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 교수 / 고신대학교 역사신학, 신학박사

“2003년 11월 13일 피지(Fiji) 공화국 나부타부타우(Nabutautau)라는 마을에서는 흥미로운 행사가 벌어졌다. 피지공화국 국무총리 라이세니아 콰라세(Laisenia Qarase)가 참석한 이 행사에는 약 600여명의 주민이 참석하여 137년 전에 있었던 한 선교사의 학살과 식인(食人) 사건에 대해 사죄하는 의식이 행해졌다.”

서울로 향하는 타이항공에 오르며 집어 든 방콕포스트(Bongkok Post) 11월 14일자 신문에 게재된 기사였다. 나는 이 행사에 대한 기사를 읽으며 지리한 시간을 잊을 수 있었고, 137년 전 피지에서 죽은 한 선교사의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다.

피지는 남태평양의 멜라네시아(Melanisia)와 폴리네시아(Polynesia) 중간에 위치해 있는 나라로서 햇살이 가득 내리 쬐는 평화로운 섬나라로 알려져 있지만, 한 때는 식인의식이 일상의 관습이었다. 남쪽으로 남회귀선 북쪽과 날짜 변경선 사이에 있는 이 나라는 1.5% 만이 육지이고 300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멜라네시안(Melanesian), 폴리네시안(Polunesian), 미크로네시안(Micrionesian), 인도인, 중국인, 유럽인들이 한데 섞여 살고 있다. 19세기 무렵 피지는 남태평양 무역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기도 했지만, 이 나라는 1874년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 후 수많은 인도인 노동자들을 들어와 사탕수수 농장에 투입되었고, 외부인들의 입국이 빈번해졌지만, 이 나라는 문명의 세계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나라였고, 식인 풍습은 오랜 관습이었다.

피지라는 섬은 1643년 유럽인 아벨 타즈만(Abel Tasman)이 처음 발견했다. 그러나 접근의 위험 때문에 그 후 130년 동안 외부인의 접근이 없었다. 그러다가 1774년 제임스 쿡(James Cook)은 타즈만 이후 피지섬의 첫 방문객이 된다. 그로부터 15년 후 폭동에 휘말린 윌리암 블라이(William Bligh, 1754-1817)가 작은 보트 한 척에 몸을 실은 채 18명의 선원과 함께 이 곳 피지에 도착했다. 그는 영국의 제독으로서 왕실 소유의 ‘바운티호’의 함장이었다. 그러나 1789년 4월 28일, 항해사의 반란으로 블라이와 그에게 충성하는 18명의 선원들은 배에 있던 대형 보트에 실려 쫓겨났던 것이다. 이들은 48일간의 표류 중에 라우 열도(Lau group) 및 바누아 레부(Vanua Levu)와 비티 레부(Viti Levu) 사이 강을 항해했는데 강 이름은 그 때부터 블라이 워터(Bligh Water)라고 불리게 된다. 이때부터 상인들이 접촉하기 시작했고, 피지가 외부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영국 교회가 이 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세기 초반이었다. 특히 런던선교회은 타히티를 비롯한 태평양 연안의 선 나라에 대해 무관심하지 않았다. 피지에 첫 선교사가 도착했을 때는 1844년이었다. 그러나 안정된 선교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감리교회도 선교사를 파송했는데, 그가 토마스 베이거(Thomas Baker)였다.

아직 식인습관이 사라지지 않는 상황에서 베이커 선교활동은 주의를 요했다. 그래도 그의 예모 있는 활동과 주민들에 대한 진정한 사랑은 감동을 주었고, 비록 소수이지만 기독교 신앙을 받아드리는 자들도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그 당시 피지의 생활문화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신체의 일부만 가린 나체생활, 불분명한 가족 개념, 일부다처, 성 행위의 자유로움 등은 기독교적 삶의 방식이나 윤리로는 받아드릴 수 없는 것이었다. 빈번한 종족간의 전쟁과 싸움에서 선교사들은 항상 공격의 표적이 되곤 했다. 과학적이거나 합리적인 판단과는 거리가 멀었던 원시적 섬사람들은 문제가 생기면 그것은 외부인이 초래한 화로 여겼다. 선교사는 항상 이런 위험한 상황에 노출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식인습관은 외부인들이 일차적인 대상이 되곤 했다.

이미 예견된 일이지만 일단의 군중들은 느닷없이 선교사 집을 습격하였고, 베이커 선교사와 그를 따르던 8명의 피지인들은 군중들에 의해 끌려나왔다. 이때가 1867년이었다. 나부타부타우라는 마을에서 사람들은 야구 방망이와 같은 통나무로 베이커 목사의 머리를 내리쳤다. 그가 비틀거리며 쓰러지자 이번에는 두 다리를 내리쳤다. 식인의식에서 흔히 하는 방식대로 도망가지 못하게 하는 장치였다. 그리고는 도끼를 그의 목을 내리쳤다. 같이 끌려온 8명의 피지인들도 몽둥이 세례를 받고 쓰러졌다. 피지인들은 식인의식을 보아왔으므로 이를 숙명적으로 받아드렸다.

나부타우타우 사람들은 짐승을 잡아 파티를 열듯이 이들의 시신을 나눠 먹었다. 베이커 목사의 죽음이 알려진 것은 훨씬 후의 일이지만, 이 일이 있는 후 나부타부타우 마을에는 화가 끊이지 않았다. 당시 200여명이 살았는데 이들은 병으로 시달렸고, 알 수 없는 환란이 밀려왔다. 세월이 지나도 재난은 끝나지 않았다. 오랜 세월이 지났으나 이곳에는 학교도 설립되지 않았고, 병원은 말할 것도 없고 어떤 형식의 의료시설도 건립되지 않았다. 개화와 문명의 바람이 불어왔으나 이 마을에는 도로도 생겨나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이곳 나부타부타우 마을 사람들은 137년 전에 있었던 조상들의 죄를 생각하게 되었다. 의로운 사람을 죽이고 그 살육의 흔적들을 먹어 치웠던 식인의식이 가져온 저주의 결과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137년 전의 일을 사과하는 의식을 행하기로 한 것이다. 이 날이 바로 2003년 11월 13일이었다.

10여명의 베이커 선교사의 후손을 포함한 600여명이 모인 이 의식에는 베이커의 고고손자인 호주인 제오프 레스터(Geoff Lester) 씨도 이 의식에 참석하였다. 물론 이들은 조상들의 식인의식이 오늘의 재난을 가져온 결과라고 믿지는 않았지만, 나부타부타우 마을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사죄 의식은 아침이 밝아오자 시작되었다. 마을 중앙에 임시텐트를 설치하고 그 주변에서 전통적인 피지의 카바(Kava) 주를 마시면서 시작되었다. 15개 단계로 이 의식은 진행되었고, 그 절정은 베이커의 후손이 고무풍선을 풀어 날리는 것을 신호로 “저주와 속박의 쇠사슬을 끊은” 의식이 그 절정이었다. 그 지역 주민이 볼 때 이날 사죄의식의 절정은 베이커 목사를 죽일 때 사용되었다는 도끼를 가져와 그 일을 재현하는 것이었다. 이 때 여러 개신교회 목회자들도 참석했는데, 한 미국인 목회자는, “이제 어둠이 이 땅을 떠났다고”고 외쳤다.

이 의식에 참석했던 피지 공화국 총리는 “토마스 베이커의 가족에게 용서를 구하는 일은 아름다운 행위”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사건을 보도한 방콕 포스트는 “총리는 이 지역에 대한 지원이나 개발 대책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나부타우타우 마을 사람들의 죄에 대해 피지 정부는 무책임하다는 의미일까? 1867년 베이커 목사가 순교한 후 그의 자녀들은 호주로 이주해 갔고, 아들 쪽으로는 대가 끊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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