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탐욕과 자연 재해는 아무 관계가 없을까?

   
일본의 지진과 쓰나미 그리고 원전의 재난을 경험하고 있다. 엄청난 재난을 경험하면서 사람들은 질문을 한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가? 마음에 있는 좀 더 정확한 질문은 왜 일본에 이런 일이 생기는가? 수년 전 인도양 일대의 쓰나미가 닥쳤을 때도 같은 질문이 있었다. 조금 지난 사건이지만 방글라데시의 1970년 홍수는 30만명의 희생자를 낳았다. 이런 엄청난 재난에 대해서 기독교는 해석에 대한 책임의식을 지고 있음은 분명하다.


이런 재난을 경험할 때 종말적 현상으로 보는 시각이 유력하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를 포함하여 종말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역시 재난을 당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주는 종말적 메시지로서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이와 같이 망한다는 종말의 경고가 예수님의 음성으로부터 전달된다.


필자는 재난을 종말론적 메시지로서 이해하기 위해, 재난이 가진 신학적 의미를 창조에서 찾아보려고 한다. 창1장이 관심사이다. 바로 본론에 들어간다.


1. 셋째 날과 여섯째 날의 창조의 관련성


창1장에 등장하는 창조의 6일 중에 이번 일본의 재난과 관련해서 관심이 가는 날은 제 3일이다. 제 3일에 하나님께서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게 하심으로 뭍이 드러나게 하셨다. 이렇게 드러난 뭍을 땅이라고 부르셨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 정체성이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반대로 물은 바다로 명명되었다(창1:10). 그리고 이런 물과 뭍의 분리, 그리고 땅과 바다의 명명으로 인한 존재의 정체성을 가진 실체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선한 상태였다.


땅과 바다의 경계가 분명히 규정되었다. 그리고 그 경계가 하나님의 선을 반영한다. 실제로 땅과 바다의 경계를 정하신 하나님의 창조 역사는 성경에서 거듭 언급된다.


[욥26:10]수면에 경계를 그으셨으되 빛과 어두움의 지경까지 한정을 세우셨느니라

[욥38:10-11] 한계를 정하여 문빗장을 지르고 이르기를 네가 여기까지 오고 더 넘어가지 못하리니 네 높은 파도가 여기서 그칠지니라 하였노라

[시74:17]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여름과 겨울을 이루셨나이다

[시104:9]주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여 넘치지 못하게 하시며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나님께서 땅과 바다를 규정하시고 그 경계를 그으셨다. 그런데 홍수와 쓰나미와 같은 재난은 이런 경계를 무너뜨린다.


제 3일에 창조하신 세상은 땅과 바다의 경계가 있고 그런 세상이 선한 세상이다. 그런데 이런 경계가 있는 땅과 바다는 각각의 역할을 부여 받게 된다. 제 3일의 창조는 계속해서 진행이 되었다. 첫째 날과 둘째 날과 달리 셋째 날의 창조는 이중 창조의 구조를 가진다. 창1:9-10절이 제3일의 첫 번째 창조이고, 11-13절이 두 번째 창조이다. 각 날의 창조의 구성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서 '이르시되'와 그 결과로 '그대로 되니라'와 마지막 하나님의 가치 평가인 '보시기에 좋았더라'로 구성된다.


이런 구성이 제 3일에는 두 번 반복되어서 이중 창조를 형성한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땅에 풀과 씨 맺는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도록 하셨다. 그리고 그대로 되었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땅은 풀과 채소 과목을 내는 역할을 하면서 하나님의 선한 질서를 반영한다.


셋째 날을 정리하면 땅과 바다가 분리되어 경계를 가지게 되고, 땅에서는 풀과 채소와 과목을 내는 질서를 부여 받았고, 그대로 되면서 선한 세상이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된 세상이 바로 선한 세상이다. 그런데 노아 홍수 이래로 쓰나미와 홍수와 같은 재난들은 물과 뭍의 경계가 무너진 그래서 선하지 않은 세상임을 반영하는 한 증거가 되고 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왜 셋째 날의 창조가 무너지는 현상을 인류는 경험하게 되는가?


셋째 날의 창조 질서가 가진 선한 세상이 왜 무너지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창1장에서 나오는 창조 기사 전체를 계속 살펴보려고 한다.


창세기 1장의 육일 간의 창조는 뚜렷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1-3일과 4-6일이 대칭이 된다. 1-3일이 '분리'라는 단어로 특징을 규정한다면 4-6일은 앞서 분리된 세상을 주관하고 거주할 주인들이 등장한다. 따라서 '채움'이란 단어가 특징어가 된다. 그리고 나아가 첫째와 넷째, 둘째와 다섯째 날이 대칭이 되고, 셋째와 여섯째 날이 대칭이 된다. 우리의 관심사가 셋째 날에 있기에 이에 대칭되는 여섯째 날을 살펴본다.


여섯째 날도 셋째 날과 같이 이중 창조 구성을 하고 있다. 첫 번째 창조가 24-25절이다. 땅이 생물을 내는데, 가축과 짐승과 기는 것을 낸다. 그리고 그대로 되었다. 그래서 그 만드신 것이 보시기에 좋았다. 이는 완벽한 창조 구성의 삼 요소를 갖추었다. 그리고 나서 다시 26절이하에서 하나님께서 이르시고(26, 28, 29), 30절에 그대로 되었고, 31절에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규정된다. 창조의 삼 요소가 두번째 완벽하게 구성된 것이다. 이렇게 제 6일도 3일과 마찬가지로 이중 창조로서 형성되었다.


제 삼 일과 육 일의 이중 창조의 대조뿐만 아니라 그 내용에 있어서도 대칭을 이룬다. 일차로 짐승을 만드시고, 이차로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을 만드셨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남자와 여자인 사람은 모든 세상을 관리하는 책임을 받았다(1:27-28). 그리고 나서 29절과 30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먼저 29절은 채소와 과목을 사람들에게 식물로 주신다. 그리고 30절에서는 푸른 풀을 사람에게 식물로 주신다.

그리고 이것은 그대로 되었다(1:30b). 그리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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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사람과 짐승들에게 식물로 주신 채소와 과목 그리고 푸른 풀은 바로 셋째 날 두번째 창조를 통해서 땅에 등장한 것들이다. 제 3일에 창조한 세상은 땅과 바다의 구분이었고, 땅의 정체성은 식물과 과목을 내는 것이었다. 이런 셋째 날의 창조는 제 6일의 창조를 통해서 그 의미가 구현되었다. 땅의 참된 주인으로서 동물과 사람들을 맞게 되었고 그리고 그 주인들의 생존을 위한 먹을 거리를 제공하기 위해서 셋째 날의 창조가 있었다.


2. '그대로 되니라'와 그대로 되지 않는 세상


창1장의 제 3일과 6일의 창조는 깊이 상관되어 있음을 보았다. 여기서 사람과 짐승들이 사는 땅의 존재 의의가 무엇인지 한번 정리해 보자.


이를 위해서 창조를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 중 두 번째의 요소인 '그대로 되니라'에 관심을 가져보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그대로 되는 것을 창조라고 불렀다. 실제로 모든 것이 그대로 되었다. 그리고 그대로 된 세상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선한 세상이었다.


오늘날 물과 뭍의 경계가 무너진 엄청난 재난을 당한 세상을 경험하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되지 않는 세상을 본다. 물과 땅의 경계가 무너진 그 엄청난 재난의 현장을 본다. 그리고 질문을 한다. 왜?


사실 창1장에서 반복되는 창조 행위에 나타나는 '그대로 되니라'는 말씀은 선한 세상과 그렇지 못한 타락한 세상을 가르는 기준이 된다. 보시기에 좋은 세상은 선한 세상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되는 세상이다. 성경이 말하는 선악의 기준이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그대로 되는 것이 선한 것이다. 그대로 되지 않는 세상은 악하다. 분명 땅과 물의 경계가 무너진 세상은 선한 세상이 아닌 악한 세상이다.


왜 이런 악한 세상이 되었는가?


성경은 창1장 이후에 왜 악한 세상이 되었는지에 대해서 상세하게 안내하고 설명한다. 그러나 지금 필자는 조금 더 창1장 내부에서 물과 뭍의 경계가 무너진 악한 세상으로 변질된 창조 세계를 해부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그대로 되니라'는 말씀이 가진 비밀이다.


모든 창조의 날에 등장하는 '그대로 되니라'는 말씀은 각기 그대로 되지 않았을 때 가지는 위험이 엄청나다. 예를 들어서 빛이 있으라 하셨는데 빛이 없어지는 것을 상상해 보자. 우리가 쓰나미나 홍수와 같은 것을 경험하고 땅이 갈라지는 지진을 경험하면서 땅과 물의 경계가 무너지고 땅이 흔들리는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 세상인지를 보게 된다. 물론 누구에게 위험한 세상이냐는 것이 중요하다. 제 6일에 창조된 땅에 거주하는 사람과 짐승에게 위험한 세상이 된다.


제 4일에 창조된 해와 달과 별이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주관한다. 그런데 해와 달과 별들이 자신의 위치를 이탈하게 되면 어떤 결과가 일어날까? 해가 지구에 더 가까이 온다면 어떻게 될까? 엄청난 재난이 될 것이다. 인류가 땅을 구성하는 지각 판의 균열 정도로 겪는 재난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재난이 해와 달과 별의 위치 이동을 통해서 경험하게 될 것이다. 지난 세기 말 지구에 다가오는 혜성이 가진 위험을 고발하는 영화들이 등장했다. 그것들이 지구와 충돌할 때 지구가 견딜 수 있을까?


'그대로 되니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너지게 될 때 지구는 아니 지구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짐승과 특히 사람들은 감당할 수 없는 일을 경험하게 된다. 소위 자연적 재해라는 이름아래서 겪게 되는 대재난이다. 성경은 이런 때를 종말의 때라고 부른다. 구약의 선지자들이나 예수님께서 종말을 예언하셨다. 요엘 선지자가의 말씀이다. 욜2:31절에 보면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마24장의 종말을 설명하시면서 2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소위 땅이 자신의 기능을 하지 못하는 기근과 땅이나 물의 경계가 무너지는 것과 같은 지진과 같은 큰 재난의(마24:7) 더 심한 것은 바로 천체의 질서가 창조 때의 모습 '그대로 되지' 않는 상태이다. 이것은 계시록에서 충분히 증거된다. 계16장에 등장하는 진노의 일곱 대접이 주는 재앙이 그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이 '그대로 되지 않는 세상'은 곧 종말이다. 그만큼 '그대로 되니라'는 중요하다. 창조된 세상의 존재와 직결된다. 말씀대로 되는 세상만이 존재한다.


창조의 질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되는' 것에 달려있음을 보았다. 그대로 되지 않는 세상이 종말이다. 그리고 그대로 되는 세상이 선한 세상이고, 그대로 되지 않는 세상이 심판을 받아야 하는 악한 세상이다.


'그대로 되니라'는 말씀이 창조 세계에 있어서 창조자의 의지를 절대적으로 강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창조주께서 그대로 되지 않게 만든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고도의 문명 사회도 끝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래서 그대로 되는 세상이 될 것인가 되지 않을 것인가를 하나님께서 결정하실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지 않다. 그대로 지속될 것인가 되지 않는가를 결정하는 것이 창조자이신 하나님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보아야 한다.


3. 땅에 먹을 거리와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의 질서가 그대로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자연의 재해라는 이름으로 자주 경험한다. 언론이나 인터넷 매체를 통해서 더 자주 보게 된다. 문제는 이런 그대로 되지 않는 세상에 대한 책임이 과연 하나님께 있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재난을 당할 때마다 사람들이 하는 질문인 '왜?'라는 말에는 신에 대한 원망을 은밀하게 담아내고 있다. 저들에게 무슨 큰 죄가 있어서 저들에게 이런 엄청난 재난을 주었는가 라고 물을 때 이미 이런 태도는 깊게 배여 있다.


이제 창1장을 좀 더 들여다보자.

창1:29-30절의 말씀이다. 앞서 살펴본 대로 창조의 여섯째 날에 두 번째 창조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사람들에게 먹을 것으로 채소와 과목을 주신 것과 짐승들에게 푸른 풀을 주셨다. 이것은 제 3일에 두 번째 창조된 것들이다. 땅을 물에서 구별해서 풀과 채소와 과목을 내게 하셨는데, 그 땅 위에 인간과 짐승을 두시고 또한 그 땅에서 나는 것들로 사람과 짐승의 먹을 거리를 삼으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 행위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이르시되'라는 것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1:30절 끝에 '그대로 되니라'고 선언한다. 이 말은 넷째 날에 해와 달과 별들이 그대로 되어서 하늘에 자기의 위치를 지키는 것과 같다. 사람과 짐승에게 먹을 것을 내는 땅이고(3일), 그리고 그 땅에 해와 달이 빛을 주고(4일, 15절), 그리고 사람을 두어서 땅을 다스리게 하신다(6일, 26절). 땅을 다스리는 사람을 이름하여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와 달리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을 이루어야 하는가는 분명하다. 즉 하나님께서 창조한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27절에서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고, 28절에서 복을 주셨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사람이 땅을 다스린 결과가 무엇인가?


이에 대한 질문의 답이 29-30절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그대로 되도록 유지하는 일이다. 복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쟁이 있다. 그런데 창1장과 관련해 볼 때 복은 하나님께서 창조한 세상이 그대로 되도록 만드는 힘이다. 창1:29-30절은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에게 주신 말씀이다. 땅의 모든 식물을 먹을 거리로 주신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처음 창조된 선한 세상은 그대로 되었다. 그래서 보시기에 좋은 선한 세상이었다.


먹을 것이 모든 사람에게 그리고 모든 짐승에게 제대로 공급되는 세상은 바로 하나님의 창조가 그리는 세상이었다. 사람을 두어서 땅을 다스리게 하고 그리고 그 땅에서 식물이 나오도록 해를 주시고, 그 식물을 얻어서 다른 사람들과 짐승들을 먹이면서 사는 세상을 하나님께서 그리고 계신다.


그런데 오늘날 21세기의 세상은 6명 중에 한 명이 굶주리고 있다. 그리고 굶어 죽고 있다. 굶주리는 세상은 과학 문명이 발달한 시대에만 일어난 현상은 아니다. 고대 시대로부터 먹을 것을 해결하는 것이 인류의 과제이다. 그리고 이런 필요에 부응해서 인간들은 장사와 이윤이란 명목으로 장난을 해 왔다.


누군가는 엄청나게 먹어대고 있고, 많은 음식들이 쓰레기로 버려지는 세상을 살고 있고, 누군가는 굶주리는 세상은 절대로 창1:30절의 말씀대로 '그대로 되니라'의 세상은 아니다.


문제는 창1:30절에 나온 그대로 되지 않는 세상이 어떤 세상인가를 인간들이 상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해와 달이 빛을 잃어버리는 때는 두려워한다. 그리고 물과 뭍이 경계를 잃어버리는 세상도 경험을 하면서 두려워한다. 그런데 먹을 것이 다른 이웃들에게 제대로 공급되지 못하는 '그대로 되지' 않는 세상에 대해서 두려움이 없다.


# 인간의 탐욕으로 얼룩진 땅


이제 결론을 맺는다.


왜 물과 뭍의 경계가 무너진 홍수와 쓰나미를 인류가 경험하면서 종말을 말하게 되는가? 그리고 사람이 거하도록 지어 놓은 땅이 흔들리면서 사람의 생명을 빼앗아가는가? 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대로 되는' 세상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졸고 계신 결과인가? 아니면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사의 문명을 비웃고 계시는 것일까? 하나님께서 실수하고 계시는 것인가? 혹시 하나님의 대리자로 땅을 다스리도록 임명을 받는 인간들이 탐욕과 욕심으로 다른 사람의 불행과 굶주림에 눈을 감은 결과는 아닐까?


인간의 타락을 먹을 것으로 설명하는 창3장의 말씀은 에덴 밖에 있는 인류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일까?


애굽의 나일 유역과 같이 기름진 땅으로서 에덴 혹은 여호와의 동산으로 불린 소돔과 고모라에(창13:10) 대해서 에스겔 선지자는 이렇게 말씀한다. 겔16:49절이다.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의 딸들에게 교만함과 음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며 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아니하며


이런 소돔의 죄악을 언급하는 이유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를 언급하기 위함이었다. 소돔도 유다 같이는 행하지 않았다고 고발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신다.


[마10:15]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마11:23-4]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지진과 쓰나미와 같은 일본의 재난을 통해서 자연의 재해라고 부른다. 마치 신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잘 통제하지 못한 결과 혹은 고삐가 풀린 세상으로 하나님을 배제하려고 한다. 우리는 그렇게 믿지 않는다. 세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선한 세상이다. 그런데 왜 이 세상이 그 선한 질서를 그대로 이루지 못하는가? 답은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탐욕이 아닐까? 내가 중심이 된 세상을 사는 인간의 탐욕이 이 엄청난 재난의 직접적인 해답이라고 창세기 1장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지금 배려하지 못하는 이웃에 대한 삶의 태도와 현실이 깊은 땅 밑에 있는 지각 판을 움직이게 만들고, 화산을 끊어 오르게 만들고 물이 땅을 삼키도록 만드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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