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참사랑교회(박종선 목사)

▲ 청주 참사랑교회 박종선 목사 “장년 성도들이 저를 찾아왔어요. ‘아이들 때문에 안 되겠어요’라며 저의 결정을 요구했어요. 마치 최후통첩과도 같았지요. 저도 결정을 내렸습니다. 아이들을 택하겠다고 말이죠. 갈 곳 없는 30명의 아이들을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지요. 그랬더니 5가정의 장년들이 모두 교회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참사랑교회(http://0675.ijesus.net)를 담임하는 박종선 목사(48, 청주) 의 목회는 5가정의 장년이냐, 30여 명의 아이들이냐를 선택하는 데서부터 시작됐다. 장년을 선택하면 목회가 ‘푸른초장’으로 보이고, 아이들을 선택하면 목회가 ‘광야’로 보였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안타까운 상황이 벌어졌다. 여러 의견들이 있었지만 박 목사는 아이들의 눈을 결코 외면할 수 없었다. 그에게 아이들을 선택한다는 것은 ‘목숨 건 행위’와도 같은 것이었다. 11년 전, 박 목사(당시 전도사)는 개척교회의 문을 열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낯선 땅, 청주의 한 지하실을 임대했다. 특별한 비전, 달란트, 철학, 계획 등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냥 평범한 목회의 소신으로 시작한 것이다. 전도를 통해 5가정의 장년들이 함께했으니 나름대로 ‘선전’(?)한 셈이었다. “어느 날 새벽기도에 나오려는데 교회 앞에 3~4명의 가출청소년들이 모여 있는 거예요. 처음에는 무관심하게 스쳐지나갔지요. 거의 매일 그들을 만났어요. 그들을 교회로 불러들였어요. 식사를 대접하고 불편하지만 따뜻한 잠자리를 제공했어요. 그리고 물었죠. ‘너희와 같은 아이들이 더 있느냐’ 30여 명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들을 모두 데려오라고 했지요.” 박 목사의 목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셈이다. 박 목사는 온종일 그들을 돌보는 데 사력을 다했다. 고아, 부모 이혼, 가정 폭력, 학교 퇴학 등 수많은 상처들로 점철된 아이들의 인생을 보살폈다. 그런데 장년 성도들이 반기를 들었다. 가출 청소년들과 함께 신앙생활 못 하겠다는 것이다. ‘우리냐 저들이냐’의 선택을 요구 받았다. 박 목사는 ‘당신들은 갈 곳이 많지만, 이 아이들은 갈 곳이 없다’며 아이들을 선택했다. 그러자 그들은 떠나고 말았다.
“비효율적인 목회다, 미쳤다, 쓸데없는 일이다, 결국 얼마 못 간다”는 등의 충고(?)를 들었다. ‘내가 정말 미쳤나’를 생각해 보기도 했지만,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성경의 논리를 떠 따르기로 했다.

    

결국 염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재정이 바닥났다. 가지고 있던 조금의 개인 재산도 한 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어떻게 할까? 어디서 빌릴 수도 없고, 또 빌린다 하더라도 감당이 안 되는 일이었다. 30여 명의 청소년들을 먹이고 입히는 일에 한두 푼이 들어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할 수 있는 일로 ‘결단’을 했다. 막노동이었다. 아내 김순복 사모는 식당 설거지 등의 일에 뛰어들었다. 그것으로도 부족했다. 카드를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당장 굶길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 달, 두 달……. 신용불량자로 떨어지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박 목사는 이 아이들을 돌보다가 인생이 끝나면 그렇게 하겠다고까지 다짐을 했다.


“그 때 남편(박 목사)을 향해 처음으로 이혼하자고 했어요. 너무 힘들었어요. 나는 못 하겠으니, 혼자 하라고 한 것이지요. 그때를 생각하면… 참.”


   
▲ 박종선 목사(왼쪽)와 김순복 사모(오른쪽)

 

옆에 있던 김순복 사모가 당시를 생각하며 한 마디 거들었다. ‘이것이 목회인가’ 등 수 많은 생각이 자신을 흔들었다고 했다. 어린 딸 지희(지금은 고1)를 볼 때 더욱 마음이 아팠다.


2년 후, 빛이 비추었다. 정부의 사회복지를 위한 각종 제도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박 목사가 청주지역 1호 사회복지 혜택을 받는 자로 선정이 된 것이다. 박 목사 내외가 모두 사회복지사를 위한 자격 공부를 하게 되었고, 이후 급여가 지급되었다. 아이들을 위한 각종 시설도 제공 받을 수 있었다.


지금은 4동의 기숙사(해뜨는집, 해맑은집, 해오름집, 드림하우스)가 마련되었다. 학생들은 보다 쾌적한 환경에서 미래를 꿈꾸며 달려가고 있다. 모두 충실한 교회 성도들인 것은 당연하다. 큰 아이들은 벌써 청년부가 되어 동생들을 잘 돌봐주고 있다.


안미영 양(20)은 중학교 3학년 때 박 목사를 만났다. 가정적인 어려움으로 방황할 때다. 그가 지금은 해뜨는 집 기숙사의 보육사로 일을 하고 있다. 교회 내에서는 찬양팀인 오아시스밴드의 단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 김민석 어린이(초6년)는 초3년 때 이곳에 왔다. 아동학대 등의 고통을 받았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졌다. 태권도 유단자 자격증도 취득했다. 초등학생 찬양밴드인 파라다이스에서 베이스 기타를 맡고 있기도 하다.


새로운 장년 성도들도 많이 늘었다. 평균 30~40명이 출석을 한다. 예배당 의자가 부족할 정도다. 또 하나 즐거운 일은 올 4월이면 박 목사가 신용불량자 해제가 된다.


“우리 교회는 ‘쉼’의 역할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힘든 사람, 상처받은 사람 등 누구든지 찾아와서 쉼을 얻고 또 힘을 공급받고 나서, 자신의 비전과 더욱 적합한 곳이 있다면 떠나도 좋다고 봅니다. 실제로 그렇게 여러 차례 설교도 했구요.”


박 목사는 개척교회, 작은 교회가 해 줄 수 없는 분야가 많음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좀 더 좋은 환경, 좋은 교육 시스템을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지만, 모두를 만족시키지는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박 목사는 한국교회를 향해 한 마디를 덧붙였다. 한국교회, 특히 큰 교회가 ‘치리 목회’를 좀 더 명확하게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성도들의 불의한 신앙과 삶에 대해 교회가 공정하게 치리하게 된다면, 큰 교회는 물론 작은교회도 보다 건강해 질 수 있겠다는 것이다.


“그동안 목회를 해오면서 가장 잘했다고 생각되는 것은 정말 아이들만 생각하고 막노동판에 뛰어들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목숨 걸었죠. 그러니까 길이 열리더군요.” (교회와신앙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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