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회 정암신학강좌 발표 논문 요약

 I. 한국 교회의 현실

▲ 변종길 박사 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
오늘날 한국 교회의 윤리 약화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여기저기서 비판과 탄식의 소리가 터져 나온다. 한국 교회가 그동안 복음을 잘못 이해해서 이렇게 되었다는 주장이 많이 들려온다. 너무 믿음만 강조하고 행함을 강조하지 않아서 그렇다는 것이다. 심지어 한국 교회가 그동안 금과옥조처럼 받들던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가르침이 잘못되었다는 주장도 나온다. 예수님은 분명히 ‘행함’으로 천국에 들어간다고 가르치셨는데, 신학자들이 이것을 이신칭의 교리로 바꾸어 설명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왜곡되고 한국 교회의 윤리 약화를 가져왔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비판의 대상 가운데는 박윤선 박사도 예외가 아니다. 오히려 그의 성경 해석과 신학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한국 교회를 잘못된 길로 인도했다고 한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 교회의 윤리 약화의 주된 책임을 박윤선 박사에게 돌리는 사람들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주장이 과연 옳은지를 면밀히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필자는 이 논문에서 박윤선 박사가 복음을, 특별히 예수님의 산상보훈을 바로 이해했는지를 검토하였다. 박윤선 박사를 비판하는 모 신학자의 주장이 과연 옳은지, 그가 과연 박윤선 박사를 바로 이해했는지,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바로 이해했는지를 자세히 검토하였다. 구체적으로는 많이 논란이 되는 난해구절인 마태복음 5:20, 5:22, 7:21과 요한복음 5:29을 살펴보고 나서, 또한 이신칭의와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야고보서 2장을 살펴보았다. 이 구절들에 대해 우선 박윤선 박사가 어떻게 해석했는지를 살펴보고, 그다음에 이 해석을 비판하는 신학자의 견해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았다. 그런 다음 이 구절들에 대한 올바른 견해가 무엇인지를 밝히고 나서 과연 박윤선 박사의 견해가 옳은지, 아니면 그를 비판하는 학자의 견해가 옳은지를 객관적으로 평가하였다. 그래서 혹 박윤선 박사의 견해에 문제점이나 부족함이 있으면 그대로 인정하고, 그렇지 않고 그를 비판하는 사람이 오해하거나 곡해한 것이 있으면 그대로 지적하였다.


II. 박윤선 박사의 성경 해석

결론적으로 대부분의 경우에 박윤선 박사는 건전한 개혁주의적 견해를 대변하고 있다. 물론 박윤선 박사의 성경 해석 중에는 부족한 부분도 있고 잘못된 부분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부분적이거나 주석에 있어서 그의 한계 때문이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7:21에서 “...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가리라.”라는 말씀에 대해 구약시대에서처럼 ‘정죄 또는 심판의 법칙’으로 이해한 것은 그 한계를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박윤선 박사를 비판하는 학자가 이 말씀을 우리가 ‘행함’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으로 이해한 것은 심각한 오해이며 곡해이다. 그는 주장하기를, 현재 천국은 ‘믿음’으로 들어가지만, 미래 천국은 ‘행함’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행함’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은 그런 뜻이 아니다. 이 구절의 말씀은 거짓 선지자와 같은 ‘형식적인 믿음’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고 ‘참 믿음’이 있어야만 천국에 들어간다는 뜻이다. 참 믿음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이 구절이 말하는 바는 <믿음> + <행함>으로 <천국>에 들어간다는 뜻이 아니라 <참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간다는 뜻이다.

  

이것을 예수님은 마태복음 7:23에서 분명히 밝히신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이 말씀은 이들이 처음에는 원래 ‘믿음’이 있었는데 나중에 ‘불법’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천국에 못 들어가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들은 원래부터 믿음이 없었다. 처음부터 예수님을 안 적이 없었다. 이것이 우리말 번역에는 분명히 나타나 있지 않으나 원문에는 분명하다. 원문으로는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였다.”로 되어 있다. 즉, 여기서 ‘알다’(기노스코)는 동사가 현재형이 아니라 ‘아오리스트’(aorist)로 되어 있다(에그논). 우리말로는 ‘과거’로 번역될 수 있다. 그래서 원문의 뜻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였다.”, “내가 너희를 한 번도 안 적이 없다”라는 것이다. 영어 성경에는 다 “I never knew you.”로 바로 번역되어 있으나, 우리나라 번역은 (필자가 살펴본 바로는) 모두 다 ‘현재 시제’로 잘못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마치 처음에는 ‘믿음’이 있었으나 나중에 ‘행함’이 덧붙여지지(첨가되지) 않아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처럼 오해되고 있으나, 예수님의 말씀은 이들은 처음부터 참 믿음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박윤선 박사의 성경 해석은 간혹 부족함을 드러내거나 잘못된 곳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을 따라 올바른 개혁주의적 해석을 제공해 주고 있다. 이에 반해 그를 비판하는 학자들은 박윤선 박사를 오해하거나 의도적으로 왜곡하는 것이 많으며,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오해하고 있다. 오직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간다는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무너뜨리고 있으며, 천국 가는 길을 잘못 소개하고 있다. 인간의 행함을 구원의 ‘전제조건’ 또는 ‘필수조건’으로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부정하고 로마 가톨릭의 구원론으로 되돌아가고 만다.


III. 감사의 규칙

그러면 이신칭의의 가르침은 행함을 약화시키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이신칭의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의 공로가 전혀 없이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에 의지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 진리를 바로 깨우치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게 된다. 그래서 이신칭의의 가르침은 우리로 하여금 ‘감사함’으로 선(善)을 행하게 한다.

  

이에 반해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가르침은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움’에 떨게 만든다. 왜냐하면, 도대체 ‘얼마나’(how much) 선을 행해야 구원받을 수 있을지, 소위 구원의 ‘커트라인’이 몇 점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불안과 두려움에 떨게 된다. 그래서 그런 사람에게는 ‘구원의 확신’이 없다. 구원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두려움’에 의해 선행을 행하지만, 그런 선행은 하나님이 기뻐 받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자기의 의로운 행위로 구원받으려고 하는 ‘공로’로서 선을 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에 의지하여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큰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여 기쁨으로 선을 행하게 된다. 이것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감사의 규칙’으로 불렀다.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드리는 선행을 하나님은 기뻐 받으시고 영광 받으신다. 그래서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의 삶은 ‘감사의 삶’이요 ‘찬송의 열매’가 된다.


IV. 해결책은 무엇인가?

그러면 오늘날 한국 교회는 왜 윤리가 문제이고 사회에서 지탄을 받는가? 한국 교회는 믿음을 아주 강조하고 있는 것 같은데, 왜 행함이 따르지 않는 것일까? 이신칭의의 가르침이 문제가 아니라면 무엇이 잘못이란 말인가?

  

그것은 한국 교회가 ‘성경 말씀’을 바로 가르치지 않아서 그렇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라고 하였다(롬 10:17). 그리스도의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들으면 믿음이 자라고, 믿음이 자라면 감사함으로 선행을 행하게 된다. 누가 시켜서 억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원함으로, 감사함으로 행하게 된다. 그런데 행함이 없는 것은 결국 믿음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믿음이 없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해서 그렇다.

  

그러면 많은 사람이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아니, 한국 교회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듣고 성경공부를 많이 하는 나라가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여기에 문제가 있다. 그저 형식적인 예배만 많이 드린다고, 설교만 많이 듣는다고 믿음이 자라는 것은 아니다. 참 믿음이 생기고 자라려면 인간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치우친 말씀이 아니라 ‘성경의 전체 말씀’을 골고루 들어야 한다. 이 점에 있어서 한국 교회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한국 교회는 대체로 사람들이 좋아하는 말씀만 전하는 경향이 있다. 은혜 되는 말씀, 부담 주지 않는 말씀만 전하려고 한다. 그래서 인간적으로 위로받고 듣기 좋은 말씀, 재미있는 말씀을 들어놓고서는 은혜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것은 많은 경우에 그저 재미있는 인간적인 이야기이거나 경건한 코미디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실제로는 한국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해 갈급해 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참 믿음이 자라지 않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행함이 따르지 않는다.

  

한국의 대형교회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기보다 ‘성공 철학’을 전하고 있다. ‘긍정적인 생각’이나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전하는 교회도 많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이 세상에서 성공하면 된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 그래서 교회에는 열심히 다녀도 사회에서는 부정부패를 대수롭지 않게 행하며, 가난한 자들과 약자들을 돌아볼 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로부터 지탄을 받는 것이다. 그 원인은 ‘믿음’은 좋은데 ‘행함’이 없어서가 아니라 ‘믿음’이 좋지 않거나 잘못되어서 그렇다. 그 근본원인은 그들이 교회에서 참된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 전체의 말씀’을 바로 듣지 못해서 그렇다.

  

따라서 한국 교회와 우리나라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교역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는 데 있다. 성공 철학과 인간적인 심리학을 버리고, 재미있는 이야기나 경건한 코미디를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는 데 있다. 우리가 좋아하는 말씀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바로 전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한국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이며, 우리 사회는 다시금 밝게 빛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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