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에서의 분립 개척의 현장을 찾아서

 이 원고는 성결교 교단지 활천의 2009년 9월호에 분립개척에 대한 특집 기사 중 하나로 게재된 글로 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약간의 오자를 수정하여 싣는다. 이는 필자의 2년 전 글이기 때문에 현재상황과 맞지 않을 수 있음을 밝힌다. -코닷-

 

▲ 이성호 교수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졸 고려신학대학원 졸. Calvin Theolgical Seminary (Th. M. 및 Ph. D) 합동신학대학원 대학교 조직신학 교수(역임) 고려신학대학원 역사신학 교수 (현) “목사가 자기 살은 베어 주어도, 자기 교회 교인들은 떼어 주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이것을 좋게 해석하면 목사가 자기 교인을 정말로 사랑한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으나, 보다 정직하게 해석하면 한국교회 목사들이 개교회 중심주의의 늪에 얼마나 깊이 빠져있는 지를 잘 나타내는 표현이다. 이 말은 분립개척이 얼마나 쉽지 않은 지를 선명하게 보여 준다. 개척을 하는 교회에, 기도로 지원하고, 돈으로도 엄청난 지원은 하지만, 성도까지 떼어 주면서 지원하는 교회를 찾아보기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어 보면, 담임 목사만 생각을 바꾸거나 분립개척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분립개척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여기에 소개하는 경남 통영에 위치한 충무제일교회(예장고신)가 그러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이 교회의 담임목사인 이경열 목사는 평소에 분립개척에 대한 생각을 늘 하고 있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농촌의 아주 작은 교회에서 목회를 할 때, 도시의 대형교회들이 자기 교회만 키우는 것이 올바르지 않다고 보고, 교회가 너무 커지면 분립해서 교회를 개척하는 것이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보았다. 특히 한 교회가 주일에 예배를 여러 번 (2부, 3부, 4부...) 드리는 것을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가졌던 목사들도 젊었을 때 한 때 뿐이지, 도시의 큰 교회에서 목회를 하다 보면 생각을 대부분 바꾸는데, 이목사는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실천하는 목사였다. ▲ 이경열 목사충무제일교회
이목사가 1991년 통영으로 충무제일교회에 부임해 왔을 때, 교인들은 약 200명 정도였다. 당회가 두 그룹으로 나뉘어 극한 대립을 하고 있는 힘든 교회였지만 교회를 잘 섬겨, 아파트 지역의 종교 부지를 얻어서 그 다음 해에 600석 규모의 아름다운 교회당도 지었다. 이 목사의 목회는 특이한 점이 없다: 대표적인 예로 “특별 새벽기도” 같이 무슨 특별한 프로그램이 전혀 없다. 본인도 자신의 목회는 “특이한 점이 없다는 것이 특이한 점”이라고 자주 언급한다. 어떻게 보면, 분립개척도 이목사가 지극히 상식적인 목회를 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충무제일교회는 중소 도시에서 기본이 튼튼한 교회다. 새벽기도회 참석하는 비율이 매우 높고, 장로들이 거의 전원 새벽기도회에 참석을 한다. 구역예배 역시 참석하는 숫자가 매우 많고 구역헌금도 다른 교회에 비해서 매우 많은 편인데, 전액 전도와 선교비로 지출된다. 아주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고신교회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상당수의 교인이 십일조 생활을 한다.


교회당을 짓고 나서 교회는 조금씩 성장하여 1997년에는 예배에 380명 정도 평균 출석을 하게 되었다. 주일 오전 예배에 1층 좌석이 보기 좋게 다 찰 정도였다. 어떻게 보면, 분립개척을 할 이유가 전혀 없는 상태였다. 오히려 전도를 더 열심히 해서 2층에 비워있는 자리까지 다 채워야 할 상황이었다. 따라서 목사 본인이 분립개척을 생각한다고 해도 당회에서 허락을 받기가 쉬운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목사는 평소 자신이 갖고 있는 생각을 지혜롭게 실천하기로 하였다. 충무제일교회는 50년 가까이 되는 아주 역사가 오래된 교회였는데, 이 목사는 이 점을 활용하였다. 당회에서 “우리 교회가 50년이 다 되어가는 데, 아직까지도 교회 하나 개척을 하지 못한 것은 하나님께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2000년이면 50주년이 되는데, 지금부터 준비해서 교회를 개척하도록 합시다.”라고 말하였다.


하나님의 섭리로 당회는 이 목사의 안을 받아들여서 개척을 하기로 결정을 하였다. 그러나 이목사가 언급하였듯이 충무제일교회는 개척을 한 경험이 전혀 없었다. 개척 결정은 하였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는 거의 이목사의 아이디어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또한 개척이 실패하면, 모든 책임을 담임 목사가 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일단 지역은 죽림이라는 통영 외곽 한적한 곳이었는데, 이 목사는 개척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모교회 근처에 지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곳에는 대단위 아파트가 들어설 지역이었는데, (그 당시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촌이었다) 이 목사는 그곳에 교회가 서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이 목사는 교회 개척이 확실하게 성공하기 위해서는 교회당을 지어주고 재정을 지원하는 것을 넘어서 교인들도 떼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이목사가 대형교회 목사처럼 절대적 카리스마가 있지도 않았고, 그 교회를 개척해서 교회내에서 절대권을 행사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본교회당은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주 좋은 건물이었기 때문에, 교인들이 본 교회를 떠나기를 꺼려하였다. 더구나 죽림지역에서 나오는 구역은 10가정 정도가 되었는데 대부분이 초신자였다. 처음에 이 목사는 “이 구역에 소속된 사람들은 다 가십시오.”라고 강한 권면을 하였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자 “가고 싶은 사람만 가십시오.”라는 청유형으로 바꾸었다.


처음에는 분립된 교회가 초라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어서 가기를 꺼려했지만, 모교회의 지원으로 조립식이기는 하지만 교회당 건물도 세워지고, 그 안에 모든 비품들이 새 것으로 채워져 규모있는 교회의 모습을 가지게 되자 교인들의 생각이 많이 바뀌게 되었다. 더구나 자립할 때까지 담임목사의 사례비도 모교회가 책임을 졌기 때문에 재정적인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결국 그 구역의 모든 성도들이 다 분립된 교회로 가게 되었다. 그들에게 분립된 교회는 모교회에 비해서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았지만, 좋은 점도 있었다. 모교회에서 그들은 초신자였기 때문에 교회에서 거의 주변인들이었다. 하지만, 분립된 교회에서 그들은 교회를 책임져야 할 지도자들이 되었다. 당연히 그들은 책임 있는 신앙생활을 하여야 했고, 신앙이 급속도로 성장하였다.


분립개척이 성공했던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이 목사가 분립된 교회를 철저하게 모교회의 한 지체라는 점을 강조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새 교회 이름을 “충무제이교회”라고 붙였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그 당시 시대 흐름에 비추어 보아서는 시대를 역행하는 이름이었다. 모두가 개척교회라고 하면, 뭔가는 색다르고 참신한 이름을 짓고 있었다. 예를 들면, 온누리교회, 사랑의교회 등등. 그러나 그런 참신한 이름들은 10년이 지난 오늘날 다 진부한 이름이 되어 버렸고, 한국 개신교회는 ‘생소한’ 교회 이름들이 난무하게 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참신한 이름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교회 이름은 공해의 수준에 이르렀다. 그러나 충무제이교회는 오늘날 오히려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고 궁금증을 유발하는 교회가 되었다. 통영을 여행한 사람들은 한 번쯤은 고속도로 바로 옆에 있는 충무제이교회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충무제이교회’라는 이름은 이후에 개척된 충무제삼교회와 충무제사교회의 서막을 알리는 이름이었다.


누군가가 언어가 사람의 사고를 지배한다고 하였듯이, 충무제이교회라는 이름은 모교회로 하여금 분립개척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지게 하였다. 이 목사는 확신에 찬 어조로 “분립된 교회는 남의 교회가 아니라 우리교회”라고 강조를 하였다. 실제로 이목사는 제이, 제삼, 제사교회를 모두 ‘자기’ 교회라고 생각한다(물론, 이 목사 스스로 그렇게 생각할 뿐이고 이들 교회를 간섭하는 일은 거의 없다. 이 교회들은 철저하게 독립된 교회들이다). 분립개척에 적지 않은 재정이 지원이 되었지만, 모교회 성도들은 제이교회를 자기 교회처럼 생각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실제로 개척교회 목사를 청빙할 때에도, 처음에는 모교회 부목사로 청빙을 하였다. 그래서 교회당이 세워질 때까지 모교회에서 이 목사를 도와 모교회에서 같이 사역을 하기도 하였다. 잠시 동안이기는 하였지만, 신임목사가 모교회 성도들과 얼굴을 익힐 좋은 기회였다. 분립개척의 이와 같은 정책은 이후의 개척 교회에도 계속 이어졌다. 제3, 제4교회도 충무제일교회에서 부교역자로 봉사한 분들에 의해서 개척이 이루어졌다.


물론 하나님의 일에 어려움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아무리 분립개척이 좋은 일이라 하더라도, 또한 그것을 실제로 실천하려고 하더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당장 누가 나갈 것인가가 문제가 된다. 충무제일교회의 경우 이 문제가 상대적으로 쉽게 해결된 편이지만, 다른 문제도 있었다. 교회당 건물 앞에 ‘욕쟁이 할머니’라고 불리는 불교 신자가 살고 있었는데, 자기 집 앞에서 스피커로 불경을 시끄럽게 틀어 예배를 방해하였다. 실제로 서부 경남 지역은 불교나 다른 종교의 비율이 매우 높다. 제삼교회의 개척의 경우에는 마을 사람들 전체가 교회당 건립을 너무나 반대하여 결국 그 장소에 설립하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물론, 하나님은 더 좋은 장소를 예비하셨다). 초신자들이었던 설립 멤버들은 그런 방해를 오랫동안 견디어 내어야만 했다. 그 가운데서 더욱 더 하나님께 의지하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교회가 더 굳건하게 설립되고 안정화되어가자, 그 할머니도 예배 방해를 결국 그만 두었다.


교회의 일은 외적인 방해뿐만 아니라 내적인 방해도 있었다. 아무리 좋은 일도 보기에 따라서는 전혀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실제로, 누가 보아도 개척할 이유가 없는데, 담임목사가 분립 개척을 한다고 하니까 이상한 소문이 돌기도 하였다. 모든 교회에는 목사를 좋지 않게 보는 세력들이 있기 마련인데, 그 중에서 어떤 이들은 담임 목사가 은퇴 후에 갈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서 간다는 소문을 퍼뜨리기도 하였다. 이목사의 입장에 보았을 때에는 정말 황당하기 짝이 없는 소문이었지만, 그런 소문마저 참고 추진해야 했다. 솔직히 어떤 때는 이런 수모를 당하고도 해야 하는 생각도 들었을 것이다.


가장 큰 어려움은 개척목사에게서 왔다. 그 목사는 여러 면에서 무난하게 목회를 했고 교회도 큰 어려움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2년여 만에 개인적인 사정으로 교회를 사임하고 다른 교회로부터 청빙을 받아 떠났다. 그러나 교인들은 이런 계기를 통해서 충무제이교회에 보다 적합한 목사를 신중하게 검증하여 청빙하게 되었고, 후임목사의 성실한 사역을 통해서 교회는 꾸준히 성장할 수 있었다. 현재 제이교회는 주일 평균 180명이 예배에 참석하고 있고, 최근 13억을 들여서 교회당도 건립하였다. 물론 이 과정에서 모교회의 직접, 간접적인 지원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충무제이교회가 이와 같이 성장 자립하게 되자, 가장 큰 열매를 얻은 것은 모교회인 충무제일교회였다. 20여명이 분립해 나가서 처음에는 빈자리가 커 보였으나 그 빈자리는 금방 다시 채워졌다. 모교회 성도들은 개척하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이전에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기쁨이었다. 제일교회 전체가 지역사회에 좋은 이미지를 심어 주었을 뿐 아니라 이목사 자신도 이 일로 인해서 주위에서 좋은 평판을 얻게 되었다. 이 목사를 만나는 목사들이나(특히 후배 목사들) 사람들마다 “이 목사님, 정말 대단합니다.”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정말 존경합니다.”라고 인사를 한다고 한다. 이런 기쁨은 목사가 자기 것을 포기함으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분립개척은 모교회에 손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 많은 유익을 준다는 것을 큰 교회 목사들은 꼭 기억해야 한다. 현재 충무제일교회는 제삼, 제사교회를 분립개척 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450명 정도가 주일 오전예배에 출석하고 있다.


이번 일로 인해 교인들은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고 교회개척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제삼, 제사교회를 개척하는 일에 별다른 반대 없이 수월하게 일이 진행되었다. 층무제삼교회는 통영지역의 3개의 큰 교회가 연합하여 2년마다 돌아가면서 개척교회를 세우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설립되었고(충무제일교회는 3개 교회중 책임 교회였다), 충무제사교회는 제삼교회가 개척된 지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계획에는 없었지만, 제일교회 출신으로 모교회에서 시무하고 있었던 강도사가 개인적으로 개척을 함으로 시작되었다. 제삼교회는 작지만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고 성장하고 있고, 제사교회는 개척한지 얼마 안 되어 모교회의 도움을 받고 조금씩 자라고 있는 중이다.


우리 주위에 OO제일교회라는 이름을 너무 많이 본다. 하지만, 제2, 제3 교회가 없는 제일교회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참된 ‘제일”교회는 제일 큰 교회, 혹은 제일 좋은 교회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제2, 제3, 제4 교회를 계속 잉태하는 교회이다. 그 점에서 충무제일교회야말로 진정으로 제일교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은퇴를 3-4년 앞두고 있지만, 이 목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대로 이런 방법으로 개척교회를 계속 설립할 예정이다. 제5교회는 좀 구체적인 구상 중에 있다. 분립개척의 일은 고신교단 전체에 조금씩 알려지게 되었고, 이 목사는 현재 국내 전도위원회 위원장이라는 중책을 맡아 ‘총회 3000교회 운동’을 지휘하면서, 총회적으로 개척교회 설립을 지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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