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라서 안하는 것이 아니고 안 해서 안하는 것 아닌가?

   
  ▲ 김호관 목사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려신학대학원(M.Div.)
고신대대학원 (Th.M.)
고신대대학원(Th.D.)
성안교회 협동목사
시카고 여수룬교회 협동목사
고신대학교, 브니엘신학교
부산총신 강사
97년도에 고신대학교 신학과 3학년에 재입학 할 때 필자의 나이는 45세였다. 그것도 27살에 미국 이민 가서 18년 만에 다시 시작한 대학생활이었다. 한마디로 정상적인 비정상이었고, 비정상적인 정상이었다. 살다보니 나에게도 이런 일이 있구나하는 마음이 들었다. 어쩌다 남들에게 일어나는 일이 나에게도 일어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 같기도 하였고, 절대로 있을 수 있는 일 같기도 하였다. 왕따를 피하고, 소외됨을 면하려 부지런히 학우들을 따라 다녔다. 도서관으로, 운동장으로, 중국집으로, 볼링장으로 열심히 다녔다. 꿈같은 현실이었고, 현실 같은 꿈이었다. 졸업이라는 난관은 있었지만 어찌 어찌 통과했고, 고려신학대학원 입학에도 난관은 있었지만 천안에서의 신대원 공부도 어찌 어찌 마쳤다. 고려신학대학원 3년간의 수업은 과중함 때문에 즐거움보다는 고통이 더 컸다. 헬라어 졸업통과 시험은 거의 초죽음의 상태가 되기도 하였다. 암기실력이 떨어져 정말 죽을 뻔 했다. 신대원은 걸어서 들어갔다가 기어서 나온 것 같다. 거기에는 다시는 안가고 싶다. 그래도 공부는 계속하게 되었다. 정말 나의 의도가 아니었다. 어찌된 영문이지 다시 고신대학교로 내려가 대학원 신학과에 들어가게 되었다. 구약학으로 Th.M을 하고, 결국 Th.D까지 하여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다시는 학위논문 같은 것은 안 쓰고  싶다.


이 글은 필자의 학교생활의 내력을 소개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좀 더 효과적인 고신대학교와 고려신학대학원의 신학교육 연계문제를 다루기 위함이다. 솔직히 먼저 밝혀 둘 것은 필자는 이 점에 대해 아는 바가 많이 없다. 제시할만한 의견이 있다고 해도 빈약하다. 의견을 제시할 만한 그런 위치에 있지도 아니하고, 신학 연계교육의 현주소를 정확하게 진단할 만큼 지식과 경험도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기획기사이기 때문에 누군가가 써야하고, 둘째는 필자도 개인적으로 느낀 점이 있다면 한번 써볼 수 있지 않는가하는 점이다. 조그마한 쪽문이라도 열면 바람이 들어오듯이 작은 생각도 생각은 또 다른 생각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한다.


최근에 무슨 일이 있어서 고신대학교에서 필자의 강의경력증명서를 떼어보았다. 2003년부터 중복이 많지만 2010년까지 총 28과목이었다. 필자에게 있어서 학교 교육, 특히 신학교육과는 그리 먼 입장은 아니다. 이번에 필자에게 주어진 글의 방향은 어떻게 하면 보다 나은 신학교육의 연계성이 이루어 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종합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필자에게는 역부족이라고 밝혔다. 그래도 필자에게 연계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해보라면 한 마디로 몰라서 안하는 것이 아니고 안 해서 안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교육현장에 몸담고 있는 분들은 누구보다도 핵심문제를 파악하는데 뛰어나다. 몰라서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마음이 없거나, 생각이 있어도 실행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한다. 그 이유는 일차적으로 여건과 현실이 충분치 않음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근원적으로 무슨 일에 대한 마음이 없으면 생각이 없고, 생각이 없으면 정책이 없고, 정책이 없으면 발전이 없다.


남의 학교를 홍보하기 위해 다음의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한번 비교해보고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필자는 이번 학기부터 C시의 B대학에 “구약역사서”를 강의하게 되었다. 정원 60명 제한에 학부생 43명이 수강신청을 했다. 첫 시간에는 학생들이 교수의 이름도 모르고 강의실로 들어왔어야 했다. 미국에서 좀 늦게 귀국하는 바람에 강사선정관계 서류를 제때 제출하지 못해서였다. 학교로부터 ID를 받지 못해 수업계획서를 미리 올릴 수 없었다. 어떤 학생은 강의실에서 “교수님,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라고 묻기도 하였다. 현재 이 기독교대학은 C시의 학부생과 S시의 대학원생을 합쳐 약 3만 명쯤 된다고 하였다. 대학교 건물들도 훌륭하게 잘 지어졌다는 느낌이 보는 순간 들었다. 기독교대학으로서 그렇게 오래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짧은 시간에 발전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설립자의 비즈니스 마인드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지만 자세한 내막은 모른다. 물론 지금의 현상만 가지고 학교를 평가한다는 것은 쉬운 일도 정확한 척도도 아니라는 것을 안다. 학교는 역사와 전통이 있어야하며, 질적이며, 학문적인 측면이 더 중요하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정체성에 대한 연구가 중요하다는 점이다.


정체성은 방향설정이며, 조직체계의 핵심적인 정신이다. 핵심적인 정신은 분산을 막고 한 곳으로 집중시키는 에너지이다. 이 에너지는 연속적인 정체성을 만들어 내고 그 정체성은 목표를 만들어내고 목표는 또 에너지를 불러일으킨다. 정체성과 에너지와 목표는 순환관계에 있다. 신학교의 정체성도 조직체계라는 측면에서 핵심적인 정신이 있어야 한다. 이 정신을 세우고 펴나가야 한다. 그 정신이 분명할수록 조직은 활성화되고 집약화를 이루어 발전한다. 정체성은 목표를 세우고 목표를 세우기 위해 정체성을 연구한다. 그 목표를 따라 조직이 움직인다. B대학교의 행정본부실이 하는 일이 있다고 한 교수가 소개했다. 일종의 기획실 같은 곳인데, 학교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야 할지를 연구한다는 것이다. 정체성을 산출하는 것이다. 관계자들이 계속적으로, 집약적으로, 때로는 공격적으로 정체성을 세우기 위해 연구하고 토론하고 고심하고 있다고 말했다. 학교의 정체성을 어떻게 세우느냐에 따라 학교의 발전이 달라질 것을 믿는 것 같았다. 옳을 것이다. 개인이나 사회나 국가가 가지는 정체성 혹은 정책이 곧 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고신대학교와 고려신학대학원이 공동으로 갖는 정체성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발전도 있고, 변화도 있고, 미래를 대비하는 신학교육의 연계성도 적실성을 가질 것이다. 하고자 하는 열망, 이루고자 하는 열성, 남다른 애정과 애착이 상호 있어야 발전 할 것이다. 이런 정체성을 마련하지 못하면 진보의 속도는 늦을 것이다. 늦은 만큼 현상유지에 가깝게 되고 더 늦으면 쳐지기까지 할 것이다. 질의 윤리학적인 면을 제쳐두고서라도 동일 기독교 계열의 B대학교와 대학원이 그것도 의과대학을 가지고 있는 고신대학교와 대학원보다 훨씬 늦게 출발한 후발학원이 객관적으로 양과 수적 면에서 우세하다면, 무엇이 문제인지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신학교육의 연계문제도 이런 현상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그냥 원론적인 측면에서만 말했다. 차제에 다음의 제안들이 충분치 않지만 그동안 교수님들과 학교 주변의 관계자들과의 대화 속에서 느꼈던 몇 가지 점들을 정리해 본다. 이것은 대안적인 모색이라기보다 누구나 알고 있는 현상적인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이런 현실적인 문제들이 좀 더 논의가 된다면 보다 효과적인 신학교육에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고려신학대원원과 고신대학교 신학부와의 연계에 대한 몇 가지 생각들 가운데 그동안 논의가 되었던 것은 우선 학부 교수들과 신대원 교수들의 순환근무제 도입이다. 이는 학생들에게 교수님들의 특성에 따른 신학교육의 다양성을 제공하자는 취지에서 비롯되었다. 배우는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확실히 효과가 있을 수 있다. 여기에는 신학 교수님들의 인격적 교제와 인화단결을 통한 면학 분위기 조성을 위함도 포함된다. 좋은 취지이기는 하지만 지역적인 거리와 행정체제적인 조율이 쉽지는 않다는 지적 때문에 아직 시행이 되지 않고 있다. 

   

두 번째는 커리큘럼 문제다. 학과목이 겹쳐지지 않도록 하는 방안이다. 필자도 마찬가지 중복교육을 경험했다. 신학과와 신대원의 과목별 중복 때문에 조정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반복교육의 측면에서는 효과성도 있지만 아무래도 겹치기식의 이중적인 커리큘럼은 학생들에게 기대감을 떨어뜨릴 수 있다. 그래서 학부 과목이나 혹은 신대원 과목을 조정하여 일원화하면 어떨까 한다.


세 번째는 신대원과 학부가 같은 장소에서 공부하는 것은 불가능한가라는 물음이다. 굳이 같이 있어야 하는 원칙은 없지만 그래도 연계교육의 측면에서는 원론적인 타당성을 가지기 때문에 검토는 필요하다. 그래서 만약 신대원을 부산으로 옮기거나 학부를 천안으로 옮기게 되면 학습의 다양화와 연구의 집약화와 시설의 편리성(도서관 공동사용 등)과 여타 인적, 물적인 양적 증가로 인한 상승효과가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신대원의 단설대학원 설립문제다. 공동체는 공동의 이익이 우선이다. 그리고 결과가 만족스러워야 한다. 단설대학원을 만들 경우, 안전한 운영체계나 재정적인 측면에서 걱정되는 바가 있다. 이 일로 발생되는 득실을 따질 경우 결코 저울질이 용이하지는 않다. 그래서 연계교육의 측면에서 독자적인 자생(自生)보다 뚜렷한 상생(相生)이 보이지 않으면 일단 추이를 관망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중요한 문제일수록 시간을 두고 논의하고, 실리(實利)쪽으로 검토하여 가닥을 잡는 것이 상례다.

 

이런 기획기사에서 남보다 나은 것은 굳이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면만 보완하고 수정해 나가면 미래는 많이 나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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