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득일 교수의 주해에 대한 설교문의 예

 

이 글은 이번 기획 주제인 주해와 설교에 대한 신득일 교수의 글에 대한 응답으로서 작성하여 설교한 것입니다. 12월 19주일에 설교하려고 작성을 해 보았습니다. 법궤 운반 사건을 근거로 계집 종 앞에서와 여호와 앞에서라는 미갈과 다윗의 관점의 차이점을 부각시킨 신 교수님의 글을 바탕으로 설교문을 작성해 보았습니다. 더불어 황창기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리스도 완결적인 방식을 적용하는 다른 한 예를 제시해봅니다. 함께 도움이 되고 논의하였으면 합니다. 필자 주

 

 

삼하6:12-23, 롬1:1-4

복음은 낮은 곳에 임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가지고 복음은 낮은 곳에 임합니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1. 다윗은 정통성이 필요한 왕

다윗은 사울을 이어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사울의 아들도 아니고, 그가 정한 새로운 수도가 벧엘이나 길갈과 같은 하나님과 만남이 있었던 장소도 아니었습니다. 즉 다윗에게는 정통성의 문제가 제기됩니다.


그래서 다윗은 조심하면서 권력에 한발씩 다가왔습니다. 사울을 피해서 망명 생활을 하던 다윗은 남쪽의 유다 지파가 불러서 유다 지파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사울 이후에 권력을 잡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과 그를 지원하는 군대장관 아브넬과 군사적인 대결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결국 북쪽 지파들도 섭렵하게 되고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전 왕이었던 사울과 정적 관계에 놓였다가 정권을 잡은 왕입니다. 이런 과정은 정통성의 문제가 있게 됩니다. 그래서 왕이 된 다윗은 자신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서 몇 가지 조치를 취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사울이 자기에게 준 딸 미갈을 다시 아내로 맞아드립니다.

사울이 딸 미갈을 강력한 군사 지도자였던 다윗에게 아내로 주었다가 다윗이 망명을 가자 미갈을 다른 사람에게 다시 시집을 보내었습니다. 발디엘이란 사람입니다. 이제 미갈을 다시 아내로 맞아들이게 됩니다. 이것은 중요한 조치입니다.


정적이지만 사울은 이전의 국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딸을 아내로 데리고 있는 것이 정치적인 안정과 정통성 설명에 중요한 구실을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정치적인 노련함으로 정국을 다스려 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미갈은 다윗에게 소중한 아내이고 사람입니다.


여기에다가 다윗은 사울의 성읍 기브아를 포기하고 남북 지파들의 중심이 되는 예루살렘을 정복하여서 수도로 정하게 됩니다. 천혜의 요새 지역이고 남북의 중심에 있기 때문에 통치하기에 좋은 지역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예루살렘에 어떤 명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벧엘이나 길갈, 세겜과 같은 곳은 족장들이 하나님을 만난 종교적인 기념비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없습니다. 아브라함 시절에 살렘 왕 멜기세덱에 대한 기록 외에는 어떤 연관성도 없습니다.


이렇게 빈약한 신적인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다윗은 법궤를 안치하는 계획을 세웁니다. 하나님의 일회적인 임재보다는 항상성 있는 임재의 장소가 되게 만들어서 신의 통치가 있는 예루살렘으로 만들고 그리고 거기서 다윗은 안정된 통치를 구현하는 것입니다.


법궤는 삼하6:2절에 보면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라고 규정입니다.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통치의 자리입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통치자로서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나라가 되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이 법궤를 기럇여아림이란 곳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오기를 두 번 시도합니다. 한번은 소가 끄는 수레를 이용하다가 웃사가 죽음을 당합니다. 저주를 받습니다. 그래서 법궤를 오벧에돔의 집에 옮겨놓습니다. 그런데 법궤가 들어간 날 이후 오벧에돔의 집이 복을 받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다시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복이 있는 예루살렘과 이스라엘과 다윗의 집이 되기를 바라는 소원입니다.


2. 여호와 앞에서 춤을 춘 다윗을 비난하는 미갈

법궤가 있어서 복을 누리고 싶었습니다.

이번에는 다시 법궤를 레위인들이 메고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옵니다. 이번에는 무사히 법궤가 이동이 됩니다. 그래서 제사를 드리고(13), 다윗은 법궤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었습니다. 여기서 다윗은 베 에봇을 입었습니다. 베 에봇을 통해서 법궤 앞에서 춤을 추는 일을 했습니다. 이렇게 춤을 추는 행위는 15절에 즐거이 환호하는 행위와 같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렇게 춤을 추는 것을 보고 비웃는 한 여인이 있습니다. 바로 미갈입니다. 16절입니다. 미갈이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마음에 그를 업신여겼습니다.


다윗은 법궤가 들어오자 하나님께 번제와 화목제의 제사를 드리고 백성들에게 축복을 합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화목제의 제물을 나누어 줍니다. 하나님의 복을 함께 나누는 행위입니다. 떡 하낵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 떡 한 덩이씩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다윗도 자기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자기의 집에 축복을 나누기 위해서 돌아올 때 그의 아내 미갈이 그를 맞으러 나옵니다. 그러면서 일성이 다윗이 왕으로 춤을 춘 행위를 비난하는 말을 시작합니다.


20절 후반절입니다.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 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여기서 방탕한 자라는 표현은 아주 형편없는 저질의 사람을 말합니다. 신약 성경에서 형제를 ‘라가’라 하는 자마다 공회에 잡히게 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라가’가 바로 방탕한 자와 같은 어원의 단어입니다. 다윗을 향해서 왕이 아니라 시정 잡배와 같은 수준에서 처리를 한 것입니다.


다윗이 법궤 앞에서 춤을 춘 것은 분명 14절에서 여호와 앞에서 춤을 춘 것입니다. 그런데 미갈은 다르게 말합니다. 계집 종의 눈 앞에서 몸을 드러낸 것으로 말합니다.


여기서 다윗이 춤을 춘 것이 몸을 드러낸 결과는 다윗이 입은 베 에봇이 가진 특징 때문에 그러합니다. 아마도 춤을 추면 그의 벌거벗은 몸이 드러나게 되는 옷인 모양입니다. 종교적인 의식의 특수한 복장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미갈은 시종을 드는 계집 종들의 눈 앞에서 춤을 추는 체통 없는 왕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여호와 앞에서 춤을 추었다고 진술합니다.


21절 이하입니다.

다윗이 미갈의 비난에 대해서 답변을 합니다.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리고 21절 마지막에도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고 다시 여호와 앞을 강조합니다.


21절의 진술은 여호와 앞이란 단어로 처음과 시작을 장식합니다. 이 말은 미갈이 계집 종 앞에서 했다는 시각에 대한 교정이고 항변입니다.


그 양자의 여호와 앞에서 사이에 다윗은 진술을 합니다. 여호와께서 사울과 사울의 집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을 선택하여서 왕권을 주셨습니다. 이 진술은 자신에게 아무런 왕권의 정통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왕이 되게 하셨다는 진술입니다. 그래서 그 왕으로 선택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수치를 드러내면서 낮추어서 춤을 추었다는 것입니다.


법궤의 안치를 통해서 자신에게 통치권을 주신 하나님을 기뻐하며 춤을 춘 다윗입니다. 그런데 사울의 딸 미갈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왕의 체통이 형편없다고 주장을 합니다. 왕의 권위가 무너졌다고 비난을 합니다.


여기서 다윗이 생각하는 왕권과 사울의 딸 미갈이 생각하는 왕권이 차이가 있습니다.


다윗은 22절에서 다시 말을 이어갑니다.

내가 이것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될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방탕한 자와 같이 묘사된 자신의 모습에서 더 낮아질 수도 있다고 강조합니다. 여호와 앞이라면 얼마든지 낮아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갈이 말하는 계집종들에게서는 높임을 받게 된다고 언급합니다.


내가 여호와 앞에서 낮추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의 권위를 지켜 주신다는 확신의 표현입니다. 나의 왕권을 하나님께서 선택하여 주셨기에 하나님께서 지켜 주신다는 확신을 언급함으로 이 미갈과의 대화를 종결합니다.


법궤가 옮겨올 때 춤을 춘 다윗에 대한 미갈이 말한 왕의 품위에 대한 업신여김에 대해서 다윗의 확신은 이것입니다. 내가 비록 이스라엘의 왕이지만 나는 여호와께서 세우신 왕이다. 이것은 여호와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의 안치를 통해서 확신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나의 왕권과 권위의 보존은 바로 이 주님에게서 나온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그 권위의 높으신 주님 앞에서 자신은 한 없이 낮아질 수 있음을 언급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낮아지는 왕이 되겠다고 선언합니다.


3. 세속적인 왕의 권위를 거부하고 낮아진 다윗

그러나 미갈이 생각하는 왕은 그런 왕이 아닙니다.

신의 권위를 담은 인간적인 왕도 권위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신비스럽게 권위를 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사울의 딸 미갈의 행위는 하나님의 앞보다는 사람의 앞에서의 품위에 더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실제로 미갈은 그의 아버지 사울이 왕권을 유지했던 방식으로 다윗의 왕권을 보고 유지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아말렉과의 전쟁을 할 때 사무엘로부터 아말렉을 모두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실제로 전쟁을 하여서 큰 승리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모두 제거하지 않고 아말렉 왕이나 좋은 가축과 재물을 숨겼습니다. 명분은 제사를 위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사무엘이 이 사건으로 인해서 사울이 더 이상 이스라엘의 왕위에 있지 않음을 선언합니다(삼상15:11).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선언합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은 불순종하면서 자기의 권위와 이름을 내는 일에는 관심이 많은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은 아말렉과의 승리를 기념하는 기념비를 세웁니다(삼상15:12). 자기의 이름에는 관심이 많으면서 하나님의 이름과 명예에는 관심이 없는 왕입니다. 자기의 왕권의 통치와 유지를 위해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재물을 모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무엘에게 요청해서 스스로 높아지는 일에 관심만을 표현합니다(삼상15:30).


이렇게 스스로 높아짐으로 왕의 품위와 권위와 이름을 내는 일이 사울의 통치의 중심입니다. 그리고 사울은 여호와의 법궤를 존중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법궤 앞에서 여호와께 묻지를 않는 왕입니다. 대상13:3절입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궤를 우리에게로 옮겨오자 사울 때에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께 묻지 않는 왕은 여호와를 찾지 않는 왕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법궤를 존중히 여기는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자란 미갈입니다. 여호와 법궤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그리고 이런 법궤를 존중히 여기는 것이 하나님의 존중히 여기는 것임을 모르고 인간적인 권위만을 앞세우는 왕권이 사울의 정권입니다.


이런 정권 속에서 인간적인 품위만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이스라엘, 언약의 백성의 모습이 아닙니다.


여기에 대해서 다윗은 저항을 했던 것입니다. 비록 미갈이 자신의 왕권의 정통성을 유지시켜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아쉬운 인물이지만 그러나 다윗은 그 인간적인 정통성보다 하나님의 인정 여호와 앞에서 서는 삶의 태도가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앞에서(코람데오) 그는 낮아졌던 것입니다.


다윗이 법궤의 행진 앞에서 춤을 추었던 행위는 세상적인 권력의 개념을 뒤집은 것입니다. 낮아지는 권력 하나님 앞에서 섬기는 권력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 나라와 어떻게 다른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실제로 다윗의 이런 행위는 사무엘서의 중심 메시지와 연결이 됩니다.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이 그리고 그 가문이 여호와를 멸시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엘리 제사장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삼상2:30절입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여기서 존중히 여긴다는 단어는 바로 미갈이 다윗을 비난할 때 사용한 영화롭다는 단어와 같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마지막으로 사용한 단어 22절에 높임을 받으리라는 단어와 같은 것입니다. 즉 다윗은 스스로 높아지고 존중히 여기지를 않습니다. 스스로는 낮아집니다. 대신에 자신의 낮아짐을 통해서 정말 높아지고 영광스러운 분을 높입니다.


최근에 언론에 북한의 김정일에 대한 기사가 나왔습니다.

기쁨조를 보고 옷을 벗으라고 명령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의 부하들보다 너희들도 춤추라고 명령을 했다고 하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춤을 추는 자는 자신이 명령을 받는 자이고 낮은 자임을 말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왕이지만 춤을 추어서 낮아짐으로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하나님께서 높이신다는 사실을 잘 아는 왕입니다. 사무엘서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다윗을 향해서 미갈은 세상적인 왕권의 개념으로 업신여겼습니다.


삼하6:16절에 다윗을 업신여겼다는 단어는 바로 삼상2:30절에 멸시한다는 단어와 같습니다. 그런 자를 하나님께서 경멸하신다는 것은 저주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여호와를 존중히 여기기에 저주받는 자와 같이 될 수 있다고도 했습니다. 삼하6:22절에 내가 낮아져서의 단어가 경멸하다는 단어와 같습니다.


다윗이 춤을 춘 행위를 통해서 다윗이 세우는 왕권과 나라의 정체를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여호와 앞에서 스스로의 권위와 이름을 낮추는 자가 될 때에 비로소 하나님께서 지켜주는 평화의 나라가 될 수 있음을 증거합니다.


그러나 미갈은 사울의 관점에서 계속해서 인간적인 품위만을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미갈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여호와 앞에서 자기를 낮추는 다윗을 경멸하는 것은 바로 여호와를 경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약속대로 저주를 받아서 아이를 얻지 못합니다.


미갈이 아이를 얻지 못함은 삼하7장에 이어서 다윗의 언약에 참여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서 성전을 짓고 통치를 영원히 보존하는 언약입니다. 진정한 통치의 권력과 정통성을 얻은 것입니다. 그러나 미갈은 다윗을 경멸이 여김으로 그가 존중히 여기는 여호와를 경멸이 여겼고 이로 인해서 여호와의 언약적 축복이 저주로 변화하게 됩니다. 이는 법궤 사건이 다윗에게 처음에 저주였습니다. 율법대로 여호와 명령대로 운반하지 않는 일에 임한 법궤의 저주가 바로 웃사의 죽음입니다. 다윗은 겸비하였고, 반대로 이제 여호와를 경멸하는 미갈에게 저주가 임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여호와를 존중히 여기고 그 앞에서 낮추는 자에게 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성도 여러분


긴 이야기의 결론에 이릅니다.

주님이 오신 성탄의 계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낮은 마구간에 인간의 몸으로 오셨습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습니다. 왜 다윗의 이름으로 복음이 불리기를 원하는지 아시겠습니까?(롬1:3) 복음은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낮아짐을 특징으로 세상에 위로가 되고 온전함을 드러내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했던 다윗과 예수님과 같이 스스로를 낮추면서 주님만을 높이는 삶을 사시는 성도들이 되는 것이 복음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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