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헌옥 목사

우리가 사는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다수결의 원칙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합리적인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올바른 다수결의 결정을 이끌어내기 위하여 건전한 토론을 하여야 함은 물론이다. 그때의 토론은 감정이나 어떤 선입견이나 소속감을 제하고 다만 양심의 소리를 가지고 자기 소신을 밝히고 모든 사람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쪽에 표를 주어 그 일을 결정하고, 결정되었으면 거기에 순복하는 것이 민주주의 정치의 대의라 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민주주의도 합리적인 것도 아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모세가 가나안에 12 탐정을 보낸 사실을 매우 안타까워하고 그것이 그의 씻을 수 없는 실수였다고 생각한다. 모든 족장들이 나아와 가나안 정탐을 건의하였을 때 모세는 그것을 옳게 보아 그렇게 하라고 했으며(신1:22-23) 결과적으로는 그 일로 인하여 이스라엘의 장정들이 가나안 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으며 이스라엘이 신천지를 건설할 아까운 세월을 허송하게 만들었던 것이라 본다. 물론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하게 하셨지만.

왜 모세는 후일 갈렙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철썩 같이 붙들고 모든 인간적 요구를 물리치지지 못했으며 가나안으로 직행하지 못했을까? 때로는 사람들의 말도 대단히 일리가 있기 때문이다. 일리란 결국 합리적인 것이다. 모세는 안타깝게 하나님께 기도해 보지 못하고 (물론 후일에 하나님의 재가를 얻었겠지만) 족장들의 말을 들었으며, 열 정탐꾼이 보고를 했을 때에도 백성들이 그들의 말을 더욱 신뢰하였을까. 그것은 곧 합리적인 그들의 논리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합리적인 주장이나 다수결의 원칙은 통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존재할 뿐이다. 그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 전까지는 사람들은 전혀 비생산적인 일에 서로 울분을 쏟으며 격렬한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그 실례가 바로 욥기서가 아닌가 생각한다.

욥기서를 읽어 보면 욥의 친구들도 대단히 의로운 사람들이고 하나님 편에 선 사람들이고 작은 죄도 용납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과 욥은 지루한 논쟁을 오랜 시간을 두고 벌여나간다. 욥은 때로 자신의 순결을 인정하지 않고 마치 하나님께 죄라도 지은 것처럼 몰아붙이는 친구들을 원망하면서 왜 이런 환란을 당하게 하셨는지 하나님의 처사에 불만을 토로한다.

그리고 이제 친구들과의 토론은 무의미하니 하나님이 계시다면 나오셔서 자신과 토론해 보자고 제안한다. 자신은 일절 죄가 없고(거의 모든 논쟁자들이 범하는 잘못) 하나님이 나를 칠 틈을 찾고 자신을 대적자로 여긴다고 하기에 이른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보시던 하나님은 욥을 찾아오시고 욥은 하나님 앞에 회개한다. 하나님이 욥을 책망하신 말씀은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였다는 것”이다.(욥38:2) 그리고 변박하는 자가 하나님과 다투었다(욥40:2) 하나님과 변론하는 자(욥40:2)라고 하신 것이다.

이에 욥은 하나님의 책망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회개한다. 스스로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한 자”(욥 42:3) 라고 실토한다. 하나님은 다시 욥의 친구들을 찾아 가신다. 그리고 그들을 향하여 책망하시되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나의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욥42:7) 그리고 그들의 회개와 욥과의 아름다운 화해를 위하여 그들이 직접 욥을 찾아가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으로 번제를 드려 화해를 청하면 욥이 너희를 위해 기도할 것인즉 내가 기쁘게 받겠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흔히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 8:7)는 성경구절을 좋아하여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두고 있는 것을 보았을 것인데 이는 수아 사람 빌닷이 욥에게 한 말이다. 욥에게 한 말이 정당하지 못하다면 이 말도 정당하지 못하다는 것인가? 아니다. 전체적인 흐름에서 욥보다 정당하지 못한 것이지 그들의 말에도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의 동행에서 얻은 말씀들이 들어 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책망하셨다.

우리는 때때로 시론도 하고 정치론도 하고 신학 토론도 한다. 칼빈주의가 어떻고 개혁주의가 어떠하고 하는 토론을 지켜보면 참 배울 것이 많다는 것을 인식한다. 몰랐던 부분들을 배우는 점에 있어 참 유익하다는 생각들을 한다. 그러나 처음엔 건전한 토론이 격력해 지면서 지루한 논쟁을 하는 가운데 선을 넘어가는 발언을 쏟아내는 것을 보면서 이런 토론은 아무리 학술적으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할지언정 과연 하나님 앞에 어떤 판결을 받을 것인지 두렵기까지 한다.

아무려면 우리가 욥보다 낫고 그들의 세 친구보다 나으랴마는 그들도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논쟁에 대해 칭찬 받지 못했다는 것을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함부로 정죄하고 상대방을 마치 구원받지 못한 죄인처럼 대하는 것을 보면 아찔하다는 생각이 앞선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 인간들의 지식의 논쟁은 도토리 키 재기일 것이다. 조금 앞선 작은 지식을 가지고 함부로 모든 사람들 재단하려는 우를 범치 말아야 하는 것이다.

오래전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나가시던 한 할머니가 “그러면 하나님 안녕히 계십시오. 또 오겠습니다”라는 소리를 듣고 필자는 강단에서 하마터면 웃음보를 터뜨릴 뻔 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돌이켜 그 순박한 할머니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물론 후에 조용히 이야기 해 드렸지만. 목사라도 모를 수 있다. 학자라도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럴 때에 어떻게 하는가? 자신은 모르면서도 아는체 하는 잘못을 범한다. 왜냐하면 모른다고 하면 그것도 모르면서 어찌.... 하는 비난이 쏟아지기 때문이다. 모를 때는 모른다고 하고 또 잘 모르겠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풍토가 아쉽다. 물론 좋게 해석하면 그러면서 자라가는 면도 있을 것이라고 하겠지만 모두가 도토리 키 재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건전한 토론 즉 사랑을 가지고 서로를 이해하는 마음으로 하는 토론은 매우 유익할 것이나, 인신공격으로까지 이어지는 논쟁은 하등 무익한 것이고 하나님 앞에서 책망 받을 일만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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