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성호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역사신학 교수
  코닷연구위원
이런 주제에 대해서 쓰는 것은 신학교수로서 항상 부담이 된다. 왜냐하면 이 주제와 관련되어 열심히 사역하는 당사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잘못 이해되면 그분들의 사역 자체를 공격한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신학이란 항상 성경의 원리뿐만 아니라 현실과 관행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신학이란 공중에 뜬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서두에서 미리 밝히자면 필자는 진중세례에 대해서 부정적이다. 물론 이것은 절대적인 의미에서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본 논의는 세례의 본질이나 세례의 의미, 심지어 세례의 형식과 관련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절대적인 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쉽게 말해서 이 문제에 대한 명시적인 규범이 성경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이 문제는 개인이나 어떤 집단에 일방적으로 맡겨 둘 수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이런 문제를 두고 의미있는 신학적 성찰을 계속해야 하는 것이다.


본인이 이 글에서 문제를 삼는 것은 특별한 형태의 진중 세례식이다. 그것은 바로 주로 훈련병들에게 시행되고 있는 대대적인 집단 세례식이다. 따라서 자대에 배치되어 교회 생활을 하다가 신앙을 가진 후 군목에게 받는 지극히 정상적인 세례를 문제삼는 것이 아니다. 또한 필자는 이 세례 자체가 무효하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세례이든 물을 수단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베풀어진다면, 그것이 누구에게 혹은 어떤 형식으로 시행되었든지 세례로서 유효하다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다. 그러나 이 세례식이 유효하니까 무조건 할 수 있다는 식으로 생각해서도 안 된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교회 역사적으로 볼 때 가장 대표적인 진중세례식은 500년경 게르만족 중 프랑크의 왕이었던 클로비스가 자기를 따르던 3000명의 군사와 함께 세례를 받은 사건이다. 이것은 게르만족이 그리스/로마 문화에 뿌리를 둔 기독교를 받아들임으로 새로운 중세 문명을 시작하게 되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교회 역사를 통해서 이러한 집단적 세례를 아주 흔한 일이었다. 정치와 종교가 일치되던 시대에 일반 병사들은 상관의 지시에 따라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세례를 받았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 역사적 진중 세례식이 있었기 때문에 중세 유럽이 복음화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좋은 제도는 우리가 계승하여 발전시켜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러한 집단 세례는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의 회원권을 약화시키고 교회의 거룩성을 치명적으로 손상시켰다. 그렇기 때문에 재세례파 같은 경우는 종교개혁 시대에 초대교회와 같은 엄격한 세례를 시행함으로 교회의 거룩성을 회복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교회의 거룩성을 성례와 같은 외적인 제도에서 찾았던 로마 가톨릭과는 달리 재세례파는 교회의 거룩성을 교회를 구성하는 회원들에게서 찾았기 때문이었다. 제자도를 강조하는 재세례파적 전통은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개혁교회 안에서도 점차 자리를 잡았다. 특히 정회원이 되어야 할 자녀들에게 대한 교리문답 교육이 대단히 강조되었다.


군대 내에서 집단적 진중세례는 피상적 세례교육에 기반을 둔 제도이다. 세례를 받는 군인들에 대한 세례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 않을 뿐 아니라 그 군인들의 신앙고백이 제대로 검증  되기가 쉽지 않다. 우리는 로마 카톨릭과 같이 세례가 구원에 필수적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렇다면, 굳이 성급하게 세례식을 행해야 할 절대적 이유가 없다. 기간병이 되어 자대에 배치된 후에 출석하는 교회의 군목에게서 지도를 받아 세례를 받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오히려 그런 방향으로 세례를 인도를 하는 것이 바람직한 방향이다.


결국 진중 세례 문제는 앞으로 한국 교회의 방향을 어떻게 이끌 것인가의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다. 어떻게 하든지 세례를 많이 베풀어서 명목상의 세례교인의 숫자를 늘이는 방향으로 교회를 이끌 것인가, 아니면 숫자는 작더라도 세례 교육을 조금이라도 강화시켜 교회의 체질을 튼튼하게 만드는 방법으로 교회를 이끌어 갈 것인가? 개인적으로 오늘날 교회의 사명은 후자에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교회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문제의 핵심은 교인의 숫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인의 자질에 있다.


교회론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세례는 가시적 공교회로 들어가는 입문이다. 그렇다면 세례는 교회의 기초이다. 기초가 튼튼할 때 교회도 튼튼할 수밖에 없다. 예수님께서도 분명히 우리에게 세례를 주어 제자를 삼으라고 명령하셨다. 세례는 제자훈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외적 수단이다. 이 세례는 단지 외적인 의식을 의미하지 않는다. 세례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베풀어지기 때문에 삼위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필수적이고, 이 고백이 진정한 고백이 되기 위해서 교회는 삼위 하나님에 대한 최소한의 고백을 사도신경에 담았고, 이 고백을 잘 가르치기 위해 교리문답을 발전시켰다. 따라서 오늘 한국 교회가 주님의 지상명령을 잘 순종하기 위해서는 세례교육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가야할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교회에서 시행되는 대규모 진중 집단 세례식은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주변적인 한 가지를 지적하면, 성경에는 앞에서 언급한 세례 교육과정과 무관하게 세례가 베풀어진 기록들이 나온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3000명과 5000명이 집단으로 세례를 받았고, 빌립은 복음을 받아들인 이디오피아의 내시에게 그 자리에서 바로 세례를 베풀었다. 하지만 이런 예들은 오늘날의 집단 세례를 지지할 수 없다. 세례를 베풀었던 사람은 일반 목사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를 직접 받은 사도들일 뿐만 아니라 세례를 받았던 사람들도 히브리어나 헬라어로 구약성경을 잘 알았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몰랐던 것은 단지 구약에 계시된 메시아가 바로 불과 얼마 전에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예수님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였을 때, 그들에게 세례를 거부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당연히 이런 예들을 오늘 한국교회의 규범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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