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목사가 담임목사에게 종속되지 않는 직분적 동등성을 확보해야 한다.

▲ 이세령 목사 코닷연구위원장
고신 교단의 교세는 2011 3월 기준으로 교회수가 1741개이고, 목사 수는 3021명이다. 강도사가 452명이며 남전도사가 383명이다. 대략 1750교회로 보고 담임 목사로 봉사하는 경우가 평균 45-70이라고 할때 25년을 봉사한다. 그렇다면 매년 70명의 은퇴 목사가 발생한다.

 

담임 목사와 같은 수급이 가능한 범주가 선교사, 기관 단체 봉사하는 목사, 군목, 간사 등이다. 그리고 외국에 교포 교회와 유학 목사 등이 있다. 현재 선교사가 2000년 이후 평균 10가정이 파송되고 있다. 그중 전문인 선교사를 제외해야 하지만 그러나 노회나 개교회가 파송하는 경우를 포함하면 10명으로 볼수 잇다. 그리고 군목과 원목 그리고 선교단체의 간사 그리고 유학과 교포교회 등을 합한다면 10명으로 보자. 결론적으로 우리 교단에 현재 담임목사와 같은 수급이 가능한 인원은 90명 정도이다. 그런데 현재 목사 후보생을 배출하는 고려신학 대학원의 정원은 120명이다. 이 숫자는 199611월에 당시 문교부로부터 인가를 받은 것이다. 그래서 1997년도부터 적용된 숫자일 것이다. 당시 한국 교회 전체가 성장하는 분위기에서 이해한다. 그리고 당시의 신학생이 담임목사로 나가는데는 최소한 신학과정 3, 강도사 과정 3, 부목사 3-4년 정도로 10년이 걸린다고 계산하면 누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과거의 정원도 적지 않았기에 2000 중반 이후일 것이다.

 

현재 무임 목사가 공적으로 150명 정도, 그리고 실제로는 300명 정도라고 한다. 현재 목사 수의 20/1정도가 무임이고 실상은 10/1정도도 된다. 심각한 현실이다. 이런 누적 속도는 갈수록 심화가 될 것이다. 여기서 부목사들의 적체 현상을 누적되고, 교단의 목회자 수급은 대책이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될 것이다.

 

부목사라는 관점에서 현재의 목회지 상황을 정리해 볼 수 있다. 답은 간단하다. 일차적으로는 신대원의 목사 후보생을 적정 수준으로 줄이는 것이고, 둘째로는 현재의 부목사들의 위치가 확립되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는 반드시 고려해야 할 점이 있다.

 

첫째는 목사와 부목사의 관계에 대한 원칙적인 확립이다.

고신 교회를 비롯해서 모든 예장, 기장의 장로 교회들은 부목사를 담임목사와의 관계에서 위치를 설정하고 있다. 이것은 천주교의 계급적 구조와 다르지 않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후에 교회들은 신조들에서 개혁된 교회가 어떤 구조를 가지는지를 명백히 선언하였다. 가장 먼저 삼직간의 동등이며(목사, 장로, 집사), 그리고 직분자들 간의 동등이다. 이것은 모든 직분이 성령님으로부터 왔으며, 직분을 주시는 분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누가 높으냐는 사도 즉 제자들의 다툼에 대해서 답하시면서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진다고 하셨다. 즉 제자들 사이에는 높낮이가 없다. 직분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그들 사이에 높낮이가 존재한다는 것이 세속적 질서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를 혼돈한 결과이다.

 

이것은 종교 개혁 직후의 천주교회에 대한 반감의 문제가 아니다. 이후 500년이 지나면서도 유럽의 개혁교회들과 심지어 미국의 장로교회들은 여전히 같은 직분 안에 직분자들간에 우열의 문제를 동등으로 규정하고 있다. 역할의 차이를 말한다. 그리고 이런 동등은 원칙적인 선언에 그치지 않고 역할과 규정의 동등으로 당회나 노회를 통해서 규정된다고 말한다.

 

미국 장로교와 같은 경우 부목사 제도를 인정하지만 그러나 부목사의 위치가 담임목사에 귀속되지 않는다. 이것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표현한다. 부목사의 한 교회에 대한 공식 고나계는 담임목사의 관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미국장로교회PCUSA, 교회정치 14.0513). 회중과 노회에 귀속된다. 따라서 담임목사는 물론 회중의 요구라도 노회의 승인을 받은 부목사의 청빙이 해소될 수 없다고 규정한다(미국장로교회 교회 정치 14.0500). 

 

그러나 고신교회를 비롯한 한국의 장로 교회는 부목사가 담임목사에게 귀속되었다. 이것은 선교사들이 동사목사라는 이름으로 목사가 된 한국인 조사들을 불러준 것에서 비롯된다. 동사목사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종속적 관계를 가진다. 그래도 이름은 동사목사이었지만 그나마 1917년부터 부목사란 명칭으로 거론되기 시작했고, 이후 1926년부터는 동사 목사란 말이 총회록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1968년에 통합이 부목사를 공식으로 정했지만 이미 1954년 연동교회 1958년 새문안 교회가 부목사를 두었다. 초기 부목사가 현재의 부목사들과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점차 교회들이 커지고 대형화되고 재정이 넉넉해 지면서 도시의 교회들을 중심으로 부목사는 담임목사에 종속된 위치로 확정이 되어갔다. 그래서 현재의 모든 장로교 헌법은 부목사를 담임목사를 보좌하며라는 문구를 넣어서 천주교식의 사제와 보조 사제의 관계를 구축한 것이다.

 

현대 도시 중심 사회에서 교회의 규모들이 부목사들의 역할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사역이 온전히 자리잡기 위해서는 그들의 위치가 종교개혁의 정신을 따라서 담임목사에 대한 종속적 관계가 되어서는 안된다. 당회나 노회를 통해서 그 역할이 동등하게 배분되어야 한다. 현재의 구조는 장로교회의 구조가 아닌 감독정치와 다를 바가 아니다.

 

어떤 교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놀라운 일이 많이 벌어진다. 담임 목사가 짐을 싸라고 하면 다음날 이사를 가야 한다는 것이다. 정말 파리목숨에 불과한 교회들이 있다. 이런 현장이 주로 대형교회일수록 더욱 가능한 현실이 무엇을 말하는가? 목사가 계급화되고 목사들의 관계도 계급화된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직분에 대한 이해와 교회의 질서를 왜곡시키고 있다.

 

두번째는 분립교회들을 세워가는 것이다.  

개혁교회들은 이런 직분자들간의 질서가 왜곡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교회를 분립해왔다. 한 교회가 천명이 가까이 오면 한 명의 목사를 더 청빙하여 분리하는 절차에 들어간다. 700명 이상의 규모가 되면 목사를 더 청빙해서 교제하면서 분리하게 한다. 그래서 개혁교회는 대형교회가 없다. 그리고 교회들간에 협력과 일치가 강회가 된다. 강단교류, 예배의 일치, 신앙적 형태의 일치, 그리고 신학교와 선교와 구제의 협력적 일치와 동행 등을 이루어내고 있다. 대형교회들이 큰 일을 하지만 대형교회 중심적 사고로 진행되고 있어서 교회 협력적 차원이 희생되는 일들이 많이 있다.

 

한국 교회 상황이 도시의 경우 토지 구입비가 너무 높아서 분립이 어느 선에서 적당한가 하는 것은 논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위에서 밝힌대로 미국 장로교의 경우와 같이 부목사 제도를 두어 회중의 수가 많아지는 현실을 고려하되, 너무 많아지지 않도록 분립을 체질화해야 한다. 많은 것은 힘을 만들어내고, 타락한 인간이 이를 통제한 가능성이 점점 더 줄어든다. 필자는 고신 교회가 교회 연합적 차원에서의 일들이 다른 교단들보다 월등히 잘 되는 것이 대형교회들이 많지 않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것이 교회의 소망스런 모습이기도 하다. 대형교회가 없다고 부끄러워하는 현실들을 듣고 있자니 답답하다.

 

부목사로서 독립된 위치를 보장하고,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헌법을 개정하고, 교회 분립을 통해 건전한 교회들이 많이 서도록 노력을 하여야 한다. 그리고 신대원은 적절한 숫자를 산출하여서 현재의 적체 상황에 대응할 필요가 있다. 이런 노력들이 장로교회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현재의 부목사들의 적체 현실을 잘 조정해 나가면서 지속적인 교회의 안정적인 성장으로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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