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하는 사람만이 권력을 바꿀 수 있고 세상의 방향을 결정할 것이다.”

▲ 이병수 교수 고신대학교 고려신학대학원 Reformed Theological Semi 석사, 선교학박사 국제문화선교학과장
고(故) 김근태의 말이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2012년 투표하라, 점령하라”고 했다. 그의 표현이 자극적이고 선동적으로 비쳐지든 그것은 사실이다. 민주화의 시대에서 권력은 총구가 아니라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선거의 표에서 나온다. 특히 올해는 문명사적 대전환기에 놓여 대한민국의 미래가 달려있는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해이다. 우리 사회는 지금 문명사적 위기 가운데 지구촌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와 한국만의 문제로 중첩되어 있다. 특히 ▲빈부격차의 경제적 양극화 문제 ▲성장과 복지 담론의 사회적 문제 ▲청년실업과 비정규직의 고용, 노동 문제 ▲사교육비 부담의 증가, 학교 폭력 및 대학생 등록금의 교육적 문제 ▲토목 공화국의 개발이냐 생명 중심의 환경이냐 생태 환경문제 ▲대북접근의 원칙론이냐 유연성이냐의 북한 문제 ▲신자본주의로 인한 시장의 위기 중 그 해결책으로 ‘따뜻한 자본주의’, ‘탐욕의 경제’ 깨트릴 ‘영혼이 있는 경제’를 열망하는 가운데 개인의 자율성과 공동체성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 어떤 방향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대한민국의 미래가 결정될 수 있고 이러한 시대적 상황 가운데 의회권력인 총선과 행정권력인 대선이 금년 4월과 12월에 동시에 기다리고 있다. 이런 시기에 김근태의 말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도 큰 울림이 되고 있다. 


대선과 총선에 임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세로 필자의 경험을 간단하게 언급하고자 한다. 필자 나이 금년 만 55세다. 선거권을 가지고 투표에 참여하기도 하고 피선거권을 가지고 선거에 출마하기도 하였다. 대통령 선거, 총선 및 지방선거 투표에 여러 번 참여했다. 네 번의 대선 투표에 필자가 투표한 사람이 모두 당선되기도 했다. 첫 번째는 김영삼 대통령, 두 번째는 김대중 대통령, 세 번째는 노무현 대통령,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이었다. 정치적 노선에 따르면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에 골고루 표를 던졌다. 김영삼 후보를 선택한 것은 그가 평생을 독재와 항거하며 민주화에 헌신한 점과 기독교 장로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에게 투표한 것은 민주화에 헌신한 점과 호남인 가운데도 대통령이 나와야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을 택한 것은 그가 민주화와 지역주의와 싸운 점, 지방분권을 부르짖은 점이었다.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을 택한 것은 기독교인 장로인 점과 경제 부분에서 타 후보 보다는 상대적으로 나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필자가 대선의 투표경험을 언급하는 이유는 필자의 글을 어떤 정치적 노선에 치우친 시각으로 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과 그 경험이 약간이라도 선거와 투표에 참고로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필자는 거의 모든 선거 투표에 참여한 평범한 시민 중의 한사람이다. 투표에 참여한 이유 중의 하나는 우리가 바라고 꿈꾸는 사회는 투표에 참여하는 시민의 표로 선출된 정치인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칼빈주의 철학자 니콜라스 월터스토로프가 이것을 잘 증명한다. “인간이 만든 모든 제도와 조직은 인간 의지의 결정의 산물이다.”


따라서 선거에 참여해야 할 이유는

첫째, 선거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한 힘이고 우리가 바라는 세상을 만들고 바꾸는 힘을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세상은 모든 것이 힘에 의해 움직인다. 그것이 자연의 힘이든, 경제의 힘이든, 정치의 힘이든, 영적인 힘이든. 힘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유형의 힘이든 무형의 힘이든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과 사랑도 결국은 힘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유,무형의 힘이다. 이유는 그 사랑의 힘으로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세상을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울지마 톤즈”에 나오는 이태석 신부의 영향도 그의 비극적 사랑과 희생의 죽음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가장 위대한 힘은 비극적 죽음(?)의 힘이다. 노무현의 비극적 죽음도 현재로는 살아 있는 힘이다. 그래서 어느 정치 평론가는 “죽은 노무현이 살아있는 이명박과 싸우고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폐족이었던 친노(親盧)가 부활하는 것도 그 힘이다. 문제는 그 힘이 어떤 방향을 택하느냐다.


둘째, 그 힘이 성경적 세계관에 입각한 후보들에 의해 발휘되도록 그들에게 투표해야 한다.

기독교인 가운데 그런 사람이면 가장 좋다. 하지만 비 그리스도인이라도 일반은총 가운데 하나님의 의와 공평을 실천할 수 있는 근접한 사람이라면 그에게 투표할 수 있다. 특히 성경적 세계관에 입각한 정치인을 교육하는데 교회가 관심을 가지는 것이 너무나 필요하다. 예를 들면 김영삼, 이명박 두 장로 대통령이 대한민국 정치에 기여한 부분도 많지만 가장 아쉬운 것은 기독교 세계관에 기초한 정치, 경제, 사회 및 문화에 대한 철학의 부재였다.


셋째, 필자가 배운 개혁주의 신학 때문이다. 개혁주의 신학자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정치를 선한 것으로 여겼다.

그가 정치를 선한 것으로 판단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 삶의 전 영역에 미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특히 하나님을 왕과 재판관으로 묘사하는 가운데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힘’이 뒷받침되기 때문이었다. 그는 어떤 신학자보다도 하나님의 힘, 전능성을 강조했다. 이것은 성경에 기초한 정확한 주석과 신학에서 나왔다. 또한 칼빈은 그 당시 인문주의자로, 법을 공부한 사람으로 힘에 대해서 잘 알았고 어떤 점에서 인문주의 영향 가운데 이탈리아 정치사상가 마키아벨리(Machiavelli, Niccolo 1469~1527)만큼 힘의 속성에 대해서 잘 알았다. 이 힘을 가장 구현할 수 있는 곳이 정치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대통령·국회의원 등 모든 선출직이 사실 정치인이고 그들의 힘은 시민의 선거에 의한 표에 의한 힘이기 때문이다.

 

넷째, 기독교 정신과 철학을 실천한 기독교 정치인 때문이다.

영국의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1759-1833)는 제대로 된 기독교 정치인 한사람이 어떻게 거대한 구조악과 싸워 승리하는 것인가를 보여주었던 대표적 인물이다. 그가 부산시 사상구에 문재인과 맞붙은 손수조와 같은 20대에 정치에 뛰어 들었다. 출마 이유는 노예제도 폐지와 기독교 국가로서의 영국의 도덕성을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약 40년 이상, 150회 이상의 대국회 논쟁 가운데 노예제도를 폐지한 것이었다. 윌버포스가 거대한 구조악과 싸울 때 우리 속담에 “계란에 바위를 치는 격”이라고 했지만 복음의 능력을 믿을 때 그 계란 속에 다이너마이트가 숨어 있어서 거대한 바위였던 노예제도의 악법을 박살내었던 것이다. 이 윌버포스가 있었기 때문에 아브라함 링컨이 노예해방을 할 수 있었고 흑인 인권 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출현이 가능했고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가 탄생할 수 있었다. 성경적 정의는 고통 받는 한 개인을 돕는 것도 중요하지만 고통 받는 수많은 사람을 돕는 법과 제도를 변화시키는데 참여하는 정치의 영역과 정치인의 역할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칼빈주의자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도 칼빈주의 신학에 기초해서 목사, 교수, 국회의원 및 수상에 이르는 가운데 네델란드에 지대한 영향을 남겼다.


얼마 전 어느 기독교인과의 대화에서 그는 교회가 “착하고 힘센 그리스도인”을 선택하고 배출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에 의하면 세상에는 네 부류의 사람이 있는데 ‘악하고 힘센 사람’, ‘악하고 힘없는 사람’, ‘착하고 힘없는 사람’, ‘착하고 힘센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고 했다. 그 중 제일 위험한 것이 ‘악하고 힘센 사람’이 투표에 당선될 때라는 것이다. 악하고 힘센 사람의 대표적 인물로 시편 73편에서 아삽의 기도에 잘 나타난다. 그 기도에서 아삽의 고민은 악하고 힘센 사람이 형통하여 선한 사람이 질투할 정도였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정치적 무관심과 변별력 없이 ‘묻지 마 투표’ 한다면 악하고 힘센 사람이 선출되어 세상을 망칠 수 있다. 성경에 입각한 ‘착하고 힘 센 사람’이 선출되어 ‘악하고 힘센 사람’을 제어하여 의와 공평을 이루는 사회를 만들 수 있도록 선거와 투표에 적극적 참여가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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