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가정, 학교의 거룩한 삼각형은 복음으로 자녀를 양육함을 말한다.

1. 교육의 책임은 부모 혹은 국가?

▲ 이세령 목사 코닷연구위원장 공교육이 확산되면서 교육의 책임이 국가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적어도 성년이 되기 전까지의 중등 교육을 의무 교육이란 영역에서 국가가 관리한다. 근대 사회로 이행되면서 과거의 신분제 사회가 권력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교육을 독점하며 차별했던 것에서 전 국민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자녀를 양육하는 일의 책임을 부모라고 적시한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 오 계명을 해석함에 있어, 칼빈은 적법한 사회 질서가 부여한 권위를 인정하는 것으로 보았다. 하나님의 이름과 권위가 부여된 통치자와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라고 한다. 이것은 개혁교회가 오 계명을 해석하는 지침이기도 하다. 따라서 자녀를 교육하는 책임이 부모에게 있다는 말과 국가에 있다는 말은 어느 정도 일치된 면이 있다. 2. 미성년자인 자녀가 누구인가? 공교육이 보편화된 오늘날 미성년 자녀의 교육적 책임이 국가와 부모 모두에게 공히 있다. 그러면 양자의 관심사가 충돌할 때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떤 진리가 참된 진리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일 것이다. 따라서 국가의 공교육이 진리를 가르치는 교육이라고 할 때 크게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미성년의 자녀가 언약의 자녀일 경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즉 자녀에게 세상 교육만으로 충족되지 않는 영원한 생명에서 나오는 교육이 필요한 경우를 말한다. 이것은 가정이나 교회에게 맡기면 될까? 교육이란 장은 이런 영적인 책임 즉 언약적 자녀를 교육하는 장으로서의 역할에서 물러나야 하는가? 분명 교육은 국가만의 책임이 아닌 부모의 책임이기도 하다. 부모의 책임이란 말은 부모의 신앙과 고백을 전수할 수 있는 교육이 학교에서도 이루어져야 함을 말한다. 공교육적인 측면과 부모의 신앙 고백을 전수하는 교육이 어떻게 가능할까? 성년이 된 대학교육이 아니라 미성년자인 자녀의 초등과 중등 교육의 두 주체자인 국가와 부모가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갈 것인가? 국가가 시민을 국가의 목표에 맡게 교육해야 할 책임과 성도가 자기 자녀를 신앙으로 양육해야 할 책임이 학교라는 현장에서 잘 조화되는 길을 찾을 수 없을까? 이를 위해서 먼저 믿는 자녀를 둔 부모가 자기의 자녀가 누구인가에 대해서 인식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내 자녀들은 나의 자녀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이다. 이것을 언약의 자녀라고 부른다. 유아 세례를 받은 아이들을 가리킨다. 유아 세례를 받음으로 이 아이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이 아이들은 부모가 육의 양식을 공급해서 자녀를 양육하듯이 하나님의 양식으로 양육될 필요가 있다. 3. 양육의 세 영역에 대해서-가정, 교회, 그리고 학교 네덜란드의 개혁교회(자유개혁교회의 경우, 소위 31파라 불리는)에서 생활하면서 배운 것 중에 하나가 자녀를 기독교 학교에 보내는 것이다. 전국에 믿는 부모들이 세운 초등학교가 전국에 120여개가 된다. 이렇게 된 역사적인 긴 과정이 있다. 부모의 신앙이나 이념에 따라서 교육을 할 권리를 찾는 과정, 그리고 국가가 이렇게 세워진 학교를 공립학교와 같이 교육적인 지원하도록 투쟁한 역사가 있다. 현재 120여 개의 초등학교와 7개의 특수 학교가 있다. 중등 교육을 위한 학교들도 전국에 지역적으로 흩어져 있다. 그리고 초등 중등 교육 교사를 양육하는 학교와 이를 발전시키는 교육 연구소 등이 있다.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왜 개혁교회가 자녀 양육의 한 장인 학교를 국가에만 맡기지 않았는가? 답은 분명하다. 언약의 자녀를 양육하는 책임은 일차적으로 부모에게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모의 신앙 고백을 공유하는 교사들에게 그 책임을 위임하는 기독교 학교를 세운 것이다. 언약의 자녀에게는 언약적 교육이 필요하다. 영적인 양식을 먹이는 교육적 환경과 교육이 필요하다. 이것이다. 가정에서, 교회에서만 하나님의 말씀을 먹이고 양육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라는 장에서도 자녀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기초와 고백 위에서 양육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가정과 교회 그리고 학교를 거룩한 삼각형이라고(Holy Triangle) 불렀다. 우리 둘째 아이가 교육을 받은 초등학교 이름이 우리 말로 삼각형 학교이다(triangel). 거룩한 삼각형이라고 함은 가정과 교회 그리고 학교가 모두 하나님의 자녀를 양육하는 거룩한 장소이어야 하고, 거룩한 말씀으로 양육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4. 양육의 재료로서 복음. 종교 개혁 이후 교회 안에 일어난 가치의 변화, 복음의 발견, 질서와 제도의 변화 등을 총체적으로 집적한 것이 예배당 안에 있다. 구약적인 제사 개념을 유지한 구교의 질서를 뒤집고, 개신교는 하나님의 말씀 중심의 설교와 두 개의 성례를 중심으로 예배를 새롭게 갱신했다. 그래서 개신교회 특히 개혁교회는 설교단을 예배당의 중심에 놓게 되었다. 그리고 좌우에 세례를 주는 물이 담긴 그릇과 성례를 집례하는 성찬 상을 둔다(아래 사진 참조). ▲ <네덜란드 Lelystad라는 도시의 31조파 자유개혁교회의 현대식 건물의 강단이다. 2004년에 지어진 건물이고 가구들이 현대적으로 새것이지만, 가구가 있어야 할 자리는 변함없다. 가운데 설교단이 있고 좌우에 성찬상과 세례를 주는 대가 놓여있다. 유아세례를 받은 아이가 성찬의 자리에 가기까지 강단에서 선포되는 복음의 말씀과 복음을 정리한 신앙고백으로 양육 받아야 한다. 이것은 가정이나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구조는 상당한 교육적 의미를 가진다. 세례는 유아 세례를 대체로 의미한다. 유아 세례를 받은 아이가 자라나서 성찬상 앞으로 나아가기까지 이 아이가 양육을 받는 것은 가운데 있는 말씀의 단을 지나야 한다. 말씀으로 복음으로 양육을 받아야 한다. 이것을 교회는 교회 교육을 통해서 이룬다.


<네덜란드 Lelystad라는 도시의 31조파 자유개혁교회의 현대식 건물의 강단이다. 2004년에 지어진 건물이고 가구들이 현대적으로 새것이지만, 가구가 있어야 할 자리는 변함없다. 가운데 설교단이 있고 좌우에 성찬상과 세례를 주는 대가 놓여있다. 유아세례를 받은 아이가 성찬의 자리에 가기까지 강단에서 선포되는 복음의 말씀과 복음을 정리한 신앙고백으로 양육 받아야 한다. 이것은 가정이나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아이가 교회에서만 자라는 것은 아니다. 교회는 복음을 가장 잘 요약한 교리문답을 잘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나아가서 가정에서도 아이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 만을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영적인 양식 즉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을 먹이고 입혀야 한다. 삶의 가치로서 복음적 가치를 심어야 한다. 그래서 개혁교회의 성도들의 가정은 식탁에서 기도하고 밥을 먹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식사를 마친다. 그리고 육의 양식과 더불어 영적인 양식과 생명과 삶에 대해서 대화를 한다. 그리고 가정의 삶의 가치가 복음적 가치를 가지도록 살아낸다. 


여기서 개혁 신앙을 가진 성도들은 만족하지 않았다. 일주일의 시간중 많은 부분을 학교에서 보낸다. 여기서도 세상의 이념과 국가의 질서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학교도 복음의 가치로 세우기를 소원하였다. 진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믿지만 그러나 영적인 양식을 공급하는 학교가 되기를 바란 것이다. 우리의 아이들이 세상의 가치에 전도되지 않고 복음적 가치에 굳게 서는 일을 위해서 포기하지 않는 노력을 기울인 것이다. 유아세례를 받은 아이가 성찬식에 참여하는 성인이 되기까지 교회에서 복음을 가르치고, 가정에서 복음을 읽고 생활화 하고, 이제 학교에서 교육이란 틀에서도 복음적 가치를 소화하도록 했다. 


거룩한 삼각형의 모든 영역이 복음으로 충만해 지도록 함으로서 부모가 유아 세례 때 했던 서약에 대해서 충실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 거룩한 삼각형으로 불리는 도식

5. 국가와의 교육 책임을 나누는 일을 위해서

앞서 언급한 대로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이다. 따라서 기독교 학교는 기독교적 가치를 가진 교사가 중요하다. 즉 부모와 신앙 고백을 함께 하는 교사가 중요하다. 그리고 부모와 교사를 형성시킨 복음적 가치 즉 세계관이 중요하다. 그런 세계관에 의해서 운영되는 학교는 진리가 하나님의 진리라는 말에 배반되지 않는다. 따라서 학문적인 발전의 결과들에 대해서 고백과 충돌이 되지 않는 한 겸허하게 인정한다. 그래서 기독교 학교는 기독교 학교만의 특별한 교육과정과 교재를 가지지 않는다. 이런 학문을 다루는 태도와 질서가 중요하다. 그리고 그런 태도를 학습하는 성경과 교회의 역사를 배운다. 그리고 대화를 통해서 성경적이며 복음적인 가치관을 습득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의 습관들을 익힌다.


이를 위해서 국가가 요청하는 목표가 크게 배반되지 않는다. 그래서 국가의 요청과 더불어서 기독교 학교는 자신의 가치를 충실하게 유지할 수 있다.


여기서 최근에 붉어진 사립학교 이사진 구성에 대한 논의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다음 기회에 다루도록 하자. 나아가서 믿는 자녀를 양육하는 기독교 학교와 불신 아이들을 전도할 목적의 미션스쿨과는 개념이 다른 것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6. 한국 교회의 현실에서

한국 교회의 경우 그 동안 양적으로 질적으로 피 선교지로서 성장을 거듭했다. 그리고 나아가서 이제 세계 교회에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여 세계 교회를 세우고 있다. 우리 고신 교회도 그런 흐름과 유관하다. 이제 우리의 자녀들을 어떻게 양육할 것인가를 고민해 보자. 


우리의 자녀들을 공교육이 아닌 사교육에 내 던져진 채로 자라가고 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과외를 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 이것이 한국이 요구하는 대체적인 가치의 반영이다. 이런 교육적인 현실에 교회와 성도들이 안주한다면 우리 자녀들의 세대가 믿음 위에 서는 내일을 보장할 수 있을까?


지금부터라도 교회가 인식을 새롭게 하자. 주일에 교회 학교 교육에 철저함을 기울이고, 가정에서 가정예배와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삶을 회복하고 성경적 가치를 적용하는 훈련을 하도록 하자. 그리고 나아가서 평일에 우리의 자녀들에게 기독교 교육이 이루어지도록 방과후 학교나 주말 학교를 교회가 장소를 제공하고 부모들이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바란다. 교회가 이를 적극 도와야 한다. 나아가서 기독교 학교를 만들어 가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성경과 신앙고백, 교리문답 그리고 교회의 역사를 잘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복음적 가치를 가지고 세상을 보고 실천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사교육에 우리 아이를 던져 놓을 만큼 한가한 때가 아니다. 사교육이 아니면 우리 아이들이 과연 대학에 못 들어갈까?  


이제까지 기독교 교육을 하는 기독교 학교가 없이도 좋은 신앙적 인물들을 길러 왔다. 모두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런 은혜가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각자에게 더 진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하는 방식이 무엇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현재까지 그래왔기에 앞으로도 연속되어야 한다는 것은 근거가 없다. 그리고 보장도 없다. 이미 세례나 입교를 한 성도들이 모인 기독교 대학이 중요한 것인지 아니면 우리의 자녀들을 바르게 교육하고 보호해야 할 기독교 초등학교와 중등학교가 더 필요한지 판단해 볼일이다. 


7. 글을 마치면서

한국 사회가 직면한 문제들 중에 첫째가 빈부의 격차로 인한 양극화의 문제라고 본다. 이것은 최근 복지 논쟁으로 발전하고 있다. 둘째는 교육 문제이다. 사교육과 영어 교육이란 광풍 앞에 한국 사회가 무너지고 있다. 과연 교회가 가진 복음이 이런 신음하는 사회 속에 답을 줄 수 있는가? 필자는 믿고 있다. 답이 있다고 바로 복음이 답이라고. 교육이란 현장에서 성도들에게 복음은 전혀 새로운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눈을 들어보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성실한 부모가 되려고 하는가? 유아 세례 때에 서약한 일에 대해서. 아이를 말씀으로 양육하며 아이를 위해서 기도하고 아이와 함께 기도하기를 계속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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