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는 교회의 얼굴이다

   
  ▲ 고려신학대학원(M.Div)
  3,17,8사단 군종목사
  한국헤비타드 총무
  화란한인교회 담임목사
예배는 교회의 얼굴이다. 교회는 예배를 통해 온 세상을 향해 교회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교회마다 예배의 요소와 순서를 통해 자신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만났으며, 그 하나님과 어떻게 교제하는지를 고백한다. 예배에 성경과 신학과 고백이 녹아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개교회의 예배요소와 순서가 종잡을 수 없다. 각 교단마다 자신들의 신학을 예배요소와 순서에 분명하게 투영시키고 있기 때문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안 될 것이다. 문제는 교회마다 신학과는 배치되는 요소와 순서까지도 효과라는 측면에서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여 예배를 기획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개교회의 예배요소와 순서를 보면 사사기에 기록되어 있듯이 각자 제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는 표현을 쓰고 싶은 충동을 느낄 정도이다.


예배요소와 순서에 대한 스펙트럼을 생각해 본다면 어떤 요소든지 가능하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교회가 원하면 무엇이든지 가능하다는 생각, 언약적인 원리에 맞는다면 도입할 수 있다는 생각, 성경이 금하지 않으면 가능하다는 생각, 성경이 적극적으로 허락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까지 다양하다. 특히 한국교회의 예배요소와 순서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의 만남이라는 생각에서 점차로 멀어져 감을 볼 수 있다. 예배도 전도의 일환이라고 생각하여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자 하는 공연이 되어가고 있다. 듣는 예배가 보는 예배로 급속하게 바뀌어가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개혁교회의 예배는 철저하게 언약적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중세시대처럼 예배의 사유화와 획일성이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개 교회 직분자들에 의해 예배순서가 수시로 변경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예배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없는 예배기획자들에 의해 예배요소와 순서가 마음대로 주물러지고 있다. ‘예배는 언약백성이 하나님과 공식적으로 만나는 것’이라는 생각이 점점 희석되어지고 종교적인 열정만이 넘쳐나고 있다. 예배요소와 순서 및 예배분위기에 대한 기획은 넘쳐나지만 정작 예배의 본질에 대한 논의는 늘 뒤로 밀리고 있는 실정이다.


개혁교회예배는 언약적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배하는 공동체이다. 성도의 삶과 교회생활의 중심이 예배이다. 그런데 이 예배는 특히 공적인 예배를 말한다. 개인적으로 혼자서 성경을 묵상하고 찬송하는 것을 예배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직분자들의 인도를 따라 성도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공적인 예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공적인 예배는 형식적인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공식적으로 자기 백성을 만나주시는 공개적인 자리이다. 신자들은 공적인 예배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만나주신다. 신약 성도들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달리 시내 산이 아니라 하늘의 예루살렘에 나아간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공적인 예배이며, 그 공적인 예배는 항상 언약적인 예배일 수밖에 없다. 사제만 활동하는 감독교회의 예배와 회중만 활동하는 회중교회의 예배와 다른 개혁교회 예배의 독특성이 언약에 대한 이해에 있다. 


개혁교회 예배는 언약적이다. 개혁교회는 신자들이 직분자들의 인도를 받아 주의 거룩한 몸을 이루어서 하나님께 공식적으로 나아가는 것을 예배로 본다. 개혁교회예배의 독특성은 바로 이 언약에 대한 이해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찾아와 주셔서 맺으신 언약은 세상 사람들이 맺는 계약과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세상의 모든 계약은 두 당사자의 자발적인 계약에 의해 이루어진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맺은 언약은 하나님의 일방성이 두드러진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자기 백성을 부르시고 그들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신다. 하지만 언약을 맺은 후에는 두 당사자가 수행해야 할 의무가 있다. 하나님 편과 그 백성 편에서 각각 언약의 요구에 신실하게 반응해야 한다. 


개혁교회의 예배 요소와 순서에는 이 언약의 일방성과 쌍무성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배순서 하나 하나에 다 언약적인 요소가 녹아있다. 예배요소와 순서를 통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오시는 부분들과 찾아오시는 하나님께 그 백성이 어떻게 반응하고 그 분과 교제하는지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게다가 이 공예배속에 모든 직분자들의 직분사역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모든 직분은 일차적으로 예배를 위해서 부름 받았다. 목사의 말씀선포, 장로의 성찬상보호, 집사의 긍휼사역이 예배를 통해 다 드러난다. 예배를 통해 자신의 직분사역을 확인하지 못한 직분자들은 다른 활동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확보하려고 할 것이다.

   

언약적 예배는 공적인 일이다

한국 개신교 신앙은 철저하게 내면화된 신앙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쉽게 말하면 신앙생활이란 것을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아서 문제되는 것이 있으면 회개하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내면적인 변화와 더불어서 공적인 부분으로까지 확대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다. 물론 신앙의 내면화는 비단 동양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본다. 신앙이란 것은 공적인 성질의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사적이고 내면적인 성질의 것이라는 생각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미 대세를 이루고 있는 생각이 되어 버렸다. 이것은 계몽주의가 신앙을 공적인 영역에서 몰아내고 사적인 영역에 가두어 버릴 때부터 예견된 일이다.


공적인 예배에 참석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늘어가고 있다. 심지어 ‘공적인 예배는 너무 형식적인 것이기에 개인적으로 예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공예배는 대충 떼우고 각 그룹별로 모여서 성경공부를 한다든지 특별한 은혜를 받기 위해 기도원이나 특별한 집회에 참여하기를 좋아한다. 영성을 위해서는 개인적인 경건의 실천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회로 부르셨을 때 개인적인 수도생활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지체로 사는 것을 통해 우리의 구원을 완성시키신다고 교훈하고 있다.   


공적인 예배가 너무 경직화됨으로 말미암아 삶의 예배가 강조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공적인 예배는 삶의 예배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신약시대에는 제사의식으로서의 예배가 없어지면서 상황이 자연스럽게 바뀐다. 신약성경에서 사용된 leitourgia와 latreia의 용례가 이 사실을 확인해 줄 것이다. 신약성경에서는 성전예배에 사용된 용어들이 폭넓은 상황으로 확장된다. 예배가 삶과 뗄 수 없이 연결되었다. ‘삶의 예배’라는 말과 ‘가정교회’라는 말을 사용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모여 드리는 공예배와 하나님의 백성들의 전체 모임인 공교회의 개념이 희석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이라는 방편을 통해 자기 백성들을 공적으로 만나 주셨다. 신약시대에도 이 원리는 변함이 없다. 그러므로 신자는 개개인의 신비체험이나 영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공적인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본다. 전통적으로 개혁교회는 예배의 이 언약적 중요성을 깨달았기 때문에 예배요소와 순서를 교단총회를 통해 항상 논의해 왔다. 예배순서를 첨가한다든지, 예배순서를 바꾼다든지 하는 것도 철저하게 신학적인 토론과정을 거쳐서 확정해 왔던 것이다. 이것이 총회지상주의가 되면 언제든지 반대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예배를 통해 교회의 하나 됨을 확인하기 힘든데 다른 무엇을 통해 하나 됨을 확인할 수 있겠는가? 신자들이 사업상, 그리고 특별한 사유로 인해 타 지방으로 출타했을 때에 같은 교단 교회의 예배에 참석해서 한 교회에 속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까? 우리는 장로교에 속한 고신교회,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개혁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초교파교회를 은근히 지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신자는 언약적 예배에서 놀라운 자유를 누린다

개혁교회의 예배가 언약적임에도 불구하고 목사 개인의 원맨쇼처럼 보이기도 한다. 교인들의 참여를 배제한 체 목사 한 사람이 중세 로마 카톨릭의 사제처럼 홀로 예배를 이끈다는 느낌이 강하다. 예배요소와 순서를 지나치게 고정시킨 것도 이런 인상에 한 몫을 한다. 예배가 획일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예배는 성경적이고 언약적이어야 하지만 성경에서 예배요소가 이런 것이어야 한다고 명문화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성경봉독과 설교, 세례와 성찬식, 기도와 찬송이 예배의 핵심요소라는 것은 성경을 통해 얼마든지 증명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요소들도 실은 성경적인 원리에서 추론한 것일 뿐이다. 우리 개신교는 유대교의 회당예배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성경적인 예배라는 말로 각 시대의 교회들이 누려야 할 자유를 억압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예배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조차도 언약에 근거한다고 본다. 언약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다. 언약은 철저하게 관계적이다. 그러므로 언약에는 놀라운 자유가 있다. 언약은 세상적인 계약처럼 언약의 조항들이 있고, 그것을 어겼을 때에 내리는 벌과 저주가 있다. 하나님께서 언약의 주도권을 가지고 계시지만 언약의 당사자인 하나님의 백성은 언약에 자유롭게 반응한다. 게다가 언약은 새로운 환경에 직면할 때 새롭게 갱신된다. 언약은 계속적으로 갱신되고, 언약의 당사자들은 계속적으로 언약을 새롭게 고백해나간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 전체와 더불어 공개적으로 언약을 맺으시고, 그 백성과 지속적으로 교제하신다는 사실에 주목한다면 예배요소를 사유화해서도 안되겠고, 예배순서를 화석화시켜서도 안될 것이다. 언약의 주권자인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라 질서의 하나님이시기에 모든 예배는 질서가 있고, 규모가 있어야 하겠다. 하지만 예배는 언약의 당사자인 성도들이 하나님께 기쁨으로 나아가는 찬양과 헌신의 제사가 되어야 한다. 언약예배는 가장 자연스럽고 가장 자유로운 예배이다. 어느 누가 이 자연스러움과 자유로움을 막을 수 있겠는가!  


언약예배는 끝나지 않았다!

공예배의 언약적 특성을 통해 개혁교회는 교회의 공교회성을 계속적으로 고백해 나간다. 교회는 언약적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세우신 바로 그 교회에 동참한다. 세계 전역의 교회들이 드리는 예배가 다양한 것 같지만 그 모든 예배가 언약적인 예배에 근거하고 있는 한 지역과 민족과 교파를 초월하여 하나의 거룩한 공교회에 동참하게 된다.    언약적 예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성경지상주의를 넘어서 전 역사에 걸친 교회전통으로 눈을 돌려야 할 것이다. 역사상의 모든 교회의 예배로부터 배우는 교회만이 참된 예배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회당예배도 포함된다. 더 나아가 구약 제사제도도 분명히 포함된다. 제사제도를 회복해야 된다는 말이 아니라 제사제도가 신약교회의 예배에 주는 시사점이 무엇인지를 깊이 들여다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심지어 우리 주위로 눈을 돌려 타 종파와 교단들의 예배들을 통해 끊임없이 배우는 것이 언약예배와 상충되지 않는다.     


예배는 완결된 것이 아니다. 개혁교회의 예배라도 끝나지 않았다. 언약적인 예배는 그리스도 중심적일 뿐만 아니라 성령 중심적이기에 얼마든지 발전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개혁교회의 예배는 언약적이기에 철저하게 삼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도 신자들을 적극적으로 교훈하는 예배이다. 교훈적이면서도 동시에 송영적인 예배가 바로 언약적 예배이다. 교회는 아무리 최고의 것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린다고 하더라도 늘 부족할 수밖에 없다. 예배는 더 풍성해져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예배를 통해서 늘 영광 받으신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언약적 예배의 본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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