국에서 보수파가 정권을 잡았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이제 귀국은 요원한 현실로 인식했다. 쿠데타를 주도했다는 이유에서 박영효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처형되었고, 그의 아내는 친구 집 문 앞에 자신의 갓난 여아(女兒)를 놓아두고 한강에 투신자살했다.

위험을 감지한 박영효는 서광범과 서재필과 더불어 미국행을 결정했다. 이 때 루미스는 미국에 안전하게 입국할 수 있도록 소개장을 써 주고, 또 미국 동부에 정착할 수 있도록 주선했다. 미국에서 서재필은 유수한 교육기관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잠재적인 인정받고 의학을 공부하게 되어 한국인 최초의 의사가 되었다. 그러나 박영효는 미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1886년 5월 31일 일본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는 요코하마에 2년 이상 머물렀다. 이때에도 루미스는 변함없이 박영효를 지원했고, 자주 자기 집에 그를 초대했으며, 필요할 경우 그에게 서적도 빌려 주었다.

박영효는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 미국 선교사들과의 교제하면서 한국도 일본처럼 서구문화와 기독교를 과감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확신하게 된다. 박영효는 망명생활 중에 고종에게 서양 문화와 기독교의 수용을 요구하는 상소문을 올리기도 한다. 즉 박영효는 상소문에는 “오늘날 천주교와 야소교(耶蘇敎)가 왕성한 구미 각국은 그 나라가 가장 강하고 왕성한데 우리의 조선 유교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둘 다 쇠퇴하여 이 때문에 국세가 침약(沈弱)하였으므로 한심하고 탄식할 따름입니다”라고 했다. 그는 일본에서 선교사를 만날 때마다 한국에 와서 서구와 같은 고등교육을 실시해 달라는 것과 한국에 복음을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우리의 재래 종교는 지금 기운이 다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기독교에로의 개종의 길은 환히 열려 있습니다. 기독교 교사들과 사업가들은 일단은 우리나라 어느 구석에도 필요합니다. 우리가 합법적인 개혁을 하기에 앞서 먼저 우리 백성을 교육해야 하며 기독교화해야 합니다(F. A. McKenzie, The Tragedy of Korea(New York:E. P. dutton & Co., n.d.), 54-55.).

아펜젤러가 1885년 한국에 입국하기 전 일본에 잠시 체류하는 동안 박영효는 그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주고 한국선교를 준비하도록 배려해 준 일도 있었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박영효는 기독교를 접하게 되고 선교사들과 교류하게 된다. 그가 1907년 부산을 방문하고 어빈 집에 유하게 된 것도 바로 이런 연유였던 것이다.

사실 개화파 인사의 기독교와의 접촉은 박영효의 경우만은 아니었다. 불교신자였던 김옥균도 서구문명의 내용이 기독교를 통한 개화를 갈망했고, 후일 일본의 청산학원 설립자인 맥클레이 선교사를 만나 한국선교를 호소해 후에 한국이 기독교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그는 야스카와 목사와도 가까이 지냈으며, 그에게 편지를 보내 “기독교 교리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한 적도 있었다. 비록 갑신정변이 실패했지만 박영효 등 개화파 인사들은 한국의 선교의 장을 여는 데에 적지 않는 기여를 하게 된다. 박영효와 루미스와의 친분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후에 박영효가 한국에 돌아가 다시 내각에 등용된 후 그가 헨리 루미스에게 다음과 같은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존경하는 헨리 루미스목사님, 나는 일본에서 13년을 보냈습니다. 내가 이 여러 해 동안 안전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당신의 친절한 보호덕택이었으며, 나는 어떤 말로도 나의 감사를 표현 수 없습니다. 최근 나는 나의 조국의 부름을 받고 돌아왔는데, 황제 폐하께서 나의 반역을 은혜롭게도 용서해 주셨고, 나를 이전 직책에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나는 천수(天壽)를 누려 왔으며, 이제 나는 눈물로 이에 대해 나의 주님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C. D. Loomis, Henry Loomis, Friends of the East (NY: Fleming H. Revell Co., 1923), 85-6.). 개화 사상가이자 혁명가였던 박영효는 이제 그리스도인으로 변모되어 있었다.

 

저작권자 © 코람데오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