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고백에 충실한 목회를 구현하는 교회상을 그려본다.

   
  ▲ 이세령 목사

  코닷연구위원장
오늘의 한국 교회가 지속적인 건강한 교회로 성장하기 위해서 어떤 방향이 필요할까? 11월의 기획기사로서 내년도 목회 계획을 주제로 하였다. 여러분에게 원고 부탁을 했지만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많은 기사들이 실리지는 못한다. 서너 편의 글이 서론 격의 필자의 글을 비롯해서 차례로 실릴 것이다. 먼저 목회 계획이 담아야 할 현실적 이해를 나누고자 한다. 


먼저 목회계획에 앞서 현재 한국 교회와 주변 현실을 고려하면서 목회적 기본 관심사를 위한 제안을 해본다. 세 가지로 규정해 보자


먼저 뒷문을 막고, 다음 앞문은 열고 그리고 주변을 정리한다. 


1. 먼저 뒷문을 막는 것이다.

교회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빠져 나가지 않도록 문단속을 잘하는 것이다. 문단속이 의미가 있으려면 무엇보다 안과 밖의 경계가 분명해야 한다. 이미 교회로 들어온 성도들에 있어서는 세상과 구별된 교회적인 표시가 필요하다. 그래야만 교회가 가진 거룩성도 보존하게 된다. 


1) 이를 위해서 교회는 이명증을 주고받는 제도적인 정비가 필요하다.

이것은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의 주민등록증과 같은 것으로서 이사 등 많은 현실적인 필요에 의해서 이동을 하더라도 이명증이 함께 가게 됨으로 교회의 테두리가 보호된다. 이명증을 통해서 교회의 테두리가 확보되면 교회의 질서가 서게 된다. 치리가 가능하게 되고, 공평이란 원칙에 의해서 교인들을 영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다. 이전에 신앙생활을 한 성도들의 역사가 함께 보존됨으로서 치리의 형평성이 보존될 수 있게 된다. 오늘날 교회의 치리가 약화되었다고 말하는 것의 실체는 이명증과 관련이 있다. 교회의 경계를 분명히 하면 이때부터 교인들을 규정하고, 거룩을 유지하는 치리와 권징의 시행이 가능해 진다. 


2) 이명증을 통해서 교회의 경계가 규정되면 그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학습과 세례 그리고 직분자의 훈련을 잘 하는 것이 필요하다.

신앙생활에 관심을 가진 성도들에게 성도됨을 위해서 학습, 세례를 받아 온전한 성도로서 서도록 한다. 이런 훈련이 철저해야 한다. 훈련의 내용이 신앙고백과 교리문답에 기초하고, 실제적인 경건의 훈련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개인적인 경건의 훈련, 가정에서의 경건, 그리고 삶의 자리인 학교나 직장 생활 속에서의 경건의 능력이 드러나는지를 확인 점검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 생활 속에서의 의무와 권리에 대한 분명한 지침을 규정하고 이를 즐거이 감당하도록 해야 한다.


학습과 세례가 성도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훈련시키고, 나아가서 교회를 비롯한 삶의 다양한 장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사는 삶을 돕는 직분자를 잘 훈련해야 한다. 복음의 말씀으로 다스리는 장로들이 필요하고, 복음의 섬김을 하는 집사들이 필요하며, 복음을 역사 속에 선포할 수 있는 목사들을 양육하는 일이 필요하다. 


3) 권징이 시행되어야 한다.

권징은 교회의 거룩성을 유지하는 방편이다. 교회 안에서 죄가 만연하도록 해서는 안된다. 이명증으로 교회의 경계를 분명히 하고, 학습과 세례 그리고 직분자들의 역할이 분명한 자격과 훈련과 임직이 이루어진다면 교회 내부를 거룩하게 만들 수 있는 기반이 형성된다. 그리고 실제로 치리의 한 형태로서 죄를 책망하고 다스리는 일을 하게 된다. 


2. 다음은 앞문을 열어야 한다.

앞문을 연다는 의미는 교회가 새로운 성도들을 맞는 태도를 가진 것을 말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가 중요하다. 다산과 전도이다.


1) 산아 제한과 다산에 대해서

한국 사회가 다산을 포기한 것을 따라서 교회도 이를 맹종하였다. 이제 주일학교가 없는 교회들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다산이 하나님의 복이라는 사실을 회복해야 한다. 모든 복을 한국 교회가 받으려고 간구한다. 그러나 가장 큰 복인 생명의 복을 얻기 위해서 간구하지 않고 오히려 피한다. 산아 제한 정책에 휩쓸려서 교회가 낙태 등에 대해서 치리나 권징을 했다는 교회를 거의 듣지 못했다. 이것은 한 시대를 휩쓸고 간 엄청난 죄에 대해서 교회가 침묵한 것이다. 교회적인 회개가 필요한 사안이다. 그리고 이제부터라도 교회가 다산이 복이라는 사실을 설교하고 권장해야 한다. 


최근에 '다음 세대'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과연 다음 세대에 교회가 오늘과 같이 흥왕하겠는가? 교회들마다 주일학교에 많은 투자를 하고 교육관을 짓는다. 그리고 교육 정책을 엄청나게 쏟아놓고 교재를 개발하고 만든다. 그러나 이것들의 본질이 무엇인가? 결국은 제한된 아이들 중에 우리 교회에 오는 애들 많게 하는 시장 원칙의 지배가 아닌가? 


과거 한국 교회에는 주일학교 아이들이 바글바글 했다. 이것이 진정한 소망인지 모르고 교재 제대로 없이 가르쳤다. 그들이 자라서 한국 교회를 이루었다. 교육도 좋고, 정책도 좋지만 무엇보다 대상 자체가 풍부하게 만드는 것이 최고의 정책이다. 아이를 많이 낳아야 한다. 학신이나 젊은 세대들에게 이것이 교회를 살리는 길인 것을 가르쳐야 한다. 


실제로 유치부 교육 내용 중에 "동생을 낳아 주세요."라는 교재를 만들어서 배포해야 한다. 아이가 하나님의 아이가 되어서 복음으로 자라며 세상 속에 서도록 해 주실 것을 믿어야 한다. 번성의 약속이 세상의 어떤 것도 막지 못한다는 확신 속에 교회가 있어야 한다. 


2) 전도에 대해서

그리고 전도이다. 믿는 부모를 통해서 교회의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듯이, 세상 속에 있는 사람들이 교회로 들어오는 것을 통해서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다. 새로운 생명을 낳고 양육하는 것보다 귀한 것은 없다. 전도가 계속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다산과 전도라는 앞문을 열수 있는 교회의 태도는 바로 복음을 가지고 존재하는 방식이다. 


3. 마지막으로는 주변을 정리하는 것이다.

주변이라고 함은 교회의 환경을 말한다. 세상이 교회를 어떻게 이해하도록 만들 것인가? 여기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교회의 존재 방식이 복음적이라는 것을 세상에 보여야 한다. 교회가 세상의 권리와 이익에 철저히 함몰된 실체로 이해되는 것이 현실이다. 권리를 탐하고, 자리에 연연하고, 매사에 돈이 개입된다. 이것은 세상의 질서도 정화되고 있는 현실이다. 


교회가 복음적인 존재 양식으로 서 있는 것이야 말고 세상에 대한 주변을 정리하는 것이다. 이것은 시대마다 그 시대가 아파하는 현실에 대한 대안적 공동체로서의 모습으로 드러나야 한다.


일제시대에는 신사참배을 거부한 것은 복음에 배반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런 복음적 저항이 자연스럽게 일제에 대한 저항이자 나라 잃은 아픔에 대한 위로이자 애국의 발로로 표현된다. 이것이 바로 그 시대에 주변을 정리한 것이다. 


6.25와 같은 전쟁 시절에 필요한 구호물자를 나누어 주고 격려하는 일을 하는 위로의 역할도 중요하다. 가난한 시절에 교회가 복음을 통해서 삶의 변화에 대한 의지를 심어 주었던 결과를 가진 것도 의미가 있다. 


그러나 독재 정권을 지나면서 보수교회가 친권력 지향을 했던 일의 열매는 지금 그것을 저항했던 가톨릭교회에게 그 열매를 내어 주게 된다. 명동 성당으로 대표된, 약자와 고통의 참여라는 것을 외면한 한국 교회는 성장을 가톨릭에 내어준다. 서구에 있어서 가톨릭은 아동성학대라는 추악한 이름으로 수습하기 어려울 정도로 기울어져 가는데, 한국의 가톨릭만은 성장일로에 있다. 이것은 주변에 어떤 모습으로 비추어지는가를 말한다. 그렇게 주변에 누적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신을 찾을 때 성당이란 매개체를 통해서 하나님을 찾게 된다. 선택을 돕는 환경이다. 역사를 위로해 낸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된다. 명동 성당 마당에서 해 준 밥 한끼 먹고, 거기서 주는 용돈 한번 받은 사람들과 그들의 주변을 한번 다시 보게 된다.  


그러나 이제 독재나 민주화라는 시대는 지났다. 시대가 지나면 항상 새로운 과제와 기회가 주어진다. 오늘날의 한국교회의 주변은 사교육과 빈부의 양극화라는 과제 앞에 함께 놓여있다. 


집단적 권리 포기

교회가 자기 주변을 정리하는 방식에서 오늘날 중요한 과제를 이렇게 정리해 본다. "집단적 권리 포기"이다. 집단적 권리 포기. 집단은 항상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형성된다. 그런데 집단이 되어서 이익이 아니라 권리를 오히려 잃어버리려고 모이는 곳이 교회이어야 한다. 손해를 보는 곳,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서 교회가 더 희생을 하는 곳이란 복음적 정신이 이 시대를 관통해 내어야 한다.


경제가 성장하면서도 빈부의 양극화가 심해진 것은 미국식 성장과 금융 중심의 경제, 즉 신자유주의 경제에 무조건 따라간 국가 현실을 반영한다. 파이가 커져야 한다는 이론에 무조건 항복을 한 결과이기도 한다. 이런 반성의 한 틀이 지난 번 서울시장 선거 결과이다. 그러나 양극화의 해소를 위해서 주어진 예산의 범위를 조정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정치권은 양극화 현상을 극복하는 방식으로 일자리 창출과 복지 문제를 다루고 있다. 여기에 정치권의 이해관계를 위해서 증세 문제를 용기 있게 다루지 못하고 있다. 실질적인 재원이 있어야 복지가 정착될 수 있다. 결국 국채나 지방채의 발행과 부채의 증가로만 해결할 수는 없다. 여기서 교회가 성도들이 복지와 일자리 창출과 사교육 근절을 위한 자발적 납세와 증세 운동과 같은 것이 필요하다. 


한국의 경우 자영업자들의 납세가 불투명한 경우가 많다. 전문직 종사자들의 납세도 마찬가지이다. 강남에 대형 교회들은 이런 부류들은 없는지를 교회적으로 반성해야 한다. 자발적 납세의 의무에 충실하여 지방 자치 단체와 국가의 재원을 적절하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 성도들이 세례를 받거나 직분을 줄 때 십일조를 내는가 만을 문답하지 말고 국가에 세금을 충실하게 내는지를 당회가 물어야 한다. 이런 노력들이 세상을 변화시킬 실제적인 힘을 제공할 수 있다. 


이것만으로 부족하다면 자발적 증세 운동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갑근세를 낼 때 선택 조항을 넣어서 1-5%정도의 추가 세금을 자발적으로 납부하고 이것은 복지와 국가적 고통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재원의 목적이 되도록 하고, 이를 감독할 수 있는 참여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향후 적정 규모의 세금의 증액이 제도적으로 이루어지는 발판을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목회자들의 자발적 세금 납부 그리고 성도들의 자발적 복지 증세 등을 고려하고 해결해야 한다. 이런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은 교회의 주변을 정리하는 일에 엄청난 효과를 가져다 줄 것이다. 다음 세대를 얻는 일은 바로 이런 것이다. 


이런 주변을 살피는 집단적 권리 포기의 노력들이 교회가 가진 복음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질문할 수 있다. 복음은 정직과 진실 그리고 이웃과 약자를 돌아보는 삶을 담보한다. 우리에게 주신 것은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이다. 삶에 장 속에서 진실을 담아 이웃을 사랑하는 길이 구체적으로 이렇게 드러나야 한다.


집단적 권리 포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것이 내일의 교회를 진정으로 살리는 환경을 조성하는 길이다.


글을 맺으면서

한국 교회가 다양한 필요들을 생각하면서 많은 것들을 하고 있다. 제자훈련, 가정교회, 그리고 두 날개 등등. 그러나 교회가 복음을 담아내는 자기 정체성에 맞는 존재 형태를 가지고 구체적으로 역할하는 것이 필요하다. 많은 훈련과 프로그램들이 복음을 가진 교회의 정체성에 어떤 일부분들을 담지할 수 있다. 포괄적인 안목가운데 복음이 우리의 역사적 현실에서 우리 교회들 모두가 함께 설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이것은 한 교회만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함께 가야 할 길이다.


나아가 이런 제안들이 현실로 뿌리를 내리고 정착하도록 구체적인 과정이 각자의 교회 현실에서 잘 구현되어야 한다. 사실 복음을 담은 신앙 고백에 근거해서 복음에 근거한 삶을 살고 존재하고 역할하도록 하는 것이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것을 어떤 절차를 통해서 실현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목회이다. 목회의 계획은 이런 것을 구현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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