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후 12:1-10 -(문장환 목사)

   
  ▲ 문장환 목사

  연세대 사회학과
  고려신학대학원(M.Div)
  남아공 스텔렌보쉬대학
  신학박사(D.Th)
  한소망교회 담임목사
1. 자랑

오랜 시간 동안 자랑은 인간 사회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다른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서 무형의 권위를 덧입으려고 하는데 사용되었다. 바울 당시의 그리스 로마 세계에서도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고 자랑하는 것을 최고의 행동으로 여겼고, 유대인에게도 일반화 되어 있었다. 고린도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거짓 교사들 역시 자랑으로서 자신들이 바울보다 우월함을 증명하여서 바울의 자리를 넘보았다. 그래서 이기적인 목적, 곧 그들을 지배하고 그들을 약탈하려고 하였다 (고후11:20). 그들이 자랑한 것은 철저히 세상적인 것으로 출신 배경, 신비적 능력, 말솜씨, 받아온 보수 등을 자랑하였다. 그러면서 그들의 자랑거리에 비해서 바울은 자격미달이라고 바울을 비난하였다. 바울은 이런 자랑 대회에 나서기를 주저하였다. 그러나 이제 바울은 어쩔 수 없이 자랑하는 일에 동참해야 한다. 그렇지만 정작 바울이 자랑에 나섰을 때 자랑의 내용은 거짓 교사들과 전혀 달랐다.  그야말로 주안에서 자랑하였다 (참조 고후 10:17). 


2. 천상의 계시 (1-6절)

(1) 반()묵시적 묵시록 (1-4절)

거짓 교사들이 공격한 것 중 하나는 바울이 자신의 사도적 자격에 대한 증명서로 환상이나 계시를 경험하였는가 하는 문제이다. 대적자들은 그런 것들을 자랑했음에 틀림이 없다.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하여 묘하게 응답한다. 분명히 그런 경험이 있었다. 환상과 계시의 경험이 여러 번 있었다. 그 중에 이 환상의 경험이 제일 인상적인 경험이었다. 이 경험은 본문에 따르면 14년 전에, 그러니까 AD 42-3년경에 다소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2절). 그는 "셋째 하늘" 혹은 "낙원"에 이끌러 갔다 (12:2, 4). 그는 바로 그곳에서 많은 "환상"을 보았으며 또 사람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계시"들을 들었다. 만일 자랑을 하자고치면 이것이 얼마나 자랑거리가 되겠는가?

    

그런데 바울은 이것을 굉장히 특이하게 기록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런 경험을 쓴 글을 묵시문학이라고 하는데, 분명 토픽은 묵시적인데, 기록하는 내용과 방식을 보면 비(非)묵시적, 아니 반(反)묵시적이다. 첫째, 일반적으로 묵시문학은 가명이라도 빌려와서 사용한다. 그런데 바울은 철저히 익명적으로 말한다. 둘째, 철저히 수동적 동사를 사용한다. "이끌려 간(2절), 이끌려 가서, 들었으니(4절)," 이런 표현들은 그런 경험이 자신의 자발적인 행동이나 덕목이나 소원과는 전혀 관계없는 것임을 강조한다. 셋째, 분명히 그 경험은 엄청날 것이지만 그것에 대한 바울의 보고는 철저히 "무(無)"이다. 바울의 보고 속에서 도대체 그가 체험한 환상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을 아무 것도 주지 않는다. 결국 남은 것은 "무명(un-name)" "무환상(un-vision)" "무계시(un-audition)" "무해석(un-interpretation)" 한마디로 "무(nothing)"이다.


(2) 황홀경보다는 현재의 연약한 모습 속에 역사하는 복음 (5-6절)

왜 바울은 이 경험을 자세히 말해주지 않는가? 우선은 발설하지 말라는 주님의 명령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 "말할 수 없는 말" 이란 말이 "발설이 금지된 말"의 의미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보다는 말하지 않기로 바울이 의도적으로 작정을 한 것 같다. 이런 것 말고 오히려 약한 것들과 수치스러운 것들 그리고 역경들만 자랑하기로 작정을 하였다 (5절). 바울은 이어서 자신의 과거의 경험을 듣고는 사람들이 바울에 대하여 대단하다고 생각할까 봐 걱정하였다 (6절). 대신에 바울은 자신의 연약한 삶 등을 보여주려고 하였다. 그렇게 하여서 복음의 진정한 모습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싶어 하였다. 복음의 능력은 황홀한 체험과 대단한 경험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하고 연약해 보이는 것에서 나타난다. 복음능력의 결과인 교회가 세워지는 것도 바로 그렇게 나타났다. 복음의 진실은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가는데 있다.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무엇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고 길인가를 바로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려면 계시 경험의 이야기를 아예 꺼내지 않아도 되지 않는가? 그래서 혹자는 바울의 앞의 말들을 은근하게 자랑하는 고도의 수사학적 표현이라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바울은 이미 이런 경험을 꺼내기조차 싫어하였지만 그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런 이야기를 해야 된다는 것을 안타깝게 말한바가 있다 (11:16). 곧 환상이나 계시 받았다고 사도됨을, 그리스도의 일군됨을 주장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 말을 하게 된 주된 이유는 따로 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자신의 몸속에 가시를 지니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그 가시를 지금 고린도인들이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환상 경험조차도 철저히 바울의 굴욕을 보여주도록 문학 구조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곧 성벽 도망 사건 (11:30-33)과 몸의 가시 사건 (12:7-9) 사이에 환상 경험 사건 (12:1-6)을 배치시키고 있다.


3. 지상의 가시 (7-10절)

(1) 바울의 몸 안의 가시 (7절)

이제 바울은 그의 자랑의 목록에서 그 자신에게도 가장 중요한 것을 말한다. 그것은 자신을 가장 높은 곳으로 이끌고 간 낙원의 계시가 아니라, 자신을 가장 처참한 데로 이끈 몸 안의 가시다. 이 가시는 무엇인가? 가시의 헬라어는 스콜롭스로서 땅에 박는 말뚝을 말한다. 혹은 그 크기를 작게 말한다면 사람을 고문하거나 찔러 꿰기 위해 사용되는 날카로운 나무막대기이다. 그러니 그의 가시는 몸 속 깊이 관통되어서 끊임없이 고통스러운 어떤 것을 말한다. 이것 때문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에너지가 고갈이 되어서 어떤 일도 효율적으로  하지 못했을 것이다.

    

바울의 가시가 무엇일까 하는 것에는 많은 연구들이 있었다. 계속되는 핍박들, 대적자들, 육체적인 유혹들, 안질, 간질, 말라리아, 알려지지 않은 질병, 혹은 심한 말더듬 등, 우리는 무엇인지 잘 모른다고 하는 것이 정직할 것이다. 그러나 고린도인들은 이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을 것이고 (6절), 바울에게는 굉장한 고통거리였을 것이다.


(2) 가시의 이중성 (7절)

그런데 이 가시는 이중적 목적을 가진다. 우선 그것은 사단의 도구로 쓰인다. 그 가시 때문에 바울의 사역이 많은 방해를 받고 더디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바울 자신이 조롱과 비웃음을 받은 것은 물론이고. 그래서 그 가시를 "사단의 사자"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 가시는 놀랍게도 이 가시는 하나님의 목적도 달성을 한다. 사단은 가시를 통하여 바울을 공격하였지만, 하나님은 그 가시를 통하여 더 나은 길로 바울을 인도하였다. 계시를 받는 것은 어떤 사람에게든지 의기양양함, 자부심을 가져온다. 바울이라도 여러 계시를 받는 것이 지극히 큰일이므로 자만하여 붕 뜨기 쉬웠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위험을 아셨기 때문에 바울을 땅으로 끌어내려서 그를 "가시(말뚝)"로 땅에 박아 놓으셨다. 이 경우 같은 가시라도 사단이 의도하는 것과 하나님이 의도하는 것이 정 반대일 것이다.


(3) 세 번의 기도 (8절)

그렇다고 이런 어려움 앞에서 어려움의 제거를 위해 기도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바울도 세 번 기도하였다 (8절). 세 번 기도하였다는 것은 기도한 횟수를 밝히기 보다는 여러 번 간구했다는 것이고, 그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자신에게 교훈하시는 말씀을 깨닫는데 충분한 시간을 보냈다는 의미다. 세 번이란 숫자는 또한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세 번 기도하신 것을 연상하게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세 번 드리셨지만, 바울은 긴 시간을 두고 작정하고 드렸던 기도들이었다.

   

(4) 하나님의 응답: 거절 (9a절)

그러나 특별한 경우 지금 바울의 경우처럼 기도한 요구가 거절되기도 한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 하도다” (9a절). 바울이 원하는 되는 것이 반드시 바울에게 최상의 결과를 가져오고 영적으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했다. 하나님께서 바울의 소원대로 해주지 않는 이유가 두 가지 있다. 첫째는 처음 가시를 준 이유와 동일한데, 가시를 제거해 달라는 기도를 거절하신 이유가 교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그 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바울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바울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세 번 동일하게 왔다. 거절과 함께 다음의 말씀이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9a절). 바울에게 주신 가시라는 것이 은혜이고 이것이 바울에게 족한 것, 충분한 것, 적당한 것, 적절한 것, 좋은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 가시가 있으니 바울이 하나님을 붙잡게 되고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이 연약한 바울에게 임한다는 말씀이다. 바울도 처음에는 제발 없애달라고 기도했지만, 세 번을 기도하는 가운데 깨달았다. 이 가시가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이 가시로 인하여 그가 한 없이 약자가 되고 연약하게 되지만, 그것 때문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에게 머무는구나 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에게 있어서 주님의 능력은 천상의 계시를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지상의 가시를 통해서 왔다.


(5) 바울의 자랑 (9b-10절)

그래서 그는 이 가시를 오히려 크게 기뻐하고 감사한다고 하였다. 거짓교사들과 몇몇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의 이 가시를 두고 바울을 공격하였고 몰아세우고 또 무시하였지만, 바울은 오히려 그것을 자랑한다.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9b절). 하나님이 주신 계시에 보상으로, 곧 바울이 교만하지 않도록 하는 장치로 가시를 주셨고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 일을 하는데 더 유익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의 연약함을 자랑하겠다는 것이다.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란 말은 그의 생애를 관통하는 지배적인 태도가 되었다. 그의 연약함이 주님의 은혜와 능력이 가장 충만하게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나타나는 통로가 되었다.


이제 바울은 10절에서 하나의 황금 같은 고백을 한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바울은 자신이 약하다고 비난하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약함을 다 보여 버렸다. 그의 "고난 목록표"를 보면 능욕을 당하고, 비난을 당하고, 거절을 당하고, 궁핍하고 곤란을 당하고 수치를 당하고 창피를 당하고 정말 약한 것들만 가득하였다 (11:23-33). 거짓 교사들이 비난하는 내용들이 맞다. 몇몇 고린도인들이 못마땅해 하는 내용들이 맞다. 그러나 그 내용이 의미하는 것은 달랐다. 그 연약함과 약점은 바울의 연약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능력으로 이어졌다. 바로 그 연약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에 붙어있을 수 있었다. 그 연약이 강함이었다.


4. 그리스도를 본받아, 바울을 본받아

그런데 한 가지 주지해야 할 사실은 바울이 자신의 가시 사건을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난의 사건을 철저히 염두에 두고 그 고난의 단어들을 의도적으로 사용하면서 기술해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증거들을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신 것 같이 바울은 말뚝에서 고난당하였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세 번의 간구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십자가가 떠나지 않았듯이, 바울도 세 번이나 간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시(말뚝)이 떠나지 않았다; 셋째,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것 같이 (요1:14), 그리스도의 능력이 바울의 연약함에 거하게 되었다 (9절); 넷째,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역이 완성되었던 것처럼 (요19:28,30), 바울의 연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완성되었다 (9절); 다섯째, 그리스도께서 연약함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그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셨듯이, 바울도 연약함 속에서 말뚝(가시)에 찔렸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교회를 세워나갔다.

   

결국 바울에게 있어서 그의 몸에 있었던 가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본받은 흔적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지상의 가시가 천상의 계시보다 훨씬 자랑스러웠던 것이다. 그는 주 안에서 자랑하는 자였다. 십자가만 자랑하는 자였다. 바울은 이 편지에서 꿈에도 잊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의 모습이다. 그 모습을 그대로 본받아 살고자 하였다. 그래서 고린도인들에게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본받으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복음을 위하여 감당한 시련들, 고난들, 어려움들, 모욕들, 약함들, 가시들 이 모든 것을 제시하는 것은 그것을 본받으라는 간접적 요구이다. 왜? 바로 그리스도께서 그의 삶에서 보여주신 길이기에! 그리스도의 삶은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을 주시고, 자신을 상실하신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바울도 그런 삶을 살겠다는 것이고, 고린도인들에게 따라오라고 말씀하고 있다. 오늘 우리에게 따라오라고 말씀하고 있다.

저작권자 © 코람데오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