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현장 교사, 생활지도에 대해 길을 잃다
학교폭력이 발생했을 때, 학교폭력자치위원회를 통해 학생을 처벌하지만, 학생은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처벌에 대해 분노하고 교사에게 더 반항적이거나 교실에 돌아가 피해자를 더욱 괴롭힌다. 그래서 피해자는 폭력상황에 대해 알리는 것을 꺼려하게 된다. 그리고 피해자는 자신의 안전을 위해 또 다른 가해자로 변신한다. 이러한 이유로 학생들은 피해발생 시에 교사에게 알리기를 꺼려하고, 교사에게 알리더라도 적절하지 않은 개입이 되어 버려서 사태가 악화되는 경우가 많다.
학생의 잘못에 대해 체벌을 대신하기 위한 상벌점제(그린마일리지)가 있는데, 학생들에게 잘못에 대한 책임을 가르치기 보다는 벌을 피하는 요령을 가르치게 되는 비교육적인 결과들이 나타난다. 교육자 입장에서 폭력을 휘두르는 학생에 대해 사랑으로 풀어나가려는 노력을 하면 온정주의라느니, 폭력을 덮으려고 하는 직무유기라고 비난을 받는다. 폭력에 대해 처벌중심으로 대처하기에도 한계가 있으며, 무조건 사랑과 용서로 대처하는 온정주의적 접근에도 한계가 있다. 지금 학교현장의 교사들은 학교폭력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길을 잃어버렸다.
처벌중심과 온정주의를 넘어선 회복으로
학교폭력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대해 논하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돌아보고 싶다.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와 인간과 인간의 막힌 담을 헐기 위해 이 땅에서 고난의 십자가 지기를 거부하지 않으셨던 평화의 왕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정체성이 되어야 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고후 5:18)
하나님은 우리를 화평케하는 자로 부르셨다. 교실에서 학생들 사이에서 하루도 갈등이 없는 날이 없다. 아이들에게 갈등이 있다는 것은 성장하고 있다는 건강한 신호 중의 하나이다. 기독교사는 학생 간의 갈등이 발생하는 것을 교육적으로 전환하고 그들이 성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겨야 한다.
학급에서 일어났던 한 가지 사례를 소개하겠다. 사회성이 부족한 한 여학생을 놀리는 것에 재미를 들이기 시작한 남학생이 있었다. 그 남학생의 놀림은 조금씩 심해지기 시작했고 어느 날, 그 여학생이 참다못해 교사인 내게 찾아와 울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장난이 심하고, 친구들 사이에서 힘이 세어 보이고 싶어 하는 남학생이라 신경이 쓰였었다. 두 학생을 불렀다. 처음 괴롭힘을 당하던 여학생은 그 남학생을 만나는 것을 몹시 불편해 했지만, 나의 부탁으로 만남에 동의하였다. 둘을 서로 마주보게 하고나서 우선 여학생의 입장을 말하도록 했다. 평소 말이 없던 여학생이라 더욱 입을 꾹다물고 있었다. 아이의 입을 열게 하기 위해 나는 그 학생이 당했던 상황을 상기시켰고, 그 때 느낌이 어땠는지 물었다. 여학생의 얼굴이 점점 긴장되더니 분노로 변하면서 남학생을 향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내가 벌레야!” 그러면서 말문을 튼 여학생은 울면서 자신의 분노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가해 남학생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여학생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여학생은 한 참을 울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했고, 높았던 소리가 조금씩 낮아지기 시작했다. 그 남학생에게도 자신의 입장과 느낌을 말하도록 했다. 그때 남학생의 태도에 나는 놀랬다. 변명을 할 줄 알았던 그 남학생이 자신이 무조건 잘못했다는 것이다. 나는 남학생에게 훈계하지도 않았고, 다만 여학생의 심정을 듣게 했을 뿐이다. 남학생은 진심으로 여학생에게 사과를 했다. 그리고 여학생은 더 이상 그 남학생을 무서워하거나 스트레스 받지 않았다. 그 후 교실에서 두 학생간의 긴장 관계는 보이지 않았고 왕따로 변할 뻔 했던 여학생은 다시 평온한 학교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이 일의 경험은 나에게 학생들을 훈계하기 보다는 그렇게 행동하는 아이들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했고, 갈등 관계에 있는 두 학생을 오랜 시간 서로 대면하여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다. 기독교사로서의 역할은 끊어진 두 관계를 이어주고 화평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학생들의 잘못에 무조건 도덕적 잣대로 심판하고 처벌하려는 응보적 태도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무조건 용서하고 봐주는 온정주의적 태도는 학생들에게 더 이상 책임감을 길러주지 못한다. 서로의 문제가 무엇인지 어떤 피해와 아픔이 있었는지 직면했을 때, 막힌 담이 헐어지기 시작하고 관계의 회복과 상처의 회복이 일어난다.
이와 같이 갈등 당사자 간의 화해와 용서, 피해에 대한 책임, 그리고 두 당사자가 격리되고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로 다시 건강하게 통합되는 것을 회복적 정의라고 한다. 그리고 회복적 정의로 접근하는 학생생활교육과 훈육을 회복적 학생생활교육이라고 한다. 학교폭력에 대해 이제까지의 처벌중심이나 온정주의적 접근을 넘어선 회복적 접근이 기독교사로서의 입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회복을 위한 대화법과 회복적 대화모임
그러면 구체적으로 회복적 정의의 접근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대안들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 몇 가지 대안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사소했던 사건들이 폭력적으로 증폭되는 많은 경우의 원인이 부적절한 의사소통에 있다. 긴장되는 갈등의 순간에 우리가 적절한 의사소통(대화)만 잘 해도 폭력적 상황으로 몰고 가지 않을 수 있다. 이처럼 관계를 이어주고 회복하게 하는 대화방식에는 비폭력대화(NVC)가 있다. 비폭력대화는 적대감 없이, 서로의 인간성을 보는 차원에서 질적인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자신의 욕구와 상대의 욕구를 동등하게 존중하면서 양쪽이 다 만족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때까지 대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비폭력대화는 서로 마음에서 주고받는 대화를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요소가 있다.
① 관찰 : 그때 그때의 상황을 관찰로 “있는 그대로” 보고
② 느낌 : 그 상황에서 자신의 느낌을 포착하고,
③ 욕구 : 그 느낌 뒤에 있는 욕구를 찾아낸다.
④ 부탁 : 그리고 상대가 즐거운 마음을 들을 수 있게 부탁한다.
학생들 간의 다툼이 일어나 교사가 이를 중재해주어야 할 상황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격리시키기 보다는 함께 불러서 서로의 느낌과 욕구를 살펴볼 수 있도록 대화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좋다. 두 아이의 행동에 대해 평가하려 하지 말고, 발생한 일에 대해 어떤 느낌인지 그리고 어떤 의도(욕구)가 있었는지 묻고 대화하도록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서로의 고통을 바라보게 하고, 학생들이 문제에 대해 책임지기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스스로 방법을 찾도록 돕는다.
교사는 대화를 지원하기 위해 학생들에게 서로의 느낌과 욕구를 찾을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질문할 수 있다.
“그 말이나 행동이 있었을 때, 네 느낌은 어땠어?”
“그 말이나 행동했을 때, 네가 원했던 것은 무엇이었니?”
느낌과 욕구를 알아주어 공감이 일어나면 분노가 가라앉는다. 그리고 진정한 화해도 가능하게 된다.
회복적 서클1)
회복적 서클이란 갈등은 당사자들의 문제일 뿐 아니라 공동체의 문제라고 인식하고, 공동체가 함께 해결하기 위해 논의하는 대화모임이다.
1) 이 모델은 브라질의 도미니크 바터에 의해 만들어졌다. 한국에는 2011년 12월에 소개되어 한국 회복적서클 모임이 한국적 모델로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좋은교사운동에서 교사대상 워크샵을 진행하였다. |
이 대화모임에는 진행자와 갈등 당사자들, 그리고 갈등으로 인해 영향을 받는 공동체 구성원이 참석한다. 진행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전 모임을 통해 참가자들을 개별적으로 만난다. 그리고 나서 참여 동의를 얻는다. 대화모임에서 진행자는 모든 사람에게 고르게 말할 기회를 준다. 대화방식은 각자 하고 싶은 말을 하도록 한 후, 무슨 말을 들었는지 상대에게 들은 대로 말하도록 한다. 이러한 대화 방식의 반복과정을 통해 서로의 고통을 듣게 되고 이해하게 된다.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판단이 되면, 모두를 위해 할 수 있는 약속이나 계획을 찾는다. 그리고, 일정한 시간이 지나고 계획과 약속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그로 인해 지금 어떤지 나누는 대화모임을 다시 하게 된다. 만약 공동체가 만족하지 못한다면, 다시 계획을 세울 수 있다.
회복적 서클의 중요한 핵심은 공동체가 문제에 대한 책임을 함께 진다는 것이다. 또한 가해자와 피해자를 격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고통에 직면하게 하고 문제에 대해 자발적으로 책임지도록 한다는 것이다.
가해자-피해자 대화모임2)
형사정책연구원은 회복적 사법의 실천과 모델개발을 위해 연구를 수행해 오면서 한국의 사법현실과 사법의 적용 가능성과 필요성을 고려해 학교폭력 사건에 회복적 사법 실천 모델을 적용하는 실험연구를 수행하였다. 초기 회복적 사법의 논의 속에서 한국 사회문화적 상황에서 뉴질랜드에서 실천된 가족회합이 적절한 모델로 고려되었고 이후 논의 및 개발과정에서 조정모델과 회합모델이 적절하게 적용된 ‘피해자-가해자 대화모임’이 개발되어 실험연구가 이루어졌다. 현재 민간영역이나 서울 가정법원의 화해권고제도도 피해자-가해자 대회모임을 실천모델로 적용하고 있다.
2) 이 모델은 한국아나뱁티스트센터(KAC)가 실천하고 있다. |
학생들을 위한 평화감수성 교육
학생들로 하여금 갈등을 건강하게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갈등에 대해 서로 대립하고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갈등해결을 위해 서로 협력하고 지원하는 평화적 태도를 길러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 다양한 평화감수성 교육과 서로를 존중하며 의사를 결정하는 학급구조와 학교구조가 절실히 필요하다.
폭력적인 학생들에게서 하나님의 형상 바라보기
학교폭력과 관련한 언론 보도를 접하면 접할수록 학생들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커지는 게 사실이다. 또한 학교폭력 대안으로 발표되는 내용들을 보면 학생들을 통제하고 감시하려는 기성세대의 권위적인 오만한 태도가 드러난다. 화평케하는 자로서 교사는 이러한 입장에서 벗어 날 수 있어야 한다.
학생간의 폭력 상황에서 교사에게(화평케하는 자로서) 가장 힘든 것은 폭력을 가한 학생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많은 경우에 폭력을 바라보는 교사는 이미 옳고 그름에 대한 확고한 판단이 서 있어서, 학생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기 전에 훈계하거나 고쳐주려고 한다. 그렇게 되면, 학생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려고 하기보다는 변명하거나 저항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소통의 단절을 가져온다. 그렇기 때문에 교사는 가해자와 피해자들에 대해 어떤 선입견이나 편견을 가지고 있는지 자신을 점검해야 한다. 만약, 학생에 대해 좋지 않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면 그 학생을 편견 없이 바라볼 수 있도록 기도하기를 바란다.
갈수록 거칠어지는 언어와 폭력적 행동 뒤에는 학생들의 외침과 호소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피해학생 중 49.1%가 가해경험이 있다고 사실만 보아도, 학생들이 자신의 자기보호와 안전을 위해 거친 언어와 폭력을 사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처받고 싶지 않은 안전의 욕구가 비극적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편견과 선입견, 권위적인 태도는 상처받은 아이들을 더욱 폭력적으로 만든다. 학생들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기도하자. 학생들은 하나님께서 아름답고 온전하게 만드신 걸작품이다.
학교폭력에 대한 글을 읽고서
1. 경영자 입장에서 본 학교폭력
오늘 우리나라 교육 현실의 문제의 원인을 교육철학의 부재 및 교육문화의 병폐로 본 것은 참으로 옳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방안으로 두레자연고등학교를 운영하고 계신 교장선생님의 글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의문점을 갖게 합니다.
첫째, 대안학교가 하나의 방안으로 제시하셨습니다. 하지만 대안학교는 말 그대로 하나의 대인일 뿐입니다. 특정 소수의 학생들에게는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불특정 다수의 학생들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전혀 도움이 안된다거나 불필요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분명 가치 있고 필요한 일이지만, 지금 논의하고 있는 주제의 초점은 공교육 상황에서 발생하는 학교폭력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부분을 놓쳐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학생인권조례에 대한 입장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글을 흐름을 보았을 때-제가 잘못 이해했을 수도 있지만-학생인권조례에 반대적 의견인 것 같습니다. 저는 어느 입장을 충분히 견지할만한 위치는 아니지만 글을 작성하신 교장선생님께서는 어느 입장인지 선을 분명히 하고 접근해야 글을 읽는 사람이 오해하지 않을 듯 합니다. 그리고 어느 누군가의 인권의 문제를 부각시키면 누군가의 인권이 피해를 볼 수 있고 잘못된 인권의 문제는 방종을 발생시킨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의문이 듭니다. 학생들의 인권의 문제를 올바르게 해 주는 것이 학교폭력과 무슨 상관이 있으며, 그것이 어떻게 방종의 문제로 연결되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인권은 그 어떤 문제보다도 중요하다고 책에서 배웠습니다. 책에서 배운대로 책에서 읽은 대로 접근해 봅니다. 오히려 기성세대, 어쩌면 교육철학-정신을 만든 사람들에 의해 학생들의 인권-정신-삶-생활-가치-미래까지 모두 인권이 유린당했다고 할 수 있는데, 어쩌면 이것이 더 정확한 접근인 듯한데, 방종의 문제를 언급하신 것은 어떤 의미인지요?
셋째, 이러한 교육적 문제, 폭력의 문제를 안고 있는 기독인들은, 교회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이러한 물음에 대한 적절한 대안이나 답이 없습니다. 또 하나의 대안학교인 두레자연고등학교를 소개하고 있을 뿐입니다. 오히려 최근 발생한 학교폭력의 문제들은 대부분 중학교입니다. 그러하기에 더더욱 접근하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2. 학교폭력과 사회적 책임
과도한 학업스트레스로 소통과 감성 능력의 약화, 성적 중심의 입시위주 교육으로 인성교육의 소홀을 문제의 핵심으로 지적했습니다. 지금의 교육문제를 정확하게 정부도 사람들도 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어떤 한 영역만으로 되는게 아니기에 구조적, 사회적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언급은 일반적으로 누구나 알고 있는 내용이고 원론적인 내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정부에서 지적하고 정부에서 해결방안들을 내어놓았지만 말씀하신 것 같이 구조적인 변화가 생기지 않는 이상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다고 넉 놓고 마냥 기다릴 수만은 더더욱 없는 실정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고난 속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아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공동체가 할 수 있는 영역의 일들을 몇 가지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에 동의합니다. 이러한 움직임과 활동의 작은 실천이라도 제시되었으면 합니다. 최소한 이러이러한 활동을 하자는 식의 방안이 필요한 듯합니다.
3. 가정교육이 해답이다.
앞의 주장들과 마찬가지로 말씀하셨듯이 특별하거나 새로운 게 없는 듯합니다.
가정의 변화, 역할이 변화, 가정의 교육적 기능의 상실이 문제의 원인중의 하나는 될 수 있어도 문제의 근본적 원인은 될 수 없습니다. 결국 부모 교육과 책무 강화, 가정과 사회의 역할 강화는 폭력의 근원을 해소 할 수 있는 기본적인 방향일수는 있습니다. 말씀하셨듯이 입시위주의 교육상황은 바꾸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가장 근본적인 문제라면 이 영역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정교육의 부재가 아주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가정교육의 부재의 주장은 가정이 올바로 서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가정을 올바로 세울 수 있는 환경은 어떻게 구성해야 할까요? 이 또한 이미 사회에 만연해 있는 경쟁, 성공, 복, 취업이라는 상황과 연결되어 있고 학교폭력의 연장이 바로 사회폭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자연스레 가정교육의 부재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막연히 가정교육의 필요성을 논하고 가정교육을 중요성을 논한다고 최소한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가정교육의 부재적 상황을 해소하고 가정교육을 현실의 삶 가운데 정착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교회공동체는 가정교육의 열매를 얻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4. 현장 기독교교사들의 고민과 대안적 노력
회복적 학교생활교육은 참으로 좋은 접근으로 여겨집니다. 학교현장에서 수고하시는 선생님들의 노고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러한 대안적 노력들은 반드시 교사들에게 또 하나의 수고를 요구합니다. 그렇습니다. 누가 과연 이러한 노고를 할 수 있을까요? 예, 기독교사입니다.
그러려면 더 많은 수고를 해야 하기에 많은 부담이 있고 이런 부탁을 한다는 것이 미안하고 송구할 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독교사들이 학교일에 더 충실하고 학교를 중심으로 자신의 생활과 역할들을 꾸려나가야 합니다. 기독교교사가 이원화된 학교생활과 신앙생활을 한다면 이러한 실천과 열매는 어려울 듯합니다.
고민과 대안적 노력의 일환들은 문제가 발생했을 때, 문제가 일어난 후에 문제를 봉합하고 치료하기 위한 방안입니다. 문제가 발생하지 않게 하고 문제가 드러난 것 뿐 아니라 드러나지 않은 영역까지 포괄할 수 있는 대안적 노력이 요구됩니다.
몇 가지 생각을 해 보고자 합니다.
모두가 입시위주의 교육, 인성교육의 소홀, 과도한 공부 스트레스 등을 학교폭력의 원인으로 보고 있습니다. 틀린 주장은 아닙니다. 그러나 뭔가 빠진 듯한 생각이 듭니다.
입시교육을 안 한다고 해서 학교폭력이 줄어들까요?
인성교육을 더 강화한다고 해서 학교폭력이 줄어들까요?
과도한 공부의 스트레스로부터 자유하게 해 준다고 해서 학교폭력이 줄어들까요?
학교폭력의 문제를 복음적 입장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선교적 입장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인간론적 입장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이러한 접근의 실제적 증거를 오늘 다 다룰 수는 없지만 이런 접근이 위의 글들에서는 다소 약화되어 있음을 느낍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1. 회개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신앙과 삶은 정부가 지적하고 우리가 모두가 공감하는 학교폭력의 원인들을 내가 직접 잘 살아내고 있는 듯합니다. 우리는 그 영역에서 너무나도 충실하게 잘 살고 있어 많은 혜택과 열매를 몸소 누리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 열매를 더 많이 누리기 위해 온 맘과 온 정성을 다하고 있으면서 학교폭력의 문제를 언급하는 것은 뭔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합니다.
너도 나도 그 경쟁의 열매를 먼저 따기 위해 너무나도 열심히 살고 있는 자신을 반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누라라고 할 것도 없이 나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2. 적극적 개입이 필요합니다.
개인주의적 태도와 사고방식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의 삶과 사고와 생활에 개입하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진정한 교제와 삶을 나누려는 태도는 사랑을 기반으로 한 개입이 당연 필요합니다. 자신만의 삶을 위주로 살아가는 학생들에게 기성 사회는 적극적으로 누군가의 삶을 돕고 도울 수 있다는 분위기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이러한 운동은 당연히 교회가 하는 일이어야 하고 만들어 가야 합니다.
학교폭력 보다는 이미 왕따라는 말이 우리 삶에 아주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폭력문제나 왕따 문제를 해결하려는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합니다.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돕고 어우러진 삶을 나눈다면 우리가 직면한 폭력과 왕따 문제에 접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개입할 수 있습니까?
방법은 간단합니다.
온 교회가 온 주일학교가 온 공동체가 연합하여 해당 학생을 도와야 합니다. 폭력을 당하거나 왕따를 당하는 학생은 개인입니다. 즉 혼자입니다. 혼자서 그 모든 문제를 감당하기에는 버거울 수밖에 없습니다. 스스로는 혼자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돕고 자신이 요청하면 언제라도 자신을 도울 수 있는 공동체, 집단, 조직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몸소 안다면 쉽게 이러한 일을 겪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학생을 위해서 과시적으로도 그것을 여러 방면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 학생이 이렇게 큰 조직, 공동체로부터 보호받고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혹시라도 해당 학생에게 불미스러운 일이 생겼을 때 온 공동체는 함께 방어해 주고 때로는 변호해주어야 합니다. 이런 모습이 외적으로 보일 때 주위 친구들과 학생들이 그 학생을 함부로 하지 못합니다. 이런 적극적 개입이 일단 필요합니다. 이러한 일을 적극적으로 할 수 없고 할 의지가 없는 공동체(교회)라면 여러모로 의심과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하는 교회일 수밖에 없습니다.
조직과 조직의 싸움이 아니라 사랑으로 연결된 공동체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이러한 일을 한번이라도 공동체는 해봐야 합니다. 모든 이들에게 이런 공동체가 교회라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내 식구를 사회적 식구를 확대된 하나님 나라의 가정과 가족을 만들어 가야 한다는 부름에 응답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이러한 공동체에 관심을 가질 것이고, 학생들은 이러한 공동체가 있다는 것으로 안정감과 미래를 보장받는 삶의 평안이 삶 가운데 주어질 것입니다.
3. 학교를 조직적으로 세워야 합니다.
좀 더 적극적인 개입 중 또 하나의 접근은 작은 단위의 학교도 필요하지만 좀 더 큰 단위의 학교를 설립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교단적 차원의 학교-노회적 차원의 학교-시찰단위의 학교를 설립하여 조직적으로 대응하고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4. 공교육 정상화를 위해 교회가 할 일을 찾아야 합니다.
공교육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대안교육을 정말 하나의 대안일 뿐입니다. 공교육을 외면하는 것은 전체 다수의 학생, 어쩌면 가난하고 소외된 학생, 더 큰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학생을 외면하는 것이 됩니다. 대안운동이 정말 공교육에 작은 파장이라도 줄 수 있습니다. 계속 하다보면 하나의 움직임이 될 수 있고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운동을 이 운동대로 하고 공교육을 향한 마음과 사랑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어떻게 공교육을 정상화시킬 수 있을 지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 교회가 기도운동을 해야 합니다. 괜한 힘을 열심히 일하고 학생들을 잘 양육하려고 운동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싸움이나 대결구도를 만들지 말고 그 사람들이 누구이든 상관없이 좋은 교육을 하려는 것이라면 사상과 가치의 문제를 벗어놓고 일반적 선의 견지에서 적극적으로 도와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안경을 많이 가지고 있고 적절한 시기마다 안경을 바꿔서 사용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지금을 공교육을 향한 마음을 모아야 합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에 관심을 두지 말고 학생들을 생각하고 적극적 개입을 통해 공교육을 도와야 합니다. 교회가 도울 일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생각하고 의견을 모으면 분명 답이 있습니다.
전국 교회 단위로 힘을 모아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교사들의 지위 향상과 학생지도를 원활히 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방안을 모색해야 합니다. 최근 등장한 준사법권을 부여하는 방식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경찰제도를 좀 더 원활히 활용하는 방안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더 많은 경찰을 뽑아 학생지도, 학생선도 경찰로서 역할을 담당하도록 할 수 있습니다. 일종의 그린 경찰제도-상담경찰, 학생선도 경찰을 세워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법적, 경찰의 지위가 어느 정도 보호받고 인정을 받는 나라이기에 적절히 활용하면 좋은 방안이 나올 수 있습니다.
-교사를 더 뽑아야 합니다. 교사가 더 많아져서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을 돌 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교사들의 업무를 줄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교사를 더 뽑아야 합니다. 모든 교육이 학교에서 다 소화되고 이루어 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단순한 제안이지만 이를 위해서는 성도들이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즉 이러한 일들을 하려면 무엇보다 많은 공적 자금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자신해서 가능한 한 종부세, 토지세, 부동산세 등과 관련하여 적극적 세납자가 되어야 합니다. 적극적으로 납세의 의무를 감당하고 세금을 더 많이 납부하는 일에 운동이라도 벌여야 합니다. 교회가 가진 자산과 재정들을 공적 교육 정상화를 위해 사용하는 일도 일종의 선교임을 알고 적극 개입함이 필요합니다. 교단적 운동도 하고 정부를 향해 입장 표명도 하고 그래야 합니다. 교단적으로 나서면 안될 일이 없습니다. 이런 일에 종교가 발 벗고 나서는 것은 너무나도 멋진 일이 될 수 있습니다.
5. 교회는 올바른 교육관과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교회는 학교폭력이 오늘날 이 시대가 낳은 교육병폐의 결과임을 알고 교육병폐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가치관 교육, 인성교육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단순히 누구나 해야 한다는 방식의 접근이 아니라 이것도 적극적 개입이 필요합니다.
어떤 방식이 있습니까?
첫째, 교회에서 교육을 받아야 하는 이유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이 이유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반영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모든 설교, 성경공부, 묵상 등 기독교세계관적 가치가 적극적으로 반영될 수 있는 내용을 담아야 합니다. 눈속임의 가르침, 세상을 쫒아 가려는 가르침을 배제해야 합니다.
둘째, 교회에서 학력과 학벌을 문제 삼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학력으로 교회의 리더를 세우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교회에서는 성적(등수)으로 대화의 주제가 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성적 자랑을 말아야 하고 성적문제가 대화의 주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넷째, 교회에서는 취직문제로 학생들에게 부담을 주는 대화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우리에게 정작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하면서 자나 깨나 이 문제로 학생들과 젊은이들을 괴롭혀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 취직자리를 알아봐 주고 자신이 다니는 회사에 취직을 시켜 줄 것도 아니면서...
다섯째, 교회에서는 성공 스토리가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이 부분은 하나님 나라 관점에서 충분히 다루어져야 하지만 오늘 다룰 직접적 주제가 아니기에 잠시 내려놓지만 뭔가 잘못된 가치관이 우리의 영혼을 갉아 먹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