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은 우리 고신 교회가 설립된 지 6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사람으로 치면 수연이 되는 나이입니다. 의미 있는 해를 맞이하여서 이번 달 기획기사는 60주년을 맞이하는 고신의 정체성과 미래를 향한 방향성을 다루기로 하였습니다. 손성은 목사가 "고신은 어디로 가는가?"라는 제목으로 고신의 신학을 다루고 이성호 교수가 고신이 극복해야 할 과제들에 대해서 글을 발표할 것입니다. 또한 고신의 중요한 모토들을 다루기를 원하는데, 왜냐하면 우리 안에 좋은 구호는 있지만 내용이 없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코람데오에 대해서는 최승락교수, 생활의 순결에 대해서는 오세택 목사, 신앙의 정통에 대해서는 박우택 목사, 오직 성경에 대해서는 변종길 교수, 오직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는 황대우 목사가 기고를 할 것입니다. 많은 관심을 가져 주시길 바랍니다. 이세령 목사(연구위원장). 

 

▲ 손성은 목사 부산삼일교회 담임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기원과 정체성이 무엇이며 어디를 향해서 가고 있는지를 알고자 하는 것은, 인간됨의 기본동기일 것이다. 동물 중에 도대체 어떤 동물이 이런 관심을 가지고 있으랴. 고신총회설립60주년을 기린다. 이런 동기가 더욱 자극되는 시점이다. 이 글은 이런 주제를 살펴보는데 있어서 모든 자료를 섭렵한 것이 아니다. 주변에 널려져 있는, 쉽게 구할 수 있는 자료들을 통해서 얻게 되는 단상이다. 그래서, 고신의 역사에 징검다리 역할을 한 몇 개의 사건들을 연결시켜 보면서, 다음의 짚게 될 징검다리가 무엇일까 하는 예측과 더불어 어떤 징검다리를 짚어야 할지를 모색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1. 전통적 신앙고백으로부터의 이탈?

변종길 교수는 2006년 부산삼일교회에서 열린 고신미래포럼에서 「고신의 신학과 신앙노선」이란 글을 발표하였다. 변교수에 의하면, 고신의 신학의 정초를 놓은 “박윤선 박사 이후에 이근삼 박사와 오병세 박사, 홍반식 박사, 그리고 허순길 박사 등에 의해 고신에서 개혁주의 신학 노선은 계속 유지되고 발전되어 왔다.”1) 신학교에서만 이런 것이 아니다. 교회에서도 개혁주의가 강조되었으며, 학생신앙운동(SFC)의 강령은 이 점에 있어서 특별하다. 개혁주의노선을 구체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곧 고신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을 신앙의 표준으로 삼고,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을 생활원리로 삼으며, 개혁주의 신앙의 대한교회 건설과 국가와 학원의 복음화 및 개혁주의 신앙의 세계교회 건설과 세계의 복음화를 사명으로 내세운다. 여기에 보면, 표준과 원리, 그리고 사명이 있다.2) 흥미롭게도 변교수는 이 표준을 요약하면서 학생신앙운동의 강령에서 강조하고 있는 “전통적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이란 말에서 “전통적”이란 말을 생략한다. 왜 그럴까? 현재의 고신총회에서 교리표준으로 받아들인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가 “전통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에는 없는 34장(성령)과 35장(하나님의 사랑과 선교)를 첨가하고 있는 것이다.

 

1) 고려신학대학원홈페이지에 있는 학교소개/교수진 아래에 올려진 글,  http://kts.ac.kr/www/bbs/board.knf?boid=d04&wid=107

 

2) 원래의 학생신앙운동강령에는 변교수가 요약하고 있는, 표준, 원리, 사명 외에 목적에 대한 진술도 있다: “우리는 개혁주의신앙의 생활을 확립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됨을 우리의 목적으로 한다.” 

 


2.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의 개정의 과정과 그 역사적 의미


이런 첨가가 함축하고 있는 신학적 의미와 역사적 의미가 무엇일까? 이런 첨가는 과연 변교수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고신의 역사 속에서 “개혁주의 신학노선은 계속 유지되고 발전되어 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까? 아니면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 중에 반대방향으로의 진전을 함축하고 있는 것일까?3) 그렇다면 먼저 이런 첨가가 언제 이루어진 것일까? 그리고 왜 이루어진 것일까?


1) 고신총회에서의 개정

2011년 12월 고신총회에서 출간한 『헌법』은 맨앞의 그 ‘헌법연혁’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1969년 제19회 총회에서는 새로 번역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과 대교리문답을 우리 교회의 신경으로 채택하였다”4)고 한다. 15인의 헌법개정위원이 선정되었고 노회수의 등의 과정을 거쳐서 1974년에 헌법책으로 출판되었던 것이다.5) 이 1974년도판 헌법에서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가 33장까지로만 되어 있다. 그런데, 1981년도에 개정하게 되는 헌법책에는 34장과 35장이 첨가되어 있다. 이 시기 동안의 총회록에는 이 34장과 35장의 첨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과연 누구에 의해서 그리고 어떤 과정을 통해서 이 장들이 첨가된 것일까? 이 문제를 살펴보기 전에 세계장로교회내에서 일어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개정운동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이 개정의 신학적 의미에 대해서 인상적인 스케취를 얻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 미국장로교회에서의 개정

청교도혁명이 진행되던 도중 영국 웨스트민스터 의회에서 1643년 제정되고 스코틀란드의회에서 1647년 선포된 이 고백서는 스코틀랜드 내에서만 아니라 이 신앙고백서를 표준으로 택한 여러 나라들 안에서도 그 상황과 형편에 따라서 그 이후 여러 번 개정을 거듭하였다. 하지만 중요한 신학적 흐름을 함축하고 있는 개정은 미국장로교회내에서 일어난 1903년의 개정이다.6) 그 이전 부흥운동 등으로 야기된 장로교회 내에서의 신학파(New School)와 구학파(Old School)와의 긴장을 봉합했던(1869년)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다시금 개정한 것일 뿐만 아니라, 현재의 미국장로교회내의 분열에 깊은 앙금을 남겨두고 있는 개정이기 때문이다. 이 분열은, 양학파의 이름에서 보여지듯이 그 당시 대두되고 있던 성경고등비평을 포함한 신학적 입장에 대한 태도 사이에 있는 긴장을 나타낸다. 곧, 새로운 신학적 흐름에 호의적인 신학파와 비판적이었던 구학파 사이의 긴장이었고 분열이었다. 그 당시 신학파를 대표하는 사람들은 Edward Robinson, Charles A. Briggs, Phillip Schaff 등이었고, 구학파는 Archibald Alexander, Charles Hodge, B.B. Warfield 등이 대표했다. 그 당시 미국장로교회에서는 신학파의 입장을 따라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결국 개정하고 말았다. 1903년의 개정이 그것이다.

3)신조상에 나타나는 이런 표현상의 변화나 항목의 첨가 혹은 삭제 등으로 고신총회 안에서의 분위기가 변하고 있다는 것을 추정하는 작업 자체에 회의적인 견해도 가능하다. 만일 그런 생각이 옳은 것이라고 한다면, 신조의 채택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전제하고 또한 신조문제도 고신총회의 방향에 대한 좌표설정과는 전혀 무관한 문제라고 보는 전제가 있는 셈이다. 이런 견해 자체가 신조에 대한 무관심을 반영하는 세태의 반영이라고 할 것이다.

4)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총회, 『헌법』, 7. 

5) 일반 책자를 염두에 두고 고신대학교와 신학대학원의 도서관에서 이 책을 구하였으나 찾기 무척 어렸웠다. 등사판 외에는 다른 책자가 전혀 없는 것을 확인하고 이 등사판(표준문서연구위원회,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 1974)이 고신총회가 첫 번째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교리표준의 일부로 받아들인 그 헌법책인 줄로 알게 되었다. 

6) 미국장로교회에서의 이런 개정운동은 스코틀란드장로교회내에서 일어난 1879년, 1892년 등의 ‘선언문’등에 나타나는 신학운동에 영향을 입은 것으로 보인다. cf. Ian Hamilton, 『The Erosion of Calvinst Orthodoxy: Drifting from the truth in confessional Scottisch churches』(Christian Focus Publications, 2010).

 


3. 신앙고백서의 개정에 대한 세계3대개혁주의신학자의 견해

이 개정에 대해서 세계적인 개혁주의신학자로 알려진 세 사람의 의견을 들어보자. 세계3대개혁주의신학자로 알려진 B.B.Warfield, Herman Bavinck, 그리고 Abraham Kuyper의 견해이다. 우리 고신총회가 진정 정통 개혁주의노선을 취하고 있다고 한다면, 1903년에 있었던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개정에 대한 이들의 견해에 귀기울여 보아야 할 것이다.  


1) B.B.워필드

먼저, 미국장로교회내의 개정논의에 직접 참여하였던 B.B.Warfield의 입장인데,7) 미국장로교회총회에서 웨스트민스터개정안이 통과된 이후 1904년에 발간한 팜프렛의 말미에 한 말이다:


“개정된 신앙고백서는 분명히 이전의 신조를 알미니안화시켜버린 것이다; 그렇게 보지 않는다면, 최소한 명백한 칼빈주의 원리들 사이사이에 명백한 알미니안주의원리들을 함께 뒤섞어 놓은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두 개의 모순되는 요소들을 함께 두면서 아무 것이나 원하는 대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해 둔 것이다. 어느 누구도 둘 다 모두를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409쪽).


2) 헤르만 바빙크

워필드는 개정된 신조가 알미니안주의화되었거나 최소한 알미니안신학적 요소가 뒤섞여 있어서 개혁교회의 신조로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네델란드의 개혁주의신학자였던 Herman Bavinck도 미국에서 일어난 이런 웨스트민스터신조개정에 대해서  그의 유명한 『개혁교의학』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8):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적 정신은 ‘북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North)에도 침투했다. 수년 동안 연구되었던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의 수정안이 1903년에 채택되었다. 이 수정판에서 신앙고백서는 단지 약간의 변경이 있었을 뿐이지만, 첨가와 누락은 - 새롭게 포함된 성령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선교에 대한 두 개의 장과 개혁교리에 대한 몇몇 거짓 견해들을 반박하는 ‘선언문’(Declaratory Statement) - 모두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 목적은 신앙고백서에서 가르치는 '제한구원론‘과 나란히 하나님의 사랑, 구속, 복음의 설교와 은혜의 제공, 성령의 사역과 유아기에 사망한 모든 아이들의 구원에 대한 ’보편구원론‘을 아주 강력하게 드러내려는 것이었었다. 따라서 수정된 신앙고백서는 두 진영으로부터 거부되었다. 클락스빌(Clarksville)의 신학교 교수인 웹(R.A.Webb)박사와 같은 몇몇 개혁주의자들과 템플턴(S.M.Templeton)박사와 같은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수정된 고백서의 ’보편구원론‘이 ’제한구원론‘과 상치된다는 주장에 의견을 같이했다. 어쨌든 주목할 만한 사실은 1905년 5월에 개최된 북장로교 총회에서, 즉 수정된 신앙고백서가 채택된 지 2년 후, 이 교단이 1770년 부흥으로 말미암아 발생하고, 신앙고백상 결정적으로 아르미니우스주의적 입장을 취한 ‘컴벌랜드장로교회’(Cumberland Presbyterian Church)와 연합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의 개혁교회와 신학은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 성경의 무류성, 삼위일체, 인간의 타락과 무능, 제한속죄, 선택과 유기, 영원한 징벌에 관한 교리들은 슬며서 부정되거나 또는 공개적으로 거부되었다. 미국 칼빈주의의 미래는 낙관적인 장밋빛이 아니었다.”

7) 개정논의에 참여하였던 학자들의 글들을 모아서 편집한 자료가 그 당시 출간되었다: John de Witt, Henry van Dyke, B.B.Warfield. G.T.Shedd, 『Ought the Confession of Faith to be revised?』(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 Library: 1890). 인용된 워필드의 견해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가 개정된 후 1904년에 발표된 원고에서 취한 것이다. B.B. Warfield, "The Confession of Faith as Revised in 1903", 『Warfield: Selected Shorter Writings』, R&R, 1970, 370~410 에서 취했다. 

8) 헤르만 바빙크, 개혁교의학1, 박태현역(부흥과 개혁사:2011), 289~290.

 


3) 아브라함 카이퍼

바빙크는 개혁주의교회가 지니고 있어야 할 특징적인 신앙조항들이 이 개정을 통해서 슬그머니 혹은 공개적으로 거부되었다고 한다. 낙관적인 전망을 할 수 없을 정도라는 것이다. 또 다른 네델란드의 개혁주의신학자인 아브라함 카이퍼는 이 1903년의 개정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을까? 아브라함 카이퍼는 미국에서의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개정운동을 염려스러운 눈으로 지켜보면서 미국장로교회총회에서 개정이 완료되기 훨씬 이전에 그 염려를 표현하였다. 1891년에 발표된 그의 관심을 보면, 카이퍼박사는 미국에서의 개정운동을 17세기네델란드에 있었던 알미니안주의자들의 항의와 관련시키고 있다. 1891년에 발표된 “Calvinism and Confessional Revision"이라는 글 속에 나타난 그의 결론이다9):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개정운동을 듣고 이런 일이 네델란드에서도 일어나게 된다면 있게 될 그 결과를 예상해 보면서 본인은 이런 개정을 적극적으로 막아야 할 것을 하나님 앞에서 갖게 되는 의무감으로 느끼게 된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이런 신조의 개정이 자기 나라에서 일어나게 된다면 강력하게 저지하는 운동을 벌이겠다는 것이다. 그것을 하나님 앞에서 갖게 되는 의무감으로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세계3대개혁주의신학자의 한 명으로 알려진 B.B. 워필드는 이 개정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현장에서는 개정을 저지하기 위해서 강력한 운동을 전개하였고,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던 네델란드의 개혁주의신학자들은 그 반대운동에 공감하면서, 또한 개정에 대한 반대소감들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한국교회의 고신총회에서는 이 신앙고백서개정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가? 이것에 답하기 위해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와 관계해서 한국교회의 역사를 잠시 뒤돌아보자.

9) Abraham Kuyper, "Calvinism and Confessional Revision," 『The Presbyterian and Reforemed Review 』2 (July, 1891),399.

 


3. 고신총회에서의 개정과정과 그 견해들

 

1) 한국교회에서의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이 신앙고백서개정이 미국교회에서 완료될 즈음은 한국사회에 개신교선교가 뿌리를 내려가고 있던 시점이다. 2년뒤쯤인 1905년에 원산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되고, 1907년의 평양대부흥운동과 함께 대한예수교장로회(독노회)가 조직되기도 한다. 이 독노회에서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서가 채택이 되지만, 신앙고백서 자체는 아직 교리표준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아직 번역도 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신앙고백서의 번역은 윌리엄 베어드선교사에 의해서 시도된다. 1925년도에 발간된 『신도게요서』가 그것이다.10)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자체에 한국장로교회가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개정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받아들인 미국장로교회(PCUSA)가 다시금 그 신조를 개정해버리게 되는 1967년도의 새신앙고백서작성에 대한 소식을 듣고 나서이다. 이근삼교수에 의하면, 한국장로교회는 “1967년 미국장로교회에 새신앙고백이 제정되자 본래의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을 떠난 것이라 하여 큰 자극을 받”았다.11) 그래서, 통합측(1971년), 합동측(1969년)과 더불어서 고신총회도 앞서 언급했던 것과 같이 1969년(19회총회)에 신앙고백서 자체(33항까지만 있는 것)를 채택하기로 하고 1974년도에 발간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1981년도판에는 34장과 35장이 첨가되어서 “개정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어느 만큼 따르게 된 것이다.12)

10) 이 『신도게요서』번역발간과 윌리엄 베어드의 신학문제를 신사참배반대운동과 관련시켜 본 필자는 “신사참배반대운동과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운동”이란 제목의 글을 써서 기독교보에 투고하였으나, 지금까지 아무 응답이 없다. 

11) 이근삼, “한국장로교회의 신학과 신앙고백”, 『개혁주의신학과 교회』(기독교문서선교회: 1985), 176. 

12) 선언문과 신앙고백서항목을 수정한 것은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1903년도 개정된 신조를 전체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개정의 신학적 함축성은 필자의 “합하려면 신조부터 합하자”는 기독교보에 실린 글을 참고하기 바란다(2012년4월18일자).

 


2) 고신총회에서의 개정과정?

이전의 “전통적”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에서 “개정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채택하는 과정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그 자세한 내막은 밝혀지지 않는다. 총회록에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사정을 희미하게 나마 추정해 볼 수 있는 단서들이 있다.


1977년도에 고신총회는 「교단창립30주년기념대성회」를 가졌다. 그리고 『순교정신 계승하자』는 제목으로 발간된 기념책자 안에 오병세, 이근삼, 허순길 세 교수의 특강이 각각  “고려파신학의 정립문제”, “한국교회에 고려파교회의 존재이유”, “고려파신학의 역사적 전망”이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이 글들을 보면, 이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개정문제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감질날 정도이다. 이 글들이 현재 우리들이 다루고 있는 주제에 의미가 있는 것은 모두 1981년도 이전의 글이기 때문이다. 아직 “개정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고신총회가 채택하기 이전의 것이다.13)


(1) 오병세 교수

이 글들 중에서 오병세교수는, “우리 교단은 1972년 9월 26일 제22회 총회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우리의 신앙고백으로 선포하”였고 그 신앙고백서는 전체 33장으로 되어 있던 것을 분명히 한다. 그리고, “이 신앙고백이 개혁주의 신학의 성숙한 표현이지만 18,19세기의 선교운동과 아울러 새로운 강조점이 신앙고백에 삽입되어야 할 필요성을 느껴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미국판에는 제34장에 「성령에 관하여라」는 장과 제35장에 「하나님의 사랑과 선교에 관하여」라는 장이 첨가되어 총 35장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킨 후, 다음과 같이 제안하고 있다: “우리의 신앙고백에도 성령과 선교가 더욱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개혁주의는 매일 새로워짐으로 모든 시대에 생명을 주는 운동이 되는 것이다.”14) 개정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2) 허순길 교수

이것에 대한 다른 이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아쉽게도 이 자료에 실린 다른 두 교수들은 이 신앙고백서개정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를 않는다. 하지만 간접적으로나마 그 입장을 추정할 수 있다. 허순길교수는 그의 글에서 “고려신학교의 설립이념은 개혁주의신학의 재확립과 개혁주의교회생활의 재건”에 있다면서, 박윤선박사, 이상근교수, 고 박손혁목사, 고 한상동목사, 한부선선교사 등이 봉사해 왔다고 한다. 특별히 이 중 박윤선박사에 대해서는, “일찌기 Calvin주의 신학자, J.G.Machen을 사사하고 화란자유대학의 연구생활 등에서 개혁주의신학에 흠뻑 젖은 그는 B.B.Warfield, A.Kuyper, H.Bavinck, K.Schilder, G.Grijdanus 등의 바른 개혁주의신학사상을 소개하고 가르침으로 고려신학교에 개혁주의신학의 정착을 이루어 놓”았다고 한다. 그래서, “개교30주년을 맞는 현 고려신학교는 이 선배교수들이 쌓아놓은 터전 위에서 변함없이 같은 신학을 파수하고 교육해 가고 있”다는 것이다.15) 그리고, 허교수는 고려파신학의 미래를 전망하면서, 미국의 프린스턴신학교와 네델란드의 자유대학교의 좌경화를 예를 신학의 변질을 경고한다. 바로 1912년도에 있어서 미국장로교회의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개정 이후에 프린스턴신학교 설립 100주년 희년을 맞이했을 때 그 당시 교장이었고, 신앙고백서개정운동에 반대했었던 Patton박사가 “Princeton은 옛칼빈주의 신학을 수정없이 가르쳐 왔다. Princeton이 자랑이 있어 그 이유를 찾는다면 개혁주의신학에 변함없이 성실을 기울여 온 것이다”는 말을 인용한다. 패턴박사의 이런 경고에도 불구하고 프린스턴신학교에 조만간에 파고들어왔던 신학적 좌경화를 허교수는 염두에 두고 경고하였던 것이다. 알다시피, 1920대에는 미국교회내에 자유주의-보수주의 갈등이 전개되었고, 결국 프린스턴이 좌경화되고, 이에 반발해서, 메이첸박사를 중심으로 해서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세우게 된다. 이 신학교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33장까지 있는 것을 지키고 있다. “고려파신학의 역사적 전망은, 선배들이 물려준 신학적인 신앙적인 전통을 후대의 봉사자들이, 오늘의 봉사자들이 어떻게 간수하고 빛내느냐에 달려있다”16)고 하는 허교수의 마음에는, “개정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가 아니라 “전통적”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고신총회의 역사적 전망 속에서도 교리표준으로 삼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3) 이근삼 교수

이근삼교수는 어떤 입장을 취하였을까? 아쉽게도, 그는 고려파가 “한국의 신학을 정통으로 지키려”17) 한다고 하면서도, 그 정통적 신학을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와 관련해서 언급하지 않는다. 흥미로운 것은, 이근삼교수가 그의 책, 『개혁주의신학과 교회』(1985년)에 실린,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의 의의와 가치”라는 글에서, 이 신앙고백서의 내용을 소개하는 중 33장까지만 소개하고 있고, 프린스턴신학교가 좌경화되는 것으로 인해서 “미국장로교에서....신앙고백은 등한시되었다”면서도, 1967년도에 있었던 미국장로교회의 새신앙고백서작성을 전후해서 제기되었던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폐기 혹은 개정의 이유들을 논평없이 나열하여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태도는 한편으로는 “전통적”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개정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넘어서서 1967년도에 선언된 미국장로교회의 “새신앙고백서”까지 인정하는 것처럼 보이는 인상을 남기게 된다. 이 점에 있어서 극히 애매모호한 입장인 셈이다.

13)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교육부, 『순교신앙 계승하자』(1977). 

14) 오병세, “고려파신학의 정립문제”, 36. 

15) 허순길, “고려파신학의 역사적 전망”, 53. 

16) 허순길, “고려파신학의 역사적 전망”, 55. 

17) 이근삼, “고려파교회의 존재이유”, 46~48.

 


(4) 요약

그러므로, 고신설립30주년에서 고려파신학에 대해서 특강을 한 세 교수들의 견해를 종합하면, 오병세교수는 신앙고백서개정을 염두에 두고 있고, 허순길교수는 간접적으로나마 반대하고 있으며, 이근삼교수는 양가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예상될 수 있는 것처럼, 오교수는 34장과 35장이 첨가되어 “개정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포함한 헌법책이 1981년 발간된 이후, 그 2년 뒤인 1983년 『월간고신』 8월호에 “고려파신학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자신의 입장을 계속 강하게 표명한다:“...그러나 우리 교회가 성숙한 마당에 12신조로는 부족함을 느끼고 1647년판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33장을 새로 번역하여 우리의 신앙고백으로 하는 동시에, 미국장로교의 전통을 이어받아 ‘제34장 성령에 관하여’와 ‘제35장 하나님의 사랑과 선교에 관하여’를 첨가시켰다. 17세기의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에도 성령에 대해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선교에 대한 내용이 내포되어 있으나, 우리 시대에 있어서 더욱 필요를 느낌에 따라 성령에 대한 것과 선교에 관한 것이 별도의 새로운 장으로 취급되게 되었다.”18) 그러면서 “이제 우리 신앙고백 제35장을 따라 선교에 힘써서 국내에서는 교회개척에, 밖으로는 세계인구의 반이 살고 있는 아세아선교에 주력하여야 할 것이다”19)고 권면한다. 죽은 정통이 아니라, 살아있는 신학이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너무나도 흥미로운 점은, 이렇게 34장과 35장을 첨가하면서도 여전히 종교개혁의 신학에 변함없이 충실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그의 글 중에서 오병세 교수는 바로 허순길 교수가 개혁주의신학의 변질을 경고하면서 인용하였던 1912년 프린스톤신학교 설립100주년기념사에서 한 Patton 박사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프린스톤신학교가 좌경하여 개편되기 전의 하지박사와 패톤박사는 종교개혁의 신학을 계승하는 신학임을 분명히 했다. 우리 고려신학도 새로운 신학을 창작하려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이요, 역사적인 장로교신학 또는 개혁주의신학을 한국이란 바탕에서 이해하며, 적용하고자 하는 것”20)이라고 한다. 하지와 패톤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의 개정을 반대하면서 종교개혁의 신앙을 파수하고자 하였던 것에 반하여, 오교수는 34장과 35장을 첨가하여 어느 정도 개정해가면서도 종교개혁의 신앙을 파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오교수가 신학적 변질을 꾀했다기 보다는 고신총회의 신학이 죽은 정통이 아니라 살아있는 신학으로서 선교와 전도를 통하여 널리 퍼뜨릴 수 있게 되어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과연 이런 개정을 통해서 그런 목적이 달성될 수 있었을까? 의미 있는 주제이다.   


(5) 문제의 핵심

문제를 간단히 정리해 보자. 정통적 개혁노선을 파수하며 계승하겠다고 시작된 고신총회가 그 정통적 개혁주의노선을 대표하는 세계적 개혁주의3대신학자들이 비판하고 있는 바로 그런 견해를 부분적으로나마 취하였다. 최소한 “개정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에 포함된 34장과 35장을 첨가한 것 취한 것을 볼 때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연 변종길교수가 2006년도 고신미래포럼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고신총회에서 “개혁주의 신학 노선은 계속 유지되고 발전되어 왔다”고 평가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세계3대개혁주의신학자들이 모두 한 목소리로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신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이 그러한 신적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 고신총회는 우리 고신총회의 독자적인 권위로 34장과 35장을 성경적인 것이라고 인정하고 취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일 그렇게 하려면, 과연 34장과 35장의 첨가가 우리 총회가 추구하는 개혁주의신학과 신앙에 아무런 손상을 끼치지 않을 것인지, 과연 우리의 신앙양심에 꺼릴 것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지를 치열하게 논구해 보아야 할 것이다. 마침 고신총회설립60주년을 기념한다. 그리고 합신과의 합동문제도 오가고 있다. 절호의 기회가 온 셈이다. 이 때를 놓치고 언제 다시금 이 문제를 거론할 수 있을까? 합신총회는 33장까지만 있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분명히 정통적 개혁주의노선을 계속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단순히 문자적으로 그 신조를 반복해서 읊조리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 어떤 비판에도 열려 있어서 다시 한 번 그 고백하는 바의 의미를 되새겨보고 오고가는 시대에 불변의 진리로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비교하면서 하나님의 영광도 존귀를 더욱 들어내는 신조가 되어야 하고 또한 그 신조에 걸맞는 삶을 살아내야 할 것이다.

18) 오병세, “고려파신학이란 과연 무엇인가?”, 『월간고신』(1983:8), 18. 

19) 오병세, “고려파신학이란 과연 무엇인가?”, 19. 

20) 오병세, “고려파신학이란 과연 무엇인가?”, 17.

 


4. 결론: 우리에게 과연 좌표가 있는가?

우리 고신은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기준도 없고 표준도 없이 그저 세상의 풍조를 따라서 바람부는 대로 오늘은 이곳으로 내일은 저곳으로 흘러갈 것인가? 그 분명한 좌표가 과연 무엇인가? 히브리서기자가 권하는대로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히12:2) 볼 뿐이다. 주여, 우리의 이 땅에서의 수고가 허망하지 않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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