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신의 신학적 정체성을 다음 세대에 전하는 통로로서 학신

1. 출발과 신조에 대해서

   
    ▲ 로테르담사랑의교회 담임
         코닷 연구위원장
학생신앙운동(SFC, 이하 학신)을 개혁주의 입장에서 연결해 볼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학신 강령제창을 하는 모습이다.  


우리는 전통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교리문답을 우리의 신조로 한다. 


여기서 학신은 개혁주의를 자신의 이념적 기반으로 하는 운동임을 확실히 보여준다. 

대부분의 한국의 장로교회가 신조로서 웨스트민스터 교리 표준 문서를 받아들이고 있다. 1907년의 장로교 독노회 개최시에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만을 신조로 채택하였다. 그리고 고신 교회는 1969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웨신 교리 표준문서 전체를 신조로 채택한다. 그런데 학신은 이미 시작초기부터(1950년도 초반) 웨신 표준문서 중 교리 표준 전체를 학신의 강령으로 채택하였다. 이것은 학신이 초기부터 개혁주의 신앙에 철저한 운동체가 되기를 바라는 소망이었다. 개혁주의 신앙의 대한 교회 건설, 세계 교회 건설이란 목표가 이를 말해준다. 

학신의 이념적 정체성과 아울러 역사적인 출발의 실체도 중요하다.


일제 침략과 해방 그리고 한국전쟁으로 인한 폐허가 된 조국과 교회의 현실을 아파하면서 학신은 태동을 하고 전국대회로 자리매김을 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측면은 신사참배로 인한 배교 행위에 대한 회개가 학신 운동의 중요한 출발 동기가 된다. 이런 학신의 출발 배경에는 물론 고신 교회 태동의 배경이 된 한상동, 한명동, 한부선, 박윤선 등이 지도력을 발휘한다. 따라서 잘못된 교회의 길을 돌이키면서 바른 신앙의 토대 위에선 참된 교회를 세우려는 지도력을 창조적으로 수용한 학생들의 운동단체로서 세워졌다. 


따라서 신조와 역사적 출발에 있어서 학신은 개혁주의 운동임이 틀림없다.



2. 교회 중심 운동

학신의 중요한 특징은 교회 중심의 운동이다. 고신 교회의 지도자들의 지도력 아래에서 한국 교회의 과거를 회개하는 일로부터 출발한 이 운동은 교회를 마음에 품는 운동이다. 학신 강령도 분명히 대한 교회 건설, 세계 교회 건설이라는 분명한 목표를 제시한다. 


이런 이념적인 토대는 실제로 운동 방식에서 그대로 구현되고 있다. 필자가 학생시절에 혹은 간사 시절에 듣고 가르쳤던 중요한 내용이다. 우리의 운동은 교회를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심지어 교회 일과 학원 SFC의 일이 겹친다면 교회를 선택하라고 가르치기도 했다. 학신 존재 의의 자체가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존재하는 운동이라는 정체성에서 흔들려본 적이 없다. 이것은 많은 선교단체나 여러 유관 기관들이 자신들의 생존이 우선하는 경우가 많다. 생존 전략이 곧 운동의 목적이 되는 경우이다. 그러나 학신이 이런 방식으로 생존 전략을 생각해 본적은 없다. 지금의 학신 리더십이 마찬가지로 생각하리라 믿는다. 


교회의 유익에 해가 된다면 언제든지 문을 닫을 수 있는 그런 자세로 임하는 교회 중심 운동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있습니다. 이런 교회를 세우고 돕는 역할의 정체성은 개혁주의 교회와 선교 가치에 부합한다. 


학원 SFC가 1980년대 이후 현재의 형태로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항상 논의해 왔던 것은 대학의 학신 운동의 위상이었다. 교회와의 관계에서 그 위상을 규정하는 것이다. 아주 실제적인 예로서 학원 현장에서 전도를 한다. 전도를 하면 이 전도 대상자를 교회로 인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리고 교회가 이 성도를 잘 양육하게 하는 것이다. 물론 교회의 정착 과정에서 개체 대학 학신이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러나 목적이 교회에 잘 적응하는 성도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학습을 받고 세례를 받는 성도가 되도록 한다. 이런 가치관은 당연한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겠지만 정말 남다른 운동이다. 교회와 연계해서 자신의 역할을 규정하는 연습을 하고 정착해 왔음을 증거하는 대목이다. 


또한 교회 중심 운동이란 측면이 가진 중요한 한 역사는 학신 운동 출신들이 신학교에 진학을 해서 목회자로 선교사로 헌신하는 일이다. 이것은 가장 좋은 것을 주님께 드리기 원하는 열정의 표현이다. 개혁파 운동이 전 영역에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는 운동체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처음 시작부터 신학교에 좋은 인재를 제공하는 역할을 염두에 두고서 이 학신을 교단이 관심 있게 보아왔고, 양육해 왔다. 이것은 결코 나쁜 관심이 아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학신 운동이 다음 세대의 교회의 좋은 목회자와 지도자를 계속 해서 배출해야 하는 책임을 역사적으로 담고 있음을 말한다. 복음을 위해서 철저하게 헌신하는 일꾼들을 배출하는 일을 강조하는 운동이 되어야 한다.


3. 개혁파 신학의 입장에서 교회 연합적 운동체

학신은 강령공동체이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웨신과 대소 요리문답이란 개혁파 신조에 입각한 운동체를 말한다. 이렇게 강령 공동체를 내세우는 것은 학원이란 현장에서 함께 하는 신앙의 운동원들이 강령에 대한 동의를 통해서 구심점을 가지게 된다. 


단순하게 학원이란 현장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이자라는 구호를 넘어가는 강령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기억하여야 한다. 이런 실질적인 노력은 운동의 방향과 구체적인 행동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전도하는 운동체, 혹은 선교하는 운동체로서 규정하지 않는다. 교회를 중심하면서 온 세상의 영역을 하나님의 복음의 가치를 가지고 복종하게 하는 운동으로 규정한다. 


실제로 한국 교회 내부에서 일어나는 청년 기독 운동들의 상당한 리더십들이 학신 출신임을 기억해야 한다. 각기 교단이 다르고 운동하는 모습은 다르지만 강령 공동체로서 고민했던 그 가치를 상당부분 반영하는 노력들을 기울이는 모습들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강령에 대한 혹은 복음에 대한 이해의 폭이 얼마나 되는가의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이런 이해의 폭은 실제적인 운동의 질과 구체적을 결정짓는다. 좀 더 실질적으로 약자들에게 위로를 주는 운동체로서의 학신의 정체성이 결여는 실제로 동문들이 서 있는 자리에서의 역할도 비슷하게 규정할 수 있다. 이런 것은 향후 더 고민해야 할 과제이다. 


필자가 경험한 대학 학신의 경우, 캠퍼스에 학신 모임을 시작하면서 공고를 한다. 그러면 이미 중고등부 시절에 학신을 경험한 자들중에 헌신된 일꾼들이 모인다. 그리고 작은 기도모임을 시작한다. 그리고 함께 성경공부를 하면서 현재의 캠퍼스라는 자리에서 함께 하는 의미들과 부르심을 놓고 토론하고 기도한다. 그리고 전도하고 더 많은 운동원들의 결집에 헌신하게 된다. 그리고 열매들을 교회에 돌리려고 노력한다. 


한국 교회가 대형화 되면서 청년 대학부도 대형화되었다. 그로 말미암아 한 교회의 청년 대학부가 전국적인 신앙 운동의 숫자를 초과하는 일들이 벌어진다. 이들이 캠퍼스에서 교회 모임으로 모이기도 한다. 이것은 한 교회의 청년부 모임의 연속으로서 캠퍼스 모임이 된다. 이런 식의 모임은 학원 신앙운동의 소멸을 자초하는 일이다. 


적어도 삶의 현장에서는 다른 교회의 성도들과 함께 같은 신앙의 고백 속에서 협력하면서 이해와 조정하는 일들을 거쳐가는 과정을 통해서 캠퍼스 혹은 세상과의 대결을 감당하는 것이 필요하다. 언제까지나 삶의 자리에 같은 교회의 성도들로 구성된 집합체가 존재할 것인가? 캠퍼스 모임은 세상에 나가기 전에 이런 삶의 현장에서 다른 성도들과 협력하는 그리스도인을 양성하는 모태가 된다. 더욱이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진 운동으로 구성해 가는 연습이기도 하다. 여기서 다른 교회의 성도들과 함께 하기에 많은 과정들이 필요하다. 이해와 협조 그리고 조정이다. 이런 과정 속에서 진정한 리더쉽이 자라게 된다. 


2007년도 한국 교회 평양 대부흥 100주년 관련해서 어떤 대형 교회의 O 목사가 인터뷰를 했다. 대형교회에서 인물이 나지 않는다라는 내용의 질문에 대해서 야성을 키우겠다는 응답을 했다. 인물이란 말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생각해 볼일이다. 영적인 거장이란 말은 적어도 한국 교회를 견인하고 섬길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여기서 개 교회를 넘어서 다른 교회를 이해하고 함께 섬길 수 있는 진정한 리더가 어떻게 길러질 수 있는 것인가? 단지 큰 교회, 대형교회를 맡는다는 의미에서 리더가 될 수 있는가? 


분명한 복음적 가치관을 가지고 다른 성도들과 함께 부르심의 삶의 자리를 섬기면서 동역하면서 부활의 능력을 가지고 어려움을 극복하는 영성을 가진 지도력이 필요한 것이다. 학신 운동은 이런 측면에서 교계를 위해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해 왔고, 지금도 해야만 한다.


4. 동문 운동의 한계성에 대해서

학신 운동의 성패는 동문들의 삶에 달려 있다. 과연 강령 공동체로서 적합한 훈련을 구체적인 삶에서 담아내고 있는가? 목사로서 개혁주의 신앙에 적합한 교회를 세우려고 노력하는가? 직장인으로, 사업가로서, 전문 직종의 사람들로서 그 곳에서 복음이 주는 도전에 응답하고 있는가이다. 


여기서 학신은 동문 운동이란 것을 구상해 왔다. 그러나 필자의 관점은 동문 운동에 대해서 그렇게 낙관적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학신 운동은 그야말로 중고대학생들의 운동이어야 한다. 동문운동은 캠퍼스에서 경험한 대로 혹은 교회 연합적인 지방이나 지구의 운동과 같이 현장에서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협력하는 그리스도인들로서 운동을 해야 한다. 이것을 학신의 이름으로 묶는 것은 학신의 정체성에 부합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실제로도 학신 동문 운동이 인맥 관련 이상으로 나름의 이념적 정체성으로 부각한 적이 거의 없다. 


이제 학생의 신분에서 벗어나서 사회인으로서 정말 개혁파 신앙을 따라서 성도들의 공동체를 이루서 교회와 세상 사이의 중첩적인 기독교 개혁파 운동들에 관심을 폭넓게 시도해야 한다. 여기서 학신과의 관련성에 집착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본다. 


정치 사회 경제 그리고 무엇보다 약자에 대한 관심 등에 얼마나 기여할 섬김의 영역들이 열려있는가? 여기서 동문 운동이 과도한 자신의 조직 관리에 소모를 한다는 것은 그렇게 생산적이지 않다. 재정적이며 그리고 정신적인 후원자의 역할을 하면서 학신 운동의 분명한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 이 운동의 생명력을 보존하는 것이다. 


고신의 개혁주의를 다루면서 학생신앙운동이 그 주제로 언급될 만큼 학신이 고신의 개혁주의 정체성을 유지 함양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어린 중학생들이 손을 들고 우리는 전통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을 우리의 신조로 한다고 외치는 한 그 신조의 포괄성이 역사 속에서 이해되는 양만큼 역할을 하는 운동체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고신 교회가 개혁주의 신앙의 정체성을 가졌음을 증거하는 것이기도 하다. 더 실질적이고 절실하며 포괄적인 강령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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