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승락 교수 연세대학교(B.A) 고려신학대학원(M.Div) 영국노팅험대학교(Ph.D)
리처드 멀러(Richard A. Muller)의 『라틴어 및 헬라어 신학 용어 사전』에서는 코람 데오(coram Deo 하나님 앞에서)를 코람 호미니부스(coram hominibus 사람들 앞에서)와 대비시키고 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 삶과 행위의 기준을 어디에 두고 살아야 할 것인지를 생각할 때, 이 양자의 대비는 매우 심각한 긴장을 유발시킨다. 사람들 앞에서 용인될 수 있는 것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역사상 사람들 앞에서보다 하나님 앞에서 살고자 하는 이유 때문에 때로 목숨을 내어 놓아야 했던 순간들도 있었다.

        

윌리엄 틴데일은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옳다는 신념 때문에 그 유능한 생애를 화형으로 마감해야 했다. 만일 그가 ‘사람들 앞에서’ 행하는 길을 택했다면 그는 당대 최고의 성경학자로서 존경을 받으며 장수를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많은 순교자들의 피가 동일한 이유 때문에 세상에 뿌려졌다. 신사참배의 강압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람들 앞에서’의 길을 택했지만, ‘하나님 앞에서’의 길을 택한 소수의 사람들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고달프고 고독한 길을 걸어가야만 했다. 그러나 그 ‘하나님 앞에서’의 길이 이 시대에도 우리에게 용기와 격려의 원천이 되고 있다.

        

우리 앞에도 끊임없이 ‘코람 데오’와 ‘코람 호미니부스’의 선택의 도전이 다가오고 있다. 한때 한국 목회자들의 영웅 취급을 받았던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 목사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16세기의 종교개혁은 우리의 초점을 신앙과 생활의 유일의 무오한 규칙인 성경으로 되돌렸다. 그러나 새로운 종교개혁은 우리의 초점을 개개인의 자아존중의 거룩한 권리에로 되돌릴 것이다.” 우리는 지금 무너지고 있는 그의 교회의 잔재를 보고 있지만, 왜 그것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지의 이유를 그의 구호와 신념 속에서 잘 찾아볼 수 있다. 인간의 “자아존중의 거룩한 권리”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서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수단화하여 인간의 자아존중의 욕구를 충족하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 자신의 거룩한 열망과 요구를 덮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결국 그는 ‘하나님 앞에서’보다 ‘사람들 앞에서’를 취한 것이 아닌가? 로버트 슐러의 가장 큰 기여는 이것이 망하는 길임을 확실히 각인시켜준 데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잘 배우지를 못한다. 여전히 많은 교인들과 목회자들이 코람 데오의 가치를 모르고 있다. 그것은 ‘사람들 앞에서’의 쉬운 길의 유혹이 그만큼 강하고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코람 데오의 매력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 우리에게 짐이 아니라 참된 누림의 길임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성경에서 코람 데오는 단지 전치사(coram = before)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헬라어에서 라틴어의 ‘코람’에 해당되는 전치사는 여러 가지가 있다. 카테난티(katenanti)나 에난티(enanti)도 그 중의 하나이다. 바울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하는 상황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으로부터의 말씀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katenanti theou) 말하고자 하는 결단을 밝힌다(고후 2:17, 12:19). 엠프로스텐(emprosthen) 역시 유사한 의미를 가진 전치사이다.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 그를 시인하거나 부인하는 것에 따라 아버지 앞에서 그 사람을 시인하거나 부인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마 10:32-33).

        

그러나 이런 전치사들 보다 더 특징적인 전치사로 에노피온(enōpion)이 있는데, 예를 들어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enōpion tou theou) 자신이 거짓말하지 않는다고 밝힌다(갈 1:20). 에노피온은 엔(en)과 옵탈모스(ophthalmos 눈)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전치사로서 ‘안전’(眼前)의 의미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이는 히브리어의 리프네(li-pnê)나 엣프네(et-pnê), 엘프네(el-pnê) 등에 맞먹는 전치사이다. 히브리어에 있어서 이 전치사들은 모두 파네(pane 얼굴)와 연결된다. 예를 들어 출애굽기 34:23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일 년에 세 차례 ‘하나님 앞에’ 보이도록 명할 때 엣프네 전치사가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70인경에서는 헬라어 에노피온으로 번역되고 있다. 따라서 이런 전치사들이 하나님과 관련하여 사용될 때는 하나님 앞이 다름 아닌 하나님의 면전(面前), 또는 하나님의 안전(眼前)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는 ‘코람’에 해당되는 헬라어나 히브리어 전치사들이 명시적으로 나타나는 구절들 속에서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눈이나 하나님의 얼굴이 언급되는 수많은 본문들 속에서 보다 폭넓게 코람 데오의 성경적 근거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히브리서 4:13에서 만물이 하나님의 눈앞에 벌거벗고 목잡힌 것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 역시 이런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다.

        

시편 139편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한 성도의 안도와 즐거움을 포착할 수 있다. 시인은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 나의 생각 ...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 ... 나의 모든 행위 ...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다”고 고백한다(2-4절). 그러면서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7절)라고 부르짖는다. 이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숨기고 싶은 자가 나에 대해 모르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질려서 손발을 내젓고 있는 상황을 말하는가? 또는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어 안달이 난 어떤 사람이 하늘에 올라가도, 스올에 내려가도 거기 계시며 새벽 날개를 치고 바다 끝에 가도 거기에도 계신 하나님을 발견하고 아무데도 숨을 곳이 없어서 체념에 빠지는 상황을 말하는가?

        

아이들이 종종 부모 몰래 못된 짓을 도모한다. 그러면서 힐끔힐끔 부모의 눈치를 살핀다. 하지만 그 눈길을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곳에서도 부모의 흔적을 발견할 때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아무리 몸부림쳐도 그 눈길을 벗어나지 못할 줄 알 때 체념하게 된다. 시편 기자도 지금 그런 체념을 토로하고 있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이 시편을 그렇게 읽고 있다. 또는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묘사함으로써 사람들을 하나님의 눈길 속에 가두려는 목적으로 이 시편을 가르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상황을 설정해볼 필요가 있다. 아이들이 부모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늘 찾는다. 혼자서 멀리까지 나가는 시도를 하다가도 눈을 돌려 부모를 확인한다. 그리고 부모의 눈길이 자신을 살피고 있는 줄 알고서 크게 안도한다. 그 사실을 알 때 아이는 더 마음껏 뛰놀고 활동할 수 있다. 이것이 시편 139편을 쓴 시인의 마음이다. 하나님의 눈길을 벗어나고 싶어 안달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안에 더 깊이 머물고 싶어 하는 사람의 깊은 안도와 즐거움을 노래하고 있다. 나의 모든 것을 아시고 나의 가는 곳 어디에나 계신 하나님은 떼어버리고 싶은 부담이 아니라 없어서는 안 될 크나큰 위안이다.

        

이 하나님의 존전에 살아가는 것이 크나큰 위안이 되는 이유는 13절이 잘 밝혀주고 있다.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이 구절은 이유를 나타내는 히브리어 접속사 키(kî 왜냐하면)에 이끌리고 있다.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신 나의 창조자가 되시기 때문에 그가 나의 모든 것을 아시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나의 가는 모든 곳에서 그의 손이 나를 인도하고 붙들어주실 것을 확신할 수 있다. 하나님이 나의 창조자 되심, 내가 그의 피조물 됨의 인식이 성도가 몸 붙이고 살아가는 모든 세계에 대한 구별된 인식(세계관)의 출발점이 된다. 뿐만 아니라 바로 이 요소 때문에 하나님을 전적 신뢰하고 살아가는 “나”와 하나님을 인정치 않고 오히려 대적하는 “악인” 또는 “원수들” 사이의 구분이 불가피하다. 원수들은 하나님을 비방하지만, 하나님이 지으시고 아신 바 된 “나”는 이렇게 노래한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14, 17절).

        

하나님 면전에서의 코람 데오의 삶은 이처럼 즐거움과 감사가 넘치는 삶이다. 그것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고 기뻐하는 삶이다. 코람 데오의 이 플러스 요인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어떤 사람들은 코람 데오 때문에 항상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갇힌 것처럼 생활할 수도 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하든지 항상 하나님이 최우선이고, 또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 면전의 특권을 누릴 줄 모르는 사람들은 아무리 종교적 행위를 열심히 할지라도 그 안에 참된 기쁨이 없다.

        

이 시대에 우리가 싸워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긴 하지만 그 본질은 코람 데오가 아니라 코람 호미니부스(사람들 앞에서)에 지나지 않는 그런 종류의 유사 종교들이다. 시편 139:13, 14처럼 “주께서 나를 이와 같이 지으셨기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범사에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뜻대로 살기를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의 삶의 방식이다. 그러나 얼마 전 한국을 방문했던 레이디 가가(Lady Gaga)의 대표곡 “Born This Way” 같은 노래에서 우리는 이와 유사한 것 같으면서도 전혀 다른 본질을 발견한다. 얼핏 보면 이 노래는 하나님의 창조자 되심을 높이는 것처럼 보인다. “이대로 난 아름다워,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니까.” 그러나 그 속셈은 하나님의 뜻보다 인간의 뜻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공고히 하려는 데 놓여 있다. “게이든 양성애든 레스비안이든 트랜스젠더든, 난 바른 길로 가고 있어.” 여기에는 인간의 본성대로 하나님이 따라주기를 바라는 요구는 있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인간 자신을 바꾸고자 하는 정신은 조금도 들어 있지 않다.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자로서 “눈가림”(엡 6:6, 골 3:22)의 유혹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한다.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엡 6:6-7)고 명한다. “눈가림”이라고 할 때 바울이 사용하는 옵탈모둘리아(ophthalmodoulia)라는 독특한 단어는 코람 데오(헬라어로는 하나님의 눈을 상기시키는 enōpion tou theou)와 대척점에 있는 코람 호미니부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이는 섬기되 사람의 눈만 끌기 위해 섬기는 것을 말한다. 바울은 이런 사람을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anthrōpareskos)라 부르고 있다. 이에 반해 바울의 목표는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곧 사나 죽으나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고후 5:9) 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살고 죽는 조건을 초월한다.

        

이런 모습을 따라 이 시대에 우리가 목숨보다 더 강한 코람 데오의 자세로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다 되기를 바란다. 그것의 출발점은 우리가 무한히 주님의 임재를 기뻐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코람 데오의 본질이요 또한 영원한 유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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