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척교회, 왜?

   
  ▲ 임경근 목사

  현, 샘물교회 부목사
  샘물기독학교 교목
  고려신학대학원 외래교수
  2011년 다우리교회(가칭)
  개척을 준비 하고 있다.
꽃 피는 5월, 교회 개척을 앞두고 있다.  ‘교회다우리!’ 혹은 ‘성도다우리!’라는 거룩한 소원을 담아 교회 이름을 임시로 ‘다우리교회’라 정했다. 개척교회를 한다니 주변 사람들이 하나같이 걱정스러워한다. 그렇기도 한 것이 나 같은 사람이 개척교회를 할 줄 누구도 예상하지 못 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요즘처럼 개척이 어려운 때도 없지 않은가! 많은 목사들이 개척교회를 시작하고 몇 년 고생을 해 보지만 쉽지 않더라고 말한다. 상가 교회는 아무리 설교를 잘 하고 여러 시도를 해도 사람이 아예 안 온단다. 혹시 사람이 온다한들 정착하지 않는단다. 헌금에 대한 부담감과 환경의 열악함, 프로그램이 다양하지 못하다는 것 등을 이유로 들며 다들 대형교회를 찾아 가버린단다. 작은 개척교회는 중ㆍ대형교회와 비교해 경쟁력이 없다. 마치 골목 구멍가게가 대형 슈퍼마켓에 밀려 수익을 내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결국 건물유지비도 감당 못할 상황이 생기면서 개척교회는 문을 닫게 된다. 친한 한 친구목사는 개척교회를 하면 가정이 힘들어지고 부부관계도 나빠지니 각오를 하라고 진지하게 충고했다. 개척교회 쉽지 않은 일임에 분명하다.


지난 해 신대원 강의 마지막 날 ‘개척교회를 하려고 한다.’는 얘기를 꺼냈더니, 한 학생이 손을 들고 질문을 했다. “샘물교회는 모든 신학생들이 가고 싶어 하는 교회인데 왜  그 교회를 그만두고 개척을 하려하십니까?” 좀 당황했지만 나는 이 질문에 대답해야 했다. 나는 왜 개척교회를 하려 하는가?


내가 개척교회를 하려는 이유가 ‘고신 3천 교회 운동’에 기여하기 위해서일까? ‘목사라면 적어도 교회를 하나쯤은 직접 개척해 봐야 한다’는 말에 감동받아서일까? 나는 네덜란드에서 7년이 넘는 유학생활을 끝내고 한국에 돌아와 울산교회에서 2002년부터 3년 9개월 동안 목회훈련을 쌓았다. 그 후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어 2005년부터 샘물기독학교 설립에 참여해 지금까지 만 5년 넘게 섬겼다. 그런데 2년 전부터 교회 사역에 대한 소원이 있어 기성교회에 문을 몇 번 두드렸다. 그 과정을 거치면서 목사 공급 과잉과 현 청빙 시스템의 문제를 경험하게 되었다. 현재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목사청빙 광고를 낸다. 청빙광고가 나면 수 십, 수 백 명의 목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찾기 위해 지원을 하고 교회는 그 중 한 명을 뽑기 위해 수 십, 또는 수 백 명의 지원서들을 버리게 된다. 이런 현실을 보면서 목사청빙과정이 이렇게 진행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기성 교회 청빙광고에 응하지 않기로 했다. 그 후 마음은 점점 교회 개척 쪽으로 기울었다. 물론 교회의 청빙이 있다면 언제든지 달려가리라 문을 열어 놓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작던 크던, 시골이건 도시건 기성교회에서의 부르심이 없었다.


2. 부르심(Calling)

교회의 부르심이 없는 목사는 의미가 없다. 목사는 자신의 열심과 결심만으로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목사에게는 교회의 부르심이 매우 중요하다. 목사로 부르심은 내적 부르심과 외적 부르심이 있는데 목사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내적 부르심도 중요하고 외적 부르심도 반드시 필요하다. 이 두 가지가 함께 가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 그런데 외적 부르심인 교회의 부름이 없다면 목사에게는 고통이다. 기성 교회의 부르심이 없는 상황에서 개척교회로 부르심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내 속에 있었다. 주관적이고 독단적인 나의 열정과 결단만으로 개척교회를 시작하는 것은 아닌지 확인하는 과정을 거쳐야했다. 만약 하나님의 분명한 부르심이 없이 시작한다면 중도에 포기하는 상황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주님의 것인데 주님의 부르심이 없이 나의 열심만으로 시작하고 포기할 수는 없다.


개척교회가 나를 향한 주님의 부르심임을 확신하기까지 진지한 성찰의 시간을 넘겨야했고 그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는 외적인 환경을 통해 나에게 부르심을 확신시켜주셨다.

        

첫째로 가족의 동의가 외적 부르심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쉽지 않은 길이지만 아내가 개척 결정에 먼저 동의해 주었다. 그리고 네 명의 자녀들도 기꺼이 함께 하기로 했다. 고 2인 큰 딸은 그동안 배운 피아노 실력으로 섬기겠다고 했고, 중 3인 둘째 딸은 사진이나 온라인 카페 같은 것을 은사로 받은 미적 감각으로 섬길 수 있겠다고 하고, 초등 3년인 셋째 아들과 5살 막내까지 든든한 교회 회원이자 성실한 일군으로 섬기겠다고 했다. 6명의 가족의 존재와 동의 지지를 통해 개척교회로의 부르심을 확신할 수 있었다. 

        

둘째는 샘물교회 당회의 동의와 결정이 외적 부르심을 확인시켜 주었다. 샘물교회가 개척을 위한 사임을 공식적으로 결정해 주었고, 2년 동안 사택과 월 60만원의 생활비를 지원해 주기로 했다. 교회의 이 결정은 나에게 있어서 개척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인하는 실제적이면서 구체적인 사인이었다. 


3. 작은 교회의 꿈

불과 20년 전만해도 개척교회를 시작하면 성도들이 모여 들었던 것 같다. 목사가 열정을 가지고 교회를 시작했고 대부분 성공(?)했다. 여기서 성공이란 성도 숫자가 늘고 교회 건물이 생기고 이후 큰 교회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개척교회뿐 아니라 기성 교회도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다. 특히 개척교회는 여러 부정적 이미지 탓에 자립하는 단계로 자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흔히 개척교회라 하면 ‘사람이 적어 인간관계 폭이 적다’, ‘전도를 많이 해야 한다’, ‘성전 건축을 위해 헌금을 많이 해야 한다’, ‘상가마다 빼곡한 교회의 존재자체가 부담스럽다’, ‘개척교회는 과도하게 친절하거나 부담을 주어 싫다’ 등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개척교회를 시작하는 나 역시 비슷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이런 부정적 이미지에서 자유로운 완전히 새로운 모습의 교회를 시작해볼 수 있지 않을까?


먼저 ‘개척교회’라는 말 대신 “작은 교회”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싶다. ‘작은 교회’는 뜻을 같이하는 몇 가정이 모이면 시작된다. 성도의 모임인 교회의 본질은 예배와 성도의 삶을 통해 드러난다. 설교를 통한 말씀의 선포와 양육은 작은 교회에서 아주 인격적이고 효과적으로 일어난다. 진지하게 듣고 배운 말씀을 통해 성도는 주일뿐 아니라 주중에도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도록 자극받는다. 성도다운 성도를 통해 세상은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이다.

작은 교회라 건물이 없다고 주눅들 필요 없다. 교회를 생각하면 예배 공간 즉 건물을 먼저 떠올리는데 건물은 교회의 본질이 아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세우시는 것으로 성도가 교회를 이룬다. 이 성도 역시 예수님이 불러 모으신다. 나는 이 고백을 붙들고 실천하려고 한다. 그래서 본질이 아닌 교회 건물을 매입하거나 유지하는데 교회의 열정과 비용을 쏟고 싶지 않다. 교회 건물에서 자유로운 교회는 교회의 본질에 더욱 충실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 건물에서 자유로워지면 건물을 정하고 그곳을 사람으로 가득 채우기 위해 노방전도나 가가호호방문 전도를 해야 한다는 부담이 사라진다. 그렇다고 교회 건물이 전혀 필요 없다는 극단적인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건물을 소유하지 않거나 교회 건물 유지를 위해 애쓰지 않는 교회가 가능하다는 얘기다. 그런 교회를 작은 교회가 할 수 있지 않을까?

        

4. 작은 교회지만, 결코 작지 않은 것들!

교회가 작다고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이 하찮고 보잘 것 없는 것은 아니다. 교회는 아무리 작아도 그 자체가 ‘예수님의 몸’이요 ‘성령님의 전’이다. 작은 교회지만 예배가 있고, 예배 속에는 설교, 찬송, 기도, 헌금, 성례가 있다. 직분적 섬김이 있고 은사적 봉사가 있다. 막상 작은 교회를 시작하려니 모든 것이 새롭고 당연하지 않게 보인다. 평소에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던 것들이 말씀에 비추어 과연 그러한지, 이것이 최선인지 고민하게 된다. 당장 예배 순서는 어떻게 할지 고민이다. 요즘은 사라져 버린 ‘십계명 낭독’을 예배 순서에 넣을 것인지 고민이 되고 ‘사도신경’을 노래로 하면 어떨지 고려 중이다. 요즘 의식 있다는 교회들은 헌금함을 예배당 입구에 비치해 헌금을 강요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 애쓰는데, 다우리 교회는 어떻게 할지 고민이다. 헌금의 본질은 무엇인지, 예배 가운데 헌금 주머니를 돌리는 것이 성경의 원리를 살리는 것인지 흐리는 것인지 살펴보고 있다. 찬송가에 수록된 모든 찬송이 과연 예배에 합당할까? ‘찬송이 무엇인가’로 시작하여 찬송가 선곡도 만만치 않다. 분기별로 하는 은혜의 방편인 성찬식을 더 자주 하면 어떨까? 장례식처럼 엄숙한 성찬식 분위기를 구원의 복음을 선포되고 확인하는 기쁨의 시간으로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유아세례나 혹은 성인세례를 대상이 있을 경우 예배 때마다 할 수 있을까? 주님께 드린 헌금자 이름을 주보에 올려야 할까? 주보는 꼭 만들어야 할까? 교회에 목사 이외에 직분자가 없는 상황에서 의사결정을 어떻게 할까? 아직 직분자가 없는 상황에서 과거 직분을 가졌던 성도를 무슨 명칭으로 불러야 할까? 교회가 고백하는 교리교육은 어떻게 할까? 언제부턴가 사라진, 부모와 자녀가 함께 드리는 통합형 예배를 훈련되지 않고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하고 실행할 수 있을까?


이런 수많은 것들이 당연하지 않고 모두 새로운 과제로 다가온다. 이를 위해 성경을 더 깊이 연구하여 성경 속에서 원리를 찾아내야 하고 믿음의 선배들이 과거에 이미 이루어 놓은 좋은 유산들을 찾아 참고해야 한다. 그 모든 과정을 신중히 거쳐 하나하나 새로운 예배와 성도의 삶을 만들어 가는 것이 작은 교회의 과제이다. 어디든 끊임없이 개혁해가지 않으면 정체되고 퇴색하기 마련인데 덩치가 커진 교회는 기존의 틀 때문에 끊임없는 개혁과 성찰이 쉽지 않다. 이에 비해 작은 교회는 개혁을 이루기에 아주 좋다는 장점이 있다.


5. 흩어져야 하는 교회

작은 교회와 대비되는 큰 교회는 도시화의 산물이다.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사람들은 도시에 밀집되었고 자동차 등 이동 수단의 발달로 거리에 대한 부담이 줄어들고 IT기술의 발달은 곳곳의 정보를 쏟아내면서 교인들이 큰 교회로 쏠리는 현상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결국 거주지를 중심으로 한 지역교회 개념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주일 뿐 아니라 주중의 삶과 연계된 신앙 공동체를 위해서는 여전히 지역 교회가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작은 교회의 역할이 극대화되어야 한다. 어떤 이는 큰 교회의 당위성을 설명하기 위해 ‘큰 교회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할 일을 생각하기 전에 교회의 본질에 집중해 보면 교회는 흩어져야 생명력이 있다. 일을 위해 큰 교회를 추구하다보면 더 중요한 본질을 잃어버리기 쉽다. 큰 교회는 작은 교회로 분립하여 세워져야 한다. 교회의 본질인 그리스도의 몸을 느끼고 경험하고 체험하기 위해서는 작은 교회가 큰 교회보다 훨씬 용이한 것이 사실이다.

        

내가 유학 시절에 다녔던 깜뻔(Kampen)의 개혁교회는 1995년 당시 1300명의 교세였는데, 600백 명, 700백 명씩 두 개의 교회로 나누었다. 얼마나 아름답고 좋았는지 모른다. 교회의 힘은 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고전 1:30)에 있다.

       

예루살렘 교회는 교회가 점점 커질 때 큰 핍박을 받게 되었고 결국 여러 곳으로 흩어졌다. 그 결과는 대단했다. 여러 지역에 주님의 교회가 생겨났고 복음 전파라는 놀라운 섭리가 이루어졌다. 큰 교회는 작은 교회로 분리하여 세워지는 것이 좋다. 앞으로는 이런 작은 교회들이 많이 생겨나기를 바란다.


6. 다우리교회

조만간 시작할 (가칭) ‘다우리’ 교회는 여러 교회 중 또 하나의 작은 교회로 보이겠지만, 내용에 있어 ‘교회다운 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성도다운 성도’, ‘목사다운 목사’, ‘가정다운 가정’, ‘남편다운 남편’, ‘아내다운 아내’, ‘말씀다운 말씀’, ‘직분자다운 직분자’를 세우고 싶은 소망을 교회 이름에 담았다.

        

아내와 자녀들이 가정에서 가정예배 시간에 아빠가 시작할 작은 교회를 위해 기도하다가 ‘다우리 교회’의 의미로 ‘자녀 대 하!’라는 의미를 생각해냈다. 다산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우대할지 고민 중인데, 적어도 말씀을 통해 자녀가 하나님의 복임을 선포하고 자녀 출산과 양육도 선교와 제자도의 핵심임을 강조할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하라”(창 1:28)라고 명령하셨는데 이 성경적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성장 방법임을 인정하는 교회를 만들어갈 것이다.

        

‘다우리’교회는 ‘다’(모두) ‘우리’라는 의미도 있다. 같은 신앙고백을 하는 성도는 한 아버지의 아들과 딸이다. 같은 신앙고백을 하는 성도는 한 식구이고 ‘다 우리’이다. 다 우리가 되는 작지만 굳건한 신앙 공동체가 다우리 교회를 통해 세워질 것이다. 이 신앙공동체를 함께 세워가기 위해 동역자들과 모여 앞으로 성경을 붙들고 많이 고민할 것이다. 이 거룩하고 의미 있는 배움과 고민의 길에 함께 동행 할 동역자를 주님께서 보내주시길 기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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