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다가오십니다. 하나님은 가시떨기 불꽃 가운데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야에게는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짐승을 쪼개어 놓고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에녹과는 오랜 세월 동행하셨지만 어떤 방식이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아담과는 저녁 서늘할 때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의사소통 방식은 다양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그것은 당연하지 않나 싶습니다.


하나님의 기적도 다양합니다.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셨습니다. 요단강도 가르셨습니다. 여리고는 성벽을 도는 것만으로 점령하게 하셨습니다. 다른 성들은 일반적인 방법을 사용하게 하셨습니다. 여호사밧은 찬양을 통해서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다윗은 물맷돌을 사용해서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히스기야의 기도에는 15년 수명을 연장시켜주셨지만 바울의 기도에 대해서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응답하셨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생각해봅니다. 우리는 꿇어앉기도 하고 바닥에 편하게 앉기도 하고 엉덩이를 치켜들고 엎드리기도 하면서 기도합니다. 꼼짝 않고 기도하는 분들도 많지만 몸을 흔들면서 기도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제가 본 독일교인들은 다리를 꼬고 앉아서, 어떤 분은 턱에 손을 괴고서-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비슷한 모습으로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교회에 들어서면 일단 앉아서 머리 숙여 눈감고 기도합니다. 제가 본 독일교인들은 교회당에 들어서면 서서 기도했습니다. 가끔 한국교인의 독일인 남편이 서서 기도하는 바람에 신기해보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어느 집을 방문하면 일단 기도부터 합니다. 식당에 가도 기도부터 합니다. 그런데 제가 아는 어느 선교사님은 집을 떠나기 전에 기도를 했습니다. 저도 몇 번 따라해 보았습니다. 나름대로 의미가 느껴져서 참 좋았습니다. 우리는 눈을 감고 기도하지만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보시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앉아서 기도하지만 유대인들은 서서 기도했습니다. 예수님도 서서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찬송을 부를 때, 서기도 하고 앉기도 합니다. 제가 본 독일교회 교인들은 찬송을 부를 때는 무조건 일어섰습니다. 우리는 예배시간 찬송에는 박수를 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집회를 할 때는 박수를 칩니다. 집회도 예배인데 그런 구별이 좀 우습기도 합니다. 독일교인들은 박수보다는 손을 들거나 내밀면서 찬양을 합니다. 아프리카교인들은 춤을 추고 몸을 흔들면서 찬양합니다. 다들 각자의 성향대로 찬양을 합니다.


병 고치는 것도 기도 외에 다양한 방식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베드로의 그림자가 병자에게 덮여서 병 낫기를 바랐습니다.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자를 고치기도 했습니다. 요즘이라면 무속신앙이라고 할 겁니다. 야곱은 버드나무, 살구나무, 신풍나무를 잘라서 양떼 앞에 세워둠으로써 자신이 원하는 양을 얻어내었습니다. 마술이나 최면처럼 보입니다. 엘리사는 여리고의 수원지에 소금을 뿌려 수질을 바꾸었습니다. 물에 나뭇가지를 던져 도끼를 물 위로 떠오르게 했습니다. 독이 있는 죽에 곡식 가루를 집어넣어 먹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지금 같으면 미신이라는 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저도 수용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것들을 정죄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방식이 절대적이라고 고집하면 안 됩니다. 다양성은 축복입니다. 다양성은 풍요로운 신앙생활을 열어줍니다. 물론 지극히 조심한다는 전제하에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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