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달 기획기사는 교리 교육입니다. 교리는 성경을 논리적으로 이해합니다. 그리고 장로교회의 전통을 따라서 우리 교회들도 교리 표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리적 표준은 초대교회로부터 세례 교육과 자녀 양육 그리고 이단의 방지등의 목표로 정착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종교 개혁기에는 로마 천주교회와의 구별과 동시에 개혁파 진영의 일치를 위한 노력으로서 교리 문답이나 신조가 형성되었습니다. 현재 고신 교회의 교리 표준은 웨스트민스터 대소 교리문답과 신앙고백서입니다. 교리 교육이 성경교육과의 관계도 적극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 필자의 글들에 관심을 가져 주시고 논의에 참여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코닷 연구위원장 이세령 목사


 

들어가며

▲ 황희상 특강 소요리문답 저자
누구나 맨 처음 교회에 발을 디딜 때는, 각종 헛된 상상과 망상을 품고 옵니다. 하나님과 구원과 교회에 대해 배운 적이 없는 백지 상태의 그는, 절반은 이단과 다를 바 없는 상태입니다. 그대로 방치한다면 그는 기독교 아닌 다른 것을 믿는 기독교인(?)으로 자라갑니다. 이 공식을 깨뜨려야 합니다. 이것을 깨주는 것이 교리교육입니다. 이것을 깨 줄때, 비로소 그들 마음에 건전한 신앙생활의 기쁨과 감사가 자리 잡습니다. 그 감사, 그 감격으로, 거듭난 새로운 삶을 기운차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막무가내로 지식만 던져서는 혼란만 가중되고, 망상에 망상만 더할 뿐입니다. 체계적인 교리교육으로 이 문제를 풀 수 있습니다.


체계적인 교리교육으로 생긴 신앙적 지식은, 단순히 교회생활에 ‘익숙한’ 신자들의 끝 모를 연약함에 비할 수 없는 단단함을 줍니다. 신자는 하나님 앞에 솔직해야 합니다. 무엇을 믿는지 왜 믿는지도 모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교회에 그저 앉아만 있다가는, 언젠가 큰일을 치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루빨리 아름다운 체계성으로 가득한 교리문답의 풍성함으로 교회교육 커리큘럼을 재편해야 합니다. 이것이 선행되지 않으면, 기독교는 하루가 다르게 개념 없이 떼만 쓰는 종교로 더욱 치달을 것입니다.


교리교육의 실제적 적용을 위하여 몇 가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논리로 접근해야 한다.

교리를 가르치려면 성경 지식만 많이 쌓아두어서는 안됩니다. 구슬을 제대로 꿰어야 합니다. 우선 가르치는 자가 최소한의 ‘논리 훈련’을 해야 합니다. 성도를 주체적인 신앙인으로 교육하려면, 생각하는 힘을 자꾸 길러주어야 합니다. 신앙의 뼈대가 잘 세워질 수 있도록 체계적이며 논리적인 교리교육이 필요합니다. 교리를 외우도록 하지 말고, ‘생각하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학생들의 질문에 ‘대답이 되는 대답’이 필요합니다. 좋은 교사는 좋은 대답을 해주는 교사인 바, 좋‘은 대답이란 ‘모면하려는’ 대답이 아니라 정확한 원리에 따르는 ‘해결이 되는 대답’입니다.


논리와 논증의 핵심으로는 다음 몇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논리와 논증은 “왜 그러한가?”를 자꾸 묻는 것입니다. 교리적 진술에 대해, 무턱대고 그런가 보다 할 것이 아니라, 왜 그렇게 믿어야 하는지 되묻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셨다, 그러면 그저 “아멘!”할 것이 아니라, “왜 꼭 성육신 하셔야만 했는가?”를 묻고 따져야 합니다. 이것은 귀찮을 것 같지만, 인생 가운데 언젠가는 해결하고 넘어야 할 일입니다. 미루면 미룰수록 그 인생의 불안정성은 길어질 뿐입니다.


둘째, “어떤 맥락인가?”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글을 읽을 때 문맥을 따라 읽으며, 저자의 의도를 파악할 줄 알아야 합니다. 교리도 그렇게 생성되었습니다. 앞의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뒤의 질문을 생산합니다. 따라서 그런 흐름을 따라 문제의식을 갖고 요리문답의 본문을 읽으면 죽은 교리가 살아납니다. 예를 들어, 새신자 교육부터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으로 바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소요리문답 1~3문은 모든 교리와 신학의 기본 전제가 되는 질문을 품고 있습니다. 인간의 목적은 무엇인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런 질문 앞에서 신자든 불신자든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통적으로 대답을 해야 하며, 그 대답에 따라 참으로 많은 것이 달라집니다. 이 몇 개의 질문을 붙잡고 치열하게 싸우는 것만으로도, 새신자 교육은 충분하고도 넘칩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모든 교리공부의 필요성이 여기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그것을 느끼도록 해 주는 것이 새신자교육의 관건입니다. 본인이 필요성을 느끼면,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공부합니다.


셋째, “무엇이 핵심인가”입니다. 요리문답의 전체적인 구조분석을 통해 전체 맥락에서의 강조점을 발견해야 합니다. 전체 구조분석을 보면, 그 요리문답이 무엇을 핵심으로 잡고 있는지가 보입니다. 먼저는 ‘숲’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학교에서 보통 공부 못 하는 학생들의 책을 보면, 앞의 몇 페이지만 더럽고 나머지는 하얗습니다. 시작 부분만 공부하다가 마는 것입니다. 반면에 공부 잘 하는 학생은 전체적으로 더럽거나, 전체적으로 하얗습니다.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하고 공부하는 경우입니다. 그렇습니다. 무슨 문서를 받았으면 이걸 첫줄부터 무턱대고 읽지 말고, 흐름을 먼저 파악하시는 게 중요합니다. 전체 구조를 봐야, 어떤 부분이 전체 문맥에서 중요한지, 또 어떤 것은 무엇에 속하는지(종속) 어떤 것은 차서를 따라 이해할 내용인지(병렬) 알 수 있습니다.


제 경우 소요리문답 학습서를 집필하면서 많은 신경을 썼던 것은, 요리문답의 구조분석을 위한 ‘마인드맵(mind-map)’의 적극적인 활용이었습니다. 요리문답의 전체 본문을 구조화 하되, 마인드맵 기법을 사용하면 방대한 분량의 요리문답의 구조를 일목요연한 논리 흐름에 따라 계층 구조(tree structure)로 한눈에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중요한지 한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 맥락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이런 방법론을 사용하면 요리문답의 주요 강조점과 위상이 드러나게 됩니다. ‘과연 어떤 문맥에서, 무엇을 중심으로 다루었는가?’ 목차만 가지고도 기독교 교리 전반을 설명할 수 있는 좋은 도구가 됩니다. 숲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야, 어떤 성도에게 지금 무엇이 필요한가를 파악하고 그 부분을 집중 교육하는, 맞춤식 교육도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요리문답 공부를 하다 보면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로부터 관련 질문이 계속 나오는데, 신기하게도 그 질문은 바로 다음에 공부할 내용일 때가 많습니다. 애초에 만들어질 때부터 그런 기본적인 논리적 연관성을 가지고 문답의 순서가 배치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 교사가 전체 구조를 그 머릿속에 품고 있으면 어떻게 될까요? 질문을 받을 때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습니다. 어느 부분이 부족해서 이런 질문이 나오는가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알고 있는 교사는 여유가 넘치고, 금방 학생의 존경을 받게 됩니다. 심지어 학생은 다음 시간을 무척 기대하며 손꼽아 기다립니다. 드디어 문제가 풀렸을 때는 “아~ 그래서 그렇구나!”하고 깨달아, 몇 단계를 훌쩍 진보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궁금증이 더 생기고, 성경에 대한 관심이 더 생깁니다. 때로는 거기서 감사를 느끼며 하나님이 하신 일을 찬양하기도 합니다. 반대로, 교사가 체계를 잡고 있지 못하다면? 어떤 질문 앞에서 한 번 막히면, 다른 어떤 프로그램으로도 그 의심의 벽을 치고 들어갈 방도가 없습니다. 소통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논리적 흐름과 문맥을 파악하며, 체계를 잡도록 해주는 교리교육이 관건입니다.1) 한 번 이렇게 전체 교리의 체계를 정리해주면 학생들은 머릿속에 개념을 잡게 되므로, 그 다음은 알아서 이해의 폭을 넓혀갑니다. 이는 제가 실제 현장에서 수 없이 경험했습니다. 학생의 과제물이나 마인드맵, 요약문 등에 선명하게 다 드러납니다. 혹시 빠뜨리거나 잘못 이해한 것이 있으면 코멘트를 해주려 했는데, 한 번도 실수한 적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세 가지를 설명했더니 두 가지로 기억한다거나….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쪼개고 구조화시키면서 큰 개념부터 차근차근 잡아주면, 세부적인 부분은 나중에라도 알아서들 챙깁니다. 더 이상 교리문답을 그저 외우는 교육 방식이 계속 되어서는 안 됩니다.



2. 삶으로 증명해야 한다.

교리가 중요합니까, 삶이 중요합니까? 교리입니까? 삶입니까? 어떤 게 맞습니까? 둘 다 중요한가요? 사실, 질문이 틀렸습니다. 교리가 곧 삶입니다. 교리교육은 단순히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곧 ‘하나님을 사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전인격적이고 실천적인 지식입니다. 이 지식은 필연적으로 삶의 개혁과 변혁을 가져옵니다. 신앙이 삶으로 증명되듯이, 교리가 곧 삶이라는 것을 증명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교리가 삶이라는 이야기는 많이 하지만, 거기에도 ‘왜 그러한가’에 대한 답이 없으면 허무한 구호에 그치고 맙니다. 그저 근거 없이 우기는 것이 아니라, 증명이 필요합니다. 증명이 없는 교육은 헛될 뿐이요, 이것 또한 허상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1년 내내 십계명만 가지고도 감동적인 교리교육을 할 수 있습니다. 십계명, 그 손바닥만 한 내용을 가지고 어떻게 1년을 한다는 것일까요? 구원받은 감사의 삶을, 십계명을 통해 직접 내 삶에 적용하여 순종하며, 집중적으로 고민하고 실천해보는 커리큘럼을 한다면, 1년도 부족할 수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은 한 계명 당 평균 3~4개의 문답을 할당해서, 각각의 문답마다 답변이 거의 A4 반 장 분량씩 나옵니다. 콤마와 콜론, 세미콜론 등으로 문장을 이어가면서, 계속해서 삶의 구체적인 부분을 풍성하게 언급합니다. 요리문답 본문 자체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고민하고 적용할 재료는 얼마든지 더 있습니다.


6계명은 살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 번도 살인하지 않은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는 교회에서, “야~ 오늘도 우리는 살인 안했다!? 계명을 지켰네!” 이런 식으로 적용할 것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알 것입니다. 이 계명이 도대체 우리 삶 가운데 어떻게 적용되는지, 무엇을 실천할 수 있는지를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안내가 요리문답 본문에 적혀있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8계명에서 무엇이 금지되었는지 대요리문답이 대답해주는 항목 가운데는 “불법적으로 공유지를 사유지화 하여 주민들을 없애는 것”이란 표현이 있습니다. 17세기 영국은 양모 방직사업의 부흥기였고, 대 자본가들이 생산량을 증대시키기 위해 앞 다투어 양들이 풀을 뜯을 목장 확보에 열을 올렸습니다. 이를 위해 마을 사람들의 거주지를 억압적인 수단(고리대금 등)으로 빼앗은 사례가 얼마든지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현실적인 문제까지 문답 안에는 반영되어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들겠습니다. 청년들과 8계명을 공부할 때의 일입니다. 도적질 하지 말라는 8계명과 환경문제가 서로 관련이 있을까요? 대요리문답을 꼼꼼히 공부하기 전에는 저도 이를 잘 연결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요리문답에 우리 삶의 터전에 대한 청지기로서 자원을 잘 관리하라는 문구가 적혀있는 것을 보고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청년들에게 어떻게 인식시킬까 고민하다가, 미디어 비평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환경보호, 지구온난화, 전기자동차 등과 같은 다큐멘터리를 보고, 이것을 8계명과 연결해서 발표를 시킨 것입니다. 3~4주가량의 준비기간을 거쳐, 대단히 유익한 세미나로 발전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이런 연결 작업을 하다 보면, 솔직히 약간의 억지도 있습니다. 그러나 해보는 것입니다. 교리와 삶의 실천적 연결고리를 찾으려는 노력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이 ‘말’은 참 잘하면서 실제 삶은 세상과 똑같다는 비판에 대해, 뭐라도 보여줄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실력은 지금부터라도 하나씩 쌓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십계명의 적용은 소요리문답 1부에서 공부하는 하나님의 성품과 창조의 원리 등을 제대로 배울수록 더욱 풍성합니다. 창조세계의 소중함을 잘 공부한 사람은, 8계명과 환경문제를 대할 때 반응이 다릅니다. 위의 세미나를 마치고 한 대학생의 고백을 들었습니다. 요즘 중앙냉난방 시설이 된 대학기숙사에서는 학생들이 여름철 금요일에 집에 오면서 에어컨을 그냥 켜두고 온다고 합니다. 주말 내내 에어컨을 켜두어야 일요일 밤이나 월요일 아침에 방에 도착했을 때 쾌적하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전기요금은 학비나 기숙사비에 포함이 되니까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렇게 한답니다. 어르신들이 들으면 까무러칠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학생이 이제는 그 에어컨을 끄고 온다는 겁니다. 매우 작은 변화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이 교리교육이 잘 된 결과라고 봅니다. 교리가 그 마음의 바닥부터 터치해준 덕분이라고 봅니다. 그냥 "너! 지구 환경을 위해 에너지 절약해야지, 에어컨 꺼!" 이런 식의 접근은 요즘 학생들에게는 대단히 황당한 접근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근본 개념을 잡아주고 스스로 행동의 변화가 일어나도록 돕는 것이 교리교육의 힘입니다. 누가 에어컨을 끄라고 시킨 것도 아니고, 스스로 그렇게 깨닫고 적용하는 이런 변화 하나하나가 교육의 효과입니다. 어린 성도 하나가 그렇게 변해가도록 돕는 것이 교회교육이고 신앙교육 아닐까요?


십계명을 공부할 때 등장하는 모든 주제들은 사실 죄다 ‘토론식 수업’으로 다룰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즘 대학이나 고등학교에서는 토론수업이 흔합니다. 십계명의 주제는 학교에서도 이미 다루고 있는 주제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우리 크리스천 자녀들이, 교리공부를 했다는 자녀들이, 세상 아이들의 이야기와 똑같은 논리로 말하고 행동하는 수준에 멈춘다면, 그것을 어떻게 ‘세상을 해석하고 세상을 극복하고 세상을 뛰어 넘는 수준의 교회교육’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이런 주제들에 대해 계명은,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자라나는 시절부터 생각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십계명의 주제는 사회적으로도 이미 이슈가 대단히 많이 되었고, 심지어 어느 정도 사회적 합의에 이르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 사회적 논의에 따라 ‘법’이 만들어지고 우리는 예외 없이 그 법의 적용을 받고 삽니다. ‘생명’을 규정하는 과학적 이론이 사회적 정서와 타협해서 자기들 나름대로의 기준을 설정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봅니다. 똑같은 사회에 ‘생명’을 규정하는 기준이 달라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과 우리는 똑같은 의료시스템을 이용합니다. 모든 것이 이런 식입니다. 그래서 교리가 진짜 삶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법에 따라 우리의 삶의 테두리가 바뀌고, 세금의 액수가 달라지고, 교육 패턴이 달라지고,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교회가 세상을 따라갈 것인가, 이끌어 갈 것인가? 이것은 무슨 기도회의 표어가 아니라 대단히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필연적인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한다면, 정말 그렇게 살기를 원한다면…. 간단합니다. 교리가 곧 삶이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삶으로 증명할 수 있는 교리교육을 위해, 독서토론, 미디어 비평, 현장탐방, 발제, 세미나, 특강, 실습 등등 온갖 방법을 써봐야 합니다.



3. 기본 커리큘럼으로 확정해야 한다.

교회에서 교리를 가르쳐야 되느냐 마느냐, 이것 역시 우문입니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모든 것이 사실은 교리입니다. 설교 안에 교리가 녹아있고, 모든 성경공부에도 이미 해석의 틀이 있습니다. 모든 교회 교육은 기본적으로 교리문답을 기초로 두어야 합니다. 많고 많은 프로그램 중의 하나가 교리교육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필요한 것이 있다면 적당한 지점에 특별한 프로그램으로 ‘끼워 넣어서’ 해야 합니다. 그래야 기초가 흔들리지 않고, 체계를 세우고, 맥을 잡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교회에서 성품이나 인간관계에 대한 교육을 종종 합니다. 언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실 요리문답의 많은 부분에서 이런 부분을 이미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성품은 성화에 대한 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십계명 안에서 하나씩 하나씩 부서져야 하며, 은혜의 방편, 특히 주기도문을 통해 끊임없이 실천적으로 새로움을 입어야 합니다. 그저 교회에 다니니 착하게 살아야 되겠더라, 이게 아닙니다. 왜 내가 굳이 선행을 해야 하는지, 내 잘난 맛에 기질대로 살면 왜 안 되는지, 성품을 다스리고 발전시켜야 할 이유를 ‘알고’ 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웃 사랑의 원리를 깨닫고, 남을 배려하는 가치가 어디에서 비롯하는 것인지를 깨달을 때, 진정한 변화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교리교육이 ‘제대로만’ 이루어진다면, 사람의 성품도 좋아집니다. 교리를 배우면 독단적이고 독선적이며 삐뚤어진다는 통념은, 그동안 그만큼 교리를 잘 못 가르쳤다는 반증입니다.


또, 교회에서 ‘시간관리 세미나’ 등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역시 맥락 없이 무턱대고 할 것이 아니라, 적확하게 필요할 때 가르쳐야 합니다. 요리문답을 통해 ‘인간의 목적’과 ‘인간의 창조’에 대해 철저히 공부하고 나면, 청년들은 난리가 납니다. 프랭클린 플래너를 사서 쓰기도 하고, 묵혀두었던 이력서를 점검하며, 학원에 등록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하면 제게 주어진 시간을 좀 더 잘 쓸 수 없을까요?” 이런 질문이 나옵니다. 인생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나면, 시간이 아깝기 때문입니다. 해야 될 일이 마구 보이기 시작하며, 부지런 하라는 조언을 할 것도 없이 안달이 나는 시점이 있는데, 바로 이때가 소위 ‘시간관리 특강’과 같은 세미나를 도입할 시점입니다.


다음은 어느 교회의 청년부에서 제 책으로 공부한 사례입니다. 소요리문답 1문을 공부한 청년 하나가 갑자기 구직활동을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담당 전도사가 무슨 계기가 있었는가 물으니 돌아오는 대답이 걸작이었답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백수는 좀 곤란하지 않겠어요?” 즉, 재물과 시간을 잘 사용하게 돕는 교육을 교회에서 혹 하더라도, 그저 유행 따라 도입하고 “관심 있는 분들은 모이세요!”해서 진행할 것이 아니라, 신앙의 체계 안에서 나에게 주어진 삶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데 쓰고 싶다는 강한 열망이 생겼을 때, 바로 그 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런 체계 안에서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기껏 교육을 시켜줘 봤자, 그렇게 절약한 시간을 가지고 죄 짓는 데 씁니다. 이것은 명약관화입니다. 나의 삶을 하나님께 더욱 맞추어서 방향 전환을 하고, 그동안 헛되게 살아간 삶을 반성하며 좋은 청지기가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된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회사에서 인정받고 남보다 능력 있는 사람이 되어서, 그걸로 자기 영광을 높이고, 세속적인 욕구를 더 많은 시간동안 추구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 경험담이기도 합니다. 세상에서 인정받는 능력을 갖추면 그것으로 교회를 섬긴 시간이 더 많았을까요? 전혀 아니었습니다.


교회 생활이나 예배 순서에 대한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남들이 하니까’, 또는 ‘작년에도 했으니까’ 이런 식은 곤란합니다. 이것은 2부의 은혜의 방편 부분에서 다룰 수 있습니다. 요리문답의 맥락 안에서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 꼭 눈을 감아야 하나?’, ‘기도할 때 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말하나?’, ‘설교는 어떻게 들어야 하나?’, ‘성찬은 뭐하는 것이며, 세례를 활용한다는 의미는 또 무엇일까?’ … 이 모든 것이 요리문답의 문맥에 정교히 담겨 있습니다.



4. 무엇을 주의해야 하는가?


a. 교회는 투자하라.

교육에 투자하자는 말은 너무나도 상식적이라 식상합니다. 그러나 ‘교리교육’에 투자를 한다는 말은 얼른 와 닿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상 투자가 없다시피 합니다. “거기에 무슨 투자할 게 있어? 교재나 잘 구입하면 되지…”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앞에서 본 십계명에 대한 공부를 다 하려면 관련 서적만 해도 수백 권으로 늘어납니다. 기본적인 미디어 교육을 위한 DVD나 모니터, 프로젝터, 컴퓨터 등의 기자재도 필요합니다. 훌륭한 외부 강사 섭외에도 비용이 듭니다.


이렇게 투자하려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교리교육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교회사를 통해 배웠습니다.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서, 단지 그 문서의 사본을 고국에 있는 교회에 전달해주기 위해서 목숨까지 걸어야 했던 역사의 현장을 볼 때, 우리는 숙연해집니다. 당대 최고의 석학들과 전문가 그룹이 모여서 만든 커리큘럼이자, 실제 교회교육 현장에서 사용되었던 유일한 공식 커리큘럼이란 사실을 신뢰해야 합니다. 다른 데 눈을 돌릴 필요가 없습니다. 반복 교육이 가져다주는 효과는 어마어마합니다. 한번 해봤다고 다 안다는 식으로 함부로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데 쓸 돈을 교리교육에 집중 투자해야 합니다. 돈 많이 들어가는 교육예산을 재점검해서, 과자 사고, 공주님 머리띠 사고, 풍선 사고, 물총 살 돈을 아껴서, 교리교육에 재정을 집중해야 합니다.


속된 말로, 돈을 발라야 합니다. 교재를 직접 만들 때는 단 한 장이라도 보기 좋게 편집하고 컬러로 뽑아주십시오. 컬러 레이저프린터를 구입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실험해보십시오. 교회에서 무슨 교육을 할 때 유인물을 나눠줍니다. 흑백으로 대충 뽑아서 주면 모임 끝나고 바닥에 떨어져 있거나 휴지통에 가득합니다. 컬러로 보기 좋게 편집하고 그림까지 넣어서 나눠줘 보십시오. 전부 집에 가져갑니다. 능력이 되는 교회는 스마트폰 앱을 제작할 수도 있겠습니다. 가능한 최첨단 디바이스를 활용하고, 교리공부 전용 소모임실을 구축하고, 하다못해 책장에 좋은 책이라도 비치해두어야 합니다. 국내 출간된 모든 교리교육 관련 책을 다 사봤자 몇 권 안 됩니다. 기본적인 책들은 구입해서 비치해둡시다. (제 책도 꼭 부탁합니다.)


또, 교리교육을 교회의 ‘문화’로 만들어야 합니다. 단순한 커리큘럼 내지 제도로서 생각하고 말 것이 아니라, 신선하고 대안적인 교회문화로 승격시켜야 합니다. 한 번 시행하고 끝낼 것도, 어느 한 부서에서만 제한적으로 시행할 것도 아닙니다. 제도가 아니라 문화로 정착시킬 일입니다. 문화 투자를 하면, 학생들이 나서서 교리공부를 하자고 조르게 됩니다. 직접 참여하고 소통하는 교육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발적인 참여가 가장 좋은 교육수단입니다. 초등학교 교실 뒤에 아이들의 미술작품을 (아무리 허술하더라도) 붙여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이 바로 교육이라서 그렇습니다. 학생들이, 성도들이, 직접 요리문답을 마인드맵으로 그려서 교회 게시판에 붙여두면 됩니다. 손으로 그리거나 혹은 컴퓨터 SW로 그릴 수 있습니다.2) 교회학교의 교사라면, 제직이라면, 인생에 한번쯤은 요리문답 전체 구조를 마인드맵으로 그려볼 욕심을 부려도 좋을 것입니다.


구체적인 것은 머리 쓰기 나름입니다. 상도 주고, 교재개발위원회도 발족하고, 교재도 직접 만들어보고, 벽에 마인드맵도 출력해서 붙여보고, 결과물을 모아서 출판도 해보고, 발표회도 하고, 학생들을 교무회의에 참석시키고…. 교회마다 형편에 맞게 추진하면 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교육은 백년지대계입니다. 한두 해 시도하고 섣불리 판단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시행착오가 분명 있을 것인데, 실망하지 말고 개선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시도’, 그리고 ‘개선’입니다. 계획하고(Plan), 실행하고(Do), 평가하고(Check), 다시 행동(Action)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홈페이지를 이용해서 자꾸 결과물(후기 등)을 올리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노하우가 쌓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작년보다는 나은 올해를 만드시면 됩니다. 교회는 그렇게 한 해 두 해 자라갑니다.


실제 교회현장의 숱한 오류들과 충돌하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아울러 필요합니다. 교리교육을 시도하려고 하면 여기저기서 항상 ‘말’이 나옵니다. 부정적 인식 때문입니다. 지금의 교리교육에 대한 인식(구질구질한 교육이라는)을 만든 것은 전근대적인 19세기 교육방식입니다. 무조건 외우도록 했던 것입니다. 다섯 명씩 앉혀놓고 외우도록 해서, 입 크게 안 벌리는 학생을 잡아내는 식 말입니다. 지금도 거기서 크게 변하지 못하는 교회가 많습니다. 이해하든 못하든 교재를 읽어나가고, 형이상학적인 개념과 용어를 그대로 끌어다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이것이 개혁교회의 전통이다’ 하고 굳게 믿습니다. 저는 이것은 새로운 형태의 신비주의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을 좋아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성도들은 교리라는 말을 들으면 딱딱하고 지루하고 쓸모없는 것으로 인식하고, 그래서 “하기 싫어!” 하면서 도망갑니다. 대상의 수준에 맞는 배려가 필요합니다. 다양한 방식과 레벨의 교재 및 보조교재를 준비해야 합니다. 다양한 수준의 교사용 지침서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에는 시간과 비용과 인력의 투자가 정성껏 필요합니다.


b. 가르치는 자는 실천하라.

교사는 자기 자리에서 ‘성도’로서 살아야 합니다. 좋은 교사란, 그가 먼저 성도로서 철저히 살아가는 자입니다. 그것만 되면 교사로서 99% 이상 준비된 자입니다. 교사는 사도적 신앙을 잘 전수받고, 그대로 순종하며 살고자 하는 고집이 있어야 합니다. 요리문답을 잘 가르치려면 먼저 요리문답대로 살려고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교사는, 특히 은혜의 방편(말씀, 성례, 기도)을 부지런히 사용해야 하며, 더더욱 십계명을 자기 삶의 표준으로 삼고, 하루하루 그것을 끌어안고 몸부림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정말 중요한 부분인데, 요리문답의 3분의 2가 삶에 대한 부분이라서, 교사가 가르친 그대로 살지 못하는 경우 금방 티가 나기 때문입니다. 환경을 보호하는 것이 하나님 뜻이라고 가르쳐 놓고는 실제로 환경을 보호하는 무슨 실천적 행동이 아무것도 없다면, 이런 것이 문제입니다. 이렇게 되면 교육은커녕, 돌이킬 수 없는 역효과만 생깁니다. 사실 이런 겉과 속이 다른 교육을 어려서부터 너무나 많이 보면서 자랐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눈치로 알지 않습니까? 딱 보면 가짜인지 진짜인지 금방 알아챌 수 있습니다. 하다못해 교회에서 종이컵 사용을 줄이거나, 이면지 활용이라도 해야 합니다. LED조명 사용, 절수기 사용 등도 ‘교리교육의 일환’이 될 수 있습니다.


교사는 또한 그의 삶을 ‘공유’해야 합니다. 교사가 잘 하는 것이 있다면 학생들에게 자랑해야 합니다. 이것은 자기 자랑이 아니라, 그 길을 함께 가자고 권하는 차원입니다. 자랑을 해야 교육이 됩니다. 물론 성공케이스만 공유할 것이 아닙니다. 실패케이스도 일단 모아두시면 나중에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실패한 자를 공감해줄 수 있습니다. 교리교육과 함께, 삶 가운데 교제가 필수적입니다. 인생 선후배, 형, 언니가 되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성도로서의 고민과 양심의 고뇌를 학생들과 구체적으로 나눠야 합니다. 직장 상사가 불법적인 일을 요구했을 때 - 상식 밖의 이야기로 들리시겠지만 - 학생들과도 상의하십시오. 가장 효과적인 교육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려면 교사는 무엇보다 삶 가운데 정직성과 도덕성의 기준을 높여야 할 것입니다. 적어도 학생들 앞에서만큼은. “선생님, 지금 그런 모습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인가요?” 이런 끔찍한 질문을 어느 날 청천벽력처럼 받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 쉽게 젖어들듯이, 교회생활에 있어서도 쉽게 만족하며 살고 있습니다. 매우 두려운 일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타성에 젖는다는 것은 대단한 시험입니다. ‘뭐 이정도면 중간은 가는 것 같아.’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이 바로 대단히 위험한 순간입니다. 교사는 항상 한걸음, 반걸음, 적어도 어제보다는 더 앞서가야 합니다. 그 노력을, 그 발걸음을, 학생들은 곁눈으로도 똑똑히 보고 충분히 다 압니다. “노력을 하는데 힘드신가보다” 하는 것과, “아, 원래 저렇게 대충 살아도 되는가보다” 하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아주 다릅니다.


어떤 교사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아이들이랑 분위기가 좋습니다. 교사의 삶을 부러워하고, 심지어 존경합니다. 눈을 반짝이며 함께 있는 시간을 즐깁니다. 그 교사의 삶이 가치 있는 삶인 것을 아이들은 눈치 채기 때문입니다. 교사가 기혼자라면, 배우자에게 무척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닭살이 돋을 정도로 행복한 모습을 학생들은 싫어할 것 같지만, 몹시 선망합니다. 가정에서 그런 모습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삶이 개혁된 교사는, 그 존재 자체로 가장 훌륭한 (혹은 가장 최악의) 교육 도구입니다.


c. 배우는 자는 겸손하라.

교리는, 특히 요리문답은, 워낙 빤한 소리들로 구성되어 있다 보니 자칫 우습게보기 쉽습니다. 그러나 막상 스스로 설명해보라고 하면 녹록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것으로 소화할 때까지 겸손히 배워야 합니다. 배우기 위해서는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를 표현해야 합니다. 다 아는 척,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앉아있지 말고, 자기 입으로 아는 만큼 표현하는 것…. 이것은 배우는 자의 가장 중요한 자세입니다. 교리교육에 있어서 스스로 ‘후기’나 ‘소감문’을 쓰는 것은, 중요함을 넘어서 ‘필수적’인 행동입니다. 배운 것을 자기의 말로 표현하는 것은 자기 것으로 삼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냥 외우느냐 자기 고백으로 삼느냐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가르치는 입장에서도, 제대로 배우고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어서, 수업평가의 효과가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교리를 배우고 나서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고작 몇 가지 지식을 가져놓고는 그것으로 타인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리를 배운 맨 첫 반응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그분의 사랑에 ‘감격’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사실 이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인데, 우리의 교만함과 죄성은 쉽게 그 길로 가지 못하게 합니다. 모든 교회가 교리를 가르칠 때 가장 중요시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면 좋겠습니다. 배우는 자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감사가 터져 나오는 것. 교리교육의 궁극적 목표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물론 교리를 가르치면 비판력이 높아집니다. 교리는 논리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구절을 그저 모아놓은 것이 교리가 아니라, 그것을 조직화, 구조화, 체계화 시킨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리를 배우다 보면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논리학습이 됩니다. 체계를 잡고 나면, 체계에서 벗어나거나 체계가 없는 것의 허술함이 딱 보입니다. 그래서 자연스레 비판적이 됩니다. 이것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닙니다. 과정입니다. 하지만 그 과정을 올바로 넘기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좋은 칼을 적절한 도구로 쓰지 못하고 강도짓에 쓰는 것처럼, 교리를 사용하는 자의 인격이 큰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 비판의 칼을 자신에게 먼저 적용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 사람 요즘 교리 배우더니 왜 저렇게 날카로워졌어?”라는 말을 들을 때 주의해야 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꽹과리일 뿐입니다.


‣ 교리를 어설프게 배운 후 나타나는 5대 부작용(TULIP)

        1. 전적 지식주의 (Total hierologist)

        2. 무조건적 비판 (Unconditional criticism)

        3. 제한적 독서 (Limited reading)

        3. 불가항력적 고집 (Irresistible persistence)

        5. 고립의 견인 (Perseverance of isolation)

(※ 개혁주의 5대교리를 패러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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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부분은 필자의 논문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과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의 구조분석 비교연구가 교회교육에 주는 시사점”을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http://me2.do/Giq7bS 

2) 마인드맵을 그리는 프로그램으로는, 컨셉리더, 프리마인드, 알마인드 등의 SW를 추천합니다. 무료로 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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