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온 선교사 가문 중 특히 두 명문가를 말하는데, 언더우드가(Understand family)와 유진 벨(Eugene Bell) 가문이다. 언더우드는 북장로교가 파송했던 대표적인 선교사였고, 유진 벨은 남장로교회가 파송한 대표적인 선교사였다. 이 두 가문의 공통점이 있다면 4대 째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다는 점이다. 마침 필자가 광주에 와 있으니 오늘은 전라남도 선교의 개척자이자 광주지부를 개척했던 유진 벨 가의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미국 남장로교회가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게 된 것은 1892년이었다. 북장로교회는 1884년 알렌을, 이듬해인 1885년에 언더우드, 헤론 등을 파송함으로서 한국선교를 시작했으나 남장로교회는 한국에 선교사 파송을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언더우드가 1891년 첫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가게 되었는데, 한 가지 목적은 한국선교에 대한 보고였고, 다른 한 가지는 한국으로 올 선교사를 모집하는 일이었다. 그 해 10월 언더우드는 내쉬빌에서 열리는 전국신학생 선교연맹(Inter-Seminary Missionary Alliance)에 참석하여 한국선교를 호소하였다.

“지금 한국에는 죽어가는 영혼 1천2백만 명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헌신과 자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호소가 영향을 주어 전킨 등 선교지원자가 생겨났고, 남장로는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남장로교 해외선교부는 1892년 9월 17일 일곱 사람의 선교사를 한국선교사로 파송하는 예배를 드렸다. 이들이 내한한 남장로교회의 제1진 선교사들이었는데, 레이놀즈(이눌서) 목사 부부, 전킨(전위렴) 목사 부부, 테이트 목사(최이덕) 목사와 누이동생 테이트 양(최마태), 그리고 데이비스 양이었다.

이들은 그해 10월 18일과 11월 6일 한국에 도착하였고, 선교지역 분할정책에 따라 전라도 지방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전라도 지방 선교의 시작이 된다. 특히 테이트 목사 남매는 1894년 3월 19일 서울을 출발하여 6일간의 여행을 마치고 전주에 도착하였는데, 이것이 전주지부의 시작이 되었다. 이들에 의해 전주에 첫 교회가 설립되었는데, 이 전주서문교회는 전라도 지방의 최초의 교회이기도 하다.

그런데 유진 벨(Eugene Bell, 1868-1925)선교사는 남장로교회의 제2진 선교사로 오웬(A. D. Owen)선교사와 함께 1895년 4월 9일 내한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는 27세였다. 그의 한국어 이름은 배유지였다. 전라남도지역에서 개척하도록 위임받은 그는 어학선생 변창연과 함께 나주로 가서 일하기로 하고 1896년 11월 3일부터 6일까지 나주지역을 답사하기도 했으나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쳐 거주지도 얻지 못하고 나주지부 설치에 실패하게 된다.

그는 목포로 옮겨가 목포선교부를 설립하고 교회개척과 교육활동에 종사하게 된다. 그의 노력으로 목포 정명학교와 영흥학교가 설립되었다. 이런 선교활동 속에서 서울에서 자동차를 몰고 광주로 향하던 중 교통사고로 아내를 잃었다. 한국에서 당하는 첫 시련이었다. 목포지부를 개척한 그는 1904년 광주로 옮겨오게 된다. 먼저 김윤수 집사를 보내 광주에 거처를 확보하게 하고 주택이 거의 완성되자 1904년 12월 19일 유진 벨은 오웬과 함께 광주로 이주하였다.

그 해 12월 25일 성탄절에는 유진 벨과 오웬가족, 변창연, 그리고 요리사들이 주민을 초청하여 40여명이 함께 예배드렸는데, 이것이 광주지방 최초의 교회인 양림교회의 시작이 되었다. 유진 벨은 이곳 광주에 숭일학교, 수피아여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과 의료 활동, 그리고 교회개척에 힘썼다. 그는 한국에서 30년간 일하고 1925년 9월 28일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고, 그의 유해는 광주 양림동 뒷산에 안장되었다.

그의 둘째 딸 샤롯 벨(1899-1974)은 두 살 때 어머니를 잃었는데, 당시 한국에는 영,유아 사망률이 높아 미국으로 건너가 생활하다가 장성하여 내한하였다. 그는 1912년에 내한하여 군산에서 일하게 된 윌리엄 린튼(William Linton, 1891-1960)을 만나게 된다. 린튼은 21세의 나이로 내한했는데 한국에 온 최연소 선교사였다. 이 둘은 일본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한국에서 일하게 됨으로 제2대 선교사가 된다.

린튼은 교육선교사로 전주, 이리, 군산 등지에서 활동했는데, 전주 기전여학교, 신흥학교 등에서 교장으로 일했다. 부인 샤롯은 한복을 즐겨 입었고, 한국을 사랑했던 이국인이었다. 그는 기전여학교 교장으로 일했다. 그러나 일제의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학교를 폐쇄하게 되자 린튼 부부는 교장직에서 해임되고 강제 추방되었다.

해방과 함께 그는 아내와 함께 다시 내한하였다. 6.25 전쟁 중에 거의 모든 선교사들은 한국을 떠났으나 그는 부산으로 옮겨가 피난민 구화활동을 전개하였다. 전쟁이 끝나고 안정을 되찾게 되자 대학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대전에 1956년 대학, 곧 대전대학을 설립했다. 그는 본래 건축학을 전공하여 교사건축도 꼼꼼치 챙길 만큼 세심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 학교가 1971년 서울의 숭실대학과 합병되어 숭전대학교가 되었다가 1983년 다시 분리되어 한남대학교로 남아 있다. 그는 1960년 사망할 때까지 그의 생의 대부분을 한국에서 일했다. 그의 한국어 이름이 인돈이었다.

위리엄 린튼의 셋째 아들 휴 린튼(Hugh Linton, 인휴, 1926-1984)은 선대에 이어 한국선교사로 일하게 되는데 그가 3대 선교사였다. 그는 1926년 군산에서 태어났으나 미국에서 대학교육을 마치고 부인 로이스 린튼(1927- )과 함께 아버지와 외조부를 이어 한국선교사로 일하게 된 것이다. 그는 해군장교로 복무했는데 인천 상육작전에도 참가했을 만큼 한국과 관련이 깊었다. 그는 순천에 거점을 두고 활동했으나 전라남도의 산각벽지를 돌며 교회를 개척하고 한국인의 친구로 살았다.

특히 1960년대 순천 지방에 결핵환자가 많았으나 병원이 없어 광주나 전주로 이송하는데 불편이 많았고, 이송 중 사망하는 일이 빈번했다. 그의 세 아들도 결핵을 죽었을 정도였다. 이런 현실 때문에 린튼의 부인 로이스는 순천에 결핵진료소와 요양원을 세웠고, 순천결핵재활원 책임자로 1996년 은퇴하기 까지 35년간 결핵퇴치를 위해 일했다. 휴 린튼 목사는 주로 교회개척에 힘썼는데,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닌다하여 ‘순천의 검정고무신’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는 고흥에서 간척사업을 벌이던 중 1984년 교통사고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휴 린튼은 5남 1여를 두었는데, 그 중 둘째가 스티브 린튼(Steve Linton, 인세반, 1950- )이고 막내가 존 린튼(John Linton, 인요한, 1959- )인데, 이들 두 형제가 한국에서 일하게 되어 4대 선교사가 되었다. 이들은 한국에서 출생했고 한국에서 교육을 받았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바처럼 스티브 린튼은 유진 벨 재단을 설립하여 북한 돕기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그는 동생과 함께 북한 주민의 결핵퇴치를 위해 장비와 의약품을 보내는 등 선한 이웃이 되고 있다.

동생 존 린튼은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신촌 세브란스 오국인 진료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특히 그는 한국형 응급 구급차량을 직접 설계 제작하여 119 응급구조체계를 마련하는 데도 기여하기도 했다. 이런 시도는 응급처치만 할 수 있었어도 교통사고를 당했던 아버지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또 다른 희생을 막아보려는 일념에서 설계했다고 한다.

유진 벨, 배유지라는 한국어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한 선교사의 거룩한 열정은 대를 이어 이 땅에서 아름다운 결실을 맺고 있다. 이런 경우를 두고, “희생하는 삶은 아름답다”고 했던가!

 

저작권자 © 코람데오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