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이혼에 대한 한 통계가 나왔습니다. 서울에서 4년차 이하의 신혼부부들의 이혼보다 20년차 이상의 황혼 이혼율이 더 높게 나왔다. 놀라운 사회 변화입니다. 이런 사회적 변화 속에 성경은 이혼에 대해서 그리고 나아가 재혼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이번 5월 기획 기사 주제입니다. 신구약 성경의 교훈 그리고 교회사와 교회법적인 이해, 또한 교회 현실에서 이혼과 재혼을 어떻게 다루는가를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혼을 교회가 치리의 대상으로 삼는 교회를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나아가 실제로 필진을 구하는 일도 어려웠습니다. 이혼과 재혼을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이 바른 교회의 태도인지 점검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혹 독자 중 이혼과 재혼에 관한 다른 주장을 가지고 계신다면 원고를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코닷 연구위원장 이세령 목사-

 

 

   
의외로 많은 신자들이 잘 알고 있는 성경구절에 대해서 실제적으로는 잘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 중에 하나가 혼인과 이혼에 관한 예수님의 선언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느니라.” 결혼식 때 단골로 인용되는 본문이기 때문에 이 말씀을 모르는 성도들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을까? 이 질문에 대하여 처음에는 나눌 수 없다고 자신 있게 대답하는 사람들도 점차적으로 나눌 수도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이 결론에 도달하는 순간,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 나눌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되면, “정말로 나눌 수 없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은 관심에서 사라지고, “어떤 경우에 나눌 수 있는가?”라는 비본질적인 질문만 난무하게 된다--마치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인간적이고 세속적 호기심 때문에 사람들은 “어떤 경우”를 찾아 헤맨다. 처음에는 이 “어떤 경우”가 음행이나 고의적 유기와 같은 ‘성경적’ 원인에 한정되지만 나중에는 불치병, 정신병, 폭행, 도박, 우상숭배 등등으로 확대된다. 이것은 교회 역사가 증명한다. 그 결과 오늘날 교회 안에서 이혼의 원인은 ‘불가피한 경우’로 정의되어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실제로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이혼의 원인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하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 “오죽 했으면 이혼 했을까?”라는 동정적 심정이 다른 모든 고려들을 압도해 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 속에서 “하나님은 이혼을 미워하시느니라(말 2:16)”라는 성경의 명시적 메시지를 성도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한국교회가 말라기 3장 16절은 그토록 강조하면서, 말라기 2장 16절에 대해서 침묵하거나 외면하는 것은 그 만큼 한국교회의 목사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성경본문에 치우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는 근본적인 명제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이 명제에 대해서 동의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혼이 혼인을 나누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이혼으로 나눌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이 생각을 받아들이는 순간 신자들은 불신자와 결혼의 본질에 관한 한 아무런 실제적인 차이가 없게 된다. 불신자들도 이혼하면 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성경적 사고와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이혼이나 재혼과 관련하여 의외로 신자들이 잘 모르는 성경구절이 고린도전서 7장 10-11절 말씀이다.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고 만일 갈릴지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이것은 이혼과 재혼에 대해서 교훈을 주는 몇 개 되지 않는 성경 구절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 구절은 우리가 다루는 주제에 관하여 아주 명시적인 가르침을 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 말씀에 따르면, 첫째, 성도들은 이혼을 해서는 안 된다. 둘째, 이혼을 할 경우에 두 가지 선택이 있는데, 하나는 독신이고 다른 하나는 전 남편과 다시 화합하는 것이다. 셋째, 재혼은 허락되지 않는다.


이 구절에서 적어도 확실한 것은 이혼이 결혼의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이혼이 결혼의 끝이라고 했다면, 사도 바울은 그 배우자에게 독신이나 전배우자와의 재결합을 명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혼은 사람이 법적으로 스스로 나눈 것이지 하나님이 실재적으로 나눈 것이 아니다. 법적인 분리와 실재적인 분리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바울 사도의 가르침을 요약하면, 이혼은 혼인의 끝이 아니라 전남편과 다시 화해하기를 소망하면서 성령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참고 인내하면서 원수를 사랑하는 연습을 하는 훈련과정의 시작이다. 사람이 보기에는 이혼한 부부가 서로 남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짝지은 것을 나누지 않았기 때문에 두 부부는 여전히 하나로 묶여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누구든지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누구든지 버림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라고 선언하셨다.1) 만약 이혼이 혼인의 끝이라면 왜 이혼한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 음행이 될 수 있겠는가? 적어도 이혼이 재혼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예수님의 분명한 가르침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 은연중에 “이혼하면 남”이라는 불신자들의 생각이 성도들을 지배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어떤 경우에 이혼할 수 있는가?”라는 바리새인적인 질문보다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느니라”는 우리 주님의 선언으로 돌아가야 한다. 교회가 “어떤 경우”라는 늪에서 헤어 나와 “끊을 수 없는 언약의 끈(the indissoluble bond of covenant)”이라는 성경적 혼인관을 붙들기를 소망한다. 이제 우리는 혼인을 사람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영적 안목을 갖도록 하자. 이것이 이혼과 재혼이 난무하는 세속화된 한국 사회에서 가정을 바로 세우고 교회를 튼튼하게 하는 길이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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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필자는 의도적으로 누가복음 16장 18절을 인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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