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우택 목사 한샘교회 담임 고려신학대학원 구약학 강사
누구든지 우리 교단교회에 소속되어 있다면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이라는 표어를 알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교단의 목회자라면 당연히 신학대학원에서 경건회 시간이나 강의시간에 셀 수도 없이 반복적으로 들었던 말이고 당연히 목회현장에서 이 말을 계속하여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앙의 정통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면 모호해 지는 경우가 많다. 특히 신앙의 정통을 많이 말하는 사람일수록 그 삶이 신앙의 정통의 가치와 중요성을 입증해 줄 정도로 모범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그 분들이 그 말을 사용하면 할수록 더욱 모호하고, 그것을 알고 지켜야 할 중요성에 회의가 들기도 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신앙의 정통”이라는 표현은 우리 교단의 전유물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에서 사용할 때는 보수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특정 형태의 개신교를 지칭할 때에도 쓰이고 있지만 복음주의적 정통은 보통 성경의 문자적 권위와 무오성을 주장하는 개신교를 지칭하여 사용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신앙의 정통”이라고 용어를 사용할 때 어떤 교단이나 공동체에서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를 달리 할 수 있다. 실제로 타 교단에서도 이 표현을 사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가톨릭교회에서도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의 정통”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어떤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지를 먼저 이해하고, 이 개념이 우리의 현실에 제대로 적용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1. “신앙의 정통”의 개념과 그 의미

“정통”(orthodoxy)이라는 용어는 어원적으로 헬라어 “올바르다”는 의미의 ortho와 “견해,” “설,” “종교적 견해,” “교리” 등의 뜻을 가진 doxy와 결합되어 있다. 문자적으로는 “올바른 종교적 견해” 또는 “올바른 교리”라는 뜻이다. 그래서 용어의 개념으로 볼 때 비종교적인 의미에서는 어떤 일관된 의견 체제나 학문 영역에서 널리 인정된 견해를 정통이라고 할 수 있고, 종교적인 의미에서는 올바른 교리, 또는 종교적 입장이라고 쓸 수 있다. 특히 신앙의 정통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 우리가 믿는 믿음의 바른 교리적 표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가 “신앙의 정통”이라고 부르는 교리적 표준은 무엇인가? 우리 교단이 2011년 제61회 총회에서 헌법개정안이 통과되고 노회에서 수의를 거쳐 확정된 새 헌법에 보면 구 헌법에는 없었지만 전통적으로 선배들로부터 전해오던 내용을 명문화한 매우 중요한 내용이 들어 있다. 그것은 “고신총회 헌법전문”인데, 이 헌법전문에 “신앙과 교리”를 진술한 내용 가운데 5항에서 우리가 말하는 “신앙의 정통”의 개념이 무엇인지 잘 표현하고 있다. 5항의 내용은 이러하다. “우리는 특별히 역사적인 교회의 전통을 따른다. 이 전통은 마틴 루터로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의 소산들을 사상적으로 체계화하고, 그 가르침을 성경적으로 더 철저하게 발전시킨 칼빈의 신학적 입장을 의미하며, 이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 교리문답서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수되었다. 이 신조들은 성경 말씀을 따라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께 대하여 믿어야 할 바가 무엇이며, 또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들이 그분의 영광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잘 밝혀주고 있다” 그리고 6항에서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과거 일본 제국주의의 신사 참배 강요와 핍박의 위협 앞에서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이 개혁주의 신앙을 지켰다”라고 하였고, 7항에서는 “그런 신앙인들의 후예는 이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파수하고 다음 세대에 전수하기를 갈망하며, 그런 책임을 완수할 수 있도록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혜와 능력을 주시기를 간구한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이러한 헌법 전문에 나타난 것은 매우 중요하고 신학대학원에서 핵심적으로 가르치는 내용이다. 이 헌법 전문에 있는 바와 같이 신앙의 정통이라는 것은 종교개혁의 소산들을 성경적으로 더 철저하게 발전시킨 칼빈의 신학적 입장을 의미하고, 나아가 이 입장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 교리문답서를 통하여 전수된 것이며, 이 신앙을 “개혁주의 신앙”이라고 개념을 정의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헌법 전문에 명시한 바와 같이 칼빈의 신학적 입장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 교리문답서는 작성 당시에 충분하지 못했던 성경주해 방법이 반영되지 못한 약점과 시대적인 문제를 다루지 못한 약점이 다소 있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성경의 교훈을 잘 표현하고 있고, 우리 신학의 색깔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교리표준은 성경, 하나님, 인간, 그리스도, 구원, 성령, 세상, 교회, 종말 등에 대한 관점을 결정하기 때문에 신자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목적과 방법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그러나 교리적 표준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이것은 교리적 표준이 성경 위에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개혁주의 신앙이 우리가 지향하는 좋은 전통이라 할지라도 성경말씀에 위배되는 점이 발견된다면 정당하고 공개적인 토론과 연구를 통하여 바로잡아야 할 성질을 가지고 있다. 이 교리적 표준을 바르게 세우는 역할을 하는 것이 주해 원리와 방법론이다.


우리는 종교개혁자의 전통을 따라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성경으로”라는 신앙의 유산을 받았다. 이 유산은 은혜와 믿음의 실체가 단순히 교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언약적 기초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역사 가운데 행하신 구원의 사건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그리고 언약의 기초 위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과 동역하며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까지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갈 수 있다는 사실도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 개혁주의 교회는 이 기초 위에서 첫 번째로는 문법적인 해석원리,1) 두 번째로는 역사적인 해석원리, 세 번째로는 신학적인 해석원리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받아들였다.2) 문법적 해석은 성경이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로 계시되었고,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중요한 방법이기 때문에 계시가 기록된 문학 장르가 무엇이며, 저자가 어떤 관점과 목적으로 책을 기록하였는지, 어떤 방식으로 논리를 전개하고 있는지 내용구조와 문맥을 고려하고, 단어와 구문, 비유, 상징 등의 의미를 고려하는 것을 말한다. 역사적 해석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역사 속에 나타내시고, 역사적 인물들과 사건들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계획을 계시하셨기 때문에 역사적 본문은 사실 그대로 받아들어야 하고, 당시 사람들의 사고와 생활상을 고려하며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상황을 고려하는 것을 말한다. 신학적 해석은 성경 66권이 표면적으로 볼 때는 각각의 저자가 있고, 다양한 시대에 다양한 방법으로 말씀하셨지만(히1:1) 그리스도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실 하나님 나라와 관련하여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각각의 본문이 그리스도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실 하나님 나라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를 면밀하게 살피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성경을 읽을 때 가슴을 뜨겁게 달구고 그리스도 안에서 사명과 책임의식을 발견할 뿐만 아니라 어렵고 힘들어도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참고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게 만드는 동력을 지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교단이 “신앙의 정통”을 교단의 핵심적인 가치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은 종교개혁의 유산들을 사상적으로 체계화하고, 그 가르침을 성경적으로 더 발전시킨 칼빈의 신학적 입장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 교리문답서를 통하여 전수된 올바른 교리 표준을 가지고 있고, 또한 올바른 교리 표준을 바르게 세우거나 바로 잡을 수 있는 성경 주해에 대한 바른 원리와 방법론을 중요한 가치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이것이 건강한 교회를 세우고 세상을 바꾸는 중요한 기초라고 믿는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우리의 신학적 입장이 성경 위에 있다는 말은 아니다. 어떤 사람이 성경을 읽는다고 할 때 자신이 의식하든 하지 않든지 간에 나름대로의 렌즈(lens)로 성경을 읽는다. 이 렌즈가 도움이 될 수도 있고, 해가 될 수도 있다. 이 렌즈를 가리켜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때로는 신학이 올가미가 되어 성경을 잘못 해석할 수 있지만 동시에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열쇠 역할을 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성적인 능력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이 렌즈를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신학이 때로는 성경해석의 방향을 미리 결정함으로 본문을 잘못 이해하거나 왜곡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할지라도 성경 전체에 대한 중요한 가이드를 제공해 줄 뿐만 아니라 설사 잘못 해석했다고 할지라도 교리적으로 이탈할 수 있는 점을 예방하는 울타리 역할도 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연약하기 때문에 성경을 읽고 해석하고 적용하는 문제에 대하여 잘못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리를 버릴 수는 없다.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 교회가 고백하는 개혁주의 전통이 가지고 있는 교리가 다르고, 로마 가톨릭(천주교), 자유주의, 신정통주의, 복음주의, 그리고 이단 교리 등이 동일한 성경을 사용하지만 그들의 교리적 입장에 따라 다르게 읽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교리적 표준의 차이에 따라 성경, 하나님, 인간, 그리스도, 구원, 성령, 세상, 교회, 종말 등에 대한 관점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종교개혁자들로부터 받은 유산인 교리 표준과 해석원리와 방법이 중요한 것이고, 이 신앙의 정통을 선배들로부터 유산으로 받았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2. “신앙의 정통”과 우리의 현실

그런데 이러한 “신앙의 정통”을 가지고 있다면 적어도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에 따라 말씀을 규칙적으로 읽고 가르친다면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과 만나고 그 말씀 안에 있는 회개케 하는 능력과 변화시키는 능력과 치유하는 능력이 나타나 교회를 바꾸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동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인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 점은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감추어진 질서 속에 있는 부분도 있고,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부분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볼 때 몇 가지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첫 번째 문제는 소위 신앙의 정통을 주장하는 자들이 과거 개혁주의 학자들이 보여준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체계적이고 이론적으로 자세히 연구하는 전통은 물려받았으나 그 말씀을 단순하게 믿고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위 개혁주의 신학을 가장 많이 입에 올리는 사람들이 어떤 면에서 가장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계산적인 모습을 보일 때가 많고,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못한 그 점에 대하여 자신이 배운 개혁주의 신학(?)으로 변명하고 합리화하며 자신을 포장하는 기술에 능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고 개혁주의 신학의 잣대를 대지만 그것은 자신의 유익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래서 “신앙의 정통”을 중요한 가치로 인식하고 끊임없이 입에 올리기는 하지만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능력은커녕 오히려 그 사람이 개혁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면 할수록 오히려 냉소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 경험이 아닌 순수한 사고나 이성만으로 인식에 도달하려고 하는 사변(思辨)에 능하고, 또한 형식적으로 타당해 보이는 논증을 이용해서 거짓인 자신의 주장을 참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궤변(詭辯)에도 능하다. 여기에 우리의 신앙고백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구속의 은혜를 전달하는 외적인 방편으로 능력있게 역사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태도로 말씀을 대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나타난다면 그것이 이상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단순하게 믿는 믿음의 야성(野性)을 회복해야 한다. “야성”이라 함은 자연 또는 본능 그대로의 거친 성질을 말한다. 그래서 야성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 인간의 지식으로 포장하고 가공하지 않은 본래 그대로의 믿음을 가졌다는 것이다. 영성신학자 리차드 포스터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있는 그대로 단순하게 순종하는 삶이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공급받은 통로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한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3)


두 번째 현실적인 문제는 교리 표준이 매우 중요하지만 이것이 성경을 더 잘 알고 경건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나 교회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에 더 치중하고 있다는 인상이 강하다는 것이다. 물론 올바른 교리 표준이 잘못된 교리를 분별해 내는 일에는 매우 중요한 잣대가 되기는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일에 기능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우리의 신앙이 율법적이며 기계적으로 흘러가게 만드는 요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정통 교리는 결코 율법적이거나 윤리적인 진술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율법의 의미와 가치를 항상 하나님이 우리 위하여 행하신 구속사역과 함께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구속사역에 토대를 두고 율법을 가르칠 때 그것은 무거운 짐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방법이 방법으로 기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지금까지 교리를 율법화하고, 이것은 할 수 없고, 저것은 할 수 있다는 식을 가르쳐 온 부분을 부인할 수 없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서 우리가 어떤 일을 해야 한다고 하는 명령적인 부분을 말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먼저 말하고 있다. 헤르만 리델보스(Herman Ridderbos)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직설법(indicative)이라고 표현하였고, 우리 인간이 행해야 하는 책임적인 부분을 가리켜서 명령법(imperative)이라고 표현하였는데, 이 순서는 매우 중요하다. 명령법이 절대로 직설법 앞에 오지 못한다. 명령법은 항상 직설법의 결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4) 우리의 교리 표준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 교리문답서가 이 순서로 되어 있다. 직설법을 무시하고 명령법이 강조되면 종교가 기계적으로 나타나는 율법적인 삶만을 강조하게 된다. 이러한 삶은 마지못해 행하는 종교적인 행위로 나타날 수도 있고, 동시에 본성과 반대되는 이중적인 삶을 노출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구원의 사역을 들을 때 감동이 있고, 모든 명령법은 그 은혜에 대한 감사로 행할 수 있다. 그래서 교리는 우리를 차갑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는 용광로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을 설명하기 전에 우선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은혜를 먼저 강조해야 한다. 한 사람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힘은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는 우리는 항상 말씀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는 원리와 방법을 무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말씀의 능력을 기대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 되었다. 비교적 우리 교단의 신학을 대변할 수 있는 곳인 총회와 신학대학원의 채플에 오시는 유명 목사님들과 대학생대회의 집회에서 설교를 들어보면 과연 설교의 가장 기본 가운데 하나인 문맥을 고려하고 있는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선택한 본문을 그 책의 전체 주제와 목적에 따라 다루는 일과 계시전달방법 가운데 하나인 문맥의 흐름과 연관하여 하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본래의 뜻과 연관된 내용을 들어보기가 정말 희귀하다. 그러한 설교는 존 스토트가 지적한 것처럼 “문맥(context)을 벗어난 본문(text)은 참 의도를 은폐하기 위한 위장(pretext)일 뿐이다”5)라는 말을 새겨볼 때 과연 하나님의 말씀일 수 있겠는지 의구심이 든다. 뿐만 아니라 성경이 그리스도 중심적인 구속역사적으로 기록된 것은 사실이지만 어떻게 그리스도와 연결되는지 규칙을 무시할 뿐만 아니라, 역사적 본문에 기록된 사건에 대한 설명(description)을 아무런 논리적 근거없이 규칙(prescription)으로 바꾼다. 과연 이러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말씀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 나타날 수 있겠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 그 말씀의 메커니즘(mechanism) 안에는 이상한 능력이 있어 능히 역경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도 있고 우리와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도 있다. 그리고 어렵고 힘든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수 있는 능력도 갖추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고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도록 돕는 일 가운데 하나가 설교라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소위 “신앙의 정통”을 이야기하는 우리가 그 길을 걸어가고 있는지 질문해 보아야 한다.


네 번째 문제는 우리의 믿는 바를 효과있게 만드는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여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우리의 믿는 바가 정통이라고 해도 그 믿음을 효과있게 만드는 일이 우리의 테크닉(technique) 이전에 성령 하나님의 조명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해야 한다. 이 일에 대하여 우리 신학대학원의 박영돈 교수님이 기도는 감사의 표현과 은혜의 방편일 뿐 아니라 사역의 방편이기도 하다고 하면서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 있어서는 다른 모든 것보다 선행되어야 할 일이다. 기도는 이 땅의 고통스럽고 암울한 현실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는 방편이다. 신약성경은 기도가 귀신의 세력을 쫓아내고 하나님의 나라를 도래케 하는데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를 밝히 증거하고 있다”라고 하면서 중요한 성경의 증거들을 논증하고 있다.6)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우리가 믿는 바의 교리를 교회와 세상에 적용하여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을 위하여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과의 싸움에 시간을 내지 못하고 있다(엡6:12). 여기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해야 한다고 할 때 자칭 개혁주의자들이 하는 것처럼 형식적으로 몇 분 또는 몇 십분, 또는 머릿속에서 깔짝깔짝 자신의 신학적 지식을 기계적으로 나열하는 정도의 기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뜨겁게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목회자와 신학자는 적어도 하루에 두 시간 이상, 일반 성도들은 하루에 한 시간 이상씩 기도하고, 분기별로 또는 동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할 때 죽기 살기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러한 안타까운 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앙의 정통”이 무엇인지 알고 배우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신앙의 정통은 항상 우리가 바른 길로 가고 있는지를 알게 하고,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점검하는 기능도 있고, 동시에 우리가 어떤 교회를 세워 어떤 인간과 세상을 만들어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해 주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신앙의 정통은 이론이 아니라 항상 실천적이어야 한다. 필자가 신학대학원에 다닐 때 존경하는 스승이신 고재수(Nick Gootjes) 교수님께서 모든 성경의 교리는 실천적이어야 한다고 한 말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 거기에 부합한 삶이 당연히 나타나야 한다. 신앙의 정통인 개혁주의 신학을 우리 교단의 모토(motto)라고 생각하고 입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그 삶이 실천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오히려 우리 신학은 조롱거리로 전락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신앙에 부합한 삶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올바른 신앙의 뿌리가 심겨져 있는지 다시 확인해 보아야 하고, 확인해 본 결과 그 뿌리가 확실하게 심겨져 있다면 무엇이 문제인지 진단하고 회개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 우리 교단이 진정한 영적인 부흥이 일어날 수 있고, 나아가 우리 교회로 인하여 이 민족이 치료되고 회복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대하7:14)


 1) “문법적 해석”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지만 고신대학교의 신득일 교수님은 이 용어 대신에  “문헌적 해석”(philological interpretation)이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그 이유는 언어를 이해하는 방법 가운데 어떤 면에서 “문법”(grammar)은 일부분이고, “단어”(word) “구문”(syntax), “문맥”(context), “비유”(parable), “상징”(symbol), “장르”(genre)가 시(poetry)인지, 이야기(narrative) 등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법”이라는 용어 자체가 문장을 이해하는 규칙과 질서를 의미하기에 그대로 쓰는 것이 모든 사람들이 이해하는 일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여 그대로 사용한다. 

2) Louis Berkhof, Principles of Biblical Interpretation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88), 67-166. 

3) 리차드 포스터, 『심플 라이프』(규장, 2003), 258-259. 

4) Herman Ridderbos, Paul: An Outline of His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1975), 253-258. 

5) 존 스토트, 『설교자란 무엇인가』, 채경락 역 (서울: IVP, 2010), 21. 

6) 박영돈, 『성령충만, 실패한 이들을 위한 은혜』 (서울: SFC, 2008), 324-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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