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원하 목사

  신약학, Ph.D.
  산성교회 담임
  코닷 연구위원
이 글에서는 신약성경 본문을 참고하여 세례에 관한 몇 가지 사실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신약성경에 세례가 어떻게 묘사되어 있는지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세례에 관한 모든 논의의 기초가 된다.


1. 세례의 기원


세례를 처음으로 시행한 사람은 세례 요한(Baptist John)이다. 그렇다면 그는 어디서 세례를 가지고 왔을까? 그가 베푼 물세례의 기원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 어떤 학자들은 구약성경의 정결의식이 물세례의 기원이라고 생각하고(참고. 레 11:24-28; 14:8-9; 15:2-12; 민 19:13, 20-21), 어떤 학자들은 쿰란공동체의 정결의식이 물세례의 기원이라고 말하며, 어떤 학자들은 유대교의 입교자 세례(proselyte baptism)가 물세례의 기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들은 모두 그럴 듯 해 보이지만 각기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구약성경과 쿰란공동체의 정결의식은 자기 스스로 반복해서 하는 것이었고, 유대교의 입교자 세례는 공동체에 입교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는데, 정작 세례 요한은 그러한 공동체 입교 의도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이 독창적으로 물세례 의식을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것 같다. 세례 요한은 구약성경의 정결의식과 당시에 존재하던 공동체의 정결의식을 참조하여 나름대로의 정결의식을 만들어낸 것으로 보인다.


2.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이유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이유에 대하여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인간으로서 모범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 동안 시험을 받으신 것도 모범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이며, 십자가를 지신 것도 모범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인가? 이런 시각으로 예수님의 행적을 보는 것은 구속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29-34에는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주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31절 상반절을 보자.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관하여 말하기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라고 한다. 이는 언뜻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말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세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은 친척관계였기 때문에(눅 1:36) 예수님과 세례 요한 역시 어린 시절부터 같이 자라면서 가까이 지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그토록 위대하신 하나님-메시아 인줄은 몰랐던 것 같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 역시 예수님이 누구신줄 정확히 알지 못하였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때가 이르러 예수님에게 세례를 주게 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31절 하반절은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준 목적을 언급하는데, 이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세상에 나타내려 함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목적은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라는 사실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예수님의 세례 후에 따라 온 성령강림과 하나님의 인증(나의 사랑하는 아들)을 통해서 확인된다.


3. 세례인가 침례인가?


기독교 교파 간에 물을 뿌리는 세례가 맞느냐 아니면 물에 담그는 침례가 맞느냐에 대한 의견 차이가 있다. 실로 세례가 맞는지 침례가 맞는지에 대한 논쟁은 오랜 세월 진행되어 온 주제이다. 하지만 아직 이에 대한 명확한 결론이 없는 상태이다. 필자는 신약학자로서 나중에 천국에 가서 꼭 확인하고 싶은 신약의 주제가 몇 가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세례인지 침례인지에 대한 것이다. ‘세례 주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 ‘밥티조’는 ‘물로 씻는다’, ‘물에 담근다’, ‘물을 뿌린다’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용어 자체로서는 세례인지 침례인지를 가늠하기가 힘들다. 다만 신약성경에서 세례가 베풀어진 정황을 고려할 때 침례보다는 세례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셨는데’, 이것은 물속에서 올라온 것이라기보다는 물 가운데 서 있다가 물가로 올라온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마 3:16). 또한 베드로는 설교 후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는데, 이것을 물(강)에 잠그는 침례로 보는 것은 현실적으로 타당하지 않다(행 2:41). 그리고 바울은 밤에 빌립보의 간수 가족에게 세례를 베풀었는데, 이것 역시 침례라기보다는 세례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행 16:33). 따라서 필자는 침례를 무시하지 않으면서, 세례가 더 옳다고 생각한다. 이 말은 침례의 가치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4.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라?


요한복음 3장에는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가 기록되어 있다. 니고데모는 오직 요한복음에만 나오는데, 바리새인이며 유대인의 지도자(아르콘 톤 유다이온: member of the Jewish ruling council)이다. 그가 일부 고위층 사두개인들과 바리새파 율법학자들의 모임인 산헤드린(Sanhedrin)의 회원인지 아니면 다른 종류의 고위 직책을 가진 자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5절에서,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질문으로 거듭남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신다. 이 구절에 나오는 ‘진실로 진실로’라는 이중 아멘 형식구(double amen formula)는 요한복음에서만 발견되는데, 굉장히 중요한 사실을 말할 때 사용된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야 한다’고 하신다. 이 구절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물과 성령이 각각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옳지 않은 해석이다. 물과 성령은 하나의 전치사 ‘엑스’로 묶여 있고, 물과 성령을 연결하는 접속사 ‘카이’는 요한문헌에서 자주 설명의 기능을 가진다(예. 1:16; 4:23; 계 1:19; 2:2, 19; 3:17). 따라서 물과 성령은 상징과 실체의 관계를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국 물은 성령의 정화하는 기능을 상징하는 것이다(참고. 요 7:37-39; 겔 36:25-27; 사 44:3-5; 슥 12:10 등).


5. 성령세례에 관하여


이제 성령세례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사도행전 1:4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명령하신다(참고. 눅 24:49). 그리고 이어서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시는데, 그것은 성령의 오심이다(5절). 예수님은 제자들이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참고. 요 14:16, 26; 15:26; 16:7).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머무르면서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려야 하는 이유는 만일 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 흩어지면(파송되면) 복음 전파의 사명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부활의 확신 위에 말씀과 성령으로 무장된 후에야 비로소 능력 있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감당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은 성령의 오심을 요한의 세례와 대조하면서 설명하신다. 즉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하나님 아버지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이 이처럼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연관 지으시는 것은 성령세례가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시기 위함이다. 즉 물세례를 통하여 성령세례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세례가 물에 의해 적셔지는 것처럼 성령세례(Baptism with the Holy Spirit)는 성령에 의해 적셔지는 것(fullness with the Holy Spirit)이다. 사람이 물로 씻어져서 정화되듯이 죄악이 성령으로 씻어져서 사해진다. 결국 물세례는 죄 사함에 대한 상징이며 의식이나, 성령세례는 죄 사함의 실체이며 내용이다.


맺는 말


우리는 언제나 성경 본문이 말하는 사실들을 교의의 소재로 삼아야 한다. 이는 세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신약성경은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막 16:16)라고 말한다. 따라서 세례는 성례이다. 성경에 나타난 세례에 대한 더욱 깊은 이해와 바른 해석적 토대 위에서 바른 교의를 구축해야 하며, 바른 교의에 근거하여 바르게 세례가 시행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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