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욱 교수님은 숭실대학교 철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뉴욕주립대 버펄로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한국철학회사무총장 및 제22차 세계철학대회 조직위 사무총장, 미국 뉴욕의 뉴스쿨에서 풀브라이트 연구교수를 지냈으며 현재 숭실대 철학과 교수로 섬기며 가치와윤리연구소 소장직을 맡고 있습니다. 저서로 <성서적 정치실천>, <공동체주의와 공공성>, <공화국의 위기> 등이 있으며 <마이클 샌델의 하버드 명강의>를 감수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 세상의 빛과 소금

성서에는 정치와 관련하여 연역적으로 끄집어 낼 수 있는 말은 너무나 다양하다. 그래서 성서에서 바람직한 정치 이념을 도출하려 한다면 입장에 따라 그 결과물들이 서로 달라질 뿐만 아니라 서로 모순될 수도 있다. 게다가 현실에 대한 이해가 없이 원론적인 입장에서만 입각하여 제도나 이념을 성서에 근거하야 논하려면, 완전히 엉뚱한 말을 해버릴 수도 있다. 그런 엉뚱한 말의 대표적인 것이 “민주주의는 성서적이지 않다” 라거나 “아무리 독재자라도 하나님은 권력자를 축복하신다.”, “신앙인은 기존의 질서를 무조건 옹호해야만 한다” 따위의 주장이다. 이 주장들은 성서의 구절에서 직접 도출될 수 있지만, 복음과 말씀의 정신과는 아주 먼 곳에 있는 말들이다.


오늘의 시대는 민주주의를 사회의 지고 가치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성서에 나타나는 정치제도란 민주주의가 극복해온 왕정뿐이다. 그래서 선거에 의한 정치 지도자의 선출이나 정책 수립에 있어서 합의의 도출, 혹은 바람직한 국가 운영에 있어서 시민의 역할과 같은 생각을 성경구절 가운데서 곧바로 찾아내기는 어렵거나 불가능하다. 우리가 현실 정치와 기독교와의 관계를 의미 있게 고민하려면, 성서로부터는 사회, 정치적 원리에 대한 이해를 얻고 현실로부터는 정치 작동 원리와 방식에 대한 깊은 통찰을 얻은 뒤 이 둘을 지혜롭게 연결해야 한다.


이 시대에 한국 정치가 가진 문제점은 정치인의 개인적 조직적 부패 문제, 당리당략에 따른 정책결정에 의한 시민 소외의 문제, 지도자의 독단적 정무수행에 따른 합의 정신 실종의 문제와 대중적 소통의 부재 문제, 국민총생산을 증가시키고 무역을 확대하기 위한 제도적 노력에 집중하는 가운데 발생한 부의 재분배 장치 미비 문제, 경제적 가치와 효율성 중시로 인한 사회적 가치의 획일화 문제, 제대로 된 내용적인 논의 없이 복지나 교육, 환경 등의 고비용 사안들이 정치적 입장에 따라 찬반으로 갈려 싸우는 정치 과잉 문제, 통일문제를 국가의 미래를 중심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왜곡하는 문제 등이다. 이러한 문제점들이 발생된 근원에는 해방과 정부수립 이후 남한에서 민주주의가 헌법을 통해 규정되고 현실화되는 가운데 위로부터의 정치제도 개혁을 우선시하면서 결국 실질적인 변화는 그 후의 수십 년간의 민주화 투쟁 과정을 통해 이루어져야했던 우리의 역사가 있다. 게다가 우리보다 더 오랜 역사와 이론적 고민의 깊이를 가진 서구도 마찬가지로 경험하고 있는 민주주의 이념 내부의 문제들도 경험하고 있다. 예컨대 다수결이 초래할 수 있는 우매한 다수의 폭압 문제, 민주제도 내에서 정치적 적대관계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라는 문제 등도 우리는 현실 속에서 경험하고 있다.


성서는 ‘세상’이라는 표현을 통해 우리에게 정치 공동체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세상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정치 공동체의 시민으로서 해야 할 역할이 무엇임을 알게 해 준다. 세상의 소금과 빛의 사명이 그것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13~16)


예수님의 산상수훈 가운데 나오는 빛과 소금의 비유는 세상과 연관되어 설명된다. 세상은 혼자의 삶에서가 아니라 이웃과 더불어 공동체를 구성하며 살아가는 삶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이 세상은 함께 먹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경제 공동체일 수도 있고 위기의 시간에 도움을 나누는 공동체일 수도 있고, 삶의 방식을 고민하고 다른 공동체와의 연대와 갈등의 문제를 해결하는 정치 공동체일 수도 있다. 정치 공동체는 세상을 이루는 한 측면이다. 이러한 정치 공동체로서의 세상에서 소금이 되라는 말씀은, 정치가 부패되는 것을 막고 정치가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

는 세계를 만드는 길이 되도록 하라는 사명을 그리스도인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다.


빛이 되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착한 행실이 모두에게 드러나게 하여 하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 말씀은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마 6:3~4)는 말씀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착한 일을 드러나게 해야 하는가 아니면 드러나지 않게 해야 하는가? 이러한 모순은 위의 두 말씀이 가리키는 착한 일이 서로 다른 종류에 속하는 것임을 이해한다면 해결된다. 즉, 착한 일에는 드러나서는 안 되는 착한 일과 드러나야만 하는 착한 일로 나누어진다는 것이다. 드러나서는 안 되는 선한 일은 개인적 선행이며 드러나지 않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는다. 그런 선행을 드러내려 하는 일은 외식하는 행위이며 그 상을 하늘로부터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정치 영역에서 행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노력은 세상의 빛이 되는 선행에 해당하는 일이며, 남들이 모두 보는, 드러는 공간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일이다. 정치인들이 다양한 국가 정책을 만들고 시민들의 삶을 규정할 법률들을 만들어 내는 일들은 투명성을 가져야만 한다.


투명하려면 정치인들의 사리사욕에 따라서가 아니라 공공성의 원리를 따라 일들을 처리해야 한다. 이런 일은 드러나야만 하는 선행이며, 이러한 선행이 세상의 빛이 될수록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일이다. 이러한 선행의 드러남은 외식과는 무관하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시민인 그리스도인 혹은 정치인인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덕목은 우리에게 일러주는 말씀인 것이다.


정치의 네 가지 측면과 기독교적 가치정치에는 여러 측면이 있다. 그러나 선거와 관련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어떠한 가치에 따라 정치적 행위들을 판단할 것인가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에 주목하고자 한다. 네 측면을 통해 정치의 참모습을 이해해 보고 그 각각과 연관되는 기독교적 가치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자.


정치: 공동체로서의 세상의 일

정치는 공동체로서의 세상(the world)과 관련된 일이다. 세상은 인간 세상을 말하는 것이며 이는 지구(the earth)와는 다른 것이다. 지구 위에 인간이 갑자기 사라진다면 인간 세상은 없어지는 것이지만 지구는 여전히 존속한다. 지구가 파괴될 위험에 처하여 인류가 우주선을 타고 외계의 어느 별에 거처를 옮긴다면 지구는 사라지지만 인간이 만든 세상은 새로운 별에서 지속될 것이다. 이처럼 세상이란 인간이 모여 스스로 만들어 낸 것으로 스스로의 삶의 환경이 되는 것을 지칭한다.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을 ‘세상속의 존재(세계내 존재)’라고 말하였던 것은 인간이 세상의 한 부분을 이루면서 동시에 세상에 대해 의식하고 세상을 규정하면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의미에서이다.


이러한 세상은 드러나는 공간이다. 세상은 사람들로 이루어지므로 거기서 사람들의 행위는 보이고 들려진다. 정치 행위는 사람들의 시선 속에 등장(appear)하기 때문에 보이는 것은 외면성(appearance)을 중심으로 한다. 이 외면성은 현상(appearance)을 의미하며, 정치는 현상과 관계되므로 판단의 대상은 외모(appearance)가 된다. 정치 영역은 이러한 출현(appearance)의 공간이다(Hannah Arendt, The Human Condition p.199).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성서적 지혜이지만, 빛으로 드러나는 착한 행실인 정치적 행위는 현실 속에 드러나는 일들, 즉 현상에 집중할 것을 요구한다. 빛 속에 드러나고 빛이 되는 것은 현상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관심을 갖고 보고 듣고 의논하는 이유는 거기서 다루어지는 일이 모두의 이익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모두의 이익’이란 공공선(the public good)을 말하는 것인데, 이는 ‘다수의 이익’과는 다른 말이다. 다수의 이익이란 다수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이익이며, 개인들이 서로의 개인적인 이익(사익)을 조정함으로써 도달할 수 있다.


당의 이익이나 계급 이익이 여기에 해당한다. 하지만 공공선이란 사익을 연합함으로써 도달할 수 없는, 사익의 총합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을 말한다. 공공성(publicity)이란 이러한 공공선이 확보되었는가에 관한 문제이다.


우리들 각자에게 개인적인 이익은 아주 중요하다. 하지만 사익에 몰두하는 것 만으로는 공공선에 도달할 수 없다. 공공선이 깨지면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삶도 결국 피폐해질 수밖에 없다. 모든 사람이 사익에만 몰두할 때 세상은 전장과 같아진다. 그래서 정치가는 공공성에 집중하는 가운데 자신의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데 집중해서는 안 된다. 정치가는 개인이나 자신이 속한 당의 이익을 초월하여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길을 찾을 용기와 헌신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 예로부터 정치가의 덕으로 간주되는 공평무사(公平無私)의 정신은 오늘의 정치가들에게도 당연히 요구되는 덕목이다.


공공성을 확보하기 위해 정치가나 시민들은 대체로는 소통의 정신을 갖고 대화에 임하여야 한다. 총선을 통해 뽑는 국회의원이 하는 일은 지방선거인 지방의회 의원이나 시장이 하는 일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지방의회 의원은 지역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지만, 국회의원은 비록 지역에서 선출되기는 해도 주로 국가 전체의 이익을 위한 일들을 다룬다. 따라서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의 경우 후보자의의 공약이 내가 속한 지역의 이익이라는 관점에 부합하는지에만 주목해서는 안 된다. 국회의원 후보자들이 자신의 지역의 관점을 넘어서서 모두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관점을 갖고 있는지 까지도 고려하는 것이 필요하다.


아울러 정치가의 정식성이 중요하다. 정치는 현실의 일이므로 정치 현실의 특성을 근거로 정치가가 거짓을 일삼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현실 정치에 전략적인 태도가 요구된다고 하더라 거짓말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전략적 태도의 특징은 특정한 목적을 쟁취하기 위해 자신의 의도를 감추는데 있다. 국가 기밀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국가 기밀이란 특정 사안에 대해 그 내용을 공개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현실 정치에서는 국가 기밀이 존재할 수밖에 없고 또 이와 유사한 기밀 사항도 많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특정한 목적을 얻기 위해 정부나 정당이 국민들을 기만하고 여론을 조작하는 것과 전략적으로 기밀을 유지하는 것은 다른 사인이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영업 행위에서 자기 회사의 이익을 위해 원가를 공개하지 않거나 제조법을 숨길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속임수를 쓰거나 해로운 원료를 사용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현실 정치에 전략이 요구되더라도 거짓이 용인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정치가에게 정직과 진실성은 항상 요구되는 덕목이다.


따라서 기독교적 가치의 관점에서 우리는 정치 공동체에서 활동하는 정치가에게는 투명성, 공공성, 정직과 진실성의 가치가 요구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시민에게는 지역 이기주의를 넘어서는 관점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이번 기회에 어떤 집단 이기주의에 빠져 있지 않은가 하는 점을 철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치: 인간의 본연적 행위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라고 말했다. 이 말의 참된 뜻은 인간은 사회 안에서 서로 협력하면서 살아가게 되어 있다는 뜻과는 거리가 있다(김선욱, 『정치와 진리』2장 참조). 이런 협력적 존재라는 말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로 표현되며,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라는 말과는 거리가 있는 말이다. 인간이 정치적 존재라는 말은 인간은 정치 공동체 안에서 정치적 행위를 하면서 살아갈 때 인간다운 삶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정치적 행위란 더불어 살아가는 원칙과 방법에 대하여 자유롭게 의사를 표현하고 다수의 의견을 형성하며 서로 의견을 소통적으로 교환하고 때로는 다투기도 하면서 합의를 추구하는 가운데 공동의 삶의 길을 함께 만들어 가는 행위를 말한다. 이런 행위를 통해서만 개인은 자신의 사적 삶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삶을 규정하는 데까지도 자신의 의지를 개입시킬 수 있다. 이때에만 인간은 비로소 자신의 삶의 진정한 주체가 될 수 있고, 그런 점에서 진정한 자유로울 수 있다. 이런 자유는 인간을 비로소 인간답게 만드는 필수적 요소이며, 정치만이 이런 자유를 가능하게 한다

는 점에서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서는 인간이 정치적 동물이라는 말과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는 동물이라는 말과 같은 맥락에서 논의된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개성을 드러내고 자신의 생각을 나타내는 방식으로 정치 활동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 영역은 표현의 공간이다. 또한 인간은 언어를 통해 의견의 차이를 확인하고, 차이를 확인하면서 소통을 추구하며, 소통을 통해 합의를 이룩하거나 서로의 의견이 결코 일치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기도 한다.


그런데 의견 불일치가 확인이 될 때 폭력을 통해 이를 해결하려는 것은 정치적 행위를 중단하고 비정치적 방법으로 넘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의견 불일치가 확인이 되더라도 정치적으로 상호간의 행동 조정과 타협이 가능하며, 이는 언어의 힘에 계속 의지함으로써만 가능하다. 따라서 정치적 행위는 말하는 행위와 일치한다. 그래서 정치란 끊임없는 대화의 과정에 몸담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 세상에는 항상 새로운 일들이 발생하고 그에 대처하는 인간의 활동 또한 언어로 진행되기 때문에, 인간의 삶이 존속하는 한 정치는 중단될 수 없으며 대화와 말 또한 중지되어서는 안 된다. 이런 이유에서 사상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는 인간의 근본적 자유이다.


사상의 자유가 생각하는 자유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포학한 정치체제라도 우리의 머릿속에 생각이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사상의 자유는 생각을 표현하고 나눌 수 있는 자유를 말한다. 생각의 내용을 표현하고 소통하는 과정에서 사상은 성숙하고 힘을 갖는다. 따라서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 그리고 언론의 자유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동일한 것의 다른 이름이다. 정치적 사안에 대해 자유로운 표현과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는 것은 정치적 참여의 기본이다.


현대는 미디어의 시대이므로 미디어를 통제하는 것은 표현과 언론의 자유에 대한 억압을 의미하며,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은 새로운 표현방식과 새로운 사상의 등장을 의미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SNS를 통한 선거운동을 허용하기로 한 2012년 1월에 있었던 선거관리위원회의 결정은 당연한 것이면서도 동시에 정치활동의 새로운 지평이 열리게 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정치 과잉의 문제로 인해 이러한 조치가 개인들을 더욱 번거롭게 만들 가능성도 있지만 그것은 언론의 자유 이후의 문제이다.


정치적 자유가 인간다운 삶과 직결되기 때문에 기독교적 가치의 관점에서도 정치적 자유는 중요한 문제이다. 정치적 자유의 허용, 보다 구체적으로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의 허용과 보장은 신앙의 이름으로도 옹호되어야 한다.


정치: 진리가 아니라 의견의 문제

그리스도인은 신앙의 진리를 믿는 이들이다. 신앙은 정치적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타협이라는 태도는 거리가 있다. 그런데 신앙적 입장에서 고민하고 따져야 할 다양한 사회적 문제에 대해도 내 입장만이 옳고 진리라고 믿는 태도는 여러 종류의 문제를 낳을 수 있다. 예컨대 전도의 방식에 있어 내가 믿는 믿음이 절대적이니까 수단과 방법,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무조건 소리 높여 “예수 천당”을 외치는 것은 복음 전도가 아니라 기독교 혐오증을 사회적으로 유발시킬 수 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이 “무례한 기독교”의 모습으로 비추어지기 않도록 조심하는 것을 두고 비신앙적이거나 약한 신앙의 모습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정치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더욱이 정치는 진리의 장이 아니라 의견의 표현과 소통의 장이라는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의 태도가 더욱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정치의 존재 이유는 인간의 삶의 다양성과 의견의 차이의 존재에 있기 때문이다. 수학과 같은 문제에는 정답이 있지만, 정치에는 그런 정답이 존재하기 어렵다. 정치란, 다양한 사람들이 정치적 공간에 모여 정치적 자유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소통과 조정의 과정 자체이다.


정치가 의견의 문제이며 답이 없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해서, 정치 영역에서 다루어지는 모든 문제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정치 영역에서 다루어지는 문제들 가운데는 정치적인 일들 외에도 여러 일들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문제는 쉽게 답을 찾을 수 있는가 하면 어떤 경우에는 다양한 의견 가운데 하나의 의견을 선택해야 하는 일도 있다. 사안의 다양성에 따라 해결 방법도 다양해진다. 한편 현실 정치를 들여다보면 계산을 통해 따져보면 해결될 문제를 놓고 계산을 하는 대신 편 가르기를 해서 해결하려는 경향이 많이 존재한다. 이런 경향에 대해 ‘정치 과잉’이라는 말을 쓴다. 이 표현에서 ‘정치’는 부정적인 의미로 활용된다. 어떤 사람에게 “당신은 정치적이야!” 라고 하면 그것은 욕이 된다.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려하지 않고 상황에 따라 누구의 편이 되는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려하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진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듯 말이다. 사실 관계를 따지지도 않고, 해야 할 계산도 제대로 해 보지 않으면서 여당과 야당, 진보와 보수 등의 이름으로 편 가르기를 하여 표결로 끝을 보려는 태도가 정치 과잉이다.


2011년 하반기에 뜨거운 논쟁의 초점이 되었던 무상급식 논쟁과 그에 따른 서울시의 찬반 투표는 정치 과잉의 대표적인 예라고 생각된다. 결국 오세훈 시장의 사임과 그에 따른 보궐선거 등으로 비싼 정치 비용을 치렀던 이 사안은 무상급식에 들어가는 비용과 세금수입 등과 관련된 계산, 그리고 각 당에서 제안한 원래의 입장과 서로 제안한 절충안의 금액 등을 꼼꼼히 합리적으로 계산하는 과정을 거치는 합리적인 검토 작업을 먼저 가져야만 했었다.


하지만 그런 치밀한 계산은 없었고 다만 무상급식의 시행과 관련된 명분과 이유, 가치에 대한 논쟁만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던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정치에 대해 관심을 가질 때 우려하고 조심해야 하는 점이 바로 이와 연관된다. 절대적 진리를 믿

는 신앙인이라도, 정치 영역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들에 대해 자신이 믿는 가치를 절대화하면서 다양한 가치와 태도들에 대해 악으로 규정하는 것은 그 자체가 정치적 악에 해당된다. 신앙적으로 양보할 수 없는 것은 신앙 자체이며 신앙의 자유를 억압할 때 신앙의 이름으로 투쟁해야 한다. 하지만 토론과 대화를 통해 합의를 추구하고 공존을 도모해야 할 많은 사안들에 대해 독선으로 일관하며 의견 차이가 중요한 사안에 대해 흑백논리나 선악의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곤란하다. 이런 사안들에 대해서 기독교적 가치는 개방적이고 공존하는 삶을 지향한다.


정치: 갈등을 통해 갈등을 넘는 과정

지금까지 말한 것처럼 정치가 인간다운 삶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며 언어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다른 의견을 조정하는 끊임없는 과정이고 모두의 이익과 관계된 것이라면, 정치의 과정에서 갈등은 불가피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갈등의 과정은 끝없이 지속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갈등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라는 점이다. 갈등의 영원한 종식이 목표라면 그것은 불가능한 목표이거나 심지어 반정치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세상 속에 영속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갈등들에 대해 어떤 태도로 임하여 관리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너무나 쉽게 빠지게 되는 유혹은 진리의 이름으로 갈등을 영속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인식의 유혹이다. 예컨대 국교를 가진 국가에서 종교 지도자들이 종교의 이름으로 사회 문제들을 일거에 해결하려고 함으로써 사회가 활기를 잃고 광기에 빠지며 결국 공포와 잔인성이 그 사회 안에 난무하는 된 경우를 종종 목격해 왔다. 이데올로기를 종교처럼 광신하는 국가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경우에 이데올로기도 사회 안에 진리와 같은 판단의 척도로 작동한 것이다. 진리에 대한 인식이 우리에게 바람직한 정치의 길을 보여 준다는 흔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영역에서 진리에 대한 확신은 정치를 종식시켜 인간적인 삶이 불가능한 세상을 만드는 경우가 더욱 많았다. 피억압자에게 ‘진리의 이름으로’는 약자를 사회적으로 구원하는 도구이지만, 억압자에게 ‘진리의 이름’은 독재와 폭압의 도구가 된다. 이런 차이를 이해하려면 진리 개념의 용법을 잘 구분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진리’라는 말로 우리는 수학적 진리를 말할 수가 있다. 추상적 개념인 수의 관계를 다루는 수학에서 참은 언제 어디서나 참이다. 시공을 초월해서 수학적 진리가 참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추상적으로 규정된 체계 속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절대적 진리’라는 말로 생각하는 것에 가장 가까운 것이 바로 수학적 진리일 것이다.


둘째로, 자연과학적 진리가 있다. 이는 경험적 사실을 바탕으로 자연의 법칙을 발견하려는 자연과학적 노력의 결과물이다. 그런데 자연과학적 진리는 새로운 과학적 사실의 발견과 더불어 항상 수정 가능성하다. 따라서 오류가 가능하다는 것이 과학적 진리의 특징이 된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오류가능하지 않은 이론은 과학의 이름으로 진리라 부를 수 없다. 오류가능하지 않은 이론의 예로는 프로이트 이론과 마르크스주의 그리고 기독교가 종종 거론된다. 이들 이론 체계에 따르면 어떠한 사태도 모두 해명 가능하다는 믿음을 이 체계의 신봉자들이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형이상학적 진리가 있다. 이는 보이는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제시되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철학적 진리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자연과학이 가능하도록 형이상학이 그 실마리를 제공한 경우가 많았지만, 그런 실용적 효과와 상관없이 형이상학은 하나의 이론 체계로서 독자적인 영역을 갖고 철학에서 연구되어 왔다. 그 가운데 하나로 중세기가 끝나는 시점에 이탈리아의 조르다노 브루노가 주장한 형이상학이 있다. 그는 기독교적 세계관에 반대하여 기계론적 세계관에 입각한 형이상학을 주장했다. 당시 로마의 교황청은 그의 사상을 이단으로 규정하여 파문했고 결국 그를 잡아들여 화형 시켰다. 브루노는 죽기까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는데, 이러한 브루너의 태도를 가리켜 후에 카를 야스퍼스는 ‘철학적 신앙’이라는 이름을 부여하였다. 이는 종종 갈릴레오 갈릴레이에 비교되는데, 자신이 주장했던 지동설을 법정의 재판관 앞에서 부정했으나 법정을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 라고 말했다는 전설이 자연과학적 진리의 특성을 보여준다면 브루노의 경우는 자신이 믿지 않으면 어느 누구에게도 확신을 줄 수 없는 형이상학적 진리의 특성을 나타낸다.


넷째로, 신앙의 진리가 있다. 신앙의 진리를 확증하는 것은 신앙의 근거가 되는 경전이고 신앙 체험들이다. 체험은 항상 신앙적 관점에서 해석되며 경전을 통한 신앙적 진리의 보증에는 순환논법이 따른다. 결국 신앙은 믿음을 통해서만 확증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순환을 피하려고 신앙이 과학적 사실 혹은 수학적 진리와 같은 것에 의존하려 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신앙적 진리일 수는 없을 것이다. 믿음은 오직 믿음으로 보증된다.


끝으로, 수행적 진리(the performative truth)가 있다. 자신이 믿는 내용이 참이라는 주장의 지속적 수행(performance)만이 그 주장의 진리성을 현실 속에서 확정시키는 경우를 말한다. 만인은 평등하다는 말을 수학적 진리로 혹은 갈릴레이의 과학적 진리처럼 믿는 태도 만으로는 평등사회가 현실 속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평등이 진리라고 믿을 뿐 아니라 끊임없이 주장하고 또 싸워온 사람들에 의해서 평등한 사회는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한 번 평등을 맛본 이들은 그것이 인간다움의 조건임을 알게 되어 그 평등을 잃지 않으려 계속 노력하게 된다. 앞서 정치는 진리의 영역이 아니라고 했는데, 굳이 정치에도 진리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수행적 진리를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작동하는 수행적 진리는 수학적 진리나 자연과학적 진리에 견주어 볼 때 그 확실성에 서 분명한 차이를 갖고 있다.


수학적 진리가 가진 힘과 같은 것을 통해 정치 영역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손쉽게 해결하려는 태도는 정치영역을 파괴하고 공포와 잔인성이 지배하는 사회를 만들어내기 쉽다. 칼 슈미트는 정치란 “적과 동지의 구별”에서 시작한다고 말했다. 이 말이 타당하게 들리는 이유는, 실제로 발생하는 정치적 의견의 대립이 마치 전장에서 이루어지는 적과의 대립과 싸움처럼 치열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미트의 규정을 따라갈 수 없는 이유는, 정치에서의 적대적인 갈등에도 불구하고 전쟁처럼 적을 죽이려는 것은 결국 정치의 종언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정치가 끊임없는 갈등의 연속이며, 적을 죽임으로써 갈등을 종식시킬 수 있다는 믿음은 거짓된 믿음이다. 그래서 우리는 정치에서 적(enemy)과 반대자(adversary)를 구분하여야 한다는 샹탈 무페의 주장은 타당하다고 여기게 된다(샹탈 무페, 『정치적인 것의 귀환』, p.15). 나와 대립을 이루고 적대적 경쟁을 벌이고 있다고 해서 그가 곧 적이고 죽임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 태도는 정치 공동체의 파멸을 초래할 것이다. 반대자는 우리와 비록 정치적 대립과 갈등 관계에 있지만 우리와 함께 정치 공동체를 구성하는 타자이다. 따라서 우리는 반대자를 정치의 필요조건으로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정권 교체를 이룬 뒤 정치보복성의 검찰조사와 세무사찰을 통해 과거 정권의 실세를 죽음에 몰아넣거나 불능상태로 몰아가는 등의 정치 행위가 아직도 남아 있는 한국 사회에서 죽임의 정치 문화가 존속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적 가치는 갈등을 통해 갈등을 넘어서는 정치를 한국 사회에 요구해야 한다.


한국 사회가 직면한 정치의 문제들

정치 과잉의 문제

오늘의 한국 사회를 좀 더 깊이 들어다보면 정치적 인식의 부족과 정치 과잉이 공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둘은 서로 맞물려 작용하고 있기도 하다. 서울시 교육청에서 공포한 <서울특별시학생인권 조례>와 관련된 사항을 예로서 살펴보자.


학생인권조례가 경기도와 광주시에서 이미 공포되어 시행되고 있는 가운데 서울시에서도 인권조례를 준비해 왔다. 곽노현씨가 교육감으로 선출된 뒤 서울시 교육청은 위원회를 만들어 자체적으로 학생인권조례안을 마련했었다. 이와는 별도로 시민단체가 자체적으로 시민 발의안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두 안 사이에는 인권 내용의 서술에 있어 다소의 차이가 존재하고 있었다. 보다 획기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던 시민 발의안은 규정에 따라 필요한 8만1천여 명을 훨씬 넘는 약 11만 명의 서명을 토대로 시의회에 제출된 반면 서울시 교육청의 안은 준비가 되었음에도 의회에 제출되지 않았다. 결국 단독으로 상정된 학생조례안은 2011년 12월 9일에 서울시의회 교육위원회와 본회의를 거쳐 승인되었다. 이후 2012년 1월 9일에 곽노현 교육감의 수감 상태에서 이대영 부교육감이 교육감 직무대행의 자격으로 서울시 의회에 재의요구서를 제출하였으나 1월 20일에 업무 복귀한 곽 교육감이 재의요구의 철회를 요구하여 시의회에서 25일에 철회 승인이 나자 26일에 공포하기에 이르렀다. 이 와중에 일부 교회에서는 1월 8일에 인권조례안의 재의를 요구하는 서명운동을 벌이기도 하였으나, 이 운동은 해당 교회의 교단 총회의 결의에 따른 것이 아니라 일부 교회 지도자들의 협의에 의한 것이었다. 학생인권조례가 공포되자 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은 이에 반대하여 조례의 효력 정지 및 취소를 위해 대법원에 제소를 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고 난 뒤 인권조례에 대한 논란이 발생하여, 이제 조례의 내용이 무엇이냐에 대한 깊은 숙고는 별개의 문제가 되었고 이제 시민은 현재 공포된 학생인권조례의 존속이냐 효력 정지냐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입장에 서게 되어 버렸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 선택은 곧 정치적 노선의 선택처럼 되어버려, 현재의 조례의 존속을 주장하면 진보, 반대하거나 수정 제안에 서명을 하면 보수로 곧바로 낙인이 찍히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상황이 바로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숙고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정치 과잉의 상황이다. 또한 자신이 보수 혹은 진보의 입장을 고수하는 경우라면 자동적으로 반대와 찬성의 입장을 취해야 하는 상황도 발생한다. 이러한 정치 과잉현상이 바람직하지 않은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기독교적 가치에 입각해서 보면 어떨까? 기독교적 가치를 갖는다 해서 곧바로 학생인권조례의 어떤 조항에 대해 무조건적인 찬성과 반대의 입장을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학교 안에서의 종교교육의 문제나 심지어 성적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조례의 내용에 대해 어떤 문제의 징후를 포착하였다면 먼저 그 내용에 대해 공개적인 방식으로 깊은 숙고와 대화의 자세를 갖는 것이 필요하다.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는 진지한 대화가 이루어지려면 공포된 학생인권조례에 대한 찬, 반 태도를 드러내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입장 표명의 순간 나는 한 편으로 낙인찍히고, 다른 편에 서있는 이는 곧바로 적대적 자세를 취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라리 찬, 반 입장표명을 거부하는 것이 대화를 유도하는데 바람직하다. 이런 유보를 통해 과잉 정치화를 차단하여 자유로운 숙고를 위한 여유를 확보할 수 있고, 나아가 사안별로 실질적인 문제를 따지는 고민이 가능하다. 교육철학적 관점에서, 문화전통의 관점에서, 학생복지의 관점에서, 그리고 바람직한 가치관 등의 관점에서 여러 사안들을 고민하고 검토하는 과정을 거쳐 비로소 입장을 결정하고, 이를 토대로 여론을 환기시키고,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과 의견 조율을 시도해 보는 과정이 표결, 혹은 투쟁에 앞서 이루어져야만 하는 일이다.


과잉 정치화는 마치 덫처럼 기존의 프레임 속에 시민을 옭아매어 숙고에 의해서가 아니라 패거리 만들기를 통해 정치적 선택을 하게 만든다. 바람직한 정치 문화는 정치적 선택을 숙고에 바탕을 두고 하도록 하는 것이므로, 이를 위해서는 숙고를 불가능하게 만들도록 설정된 프레임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꼼수’와 <닥정>, 그리고 프레임

2011년 말 이후 한동안 한국의 정치문화 변화의 중심에는 있던 ‘나는 꼼수다’는 한국의 정치의 프레임 변화를 시도한 노력으로 평가할 수 있다. ‘나는 꼼수다’는 딴지일보의 김어준, 시사인 기자인 주진우, 전 국회의원 정봉주, 시사평론가 김용민 등이 기존의 언론매체와는 전혀 다른 방식인 스마트폰을 이용한 방송 팟캐스트를 통해 보도하는 시사토크쇼를 말한다. 이 쇼를 제작한 의도에 대해 김어준은 <닥치고 정치>라는 책에서 “기존의 언론 매체가 보수층에 장악당한 데 대한 대응책 마련을 위해서” 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현재 진보가 집권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 중 하나가 뭐냐. 메시지 유통 구조를 보수에 의해 장악당했다는 거야. 메시지 유통 구조는 절대적으로 중요해. 그 유통 채널을 타고 프레임이 유포되거든. 머릿속에 한번 세팅된 프레임의 힘은 대단히 강력한거야. 아무리 정교한 논리도 그 프레임 안에서 노는 한 절대 기득의 구조를 이길 수가 없다. 그 프레임 안에서 노는 진보는 거기 등장하는 허접한 미시 논리를 깨는 데서 얻는 지적 쾌감에 도취되기 십상이지.”(<닥치고 정치> p.301) 그래서 그는 새로운 프레임을 생산해 내고 그것을 유통시키는 새로운 유통구조로서 팟캐스트를 사용하기로 하였다는 것이다.


‘나는 꼼수다’는 20~30대 층에서 수많은 청취자들을 확보했고, <닥치고 정치>는 2011년 말까지 87쇄가 찍히고 42만부가 판매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이는 그들이 의도한대로 새로운 프레임의 유통에 상당히 성공했다는 말이다. 2012년 연초에 SBS TV의 인기 프로그램인 ‘힐링 캠프’에 차례로 등장한 게스트가 정치인 박근혜와 문재인이었던 점은 <닥치고 정치>에서 이 두 사람을 강력한 차기 대통령 선거 후보 및 라이벌로 규정했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으면 이해하기가 어렵다. 프로그램이 제작되던 시점에서 문재인은 아직은 다른 야권 대선후보들에 비추어 그다지 높은 지지율을 얻지는 못했기 때문에 그가 야권을 대표하여 박근혜와 나란히 프로그램에 출연한 이유가 달리 설명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 이후 시간이 갈수록 어쨌든 사람들은 박근혜와 문재인을 비교하기 시작했고 여론조사에서 문재인의 지지도는 계속 상승세를 탔는데, 이는 ‘나는 꼼수다’와 <닥치고 정치>가 마련한 새로운 프레임에 따라 사람들이 대선 구도를 보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되며, 또한 ‘나는 꼼수다’와 <닥치고 정치>가 정치적 플레이어로서의 역할을 이미 시작했다는 것을 말한다.


프레임과 관련하여 정치적 행위와 철학적 활동이 다른 점은, 정치적 행위는 새로운 프레임을 제시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관심을 둔다면, 철학적 활동은 프레임의 존재를 알리고 비판적으로 보게 하여 정치적 선택에 있어서 프레임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관심을 둔다. 이런 점에서 ‘나는 꼼수다’는 철학적 역할보다는 정치적 역할에 더 관심을 가진 활동이다.


기독교적 정치 행위는 기존의 프레임이 가진 가치를 돌아보게 하고 기독교적 가치에 따라 사안들을 바라보도록 하기 때문에 프레임에 대해 기독교적 가치에 따라 비판적 관점을 적용하면서 사태를 바라보도록 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의 프레임을 덧씌워 독자적으로 생각을 하지 못하고 무조건 주어진 프레임에 따라서만 생각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작동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가 특정한 하나의 이념으로 만 수렴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의 기독교 정치

정교분리 개념의 오용과 남용

그리스도인이 정치참여를 고려할 때 부딪히는 것이 정교분리의 이념이다. 정교분리의 의미가 종교는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식으로 흔히들 이해되지만 역사적으로 미국과 유럽의 전통 속에서 이해된 의미는 그와는 다르다. 정교분리의 참된 의미는, 국가가 특정 종교를 국교로 지정하여 종교 활동에 정치적 영향을 미치거나 다른 종교의 활동에 지장을 초래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토마스 제퍼슨이 주도해서 만들었던 미국 수정헌법 제1조에 나오는 정교분리 이념의 의미는, 영국에서처럼 특정 종교를 국가종교로 선택함으로써 다른 종교 또는 교파를 탄압해서는 안 된다는 데 있었다. 실제로 미국의 개신교회의 강단에서는 정치적 문제들이 자주 거론되었으며 정치가는 자신의 종교적 신념과 원칙에 따라 활동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그것이 미국의 수정헌법 제1조의 정신에 위배되는 것으로 간주되지 않았다(Corrigan and Hudson, Religion in America, p.123).


그런데 일부의 한국교회는 정교분리 이념을 상황에 따라 오용하거나 남용하여 왔다.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이승만 정권 때는 독재를 지지하기 위해 부정투표에 한 몫을 했었고, 개발독재가 이루어지던 박정희 정권 시절과 폭압적이던 5공화국 시절에는 인권 및 정치 탄압은 외면하면서 개인적인 복에 집중하여 외형적 성장에 몰두했었다. 이 과정에서 교회는 정교분리 이념을 왜곡하여 스스로 사회정치적 차원에서 긍정적인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피해 왔던 것이다. 여기에 대해 기독교 사학자인 이만열 교수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한국 교회의 다수파를 형성하고 있는 보수주의권의 경우, 과거 정치와 사회에 관한 문제는 정교분리론에 기대어 자신들의 목소리의 몫을 포기하고 진보권에 위임하다시피 했다. 그 정교분리론이란 것도 정체가 대단히 모호한 것이어서, 필요한 때에는 교계 지도자들이 이를 이용하여 예언자적 사명을 회피하거나 자신의 용기 없음을 은폐, 변명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그러면서도 조찬기도회에 참석하거나 독재자를 옹호하는 자신들의 정치행위에는 이 이론의 저촉여부를 문제 삼지 않았다. 결국 이 이론은 적용과정에서도 편파성을 드러내었고, 그 결과 한국 교회 지도자들의 정직하지 못한 약점을 폭로하는 데 일조하고 말았다.” (이만열, 「머릿말」p.6)


이제 민주화가 상당히 이루어지고 독재와 억압이 대부분 소멸될 상황에 이르자 보수적인 종교 지도자들 일부는 정치에 직접적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즐겨했고 선거 과정에 과도하게 개입하여 왔다. 이후 장로가 두 차례 대통령이 되면서 기독교의 정치적 영향력은 이제 극단적으로 부정적이 되어버렸다. 권력 지향적인 목회자가 사회적 통념에 반하는 정치적 발언을 하는 일이 너무나 빈번해 지자 이제는 일부 목회자들의 그 같은 행위가 기독교 전체의 모습으로 인식되어,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은 이제는 기독교인이 아닌 후보가 대통령이 되도록 하는 운동을 기독교계가 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할 정도가 되어 버렸다. 기독교의 정치 활동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 인식이 이제는 극단적인 상황에 까지 와버렸다는 것이다.


이런 부정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이름으로 정당을 만들어 참여하려는 이들에게 정교분리 이념은 그들 방식의 참여를 막는 장치가 되지 않고 오히려 무기가 된다. 정교분리 이념이 오용에서 이제 남용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들은 스스로 설정한 이념을 성서에 근거한 것으로 설명하며, 이를 기독교적 프레임으로 사회에 적용하는 방식으로 정치에 접근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기독교적 가치를 중심으로 정치적 성찰을 요구하는 건전한 기독교적 정치 참여와 혼동을 불러일으키거나 충돌을 야기한다.


우리는 특정 정치인이 특정 종교를 갖고 있을 때 그가 자신의 종교적 가치에 기반을 둔 신념에 따라 정치적 행위를 하는 것을 비난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그러한 시민이 자신의 신앙적 가치에 따라 정치적 소신을 피력하고 정책에 그 가치가 반영되기를 바라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정치 행위를 통해 신앙 자체를 전파하려는 것은 문제이지만, 신앙이 지닌 보편적 가치를 정치에 구현하려는 것은 문제될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중요하기도 하다. 우리는 기독교라는 이름과 더불어 정치적 행위를 할 때 문제가 되는 것과 그렇지 않는 것을 엄밀히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오늘과 같은 상황에서 기독교적 정치 행위가 사회에서 바른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도록 자신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정치와 종교 관계 이해의 변화

서양 근대의 자유주의적 정치관에 따르면, 정치는 공적영역에 해당하고 종교는 사적영역에 해당한다. 따라서 종교는 개인의 활동에 한하며 공적영역에서 종교적 진리에 근거한 주장은 허용되지 않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관은 최근에 들어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사회 세력화하는 종교의 힘을 정치 영역에 제대로 반영하지 않음으로써 결국 정치 자체를 왜곡시켜버린다는 이유에서이다. 이런 비판의 근거가 되는 사례 중 하나가 9.11 테러이다.


2000년 9월 11일에 있었던 미국 뉴욕시에 위치한 세계무역센터에 대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테러에 대해, 종교의 정치적 영향력이 정치의 장에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정치 외곽에서 정치의 중심을 때리는 방식으로 정치적 행위가 이루어진 것이라고 마이클 샌델은 해석했다. 이는 근대의 자유주의적 정치관에 따른 종교-정치의 관계가 더 이상 제대로 기능하지 않고 있다는 비판이며, 또한 종교가 실제로는 단지 사적 영역에만 머물러 있지 않음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라는 것이다.


따라서 샌델은 종교가 더 이상 정치의 바깥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지 말고, 정치의 담론의 영역으로 들어와 자신의 주장들을 풀어놓고 대화를 통해 해결해 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는 정치 영역에서 종교분쟁을 조장하자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종교 안에서 보편화 가능한 가치들을 확인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고유한 신조의 영역에 대해 관용하며 공존할 수 있는 길을 정치 영역을 통해 확보하자는 주장이다. 비록 신앙의 내용은 다르지만 합의 가능한 삶의 여러 요소들을 중심으로 중첩적인 합의를 추구해 가며, 각각의 입장이 지닌 특성적 입장에 대해 상호적으로 이해를 추구하는 방식으로 상호공존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교회의 권력과 교회의 소통방식

교회 내부에서 신앙인들이 진리를 중심으로 활동할 때, 신앙적 진리의 소통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에 대한 해석이 말씀의 증거 혹은 선포라는 방식을 갖는다. 이는 본질적으로 일방성(一方性)을 그 특징으로 한다. 물론 무엇이 참된 교리로 인정되어야 하는가, 어떤 해석이 올바른 것인가와 같은 문제들은 그것을 결정하고 확정하는 집단의 내부 소통을 전제로 한다. 그런 점에서 신앙의 진리 또한 쌍방향의 소통이 요구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한국 교회에서는 신앙의 문제에서 목회자와 평신도의 관계에서 일방적이고 수직적인 방식만 다루어진다. 이런 신앙적 소통의 일방성에 익숙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정치 문제에 대해서도 목회자들의 설교와 주장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종교적 진리의 일방적 소통방식에 익숙한 교회 지도자들이 민주적인 쌍방의 소통이 요구되는 사회 안에서 자신이 익숙한 종교적 방식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펼치려 할 경우 사람들로부터 저항을 받게 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따라서 기독교적 가치가 정치의 영역에서 실현되기를 바란다면 그 가치가 일반 시민들과 소통이 가능한 언어로 ‘번역’되어 나타나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기독교는 독단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려한다는 오해를 받기 쉽다. 특히 대규모로 성장한 대형 교회는 이미 사회 질서 안에서 커다란 사회적 영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지도자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것은 지극히 삼가야 할 일이다. 오히려 교회는 쌍방적 소통의 태도를 내면화하여 기독교적 가치를 표방하되 정치권력을 지향하는 어떤 노력도 삼가는 것이 현 시점에서는 전적으로 요구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적 가치가 사회에서 작동하게 하는 가능한 방식 가운데 하나는, 정치적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서 각각의 사안이 가진 여러 측면들을 분석하여 전문가의 노력을 통해 정치적 소통의 질서에 따라 접근하는 것이다. 더욱이 개신교는 교파주의 때문에 동일한 사안에 대해서도 교파들 간에 상호 모순된 주장들이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개신교가 건전한 사회적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서는, 오늘의 한국 사회와 같이 민주화가 상당히 이루어진 상황에서는 교회 혹은 목회자의 입에서 사회로 직접 의견이 전달되기 보다는 교파들 사이의 이견을 사전에 조정하는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개신교 전체에 이익이 될 수 있다. 이 장치는 교파간의 신앙 문제를 조정하는 기능이 아니라, 단지 기독교의 가치가 사회적으로 구현될 수 있는 정책적 대안 제시와 이를 위한 개신교 내부의 의견 조율의 기능에 집중한다면 현실적으로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이런 일은 궁극적으로 기독교적 가치가 시민들을 설득할 수 있다는 신념에서 출발한다.


결론: 기독교적 정치 참여의 길

기독교가 이념 체계의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 정치가 하나의 이념 체계의 구성과 강요로 설정된다면, 이는 이데올로기가 되고 그 정치적 결과는 비극이다. 하지만 기독교는 보편성을 지닌 가치 체계를 지니고 있기에 사회가 그릇될 길로 나아갈 때 그것을 비판하는 좋은 기준점이 된다. 이 경우에 기독교는 시민들로 하여금 가치를 중심으로 여러 문제들을 바라볼 수 있게 돕는다. 이런 노력 가운데 그리스도인은 정치 공동체 가운데 소금과 빛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교회는 교인의 수만큼 사회 안에서 권력을 지닌다. 그런데 목회자가 이런 권력을 바탕으로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을 키워가려 한다면 신앙은 왜곡되고 사회는 교란된다. 목회자는 신도들이 선한 정치적 영향력을 미치는 시민이 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어야 하며, 신도들에게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여 자신이 사회 안에서 권력적 지위를 얻으려 해서는 안 된다. 이런 점에서 목회자는 신앙과 정치 사이의 먼 거리를 확인해야 한다.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은 기독교적 가치의 정치적 의미를 잘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이 교회의 직분자라는 것과, 그가 바람직한 정치가인가의 여부는 별개의 문제이다. 자신의 삶을 바쳐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정치가의 길을 추구함으로써 자신에게 체현된 기독교적 가치를 통해 한국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 또는 선거나 사회 참여를 통해 인간다운 사회의 실현을 위해 노력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인은 신앙과 정치 사이의 가까운 거리를 확인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드러내지 않고 하는 선행과, 드러나는 공간인 정치영역에서의 착한 행실을 통해 빛이 되어야하는 선행, 이 두 가지 모두가 요구된다. 과거에 이 땅의 어려운 정치적 상황 속에서 믿음을 지키며 세상 안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몸소 감당했던 신앙의 선진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다. 지금과 같은 축복된 정치적 자유와 민주적 여건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보다 조심스럽게 정치적 숙고의 길을 열고, 기독교적 가치의 관점에서의 비판과 참여의 요구에 능동적으로 응답하는, 실천적 덕을 갖춘 시민이 되어야 할 책무가 부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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