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종길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은 구호이다. 곧 ‘오직 성경으로’ 또는 ‘오직 성경에 의해’란 뜻이다. 이것은 종교개혁자들의 핵심 주장들 가운데 하나인데 가톨릭교회의 잘못된 주장에 대항해서 내세운 것이다. 당시 가톨릭교회는 ‘성경’과 아울러 ‘전통’의 권위를 강하게 주장하였다. 곧 진리는 ‘성경’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록되지 않은 ‘전통’을 통해 계속해서 전해 내려 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전통’도 ‘성경’과 마찬가지의 권위를 가지며 똑같이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에 대한 반동으로 1546년에 모인 트렌트(Trent) 회의에서는 성경뿐만 아니라 전통도 ‘동등한 경건한 사랑과 존경으로(pari pietatis affectu ac reverentia)’ 받아들이고 경외하여야 한다고 결정하였다. ‘전통’도 ‘성경’과 똑같은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본 것이다. 이처럼 ‘성경’과 ‘전통’ 둘 다 최고 권위로 인정하는 가톨릭교회는 결과적으로 ‘전통’의 우위를 가져오게 되었다. 왜냐하면 ‘성경’에 없는 것도 ‘전통’이란 이름하에 권위 있는 교리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성경에 전혀 근거가 없는 ‘마리아 무죄 탄생’과 ‘마리아 수난’과 ‘마리아 승천’ 교리도 제2 바티칸 회의에서 ‘전통’의 권위에 의해 채택되었다(The Church, VIII, 58-59). 공식적인 결정은 나중에 있었지만, 오래 전부터 가톨릭교회에서 미신적으로 믿어져 오던 것들이 나중에 ‘전통’의 이름으로 공인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성경’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성경 자체가 최고의 궁극적 권위를 가진다고 주장했다. 루터는 ‘공회’도 잘못할 수 있고 실제로 잘못했다고 주장했다. 종교개혁자들은 ‘전통’이 ‘성경’을 보완한다는 주장을 배척하고 ‘성경의 충족성(sufficiency of Scripture)’을 주장했다. 같은 맥락에서 칼빈은 성경의 ‘자증(自證, autopistia)’을 강조했다. 성경은 교회의 결정이나 외부의 권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 안에 신적 권위를 가지고 있다. 또한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은 불분명하며 교회가 해석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가톨릭교회의 주장에 반대하여 ‘성경의 명료성(perspicuity of Scripture)’을 주장했다. 그리고 성경 해석의 최고 심판자는 성경 자신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종교개혁자들이 주창하고 오늘날 개신교의 기본원리가 된 ‘오직 성경’이 오늘날 한국 교회에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오직 성경’이라는 원리가 오늘날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1. 전통과 성경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는 과연 ‘성경’이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는가? 입으로는 성경이 최고의 권위를 가진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안 그런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한국 교회는 주초 문제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해 왔다. 술 담배 하는 것을 마치 죽을 죄를 짓는 것인 양, 제일 큰 죄인 양 생각하는 경향도 있었다. 물론 한국 사회의 풍습을 생각할 때 술 담배는 여러 가지 죄들과 연결될 가능성이 높으며, 따라서 이것을 금지한 것은 합당한 조치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의 상황을 고려해서 선교사들과 한국 교회가 결정해서 내린 조치이지 성경의 계명은 아니다.

  

물론 우리가 전통을 다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개혁교회도 성경에 합당한 전통은 인정한다. 한국 교회가 가지고 있는 수요예배와 새벽기도회 등은 성경에 직접 명령된 것은 아니지만 성경의 가르침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것을 성경의 계명과 같은 차원에서 생각하면 안 된다. 인간의 전통은 결코 성경의 계명과 같은 차원에서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전통 가운데에는 성경의 가르침에 맞지 않는 것이 더러 있다. 예를 들면 ‘성령강림절’을 지키지 않고 ‘맥추감사절’을 지키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구약의 맥추절이 신약 시대에 성령 강림으로 말미암아 영적 추수가 시작되었으므로, 개신교회는 그림자인 ‘맥추절’의 완성이요 실체인 ‘성령강림절’을 지키게 된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많은 교회들이 교회의 생일인 ‘성령강림절’을 무시하고, 상반기를 결산하는 의미에서 교회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맥추감사절’을 지키는 것은 유대주의적이며 물질주의적일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속 사역의 완성과 성령 강림의 의미를 무시하는 것이다.

  

그 외에도 ‘장로’나 ‘권사’가 되는 것을 명예나 권세를 누리는 벼슬로 생각하는 것이라든지, 그래서 장로 권사 취임식 때 돈을 거두어서 낸다든지 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이다. ‘일천번제’ 헌금이나 ‘신년성구 제비뽑기’ 등등 성경에 어긋나는 것들은 비록 전통이 되었다 할지라도 잘못된 것이며 시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2. 공회의 결정과 성경

공회의 결정도 성경에 어긋나면 효력이 없다. 아무리 노회나 총회의 결정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성경에 어긋나는 것이라면 효력이 없으며 구속력이 없다. 이것을 개혁교회 헌법 제31조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다수의 투표에 의해 정해진 결정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나 교회헌법에 어긋나지 않는 한, 구속력 있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이 말은 곧 총회의 결정이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난다면 구속력이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총회의 결정이니까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것은 원리에 맞지 않다. 예를 들어 총대들이 모인 총회에서 다수의 찬성에 의해 ‘동성연애’는 죄가 아니라고 결정한다고 해서 그것이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럴 경우에 개교회나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그 총회의 결정은 구속력이 없다고 선언할 권리가 있다. 따라서 총회의 결정은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구속력을 가지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지나치게 법조문에 얽매여서 형식주의로 흐르는 것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교회헌법이나 노회규칙이나 무슨 규정이라도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맞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래서 그것이 성경이나 성경의 원리에 맞지 않는 것이라면 속히 고치는 것이 올바른 태도이다. 악법도 법이기 때문에 또는 규정에 있으니까 무조건 지켜야 한다는 주장은 자칫 바리새주의나 가톨릭주의로 흐를 위험성이 있다. 가톨릭교회는 성경에 없는 것이라도 전통의 이름으로 권위를 부여한다. 그런데 그것이 교회에 통용되는 전통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교황이다. 주교회의나 무슨 위원회에서 심사하고 결정한 것을 교황이 선포함으로써 권위를 가지게 된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성경보다도 주교회의의 권위 곧 교황의 권위가 더 우위에 서는 결과를 가져오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이런 잘못에 빠지지 않으려면 우리는 모든 것을 끊임없이 성경에 비추어 생각해야 한다. 비록 당회나 노회나 총회의 결정이라도 성경에 비추어 잘못된 것이 발견되면 즉시 그것을 인정하고 고치는 용기가 필요하다. 예루살렘 회의에서도 사도들과 장로들이 여러 가지로 논의한 후에 야고보가 성경을 인용하여 설명함으로써 모든 논의에 종지부를 찍은 것을 본다(행 15:15-18). 이처럼 우리는 모든 것을, 그 사안만 따로 떼어서 볼 것이 아니라, 항상 성경과 성경의 원리 아래서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3. 신학과 성경

우리는 또한 모든 신학을 성경의 관점에서 조명하고 판단하여야 한다. 이것은 단지 자유주의 신학이나 비평주의 신학에 대해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개혁주의 신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개혁주의 신학을 취하는 이유는 그것이 성경의 진리를 가장 잘 드러내고 성경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혹 어떤 개혁주의 신학자가 성경에 맞지 않는 주장을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거부해야 한다.

  

이것은 칼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칼빈에 대해 매우 좋게 생각하며 그의 신학 전반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받아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칼빈이 말했기 때문에 무조건 옳다는 식의 주장은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칼빈이 말했기 때문에 옳은 것이 아니라 성경에 맞기 때문에 칼빈이 옳은 것이다. 따라서 비록 칼빈이 말했다 할지라도 그것이 성경에 맞지 않으면 잘못된 것이다. 특히 칼빈의 주석들 중에 문맥에 맞지 않거나 자기주장에 끼워 맞춘 것들이 더러 있다. 따라서 이런 것들까지도 칼빈이 말했기 때문에 옳다고 받아들이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이런 것은 나아가서 아브라함 카이퍼나 헤르만 바빙크, 헤르만 리덜보스 등과 같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카이퍼의 성령론이나 문화관에 대해서는 많은 문제점이 지적되었다. 리덜보스의 신학에도 문제점이 많은데 개혁주의 신학자라고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은 옳지 않다. 한국의 박윤선 박사나 이상근 박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세상의 어떤 신학자도 하나님 앞에 완전하지 않다. 모든 것은 성경에 의해 판단되고 평가되어야 한다.


따라서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 성경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바로 아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성경 원어를 아는 것이 중요하며 문맥을 살펴서 바로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 문맥은 그 구절이 속한 직접적인 문맥뿐만 아니라 그 성경책이 속한 넓은 문맥과 나아가서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포함한다. 그래서 개혁주의 성경 해석의 제일 중요한 원칙은 “성경은 그 자신의 해석자이다”는 것이다. 곧 성경의 어떤 구절에 대한 해석은 성경 안에 답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부지런히 읽어야 하며, 그러면 대부분의 질문에 대한 답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 중요한 질문이 있다. 그러면 성경 해석은 원어를 잘 아는 신학자들만 할 수 있는  것인가? 가톨릭에서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래서 평신도들에게서 성경 해석의 권한을 빼앗아버렸다. 그러자 평신도들은 성직자들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게 되었으며, 결국 교황이 모든 것을 결정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종교개혁자들은 평신도들에게 성경 해석의 권리를 돌려주었다. 성경은 어려운 책이 아니라 인간의 구원과 생활에 대해 분명하게 가르친다고 주장하였다(명료성). 칼빈은 성경 해석의 최고심판자는 성경 자신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종교개혁의 원리는 오늘날 우리에게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우리는 물론 성경 원어를 알고 신학을 공부한 신학자들의 성경 해석을 존중해야 하겠지만, 그 신학자들이 성경에서 벗어난 주장을 하고 이상한 해석을 한다면 평신도들은 이에 대항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특히 오늘날 신학자들은 자유주의 신학을 배워서 성경에 대해 비평적 입장을 가지며, 이신칭의를 부정하고 종교다원주의를 지지하는 등의 주장을 할 때에는 목사들이나 평신도들이 일어나서 항거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 최종적으로 올바른 신앙과 신학을 수호할 책임은 신학자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목사들과 장로들과 평신도들에게 있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성경’이 이상하게 번역되고, 이권 때문에 ‘찬송가’가 자주 바뀌는 현실을 보면서도 목회자들이나 평신도들이 가만히 있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전적으로 대한성서공회만 바라보고 신학자들만 너무 믿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염려된다. 그렇게 할 경우에 피해자는 결국 평신도들이며, 한국 교회 전체가 손해를 보게 된다. 우리는 한편으로는 올바른 신학자들을 존중하고 양성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잘못된 신학과 성경 해석에 대해서는 경계하고 배척해야 한다.


4. 목회와 성경

목회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따라 올바르게 행해져야 한다.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성경의 원리를 따라 올바르게 교회를 세우고 인도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교회에는 세상적인 원리를 따라 성장지상주의, 물질주의, 인본주의 등이 많이 들어와 있다. 교회 성장에 도움만 된다면 무엇이든지 다 받아들이는 추세이다.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보다도  사람들이 좋아하는 성공철학과 긍정주의 심리학을 전하며, 경건한 이야기들과 세상 코미디들로 설교를 떼운다. 그저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고 웃기기 위한 것들이 많다.

  

뿐만 아니라 교회 운영에 있어서도 성경의 원리를 따르기보다도 세상적인 경영 방법을 따르는 경우도 많다. 대형교회에서는 담임목사의 당회장실을 대기업의 회장실처럼 꾸며놓고서 비서들을 거쳐서 들어가게 되어 있다. 부목사들을 대할 때에도 마치 재벌 회장이 밑의 부하들을 부리듯이 다룬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중요한 덕목인 사랑과 온유와 겸손은 찾아보기 어렵다. 사랑과 존경에 의한 목회를 하는 것이 아니라 명령과 강압에 의한 목회를 한다. 심지어 각 부서의 부흥 정도에 따라 성과급을 지급하기도 한다.

  

이런 방법이 교회 부흥에 도움이 될지는 몰라도 성경적인 방법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목회를 할 때에도 성경의 가르침이 무엇인가, 성경의 원리가 무엇인가를 먼저 살펴보고 거기에 맞는 목회를 해야 한다. ‘성령 강조’가 교회 성장에 도움 된다고 무분별하게 성령 운동을 하고 은사집회를 한다든지, 어느 교회는 ‘가정교회’를 해서 효과 봤다고 해서 무조건 따라간다든지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비록 시대가 변하고 세상이 달라져도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좇아가야 한다. 성경을 잘 읽고 연구하면, 거기에 새 시대에 맞는 목회 원리가 들어 있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는 성경의 근거도 없이 전통적으로 해오는 것들이 더러 있다. 예를 들면 ‘성가대’는 전부터 해오던 것이라서 당연시하지만 과연 성경적인가? 구약 시대에는 성전에서 전문적으로 찬양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신약 시대의 교회에도 그런 성가대가 있었는가? 우리는 이런 것을 성경에 비추어 끊임없이 반성하고 살펴보아야 한다. 또 한국 교회에서는 ‘어린아이들’은 소위 어른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것이 전통이 되었지만, 과연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가? 왜 어린이들은 어른예배를 드리지 않고 따로 예배드려야 하는가? 등등 성경에 비추에 살펴보아야 할 것들이 많다. 

  

또 오늘날에는 교회마다 드럼을 갖다놓고 시끄럽게 찬양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다. 젊은이들의 신세대 문화에 맞는 진보적인 모습인 양 자부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그런 것이 과연 성경이 말하는 올바른 찬양인가? 찢어지는 기계음과 사람을 흥분시키는 드럼에 맞춰 한 30분 찬양하고 나면 정작 설교 시간에는 태반이나 졸고 있다. 과연 하나님의 말씀 듣는 것을 방해하고 말씀을 가리우는 것을 올바른 찬양이라 할 수 있는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올바른 찬양은 무엇일까? 우리는 이런 것에 대해 성경을 펴놓고 성경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화란개혁교회에서 하듯이 ‘시편 찬송’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시편 찬송이 꼭 성경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시편의 가사가 좋은 것은 사실이지만, 멜로디는 종교개혁 시대와 그 후 유럽에서 사용하던 것이다. 그러니 꼭 그 시대의 멜로디가 옳다든지 그런 멜로디만 사용해야 된다는 것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구약 시대 성도들은 당시 유대인들의 멜로디를 사용했을 것이며, 신약 시대 성도들은 처음에는 예루살렘 교회가 사용하던 것을 따라하다가 차자 자기들의 멜로디를 사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시편 찬송의 가사는 구약의 시편 말씀 그대로가 아니고 찬송에 맞게 시편에 기초해서 가사를 개사한 것이다. 따라서 성경 그대로는 아니다. 화란개혁교회의 시편 찬송은 그 시대에 그 나라 사람들이 사용하던 하나의 ‘전통’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시대에 맞는, 그러나 성경적인 내용의 가사와 영적인 멜로디로 이루어진 찬송을 만들어서 사용할 권리가 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하나님께, 마음으로 찬송하라는 것이다(엡 5:19, 골 3:16). 곧 사람을 즐겁게, 자기 자신을 즐겁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을 해야 된다는 것과, 입술로만 하는 찬양이 아니라 ‘참 마음’으로 하는 찬양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세상’을 따르지 아니하고 ‘전통’을 따르지도 않고 오직 ‘성경’을 따르는 찬송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여러 가지로 어지럽다. 방향이 없고 기준이 없다.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사사 시대와 같다. 자기가 생각할 때 좋은 대로, 자기 교회 성장에 도움 되는 대로 이것저것을 행한다. 그러나 이런 것은 옳은 방법이 아니다. 그런 것은 세상적인 인간단체가 행할 일이지 하나님의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아니다.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가 나아가야 할 길은 성경을 따라 나아가는 것이다. 곧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성경이 제시해 주는 원리를 좇아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세’가 필요하다. 내 생각과 내 주장을 앞세우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만 오늘날 시대에는 그게 아니고 ...”라고 말하는 자세가 아니라 “주여, 말씀하소서. 내가 듣겠나이다.”라고 말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어린 아이 사무엘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 3:10)고 한 것과 같은 자세가 필요하다.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누가 뭐라 하든 이렇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진정한 부흥과 개혁이 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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