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성호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역사신학
필자의 개인적인 경험으로 보았을 때, 고신의 지도자들은 일반적으로 미래보다는 과거를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과거에 대한 이야기도 신사참배 가결 이후의 10여년에 주로 한정되어 있고, 그 이후의 수치스런 역사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침묵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교단의 미래에 대하여는 별 관심이 없을 뿐 아니라, 관심이 있다 하더라도 근시안적이고 파편적이며 원론적인 논의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하나님이 아닌 이상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보았을 때 큰 흐름은 그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토인비라는 유명한 역사가가 말하였듯이 역사는 도전과 응전의 역사이다. 미래에 닥쳐올 도전을 정확히 인식하고 그 도전을 잘 극복할 때, 우리 고신교회는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 지엽적인 것에 매몰되어 미래를 잘 대비하지 못한다면 우리 고신 교회는 그 존재 가치를 잃어버릴 지도 모른다.


1. 고령화: 서서히 다가오는 무시무시한 교회의 적

필자가 보기에 고신교회가 당면한 가장 큰 적은 고령화이다. 고령화는 이미 한국 사회 곳곳에 뿌리깊게 진행되고 있으며 사회 전체에 큰 부담이 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이 고령화가 해결되기 보다는 점점 더 심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의 고령화는 사회보다 더 빨리 진행되는데, 가장 큰 이유는 젊은이들이 기존 교회를 떠나서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로 옮기기 때문이다. 필자가 방문한 상당수의 교회에서 생동감 있는 청년회를 찾아보기가 심히 어려웠다. 지금 한국 교회는 알게 모르게 점점 말라 고사되어가는 거대한 고목나무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교회는 고령화 문제에 대한 해답을 노인목회에서 찾기도 한다.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겠지만, 보편적 방법이 될 수는 없다. 노인 목회가 쉽지도 않지만 그 부분에 있어서 탁월한 역량을 가지지 않는다면 노인들을 잘 섬길 수도 없다. 무엇보다도 건강한 교회는 노인들의 비중이 높은 곳이 아니라 모든 세대가 골고루 같이 공존하는 교회이다. 그렇다면 지금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노인들로 하여금 가치있게 늙어 가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노인들이 여생을 가치있고 행복하게 사는 가장 좋은 길은 다음 세대와 더불어 사는 것이다. 문제는 한국의 어떤 곳에서도 나이 드는 법을 가르치는 곳이 없다는 것이다. 가장 큰 원인은 교회를 말씀으로 인도하는 목사들이 이 문제의 중요성에 대해서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거나 그 방법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특히 목회자들이 은퇴식을 할 무렵에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나이는 들었지만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는 목사들이 적지 않은 것을 우리는 요즘 너무 자주 목도하고 있다. 


한국 노인들의 가장 큰 문제는 다음 세대와 소통할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 이것은 의외로 나이든 목사나 장로일수록 더 심하다. 그들에게 있어서 젊은이들은 가르침의 대상일 뿐이다. 젊은 사람들에게서도 배우겠다는 겸손한 자세를 가진 교회 지도자를 찾기가 상당히 어렵다. 심지어 청년부 성장을 위해서 과감한 재정적 지원은 해 주지만 그들에게 교회의 중요한 일은 맡기지 않는다. 청년들은 교회에서 찬양 인도를 해 주고, 교회 부서에서 봉사해야 하는 존재이며, 교회행사 하는데 있어서 인원을 채워주어야 할 존재일 뿐이다. 그 결과 젊은이들은 교회의 영원한 손님일 뿐이며, 이와 같은 상태가 계속 될 때 청년들은 기회만 생기면 미련 없이 그 교회를 떠나게 된다. 청년들을 하루 속히 교회의 주역으로 훈련시켜야 할 필요가 여기에 있다.


해결책은 분명하다. 목사들 스스로가 나이 드는 법을 배워서 이것을 성도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이것을 제대로 가르쳐 주는 곳이 없기 때문에 목사들은 성경을 통해서 철저하게 배워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교회의 지도자들 특히 장로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한다. 장로들은 이런 일을 잘 할 수 있는 능력있는 목사를 분별하여 청빙해야 한다(박사학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교인들은 장로를 세울 때 청년들과 제대로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을 세워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젊은이들 중에서 다음 세대를 이어갈 수 있는 신실한 사람을 장로로 세우는 것이다. 우리 교단의 헌법에 따르면 40세 이상이면 장로가 될 수 있으니(예전에는 35세도 장로가 될 수 있었는데, 이 점에 있어서 개정된 헌법은 오히려 퇴보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필요하면 청년 지도자들을 당회에 참석시켜서 책임있는 의견을 개진할 수 있도록 장을 열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당회가 경로당으로 바뀌는 순간 교회 전체가 늙어가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고신교회의 미래는 청년들과의 소통에 성공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달려있다. 어떤 사람들은 예배시간에 청년들이 좋아하는 음악이나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것으로 해결하려고 하는데 이것이야 말로 임시방편일 뿐이다. 그렇게 훈련받은 사람일수록 더 좋은 미디어 시설이 구비되어 있는 근사한 교회로 쉽게 가버리는 경우가 많다. 또한 그렇게 신앙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이사 갈 때 굳이 고신교회로 갈 이유가 없다. 진정으로 청년들의 신앙을 위한 것이 무엇인지를 근본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2. 저출산: 교회를 덮치는 쓰나미

고령화는 교회를 서서히 말라가게 하는 질병이라면 저출산은 쓰나미와 같이 갑자기 닥치는 재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문제를 다루기 전에 우리 교회는 먼저 회개를 할 필요가 있다. 박정희 군사독재 정부는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하지 못해 산아제한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불과 몇 십 년 후를 바라보지 못한 근시안적인 정책이었을 뿐 아니라 사탄적 정책이었지만, 그 당시 거의 어떤 목사도 산아제한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강단에서 단호하게 설교하지 않았다(필자는 들어 본 적이 없음). 낙태로 불리는 태아살해 역시 교인 중에서 알게 모르게 큰 죄의식 없이 시행되었고 지금도 그렇게 바뀌지 않았다.


지금은 정부가 출산을 장려하고 있지만 산아제한 보다 더 강력한 시대적 상황이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하고 있다. 주거비용과 사교육비는 신자들로 하여금 자녀들을 많이 낳는 것을 두려워하게 한다. 성경은 여자로 하여금 “집안 일을 하게 하라”(디도 2장)고 명령하고 있지만 여 신자들의 대부분은 집안 일을 하찮게 여기고 아이를 기르는 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막중한 소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자녀들이 가정에서 주의 훈계와 교훈으로 ‘양육’되지 않고 어린이 집이나 유치원에서 세속적 가치관으로 ‘사육’되고 있는 실정이다.


상황은 더 암울하다. 필자가 알고 있는 모 초대형교회는 수능 100일전부터 새벽기도회가 참석자들로 미어터지지만, 수능이 끝난 바로 그 다음 날 참석 수가 그 전의 10분의 1 이하로 떨어진다. 대도시 교회일수록 중간고사나 기말고사가 있는 기간이면 중고등부 예배 참석 인원이 확 줄어든다. 대부분의 교회가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자녀 교육에 있어서 교인들도 불신자들과 거의 차이가 없다. 오히려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일류대를 향한 소망을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있을 뿐이다.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종교는 대학‘교’라고 한다. 이 대학이라는 우상숭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고신 교회의 미래는 암울할 수밖에 없다.


저출산의 여파는 이미 고신대학교를 강타하고 있다. 앞으로 신입생을 충원하는 것은 더욱 힘들어질 것이다. 다른 사업도 마찬가지지만 이제 교육산업은 특별한 경쟁력을 가지지 못하면 퇴출되게 될 사양산업이다. 당면한 이 문제는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교육부의 요구사항에 맞추는 것도 근본적인 해결방법이 될 수 없다. 이 문제는 저출산이라는 쓰나미가 몰고 온 구조적인 문제이며, 이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함이 없이는 어떤 해결책(예를 들면, 신대원이 내려와야 하느니 고신대학이 올라가야 하느니 등등)도 미봉책에 불과하다. 만약 이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면, 교단 지도부는 특단의 조치를 내려야 할 것이다.


3. 양극화: 작은 교회에 퍼부어지는 융단폭격

양극화 문제는 이미 한국 사회에 고질적인 문제로 오랫동안 깊이 뿌리 박혀 있다. 앞으로 우파정권이 정권을 잡고 있는 한 이 문제는 더 심화될 것이며, 좌파 정권이 다시 정권을 잡는다 하더라도 양극화의 큰 흐름을 다시 되돌릴 수 없을 것이다. 재벌은 이미 정부의 통제뿐만 아니라 시장의 지배를 벗어났다. 그들은 현재 모든 사업을 독식하고 있으며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은 도태될 것이다. 중산층은 무너지고 소수의 가진 자가 부를 독식하며 빈곤층이 사회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기업이 잘 되어야 국민이 잘 사는 시절은 이제 끝났다. 세계화 시대에 있어서 삼성은 더 이상 대한민국만의 기업이 아니다.


교회도 양극화의 폭탄은 피할 수 없다. 점점 더 성도들이 대형교회로 수평이동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수많은 신학교 졸업생을 교회가 배출한 결과 수많은 미자립교회가 양산되어서 서로가 경쟁을 하고 있다. 교회가 급속히 부흥하고 있었을 때에는 목사 수급을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 하더라도 교회 성장이 멈춘 지금 우리는 신학교 입학정원에 대해서 교단 지도부는 책임있는 결정을 하여야 한다. 예전과 달리 지금 교회를 개척을 하는 이들은 주위에 있는 교회는 말할 것도 없고 멀리 떨어져 있는 대형교회와 무한 경쟁을 해야 한다. 무조건 많은 수의 목회자를 배출하면 하나님께서 알아서 사용하실 것이라는 무책임한 생각을 재고해야 한다. 시대가 바뀌었으면, 정책도 바뀌어야 한다. 청빙을 받지 못하여 어쩔 수 없이 미자립 교회의 개척을 선택한 목사들의 고통을 더 이상 후배들이 격지 않도록 총회의 결단을 촉구한다.


고신과 관련하여 양극화 중에서 가장 큰 문제는 수도권의 집중화와 지방의 공동화이다. 대표적인 예로 불과 10여전 전만 하더라도 최상에 속하였던 부산대학은 이미 지방대학 중의 하나 정도로 그 위상이 전락되어 버렸고 수많은 미래의 인적 자원들이 수도권으로 몰리고 있다. 더 나아가 부산, 경남에 집중된 우리 교회의 대학입학생들 중 가장 지적인 능력이 뛰어난 이들은 수도권으로 오더라도 이전처럼 고신교회를 찾지 않는다. KTX로 대변되는 교통의 발달로 인해 수도권은 스펀지처럼 인적, 물적 자원을 빨아들이고 있다. 복음병원은 앞으로 삼성병원이나 아산병원과 경쟁을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양극화의 큰 흐름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성도들은 큰 교회로 몰릴 것이고, 서울과 지방의 차이는 더욱 심화될 것이다. 이것은 지금 현재 규모가 좀 있는 교회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다. 요즘 교회들은 근본이 튼튼하지 않기 때문에 교회가 조금이라도 문제가 있으면 너무나 쉽게 분열하는 경향이 있다. 결국 목사들이 목회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작은 교회를 큰 교회로 만드는 생각을 버리고 작은 교회를 훌륭한 작은 교회로 만들어야 한다. 또한 자기 지역을 살기 좋은 지역으로 만드는 것에도 힘을 써야 한다. 좋은 유치원이 생기는 것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고 주변의 학교들도 더 좋은 학교가 되도록 교회가 지원을 하여야 한다. 쉽게 말해서, 자기 지역에 사람이 몰리도록 교회가 사력을 다해 노력하지 않으면 그 교회는 쇠퇴할 수밖에 없다. 요즘 교회들이 이전과 달리 너무 교회 안에 갇혀 있는 경향을 보인다. 교회가 사회적으로 책임있는 소명을 다하지 못한다면 교회는 사회로부터 외면당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교회와 사회는 더 이상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4. 세속화: 교회 안에 침투한 보이지 않는 질병

한국사회는 급속히 세속화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특별히 컴퓨터와 인터넷은 말할 것도 없고 스마트 폰의 등장은 사람의 생활 방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사람들은 더 이상 진지하지 않고 초월적 세계에 대한 관심이 현전하게 떨어졌다. 바울의 말대로 사람들이 쾌락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시대가 되었다. 언제 어디서든지 뉴스, 게임, 영화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전도하기가 이전보다 보통 어려워진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기계에 노예가 되어 가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땅을 사고 그 땅을 담보로 돈을 빌려서 교회 건물 짓고, 교육관 짓고, 수양관 짓는 식으로 성장해 왔다. 그러나 이 성장 모델이 1990년대를 지나면서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건물이 좋다고 교회로 오지 않는다. 무리해서 교회당을 건축한 결과 상당수의 교회들의 빚더미에 올라 있다. 적지 않은 교회가 빚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여 문을 닫고 있는 현실을 교회 지도자들이 예사로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빚이 많으니 교회 교육이 부실해 지고, 교육이 부실해 지니 교인들이 오지 않고, 교인들이 오지 않으니 재정이 나빠지는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 고신 교단은 좋은 외적인 시설을 상당히 보유하고 있다. 의과대학을 보유하고 있는 종합대학도 있고, 복음병원이라는 큰 병원도 있고, 서울 강남에 총회회관도 있고, 대전의 중심지에 선교 센터도 있고, 천안에 웅장한 고려신학대학원도 있다. 한국 교회 중에 이 정도 시설을 보유하고 있는 교단은 그렇게 많지 않다. 어떻게 보면 자부심을 가질 만도 하다. 하지만 이제 이런 건물들이 교회 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다. 건물을 유지하는 비용이 앞으로 급격히 증가하게 될 것이고, 이것은 교단 전체에 큰 부담으로 계속 남게 될 것이다. 성도들의 헌금의 상당 액수가 건물을 유지하는데 사용된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교회성장을 거의 우상으로 섬기면서 지내왔다. 그 결과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보다는 교회가 오히려 세상을 따라가고 있다. 세상의 온갖 것이 무분별하게 교회 안에 들어오고 있다. 특별히 예배에서 이런 세속화는 가장 심하게 진행되고 있다. 교회 건물 구조는 극장으로 변해가고 있으며,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는 설교가 유행하고 있다. 기독교 방송의 상당 수 설교는 불신자들에게 오히려 혐오감을 주는 기가 막힌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개신교, 천주교, 불교 방송을 객관적으로 한 번 비교해 보라!) 다시 한 번 교회가 거룩성을 회복하지 않으면 한국교회가 유럽의 교회처럼 텅텅 비게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5. 정답은 사람이다.

필자가 보기에 60주년을 맞는 고신교회의 앞날은 상당히 어둡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게 보인다. 하지만 교회 역사 속에서 교회의 앞날이 장미 빛처럼 환하게 빛난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하나님은 시대마다 교회에 새로운 도전을 주셨고 교회는 말씀을 붙들고 그런 도전에 응전을 하면서 살아왔다. 어떤 경우에는 충성된 종으로 그 역할을 잘 수행하였고, 어떤 경우에는 매우 미흡한 경우도 있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앞에 놓은 도전들의 크기가 아니라 얼마나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주님께 헌신하는 것이다.


앞에 열거한 도전들을 해결하기 위한 궁극적인 방법은 유능하고 신실한 말씀의 사역자들을 길러내는 것이다. 고신 교회의 작은 교회를 한 번 생각해 보자. 주위에 큰 교회도 많고 작은 교회도 많은데, 고신교회를 가야 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결국 신자들은 그 교회의 목사를 보고 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목사를 바로 세우고 지속적으로 성장시키는데 모든 관심을 쏟아야 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 볼 필요가 있다.


“고신은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통설이 있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이 통설은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렸다. 사람의 중요성을 알았기 때문에 주남선, 한상동 목사는 고려신학교를 설립하였고, 여기에서 목사들을 길러내어 회개와 진리 운동을 실천적으로 주도하려고 하였다. 그 당시 최고의 주경신학자였던 박윤선 목사를 청빙하는데 성공하였고, 만주에 있던 박형룡 박사를 모셔 오는 일에 송상석 목사는 목숨을 걸었다. 이 정도면 “고신이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은 그 다지 신빙성이 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앞에서 언급한 모든 분들은 모두가 다 고신을 떠났다. 떠난 이유가 고신교회의 지도부에게만 있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그 일에 전적으로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이후에도 신대원에 있었던 적지 않은 수의 교수들이 자의든 타의든 학교를 떠나야 했다. 이런 고신의 멘탈리티를 극복하지 않으면 우리 안에 있는 인재들이 밖으로 떠나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고신의 모든 지도자들은 고민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우리 안에서 제대로 된 지도자를 길러낼 수 있을 것인가? 무엇이 미래의 인재들로 하여금 고신에 남아 있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미래의 청소년들이 고신 교회 안에서 매력을 느끼고 이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도록 만들 것인가? 먼저 서로가 맞대어서 방안을 만들고 그것을 프로그램화 시키고 관심있는 사람들을 설득하여 필요하다면 기금도 모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신대원을 위한 장학기금 중 가장 규모가 큰 목양장학회에 대한 언급을 하면서 마치고자 한다. 목회장학회가 시작할 때 그 취지에 깊이 동의하였던 한 분이 자신의 회사의 매출의 1%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얼마 전 그 회사의 매출이 무려 2조원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의 미흡함으로 인해 약속한 기금은 다른 곳으로 가고 말았다. 이것은 우리가 당면한 문제의 해결이 돈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준다. 교회의 지도부가 얼마나 신뢰할 만한 비전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여 추진하는가가 중요하다. 스스로 속아서는 안 된다. 주님은 만홀히 여기심을 당하시는 분이 아니다. 지금이라도 우리 모두가 힘을 합하여 신실하고 유능한 말씀의 사역자를 길러낸다면 앞서 언급한 거대한 장애물들은 우리가 즐겁게 먹을 “밥”으로 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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