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 설요한은 고려대학교 행정학과 4학년에 재학중이며 광교장로교회(담임목사 이성호 교수)의 출석교인이다. -편집장 주- 

 

보편화된 정치?


  정치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시대이다. 작년만 보더라도 나꼼수의 흥행이 여기에 크게 한 몫을 했고 이와 더불어 한미 FTA, 서울시장 보궐선거, 안철수 현상, 선관위 디도스 사건, 뉴스타파 등의 화두가 나타나고, 풍자에 대한 고발이라는 과민반응이 되려 역풍을 맞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한다(하지만 촌극의 주인공인 그분은 촌극을 장편소설로 끝맺으려는 의도가 있는지 계속해서 과민반응을 남발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이 회자되면서 사람들은 어떤 형태로든지 저마다의 정치적 입장을 조금이나마 피력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정치적인 건 싫어요.” 하는 말이 습관처럼 나오는 분위기에서 2008년 ‘촛불’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제는 정치에 대한 관심 정도는 가져야 하지 않겠나.” 라는 말이 나오는 분위기로 바뀌는 듯하다. 당장에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SNS 매체에 접속해 몇 명을 ‘팔로잉’하거나 친구를 맺고 ‘좋아요’를 누르다 보면 타임라인 창은 어느새 최신 사회이슈로 보이는 것들이 ‘RT’(리트윗)되거나 ‘공유’되어 있다. 이제는 정치가 정말로 보편화된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전자매체에 익숙한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들에게는 말이다.



민주주의라는 텅 빈 기표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여러 인터넷 유저들은 블로그 등을 통하여 ‘선거에 참여하지 않은 결과가 낳은 대한민국의 현실’을 규탄하기도 했다. 저번 서울시장 보궐선거 때에는 선거 며칠 전부터 꼭 투표하자는 글들이 올라왔고, 정확한 세대별 투표율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투표를 한 사람들 중에서 20~40대는 나경원 후보에 비해 진보적이라고 불리는  박원순 후보를 압도적으로 지지한 결과를 보였다. 그리고 박원순 후보는 시장이 되었다. 이 같은 상황은 사회 내에서 명시적으로 드러내지는 않더라도 ‘민주주의’에 대한 성찰이 시작된 것은 아닐까 하는 일종의 기대감에 부풀게 한다.


  그런데 여기서 잠시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이 민주주의라는 것이 그리 정의가 명확한 용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용어는 단지 시민이 정치적 주권자라는 주장을 담고 있을 뿐이다. 이 시민사회의 권력이 어떻게 구성되고 제도가 어떻게 형성되어 통치가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것을 이 민주주의라는 용어가 규정해 주지는 않는다. 상당히 최근인 1987년도에 민주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민주주의라는 말에 대한 감수성은 있을지 모르나 실제로 민주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가에 대한 성찰은 부족한 것이 한국사회의 현실인 것이다. 이 민주화가 국가기구나 기업, 언론, 교육 등의 영역에까지 흘렀는가 생각해보면 실제로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오히려 민주화 이후에 민주화를 위해 항거하던 사람들은 곧바로 잘 먹고 잘 사는 문제로 편입되고 경제의 호황과 더불어 소비주의적인 문화에 잠식되어 ‘민주’라는 말은 단지 기표로만 남게 되었다. 이랬던 분위기가 최근에 반전되는 기미가 보이고 있고, 따라서 이럴 때에 민주주의라는 말을 성찰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사실 오늘날 이해되고 있는 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실제로는 투표로 대변되는 정도에 불과하여 이 이상의 정치적 활동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쉽지 않다. 하지만 민주주의라는 것을 고려할 때는 국가권력의 구성과 아울러 자본과 이와 관련된 경제적인 규범을 형성하는 권력까지도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따른 다양한 활동이 요구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주권을 따르는 민주주의


  이때 그리스도인은 민주주의라는 체제 하에서 한 명의 주권자로 활동하면서도, 주권 행사의 기준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따라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기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되어야 한다. 특히 율법이 중요한데, 개혁신학의 전통에서는 성경이 말하는 율법을 문자 그대로 적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피하면서도 동시에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율법의 경계 내에서의 자유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리고 구약의 율법의 의미를 해석학적으로 드러내어 오늘날 의미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잠시 십계명에 한정해서 생각해 보자. 장로교회가 권위 있는 문서로 인정하는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 중 대요리문답을 참고해 보면, 도덕법은 인류에게 선포된 하나님의 의지로서(93문), 중생하지 못한 자들에게는 그것이 정죄의 기능을 하지만(96문), 중생한 자들은 정죄로부터는 해방되면서도 구원에 대한 감사로 그들의 생활법칙으로서의 도덕법을 더욱 조심하여 따르게 된다고 기술하고 있다(97문). 그리고 이 도덕법은 십계명에 요약되어 포함하고 있다(98문). 그리고 십계명을 준수하는 원리 중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있는데, 우리들에게 금했거나 명령된 일이라면 다른 사람들의 지위와 의무에 따라서 그들도 이를 피하거나 행하도록 도와 줄 의무가 있다는 것과 다른 사람들에게 명령된 것도 우리의 지위와 사명에 따라 그들을 도와야 할 의무가 있고 그들에게 금한 일에도 저희와 동참하지 않도록 조심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99문). 이것은 십계명이라는 것이 단순히 개인윤리의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윤리로 넓게 해석하고 적용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중요하다. 대요리문답은 100~148문에 걸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있어서 우리의 마음자세와 행동양식이 어떠한 방식으로 나타나야 하는지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모세오경에서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자기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거룩은(레 19:2), 약한 자들을 돌보는 것을 배제하지 않는다(레 19:9-10).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길은(신 10:12),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배제하지 않는 것이다(신 10:19-20).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너희도 이방 땅에서 나그네였음을 기억하며 나그네들을 압제하지 말고 약자를 해하지 말라 명하신다(출 22:21-22). 이스라엘 왕국이 세워진 후에도 하나님께서는 약자를 배려하지 않는 왕들을 이사야, 예레미야, 호세아, 아모스 등 선지자들을 통해서 꾸짖으셨다. 신약시대의 교회 역시 공동체적 차원에서 서로 호혜를 베풀기에 힘썼다(행 2:44-47; 4:32-35).


  오늘날 사회는 성경이 쓰여진 당시의 사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해져 개인이 활동하는 사회적 범위 역시 넓어졌고 분야도 다양해졌다. 그렇다고 성경이 말하는 사회적 윤리의 의미가 퇴색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안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원하시는 것들을 오늘날 시대 속에 어떻게 구현해야 하는지에 대해 더욱 고민해야 할 때이다.



청년의 문제?


  오늘날 사회에서 이슈가 되는 현안은 셀 수 없이 다양하고 하나하나가 중요하게 회자되어야 할 것들이지만, 그 중 한 가지에 대한 단상을 적어보고자 한다.


  요새 정치권에서 ‘청년’들이 주목을 받고 있다. 주목받는 이유 중 하나는 흔히 ‘88만원 세대’라고 불리우는 세대담론이다. 청년들의 불만의 가중, 2008년 이후 시위에 대한 일종의 ‘저항의 대중화’와 온라인과 소셜네트워크로 퍼지는 정치적인 이야기와 선거참여운동. 이러한 것들이 실제로 투표율과 지지율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드러나면서, 그리고 그 성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남으로써 각 정당에서는 청년들을 위한 의제를 선점하기 위해 ‘경쟁’하고 있다. 비대위 위원 청년 영입, 청년 비례대표 공천 등으로 청년을 ‘슬로건’으로 내세우기도 하며 청년을 위한 실업수당 제공 등의 정책을 추진하려 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렇게 의제를 선점하는 방식이 과연 청년들을 위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현재 ‘청년’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정치적 논의들은 단지 청년들을 ‘포섭’하기 위한 정치‘공학’적 차원의 논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청년들의 정치성이 강해지면서 이를 포섭하기 위한 정치공학적 움직임이 나타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나, 정작 이 문제의 근원적인 해결책을 정치‘철학’적으로 고려하는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는 것이다. 사실 청년의 문제는 단순히 ‘88만원 세대’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의 문제이다. 당장에는 경제, 주거의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에 청년이 속한 가정의 경제문제이기도 하고, 사회의 노동재생산 구조에 기인한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각 정치집단에서는 청년을 표적으로 한 시혜성 정책만을 내놓을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경제구조를 포괄할 수 있는 보다 근원적인 대안을 내놓아야 하다. 그동안 출자총액제한제 폐지, 지주회사 규제 폐지, 금산분리제 폐지 등의 친재벌정책을 시행하고 종합부동산세, 법인세, 소득세 등 경제적 우위를 점하는 자들에게 부여해야 할 세금은 대대적으로 줄이면서 이 부자감세에 대한 재정 부족분은 서민증세로 충당하고 있다가 갑자기 청년지향, 서민지향적인 정책을 내놓는 것이 정치 세력들의 ‘숨죽임’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살필 필요가 있다. 다시 제도정치권이 안정화되면 어떻게 돌변할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간혹 ‘구조의 문제’를 제기하면 급진주의자라거나 때론 종북주의자라는 오해를 사기도 하며, 심지어는 현 구조 안에서 취할 것은 취하고 있으면서 입만 살아있는 인지부조화자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하지만 비단 이것은 좌파나 개혁을 지향하는 사람들만이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보수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말이다. 정치철학상 보수는 대개 개인의 자유, 도덕, 법, 전통, 시장 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현 구조가 이러한 가치가 보편적으로 공유되도록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주류를 중심으로 작동하고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경우에는 배제시켜 버리는 구조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불안정한 비주류는 소수의 안정된 주류에 편입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우리 나라의 자살사망률은 OECD 국가 중 1위이고, 미혼자 자살률은 기혼자의 3배가 넘는다. 무엇을 보수하겠다는 말인가?


  상황이 이렇다. 따라서 정책 입안자들의 정치철학을 숙고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정치철학을 구현하는 기술로서 정치공학의 중요성을 폄하할 수는 없으나, 단지 포섭용에 불과한 정치공학적 움직임은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근원적 대안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윌버포스와 비그포르스


  곧 총선이 시작된다. 이미 각 정당에서는 후보 공천이 시작되었고 이제 각 지역에서는 선거유세가 시작될 것이다. 위에서 선거에 국한된 민주주의의 한계에 대해 언급하긴 했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제도정치권의 역할이 중요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고 모든 시민이 제도정치권 내에 들어가 의정활동을 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선거를 통해 ‘그래도 더 나은’ 사람을 뽑는 것이 중요하다. 제도정치권은 각 의원들이 나름의 정치철학적인 관점을 가지고 들어가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벌어지는 정치공학적 활동이 치열하게 일어나는 곳이다. 사실 이 치열함을 낳는 것은 시민사회 전반에서 나타나는 목소리의 크기이기에 시민사회 전체의 역할과 유기적으로 논해야 하지만, 우선 정치인에 초점을 맞추어 보자면 사회개혁의 철학을 공학적인 방법을 통해 구현한 두 사람을 예로 들 수 있다. 18~19세기 영국에서 노예제도와 노예무역 폐지에 지대한 공헌을 한 윌리엄 윌버포스(1759~1833)와 20세기 초중반 스웨덴 사회민주주의 정책의 초석을 놓은 에른스트 비그포르스(1881~1977)이다.


  윌리엄 윌버포스는 20대 초반에 정계에 진출하여 수려한 언변와 쾌활한 성격으로 촉망받던 정치인이었다. 그는 당대의 야만적 문화(동물학대 등)에는 휩쓸리지 않았고 나름의 도덕성을 가지고는 있었으나 그때까지만 해도 회심한 그리스도인은 아니었다. 그는 20대 중반(1785)에 영적 회심을 하였는데, 이 때 성직자가 되어야 하나 고민했지만 그를 상담했던 존 뉴턴으로부터 의원으로서의 그의 위치에서 신자로서 살아가라는 조언을 듣는다. 그는 이전에 행했던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습관을 버리고 의회에서 성경적 가치관을 실현하기 위하여 진력한다. 그는 영국 사회의 상류사회 개혁, 빈민 구제 등의 정책을 주도했고, 그의 대부분의 경력을 노예제도와 노예무역 폐지에 쏟았다. 회심 이후 그는 평생 주머니에 책을 넣고 다니며 다방면의 지식을 습득했으며, 항상 메모할 수 있기 위해 잉크를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그는 개혁을 위한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때론 그가 감리교인인 것을 드러내지 않는 ‘전략’을 구사하기도 했다(당시 감리교의 열광주의적 성격이 사회의 지탄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윌버포스의 개혁이 전형적인 보수의 부르주아식 개혁이라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하고 그 징후를 그가 프랑스 혁명의 과격성에 대하여 우려를 표한 부분에서 읽어내고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의 공헌이 굳이 폄하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에른스트 비그포르스는 스웨덴 사민주의 최고의 이데올로그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그는 언어학 박사였지만, 당 활동, 의정 활동, 재무부 장관까지 역임하면서도 나라 밖 최신의 경제 이론, 철학, 사회 운동 등에 대한 방대한 연구를 병행했다. 또 사민당 내 좌파의 지도적 인물로서 사민주의의 윤리적 원리들에 대해서도 흔들리지 않는 태도를 견지했다. 그는 원리적으로는 사회주의자였지만 이것을 급진적으로 이루는 것이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인식과 더불어 점진적 개혁을 추진해 나갔다. 그는 튼튼한 이론적․사상적 배경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현실 속에서 반대 세력들을 설득하고 그들의 저항을 뚫기 위해서는 다수 대중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현실적인 힘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다수 대중이 현실적으로 원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하며 그것을 찾아낸 뒤에는 흔들리지 말고 한목소리로 그것을 외치는 힘 있는 정당이 있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많은 원리적 사회주의자들이 이 부분에서 비그포르스를 ‘개량주의자’로 아쉬워하는데, 그가 자신의 철학을 공학적으로 구현했고 그것이 현실 사회를 실제로 상당 부분 개혁했다는 점에 있어서는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 않은가 싶다.



기독교인은 좀 정치적일 필요가 있다


  천문학적인 액수를 탈세한 기업인이 ‘모든 국민이 정직했으면 좋겠다’는 화두를 던지고, CEO 정책이라는 국가운영상 모순된 정책을 구현하시는 분께서 마이클 센댈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었다며 정의를 논하는 세상이다. 재계와 정계의 최정점에 있는 분들의 의식이 이러하고 이러한 의식이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리는 그 안에 있어서, 또 나름대로 적응하며 잘 살고 있는 듯하여 이것이 표면적으로 느끼기 어려울 수 있으나 실제 현실이 녹록치 않다는 것은 우리 자신과 주변을 조금만 성찰해 보아도 알 수 있다.


  선거철이 되면 교회에 정치인들이 종종 등장하곤 한다. 교회만큼 사람이 ‘일정 시간 이상 몰려 있는’ 곳이 드물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이유를 붙일 수 있겠지만 선거철에 오는 이유를 굳이 설명하지는 않아도 될 듯하다. 하지만 교회에 다닌다는 이유가 굳이 뽑아야 할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교회에 다닌다는 것을 선거철에만 정략적으로 이용하려는 자가 과연 신앙을 가진 자인지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설령 신앙을 소유했다고 해서 그가 기독교적 가치관을 온전히 구현할 것인가는 결국 그가 내놓는 정책을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걸어왔던 정치행적과 정당이 있는 자라면 그가 속한 정당의 성향까지도 보아야 하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개인적, 사회적으로 나타내는 데 있어서 후보의 정책과 정당의 성향이 과연 합당한가를 고려해서 지지해야 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흔히 ‘중우의 정치’라고 비판받기도 한다. 이 말을 그대로 강조해서 민주주의의 당위를 해쳐서는 곤란하겠지만, 사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는 ‘중우’에 불과한 존재인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속받은 신자로서의 자유함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성령의 도우심에 따라 개인적․사회적 차원의 기독교 윤리관을 정립하고 그것을 현실 세계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방식대로 실천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작게는 생활의 공간에서 SSM(기업형슈퍼마켓) 등의 문제도 고민해 보고, 선거가 이루어지면 후보와 정당에 대한 관심을 많이 갖고 정책도 세세히 살펴보고(향후 몇 년을 책임진다), 크게는 제도정치의 영역 자체에 대해서도 고민하는 습관을 갖고, 거대한 경제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이 온당한가에 대한 성찰도 해 보고 때로는 비판(혹은 저항)의 목소리도 내 보면서 말이다. 그래야 민주주의의 체제 내의 한 주체로 활동할 때 개인, 가정, 지역 등의 틀 안에 있으면서도 더 넓은, 보편적인 부분을 함께 아울러 고민하고 개혁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글을 마무리하는 시점에 경범죄처벌법 개정법률에 구걸행위의 처벌에 대한 규정을 넣은 것이 논란이 된다는 기사를 접한다. 구걸행위가 일어나는 곳은 잘 가지 않을 것 같은 분들이 어떤 대안을 가지고, 어떤 감수성을 가지고 이 법률을 발의하고 통과시켰는지 궁금해진다. 빈곤이 발생하는 악순환에 대한 시민적 관심이 여러 정치적 행동양식으로 드러나야 할 이유가 오늘 또 하나 늘어난다. 기독교인은 좀 정치적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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