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복협 3월 월례회에서 이 교수, 교계 지도자들 향해 ‘따끔한’ 충고

원로 사학자인 이만열 교수가 한국 교회를 향해 회초리를 들었다. 이 교수는 3월 9일 아침 7시 새문안교회에서 열린 ‘한국 교회와 나라 사랑’ 주제의 3월 한복협 월례회에서 주제 발표를 통해 “1907년 대부흥 100주년을 맞아 한국 교회가 열병에 걸려 있다”며 “평양대부흥운동이 기독교 역사에서는 중요하지만 민족사에서는 그렇게 높게 평가되지 않는다는 걸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 "선조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며 한국 교회 지도자들을 질타한 이만열 교수     ©뉴스파워
이 교수는 기독교의 전래가 구한 말 부패했던 한국 사회를 어떻게 변혁시켜 갔는지에 대해 <대한그리스도인회보>, <황성신문> 등의 기사를 인용, “부정부패한 지방관들 중에는 부정을 고발하는 기독교도들의 항거 때문에 야소교 있는 마을에는 부임하지 않겠다는 현상이 나타났을 정도”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또한 “목사님들, 교계 지도자님들, 똑똑히 들어달라”며 “우리 사회 기독교인들이 사회의 부정부패에 연루 안된 곳이 없다”며 “한국 교회를 이렇게 키워서 되겠느냐. 우리 선조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며 따끔한 충고를 이어갔다.
 
새벽기도회가 나라를 위한 기도회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도 상기시켰다. 1905년 을사늑약과 1907년 정미7조약 등 일제의 침략의도가 노골화되던 때에 맞춰 상동교회 중심의 1주일 간 기도회가 이어졌고, 그 즈음에 새벽기도회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아울러 독립운동가였던 김구 선생이 진남포교회의 엡윗청년회(Epworth League) 총무였던 사실도 소개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을사늑약을 무효화하기 위해 감리교회의 엡윗청년회가 상소운동을 벌였고, 김구도 이 철폐운동에 참가했다는 것.
 
또한 당시 내각총리대신이던 이완용과 일진회 회장이던 이용구를 처단하기 위해 앞장섰던 이재명 의사를 비롯해 행동대원 이학필 목사 등 대부분이 기독 신자였음도 소개했다. 이 교수는 “한말 기독교인들의 의열투쟁은 1920년대 적극화된다는 점에서 한국 독립운동사에 있어 선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고 말했다.
 
3.1운동과 임시정부운동에서도 기독교인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었음을 강조했다. 이 교수는 “3.1운동 당시 기독교인의 숫자는 300만의 천도교에 비하면 20만 명에 불과했다”며 “그럼에도 민족대표 48명 중 24명이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은 그만큼 그리스도인들이 민족운동에 적극적이었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임시정부 때 각각 초대 대통령과 초대 주석을 지낸 이승만과 김구를 비롯해 의정원(지금의 국회)엔 손정도, 김인정 목사 등 목사들의 참여가 많았다는 사실도 빼놓지 않았다. 이 교수는 특히 손정도 목사에 대해 “정동교회를 섬기다가 망명해서 임시정부에 몸담았고, 나중엔 길림에 가서 목회를 했는데, 자녀의 친구들이 김일성 등이었다”고 말했다.
▲ 한복협 월례회에서 이수영(오른쪽), 이만열 교수(왼쪽) 등 참석자들이 기도하고 있다.     ©뉴스파워

손정도 목사와 관련된 김일성의 유훈도 소개했다. 이 교수는 “손정도 목사 기념사업을 하라”는 “김일성의 유훈을 위해 북한의 당 역사연구위와 감리교가 몇 차례 교류가 있었다”고 말했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대해서도 이 교수는 “일제가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신사참배를 강요한 만큼 신앙 위에서 한 신사참배 반대운동이지만 오늘날 해석상 일제에 항거했다는 해석의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박정희 정권의 한일회담과 관련해 기독교계의 비판이 1965년 6월 22일 영락교회 연합기도회로 발전했으며, 이 운동엔 진보와 보수의 구분이 없었다”며 “1968년 박정희의 삼선개헌이 시도되면서 한국 교회의 진보와 보수의 경계가 뚜렷하게 되었다”고 소개했다.
 
이 교수는 또 박정희의 3선 개헌에 반대 성명서를 낸 김재준, 박형규, 함석헌 등에 대해 김윤찬, 조용기,  김장환 목사 등 보수측 인사 242명이 실체도 없는 ‘대한기독교연합회를 만들어 정치적 중립 주장을 하며 우려를 표했던 것과 관련, “오늘날 애국한다고 떠드는 사람들, 그들의 과거를 알 필요가 있다”며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 중 나중에 자기 이름이 어떻게 기록될지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남한의 통일운동에 있어서도 기독교의 역할이 컸음을 소개했다. 이 교수는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을 비롯해 1978년 10월 17일 함석헌, 문익환, 윤보선 등의 10.17민주국민선언 발표 등은 통일문제의 정부 독점을 민간 차원으로 끌어내리는 역할을 했다”고 강조하고 “언론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1981년부터 시작된 해외 기독인들을 중심으로 한 10여 차례의 회합이 남북 기독인들이 만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고 말했다.
 
“평화와 화해운동이 이 시대 한국 교회가 당면한 시대적 과제”라고 말한 이 교수는 “오늘날 한국 교회의 타락과 교직자들의 타락을 보며 고려시대 불교, 불승들의 타락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깝다”면서도 한국 교회가 사회를 위해 많은 역할을 했음도 강조했다.

이어 안동교회 유경재 목사는 ‘안동교회 지도자들의 나라 사랑’을 주제로 일제시대 안동교회 교인들의 꼿꼿함을 소개했다.

▲ 안동교회 유경재 목사     ©뉴스파워

유 목사는 “‘양반교회’ 안동교회의 정신은 바로 선비정신, 즉 노블리스 오블리제”라고 소개하며, 창씨 개명을 거부한 김창제, “왜놈들에게 5전의 전차삯도 줄 수 없다”며 화동에서 연희전문학교까지 걸어다닌 한글학자 이윤재, 찬방에서 겨울을 지내면서도 교회 장작이나 성미에 손대지 않았던 3대 목사 이강원, 자기 집엔 땔감이 없지만 월급을 털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었고 다른 사람들 신사참배 안시키려고 먼저 신사참배를 한 문교부장 유억겸 등 휘청이던 시대에 꼿꼿했던 안동교회 교인들 이름과 일화를 들려주었다.
 
유 목사는 “이런 선비정신이 결국 새바람을 일으킬 수 있는데, 오늘 지도자들은 이런 도덕성이나 철저함이 결여되어 있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전병금 목사(강남교회)는 두 발제에 대한 답변에서 “지금도 곳곳에서 구국기도회를 비롯해 정치적인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시점에서 교회와 나라 사랑이라는 주제를 다룬다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라며 일제시대 기독교인들의 활약을 소개한 이만열 교수의 발제에 더해 “당시 조선총독부는 교회의 활동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었고, 성서를 불온서적으로 분류하기도 했다”고 강조했다.
 
전 목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은 복음 증거와 함께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적극적인 사회참여에 나서는 것”이라며 “이러한 사명엔 보수, 진보가 따로 있을 수 없다”며 보수와 진보가 나누인 한국 교회의 현실을 꼬집기도 했다.
 
전 목사는 “박정희의 삼선개헌에 대해 한국 교회가 보수와 진보의 견해차가 생기게 되었다는 이 교수의 지적은 한국 교회가 하나님 나라 운동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음을 지적하는 것”이라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기 위한 한국 교회의 꺾이지 않는 신앙은 나라사랑운동으로 표출되면서 박정희의 권위주의 군사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화를 가져오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 강남교회 전병금 목사     ©뉴스파워

이날 월례회엔 손동아 목사(인왕교회), 주광조 장로(한복협중앙위원), 김영한 교수(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장)가 각각 한국 교회의 영적 각성, 사랑 운동, 한반도와 세계를 위해 기도했다.
 
이만열 교수는 “한국 교회의 당면 과제인 화해와 평화 역할을 한국 교회가 제대로 하고 있다고 보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삭발투쟁 하는 것 보면 모르겠느냐?”고 반문하고 “목사들보다는 평신도들에게서 희망을 본다”며 “한국 교회는 화해자, 치유자의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뉴스파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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