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게재된 손재익 목사의 글은 목사 수급(부목사를 중심으로)에 대한 기획기사를 보고 독자로서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연구위원회는 글을 게재하는 것이 현재의 논의에 도움이 되리라 판단하여 싣도록 하였습니다. 어떤 분이든지 논의에 참여를 원하시면 원고를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연구위원장 이세령 목사

 

서론

▲ 손재익 목사 강서교회 부목사
한국교회에서 일반적으로 목사가 되는 일은, 목사가 되고자 하는 사람 개인에게 그 책임을 맡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사람의 의지가 거의 상당수를 결정합니다. 의지만 분명하다면 어렵지 않게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의지가 없어서 안될 뿐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현상이 바람직합니까? 성경은 어떻게 가르칩니다. 교회 역사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있습니까?

 

본론

성경의 가르침

성경에는 목사를 비롯한 직분자의 자격과 그 직분자가 하는 일(직임)에 대하여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그 자격에 해당 본문은 딤전3:1-13; 딛1:5-9; 행6:3 등입니다. 그 직임에 해당하는 본문은 딤전4:13; 5:17 딤후4:2; 딛2:6; 행20:20-32; 벧전5:1-4; 약5:13-14 등입니다. 성경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직분자의 자격과 그 직임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다. 따로 교육을 받지 않아도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성경은 직분자의 자격과 그 하는 일에 대해서 우리 모두에게 가르쳐 주고 있을까요? 그 해당되는 사람만 알면 되는데 말입니다. 성경에서 직붅의 자격과 그 직임을 우리 모두가 알도록 말하고 있다는 것은 그 모든 책임이 해당 직분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읽고 듣는 모든 회중에게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 사실은 실제로 직분자를 선택함에 있어서 교회의 회중이 그 주체였다는 성경적 가르침을 통해서 분명해 집니다. 그 첫 예로 신약교회 최초의 직분자 선출인 행6장의 내용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행6:5에 보면 일곱 명의 직분자를 선택함에 있어서 그 주체는 ‘온 무리’입니다. 행14:23에서도 각 교회에게 직분자의 선택이 맡겨져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직분은 항상 개인의 뜻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교회가 주체였습니다. 이처럼 직분은 절대로 개인의 의지에 따라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게 주신 책임입니다.

마지막으로 성경은 우리에게 어떻게 직분자를 선택하라고 가르칩니까? 딤전5:22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이처럼 직분자의 선택과 임직은 매우 신중해야 합니다.

 

역사의 가르침

일반적으로 신학과 신앙에 관한 문제를 판단함에 있어서 우리가 따르는 순서는 성경-신앙고백-교회사 의 순서입니다. 우리는 먼저 성경이 어떻게 말하는지 살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고백과 교회사에서는 어떻게 말하는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 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비롯한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따르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대개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 정도는 잘 살펴보지만, 표준문서 중 하나인 정치모범에 대해서는 잘 살펴보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사실 직분에 관한 내용에 있어서는 웨스트민스터 정치모범(The Form of Presbyterial Church-Government)에 너무나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정치모범 중에 “개체 교회의 직분자들에 관하여 (Of the Officers of a particular Congregation)”라는 항목이 있는데 그 내용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각 직분자의 수는 교회의 형편the condition of the congregation에 따라 결정한다.”

이러한 가르침은 우리에게 중요한 책임을 말해 주고 있으니 그것은 바로 “교회의 형편”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교회의 형편이라는 것을 객관적으로 말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것이 직분자 선택의 주체인 교회가 감당해야 할 책임입니다. 그러므로 은퇴 목사 수, 자연 사망률, 중도 탈락률, 교회 증가율 등을 면밀히 살피고 예측하는 것을 ‘믿음 없는 것’으로 치부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이 성경과 역사가 가르쳐 준 교훈에 대한 ‘신뢰’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경솔히 하지 말라는 성경의 가르침에 최선을 다하는 한 방식으로 ‘교회의 형편’을 분별하는 것이 우리에게 맡겨진 책임이라는 것을 역사가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밖에 우리는 역사가 가르쳐 준 중요한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장로교회에서는 목사에 대해서 ‘교육받은 목사’(an educated ministry)의 필요성을 분명히 하게 되었습니다. ‘교육받지 않은 무지한 목사’를 급조(急造)하여 목사로 세우는 것은 종교개혁을 방해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인정했습니다.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많은 사제들이 교회를 허물었던 역사를 경험해 보았기 때문에, 그리고 성경의 진리를 권위를 가지고 여러 계층의 청중에게 설명하는 것이 목사의 일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균형있는 판단력과 그 업무를 위해서 훈련과 실천으로 단련된 정신이 필요하다고 여겨졌습니다.

특별히 청교도들이 이 부분에 대해 분명하게 인식하고 신학교를 설립하여 언어와 인문학과 신학 교육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성경, 성경언어, 신앙고백, 조직신학, 교회사, 인문학(논리학과 철학)을 중요하게 가르쳐왔습니다. 다수를 뽑아서 대강 교육시켜서 임직하는 것이 아니라 소위 말하는 ‘소수정예’를 제대로 교육한 것입니다. 이 사실은 앞서 언급한 바 있는 웨스트민스터 정치 모범에 ‘목사 시취’(The Rules for Examination)를 다루는 부분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를 잘 아는 프린스톤의 신학자 찰스 핫지는 목사를 무조건 많이 세우면 좋다는 생각은 오히려 그들 자신과 교회에 큰 재앙이 됨을 지적합니다. 그러면서 잘 준비된 2-3명의 진실한 목사가 오히려, 교육을 받지 못하고 열심만 있는 많은 사람보다도 더 낫다고 말합니다.(1)

(1) Charles Hodge, The Church and Its Polity (London: Thomas Nelson and Sons, 1879), 446-447.

 

 

실제적 적용

교회는 목사를 택함에 있어서 딤전3:1-7; 딛1:5-9에 부합하는 적절한 자가 나올 때까지 신중하게 관찰하고 서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숫자를 채우기 위해 성급하게 임직하는 것은 교회에게 아주 위험합니다. 이것은 성경과 역사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직분자 선출의 교회적 책임이라는 것은 이미 제도적으로 분명하게 확립되어 있습니다. 이미 우리가 가진 제도는 신중하고도 매우 신중하게 직분자를 세울만 합니다.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목사 후보생으로 추천을 받아야 하고, 3년간의 신학수업을 마친 뒤 강도사 자격 시험을 치루어야 하고, 강도사로 봉사한 뒤에는 목사고시를 거쳐서 회중의 청빙을 통해서 목사로 임직을 합니다. 그렇게 목사로 임직한 사람이 한 교회를 맡아 봉사하기 위해서 또 한 번의 회중의 청빙이 필요합니다. 이 모든 절차에 있어서 개인의 선택보다는 교회의 책임이 더 강조되고 있습니다. 개인의 의지를 절대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에게는 이미 훌륭한 제도, 성경과 역사가 우리에게 전수해 준 제도가 있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이 제도가 가진 의미를 제대로 살리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몫은 그 제도를 충분히 활용하고, 그 제도가 가진 본의를 잘 드러내는 것입니다.

 

결론

실제로 우리는 농반 진반으로 이런 말을 자주 합니다. “장로를 잘 세워야 된다. 집사를 잘 세워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평생 후회한다. 교회 망친다.” 하물며 목사는 어떠합니까? 개인이 장로가 되고 싶다고 해서 무조건 되지 못합니다. 개인이 집사가 되고 싶다고 해서 무조건 되지 못합니다. 그 최종적인 결정은 교회가 합니다. 그렇다면 목사는 어떠하겠습니까? 얼마나 더 신중해야 하겠습니까? 얼마나 더 큰 책임이 교회에게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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