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 새 번역문의 번역 오류 분석 및 에큐메니즘, 교회일치 운동으로 미화된 실체 연구

1. 시작하면서

▲ 김영수 장로 부평교회시무장로
사도신경 새번역을 두고 처음에는 단순히 한국교회의 역사와 전통을 외면한 혼란만 가중시키는 중대한 실책이라고 생각했었다. 새 번역은 어떤 명분과 목적이 분명치 않다는 정도로 이해하고 있는 가운데, 예장 통합 중심의 한기총이 KNCC(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공동으로 새번역 특위를 구성하고 에큐메니즘, 교회일치 운동 차원에서 이뤄졌다는 사실에 경악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1)

언더우드 선교사가 처음 조선 땅을 밟은 시기는 1887년이다. 사도신경을 번역한 해는 내한 7년 후 1894년이다. 이제 그로부터 번역한지가 햇수로는 118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후 1908년 합동 찬송가를 발간하면서 감리교의 요청으로 ‘지옥에 내려 가사’ 부분은 장로교가 양보하여 삭제했으나, 현재 사용하고 있는 사도신경은 100년이 넘도록 한국교회 전체가 통일된 하나의 사도신경으로 사용한 것이다.2)라고 오병세 박사는 지적한다.

새 번역 시도는 소중한 전통을 외면한 발상으로 조물주 하나님에 대한 개개인의 신앙고백에 있어서 상당한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다.

언더우드가3) 조선 선교사로 가겠다는 결심을 밝힌 후 그는 약혼녀로부터 파혼을 당했다. 그는 ‘내가 딱 한 가지 아는 것은 그곳에는 하나님을 모르고 있는 1천만 명 이상의 생명이 있다는 것.’ 이라고 고백하며 조선 행을 주저하지 않았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처음 조선 땅을 밟고서 하나님께 드린 기도는 이렇다.  

‘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를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서양귀신이라고 손가락질을 받고 있지만, 저희(조선인) 영혼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습니다.’  

그의 30여 년간의 헌신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 한국교회의 발전상이 존재하고 우리도 여기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오늘의 한국교회는 과거라는 시점으로부터 오늘이라는 현재의 역사로 이어진 것이다. 그럼으로 전통적 교리史를 단절시키고 사도신경을 새로 번역해서 사용하겠다는 구상은 그 명분이 설명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숭고한 한국교회의 역사와 전통을 저버리는 너무나 안일한 생각이 아닌가 싶다.

혹 총회가 고백하는 방법을 바꾼다고 해도, 숙달되고 단련된 익숙해진 개인의 신앙고백 방법은 자신만이 갖는 유일신에 대한 믿음⋅신앙⋅확신 등 본질의 문제이기 때문에, 자연스런 방식의 고백 문에 의한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를 타에 의해 강제 또는 속박할 수가 없다. 그것은 신앙과 양심의 자유에 속하기 때문에 그러하다.

어떤 연유로 사도신경의 새번역이 시작되었으며, 어느 경로를 통해 우리 교단에 유입되었는가? 를 다방면으로 알아보는 과정에서, 고신총회 헌법개정위원회의 한 실무자로부터 ‘한기총이 한국교회 전체가 사용하기 위해 재번역한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다.

교계 언론이 보도한 바에 의하면 고신교회 역시도 한기총과 KNCC가4) 공동으로 구성한 새번역 특위를 인정하고 수용하였다고 본다는 점이다. 대외 적인 연합 활동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공동보조를 맞춰야 하는데, 쉽게 발을 빼기란 정말 쉽지 않다는 점도 인정되나 그래도 우리만의 길을 다시 찾아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60회 총회에서 신학위원회에 맡겨 연구하기로 한 유 안건이, 제61회 총회(2011. 9. 19~22)가 신학위원회의 보고를 받으면서 ‘적절한 시기에 사용할 수 있도록 총회임원회에 맡기기로 한 보고를 받기로 가결하다.’라고 한 부분이 확인되었다.

당시 신학위원회가 총회에 제출한 보고서에는 상당한 이유와 당위성을 설명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7. 사도신경, 주기도문 새변역 문안 채택에 대한 고신 총회의 과정들 검토⌋ 부분에서 다루기로 한다.

총회 회의록의 ‘적절한 시기와 총회 임원회에 맡긴다는 정도’의 기록만으로는 애매모호하고 분명한 우리 총회의 인준 절차라고 보기는 어렵고, 안건을 취급하는 방법이나 심도가 부족하다는 논란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이다. 지금 목회자들은 처음에는 ‘총회가 결정했다고 말했다가, 지금은 총회가 그런 결정을 한 적이 없다.’ 라는 식으로 약간 의문스런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사도적 신앙고백문’ 자체를 거부하는 교파는 침례교회가 유일하다. 알미니안주의는 「Irresistible Grace∣불가항력적 은총」을 부인하며 만인구원론을 주장한다. 이를 계기로 사도신경의 유래와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고자 한다.

1)뉴스엔조이 2004. 12. 25 주재일 기자 : 한편, 이번 번역을 KNCC와 한기총이 공동작업한 데는 양 기관에 모두 가입한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김태범 목사)의 적극적인 제안이 크게 작용했다. 예장통합은 총회 결의를 통해 자체 번역을 했지만, 작년 총회에서 재번역안 채택을 보류하고 한국교회가 통일된 주기도문·사도신경 사용에 힘쓰기로 했다. 예장통합이 KNCC와 한기총에 재번역을 요청해, 한기총, KNCC는 올 해 6월과 7월 각각 연구위원회를 구성했다. 양측 위원회의 위원장도 예장통합 소속 이종윤 목사가 맡았다.

뉴스엔조이 2006. 9. 5 기사 : 주기도문 새번역 작업은 4년 전부터 예장통합 총회가 주도적으로 나서 작업을 시작했으며, NCC와 한기총 등 범교단적으로 작업을 확대해 연합 기관의 최종 합의문을 이끌어 내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주기도문 내용 가운데 당신이라는 표현을 ‘아버지’로 표현된 문구가 가부장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며 한국교회여성연합회 등 교계 여성 단체들이 반대해왔다. NCC 여성위원회도 반대 목소리를 내면서 NCC도 통일된 입장을 내놓지 못했다. 새번역이 통과되면 찬송가 발간 작업에도 영향이 미칠 전망이다.  

2)오병세 박사 『고신헌법 개정안 중 교리 표준에 관하여』 Ⅳ. 사도신경의 ‘지옥에 내려갔다.’는 문제 2. 한국교회의 실상 1) 언더우드 선교사의 사도신경 번역 판. 2012년 총회 보고서, p.4 참조 

3)언더우드 선교사는 1887년 내한하였으며, 지병으로 귀국하여 1916년 소천 하였다. 그는 최초로 한글로 된 찬송가를 만들었고, 정동장로교회(새문안교회)를 설립하였으며, 한국인들에 의해 한국말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했다. 1889년에는 기독교서회를 창립했고, 성서번역위원회를 조직, 회장을 맡았다. 1890년에는 한영사전, 영한사전을 출판했고, 1897년 주간지 그리스도 신문을 창간했다. 1900년 YMCA(기독교청년회)를 조직하고, 경신학교 대학부를 설립, 연희전문대학으로 발전시켰다.

4)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의 정체는 무엇인가?

사탄을 숭배하는 프리메이슨들이 조직한 세계교회협의회(W.C.C)가 프리메이슨 조직이라는 역적인 근거는 많다. 세계교회협의회의 한국 지부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이다. 이 조직은 철저하게 교회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으나, 프리메이슨의 노선을 따른다.

한국교회협의회(KNCC)가 "생명의 강 살리기 종교여성 공동기도문"이라는 말도 되지 않는 글을 올리거나 허용하는 것은 이 집단의 정체성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교계의 성도들은 한국기독교협의회(KNCC) 소속되어 있는 교단이나 교회들을 떠나는 것이 사는 길이다.

한국교회협의회(KNCC)는 WCC(세계교회협의회)에 분담금을 지불하고 있다. 이것은 성도들이 교회에서 헌금하는 것이 노회와 총회 등을 통해 사탄의 조직(세계교회협의회)에 분담금을 지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WCC=KNCC -> 신앙의 세속화 된 교회, 하나님과 부처를 함께 부르는 기도. 나미아미타불 아멘을 고백한다.(출처 : http://blog.daum.net/sbchunew)

KNCC 가입교파 :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통합), 기독교 대한감리회, 한국독교 장로총회(기장), 한국구세군, 대한성공회, 기독교 대한하나님의 성회(순복음), 기독교 한국루터교(루터교), 기독교 대한 복음교회, 한국정교회 대교구. (가입 9개 교파)

 

2. 사도신경이란 말의 어원

말 그대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도들의 신앙고백문(the Apostles' Creed)이다. 이 말의 라틴어 원문은 ‘사도들의 증표’ 란 뜻이 있다. 따라서 라틴어 심볼룸(표징, 표어)은 ‘함께 맞추다.’ 나 ‘서로 들어맞다.’는 뜻을 지닌다. ‘심볼룸’은 쪼개진 물건의 반쪽을 가리키는 일종의 ‘증표’ 를 의미한다. 이것을 서로 맞출 때 비로소 라틴어 symbolum의 ‘서로 들어맞는다.’는 말이 된다.

외국 영화에서 쪼개진 목걸이 같은 것을 가족이나, 연인끼리 헤어질 때 서로 나눠 갖는 것을 본적이 있다. 수십 년 후 다시 만났을 때, 그 반쪽을 서로 맞추면 가족 또는 연인이라는 ‘확정’이 된다. 그러므로 심볼의 의미는 심오한 깊이가 내재되어 있다. 그리스도와 우리들의 신앙이 결합하게 된다는 ‘증표’는 너무나도 소중한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입으로 시인한 것은 마음으로 주님께 ‘믿습니다.’라고 고백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는 것이다. 이 고백이 없는 자는 주님과 결합할 수가 없다. 사도신경은 기독교 문화의 중심 요소이며 산 증거이다. 신앙의 유산으로서의 소중한 보화와 같다.

특히 주후 300년 전후의 초대교회 역사를 보면, 네로의 극심한 박해와 황제 숭배로 인한 숫한 박해에도 이 신앙고백으로 인해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의 피를 흘렸다. 역사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신앙고백을 통해 다른 신을 거부하였고, 고귀한 목숨도 초개같이 여기면서 신앙의 정절을 지켰다.

어디까지나 기독교의 표준(standard)은 성경이다. 주기도문이 중요하고, 그 다음은 사도들의 신앙고백이 고스란히 담긴 사도신경이 중요하다. 유대인들의

신앙고백은 신명기 26:5~10(출애굽 사건)이 저들의 주된 신앙고백 문이라고 한다. 이 밖에도 여호수아 24:16~18(여호와만 섬기겠노라), 신명기 6:4~9(마음, 성품, 힘을 다해 섬기라) 등도 유대인들의 신앙고백 문이다.  

 

3. 사도신경의 기원과 역사

사도신경은 오랜 기간 동안 교부들의 논쟁과 검증 과정이 있었다. 사도신경은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 문으로써 전통적 신앙을 대물림한 흔적들이 역력함을 역사가 증명해 주고 있다.

사도신경의 처음 출발은 마태복음 16:16(시몬 베드로의 대답)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태복음 28:19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다. 이런 고백들은 바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습니다.’ 라는 고백이며 그리스도의 신비성에 대한 믿음의 고백이기도 하다. 그리고 마태복음 28:19은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에 기인한 과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세 가지 존재양식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고백인 것이다.

사도신경의 헬라어 원문은 200년경에 처음 5~6개가 발견되었다. 당초 발견된 원문에는 ‘지옥에 내려 가사’ 부분이 빠져 있었다고 한다. 그 후 3세기 말경부터 4세기에 이르면서 로마가톨릭에서 일부를 수정 하여 ’지옥 하강‘ 부분을 추가하여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역사가들은 보고 있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번역한 최초의 사도신경 한글 원문에도 ‘지옥에 내려 가사’ 부분이 있었으나, 1908년 통합 찬송가를 편찬할 때 감리교가 요한 웨슬레는 ‘음부 하강’ 부분을 부인하는 입장이므로 장로교를 설득하여 타협한 것이 그때 삭제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5) 다만, 이 문제는 학자마다 의견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필자의 의견은 생략한다.

5)오병세 박사 「고신헌법 개정안 중 교리 표준에 관하여」 Ⅳ. 사도신경의 ‘지옥에 내려갔다.’는 문제 1. 신학적 고찰 1) 기독교강요 칼빈의 주장 2)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3) 소교리문답 2. 한국교회의 실상 1) 언더우드 선교사의 사도신경 번역 판. 2012년 보고서, p.3,4 참조

이렇게 해서 3세기 말경 로마에서 8~9개의 신조로 이루어진 ‘고대 로마신경’ 으로 발전하였는데, 이런 것들이 후기 모든 사도신경의 원형이라고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이후 큰 골격이 만들어 지기까지는 300~350년 정도가 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도신경의 기원은 분명히 사도들이다. 주후 400년경 로마의 신학자 루피노의 진술에 의하면 ‘사도들은 흩어지기 전에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받아들일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복음을 가르치는 일이 생겨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사도들이 각기 떠나기 전에 마땅히 해야 할 설교에 대한 어떤 규범을 공통적으로 설정했다. 성령으로 충만한 모든 사도들이 다시 모인 상태에서 그들은 그들 각자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공통적 규범으로 만들고 그러한 것이 믿는 이들에게 제공되는 신앙규범이어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고 규정함으로써 자신들이 앞으로 할 설교에 대한 이런 짧은 개요를 작성했다.’고 하였다. 초기교부 Clement에 의하면 제자들은 복음을 전하다가 모두 비참한 죽음을 당했다고 전해진다.

시대마다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름 받은 자들이 사도적 비전⋅성품⋅결의를 소명으로 삼은 데에는 상당한 이유가 있다.

진정한 비전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점과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기고 하늘의 상 주심을 바라보았던 모세를 모본으로 삼아야 된다는 점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목표를 향한 불굴의 결단으로 패배냐 실패냐를 염두에 두지 않고 결연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본다. 사도들의 결의(determination)는 죽음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에 이르는 길이였다. 바로 이 점이 사도신경의 원 저자가 제자들 이었다는 점에 더욱 큰 의미를 부여해야 할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중대한 명령과 과제를 두고 고민하면서 ‘우리가 동일한 같은 복음을 전해야 하는데 이야기 하는 방식이 서로 다르고 전파하는 핵심이 다르면 안 된다. 누구든 동일한 교리를 가지고 신앙을 가르치자.’는 합의 하에서 함께 의논하여 최소한의 요약된 규범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요한 칼빈은 ‘나는 사도신경이라고 부른다. 교회의 초기 사도들의 시대로부터 신앙에 대한 공적이고 확실한 하나의 고백으로 받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도신경이라는 표현은 이 신경이 사도들에 의해 공동으로 작성되었다는 구전이 두루 퍼져 있다가 나타난 것이다. 이 후 교회가 ‘신앙고백 문’ 형식으로 확정하여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7세기에 와서 오늘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사도신경의 표준 문이 작성되었는데, 로마를 제외한 다른 서방교회에서 ‘예비 사제들의 교리 지침서’로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은 약 600년에 걸쳐 완성된 셈이다.  

 

4. 처음 그리스어에서 라틴어 표준어로 사용된 배경

사도신경에 대한 학자들의 응집력과 형성 과정이 학술적으로 규명된 것은 1946년 벨기에의 요셉 사제에 의해 문헌으로 정리된 것이 있긴 하다.

사도신경은 초기에는 그리스어로 되어 있었는데, 이것이 재 확정되고 보급될 때에는 라틴어 표준으로 되었다. 당시 로마제국이 그리스어를 만국공통어로 사용하다가 이후 헬레니즘을 벗어나 점차 라틴 문화를 형성하고 자국어인 라틴어가 창달되었기 때문에 라틴어 표준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초기 200년경의 헬라어 원문을 모체로 보며 더욱 소중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5. 교회와 성당의 사도신경 문안 비교 대비

교회와 성당에서 사용하는 사도신경 문안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종전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새번역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새 번역문은 2004년 한기총과 진보적 입장에 있는 KNCC(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교회일치 차원에서 공동으로 사도신경, 주기도문 새 번역 특위를 구성해서 번역한 것임. 지금의 한기총 회원은 21개 교단 11개 기관이 탈퇴, 한교협(한국교회 연합)을 구성하므로 써 지금 한기총의 중심 세력은 KNCC 회원들이 완전 장악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한기총 중심 세력 + KNCC = WCC 라고 해석 된다.)

천주교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나는 믿나이다.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 편에 앉으시며, 그리로 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성령을 믿으며,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아멘.

사도신경 문안 비교표

* 사도신경 원문은 동일한데, 교회와 성당은 중요한 단어 번역 및 용어 선택에 약간의 차이를 둔다. 

성당

천주

성부

그리스도님

동정

마리아

저승

사흗날

산이와

죽은이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

성인의 통공

통치

교회

하나님

아버지

그리스도

동정녀

마리아

-

사흘

산자와

죽은자

거룩한 공회

성도가

서로 교통

고난

교회와 성당의 주요 단어 비교표

* 성당에서 사용하는 문안에는 ‘저승에 가시어’ 내용이 있다. 저승은 사람이 죽은 뒤 영혼이 가서 산다는 의미로 해석되는데, 용어의 정의상 저승은 지옥과는 다른 뜻으로 표현된 것이다. 최소 3일간은 고통(지옥 하강)을 받으셨다는 의미와는 좀 다른 해석이다. 라틴어 descendit ad inferos 는 ‘지옥에 내려 가사’로 번역함이 옳다.

라틴어 원문 cormmunionem을 종전에는 교통으로, 새 번역은 교제로, 성당은 통공으로 번역했다. communion of saints는 단순한 교제나 친교 보다는 믿는 자들의 영적 ‘교통’을 의미하는 번역이 더 좋은 것 같다. 교제는 서로 사귀어 가까이 지냄을 의미하고, 친교는 아주 가깝고 친하게 지낸다는 표현인데, 그것이 틀렸다고 하기보단 익숙해진 깊은 뜻을 그대로 사용함이 좋을 것 같다.  

* 성당(1996년 이전 사용 용어)

⋅고성소에 내리시어, (고성소-> 천국과 지옥의 사이에 있는 곳)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 성당(종도신경,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 사용 용어)

⋅지옥(림보, 라말) 내리사 사흗날에 죽은 자 가운데로 조차,

(림보-> 천국과 지옥의 사이에 있는 곳)

본시오 비라도 벼슬(?)에 있을 때에 난(亂)을 받으사, 

 

6. 교회사적 측면에서 볼 때 새 번역문 사용 문제는 중대한 분수령이 될 것 같다.

그리스도 교회는 약 일천년 동안 단일성을 유지해 오다가 1054년을 정점으로 동⋅서방교회로 분열되었다. 분열의 원인으로는 정치, 경제, 문화, 지리, 인종, 언어 등도 그 원인으로 분석되지만, 주원인은 교권의 주도권 싸움과 증오와 질투심 때문이었다.

교리적인 문제로는 성령의 발출, 교황의 권위와 무오설, 동정녀 마리아의 무죄성, 성찬식 때 평신도에게 떡과 잔을 주느냐 안 주느냐, 성상화 및 성자들의 초상과 조상숭배, 사제의 결혼 문제 등에 대립적 관계를 보이면서 동방교회는 서방교회를 이단으로 간주하기까지 했다.

사도신경은 인노첸시오 3세(1198-1216년)에 의해 서방교회(로마가톨릭)의 공식 신경으로 인정되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도신경의 원문은 4세기의 루피노에 의해 라틴어로 기록된 것과 안치라의 주교 마르첼로(Marcellus, 이단 아리우스주의에 반대한 신학자)가 로마교회와의 신앙의 통교(通交 friendly relations)를 표명하기 위해 340년경 율리오 1세에게 보낸 서신 내용 중에 나타나 있는 것으로서 원본이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현재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것을 원문과 비교해 보면 두 가지 조항이 추가되어 있는데, 처음 12개 조항을 14개 조항으로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 과 ‘영원히 사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초창기의 사도 신경이 세월이 흐르면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시대적인 요청에 의해 추가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우리 개혁주의 교회 역시도 1517년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제시하여 로마가톨릭의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기 이전의 교회사는 실재 하나다.

그러므로 특히 종교개혁 이전의 교부 철학자들의 교리와 신조들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한다. 325년에 있었던 니케아 공의회는 성자의 신성을 부정한 아리우스 주의자들을 이단으로 정죄했는데, 오늘 우리 개혁교회들도 그 결정을 동의하고 지키고 따른다는 점이다.

콘스탄틴 대제(306~337)가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293~373)에게 아리우스를 공동체에 받아들일 것을 지시했으나, 아타나시우스는 이를 단호히 거부함에 따라 아리우스를 추종하는 이들에 의해 335년 티로에서 교회회의가 소집되어, 아타나시우스의 해임을 결의하고 황제는 그를 트리어에 감금했다. 그가 일생 동안 겪게 된 다섯 번째의 유배였다. 아타나시우스 총대주교는 이단교리와의 투쟁으로 인해 사제생활 46년 동안에 20년간의 유배 생활을 하면서도 그리스도교의 정통교리를 지킨 위대한 교부이다.

특히 어거스틴, 요한 칼빈은 기독교교리의 중요한 근간을 완성한 매우 뛰어난 사상가이다. 요한 칼빈이 기독교강요를 집필할 때 총 3,402번 초대교회 교부들이나 중세 스콜라 신학자들의 글을 인용했는데, 50회 이상 인용한 사람이 무려 13명이나 된다. 그 중에서도 어거스틴의 글은 1,708회나 인용하였고, 제롬 332회, 크리소스톰 259회, 터툴리안 122회를 인용했다.

이렇듯이 어느 날 하루아침에 개혁주의 신학이 정립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지금 논의되고 있는 새 번역 사도신경 사용 문제도 교회사적 관점에서 보면, 신앙정서가 비슷한 교파끼리 동일한 것을 선택하게 되는 중대한 시험대에 올라있다고 보아야 한다.

역사적으로 학파는 이즘(ism 주의, 학설)에 따라 형성되었다. 교회의 분열 또한 어떤 명분을 내세워 갈라지곤 했다. 지금 우리가 어느 번역문을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는 한국교회의 통일성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정통성이 있는 신앙고백 문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로마가톨릭의 그것과 흡사한 베낀 새 번역문을 에큐메니컬 운동 차원에서 수용하고 함께 갈 것인가, 아니면 단호히 거절하고 돌아서느냐의 기로에 서 있다고 생각해야 된다는 점이다.  

 

7. 사도신경, 주기도문 새번역 문안 채택에 대한 고신 총회의 과정 검토

맨 처음 사도신경과 주기도문 사용 여부를 총회에 상정하는 안건은 제60회 총회(2010. 9. 27(월)~10.9(목))에서 신학위원회 위원장 이순만 목사에 의해 청원된 것으로 총회 촬요에 나와 있다. 당시 한기총 이광선 대표회장은 총회 앞에 사절단으로 오셨다. 동 총회 촬요 p. 36. 1. 신학위원회에 배정된 안건 중 (5) 동부산노회장 이환봉 목사가 발의한 "사도신경과 주기도문 사용에 대해 총회의 통일된 지침 청원"건은 주기도문은 개역개정 성경대로 하기로 하고, 사도신경은 신학 위원회에서 1년간 연구하여 보고하기로 가결하다. 라고 되어있다. 아마 총회 신학위원회 관계자들과 발의자는 한기총과 KNCC가 공동으로 번역한 점을 잘 몰랐거나, 번역한 그 쪽에서 배부한 자료 중 새 번역의 취지와 자화자찬한 제안 설명문을 편의상 베껴 보고한 것 같다. 아니면 교단 관계자로부터 부탁을 받고 한기총의 자료를 넘겨받아서 그대로 인용 보고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제61회 총회(2011. 9.19~22) 촬요에는 Ⅳ.중요결정 사항 p. 27. 9-3

신학위원회에 맡겨진 “사도신경과 주기도문 사용에 대한 총회의 통일된 지침건”의 총회 보고서를 보면 사도신경은 이전의 번역본에 비해 원문에 가까워졌고, 현대화되었으며, 애매한 표현이 제거되었으므로, 개정된 고백문을 사용하는데 무리가 없으므로, 적절한 시기에 사용할 수 있도록 총회임원회에 맡기기로 한 보고를 받기로 가결하다. 로 되어 있다. 이를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60회 총회 결정사항

61회 총회 결정사항

주기도문은 개역개정 성경대로 하기로 하고, 사도신경은 신학 위원회에서 1년간 연구하여 보고하기로 가결하다.

사도신경은 이전의 번역본에 비해 원문에 가까워졌고, 현대화 되었으며, 애매한 표현이 제거되었으므로 개정된 고백문을 사용하는데 무리가 없으므로 적절한 시기에 사용할 수 있도록 총회임원회에 맡기기로 한 보고를 받기로 가결하다.

60회 재정리

61회 재정리

1.주기도문은 개역개정 성경대로 한다.

2.사도신경은 1년간 연구해서 보고한다.

 

 

 

 

 

 

 

 

1.적절한 시기에 사용하도록 총회 임원회에 맡긴다.

2.보고를 받기로 가결하다. 보고 내용은 하기와 같다. 5가지로 요약됨.

‘새번역 사도신경은 이전의 번역본에 비해 원문에 가까워졌고, 현대화 되었으며, 애매한 표현이 제거되었으므로 개정된 고백문을 사용하는데 무리가 없으므로 적절한 시기에 사용할 수 있도록 총회임원회에 맡기기로 한 보고를 받기로 하다.

 

제60회, 제61회 총회 결정문 분석

 

문제점 지적

 

1. 제60회 총회에서 주기도문은 개역개정판 성경대로 한다고 이미 결정을 했다.

그럼에도 개체 교회들은 주기도문까지도 새번역문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총회결정 위반 행위이다. 이미 새번역 주기도문을 시행한 교회들이 상당수가 있다. 아마 총회로부터 개체교회에 주기도문도 새번역문으로 사용할 것을 지시했다면, 이것은 중대한 과실에 해당한다.

 

2. 신학위원회가 새번역 사도신경의 장점을 총회에 보고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이전의 번역본에 비해 원문에 가까워졌고

2) 현대화 되었으며

3) 애매한 표현이 제거되었으므로

4) 개정된 고백문을 사용하는데 무리가 없으므로

5) 적절한 시기에 사용할 수 있도록 총회임원회에 맡기기로 보고하다.

 

위 1)~5)까지의 총회 보고 내용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고, 심각한 허위보고이다. 한마디로 총회와 교회를 우롱하는 처사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1) 무엇이 ‘이전의 번역본에 비해 원문에 가까워 졌는가?’의 자료를 명확하게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이 아쉬운 것이 아니라, 허위 보고이다.

2) ‘현대화 되었으며’의 현대화를 의미하는 뜻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다. 무엇이 어떤 점들이 시대에 뒤떨어졌는지를 설명하지 못했고, 세속적 풍조를 따른다는 의미는 아닐테지만, 이해하기 힘든 허위 보고임에 틀림없다.

3) ‘애매한 표현이 제거되었으므로’ 역시 애매한 표현이 무엇인지를 제시하지 못했다. 따라서 이 역시도 허위 보고이다.

4) ‘개정된 고백문을 사용하는데 무리가 없으므로’ 의 자체 진단은 분명히 무리가 따르는데,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다.

5) ‘적절한 시기에 사용할 수 있도록 총회임원회에 맡기기로 보고하다.’에서 적절한 시기는 아직도 오지 않았다. 예수님 오실 때까지 영원히 오지 않는다. 그리고 총회임원회가 적절한 시기를 판단하는 기준은 여론 조사나 정보 등의 통계를 집약해서 판단하거나 수의를 통해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임의로 시행했다. 비록 총회임원회라고 할지라도 그런 권한은 부여 할 수가 없다는 법리다.

 

종합 정리

 

1. 제61회 총회가 신학위원회의 보고를 받았다는 점은 인정해야 될 것 같다. 그러나 신학위원회의 보고는 진실에 근거하지 못한 허위 보고이므로 무효다. 총회 결의문이 성문화가 되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절차가 있는데, 결의 자체가 합법적이냐의 검정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위헌여부, 성경⋅헌법이나 제규칙 위반여부, 이해될 수 없는 통상 관례를 넘어선 결의, 추상적인 결의, 문맥, 실제와 기록상의 착오 발생 등이다.

2. 총회가 위임 결의를 했다고 하더라도, 총회 임원회는 통상적인 집행, 결정은 할 수 있지만, 범주를 넘어선 권한 밖의 위임 사항은 법리적으로 결정권이 부여되지 않았다고 해석된다. 시행시점 판단은 기준, 절차, 방법이 없었다는 면에서 위법에 해당한다.

 

 

총회 결정은 존중돼야 한다. 그러나 옳다는 전제가 없는데도 동의하라는 것은 무조건 맹종을 강요하는 ‘총회라는 교권을 우상화’ 하는 결과가 된다. 종교개혁 이전의 교회가 맹종을 강요했다.

우리 신학교 학자 중에서 개혁주의 신학에 정통한 화란 캄펜에서 유학한 교수님들이 동의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총회라는 정치가 개입하여 일방적으로 밀고 나가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총회 결의를 중시하는 일부 분위기도 존중해야 되겠지만, 고려파의 역사라는 교회사적 관점에서 생각해 본다면 매우 중요한 대목이다.

고려신학대학원 유해무 박사는6) 기독교보 제1031호에 ⌈교회와 신조 : 사도신경, 주기도문 새 번역의 도입에 대한 소고⌋를 발표했다.

유 박사는 고신교회는 ‘총회의 결정대로 2012년부터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의 새번역을 공적으로 도입하였다. 그렇지만 여전히 기존 번역(성경도 개역)을 사용하고 있는 교회도 많다. 상당히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라고 지적한 것은 학자의 양심에 의거한 바른 진언으로써 우려를 넘어 개탄스런 감정으로 들린다는 점이다.  

6)기독교보 제1031호 2012년 6월 11일 발행, p. 3면 참조. 유해무 박사는 고려신학대학을 졸업하고, 고려신학대학원에서 M. Div. 과정을 마쳤다. 이후 자매교단인 화란의 31조 개혁파 교회의 직영 캄펜신학교에서 교의학을 전공한 후 현재 천안의 교단직영 고려신학대학원에서 교수로 사역하고 있다.

8. 새 번역문에 대한 본 교단 신학자들의 견해

8.1. 유해무 박사의 견해

첫째. 교회회의와 번역 채택 절차에 대하여

“총회는 교회 회의로서 교리와 예배와 교회법(정치와 권징)을 다룬다. 그런데 총회는 공 예배에서 사용하는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의 새번역 참여와 토론을 미흡하게 진행하였다. 교리와 예배와 정치가 단일체를 이루지 못하고 별도로 작동하고 있다는 뼈아픈 예이다.” 라는 점을 지적했다.

둘째. 번역 자체의 오류가 너무 많다.

새번역에는 토론을 거쳐 더 잘 번역할 부분이 더러 남아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에,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 26:42)고 간구하셨다. 우리 입에 익은 이 번역의 원문은 주기도문에 먼저 나온다. 주기도문 새번역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로, 성경 번역은 “뜻이 이루어지이다”(마 6:10)이다. 같은 원문을 새번역이 각기 달리 번역한 것은 한국교회가 여전히 피선교교회의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같은 복음서 안에서도 번역에 일관성이 없는 성경 번역의 수준, 비슷한 시기에 번역한 성경과 ‘공예배’ 용 주기도문의 번역이 서로 상이하다는 것은 신학의 빈곤을 노정시킨다.

또 사도신경의 ‘그의 유일하신 아들’은 성경 번역에는 나오지 않는다. 개역과 개역개정판은 ‘독생자’로 번역하고 있다(요 1:14, 3:16,18; 요일 4:9). 이 원어와 역어는 성부와 성자 하나님의 독특한 관계를 표시한다. 성경은 인간의 경우에는 ‘외아들’ 눅 9:38; 히 11:17)로 번역한다. ‘독생자’이든 ‘유일하신 아들’이든 외아들과는 다른 역어이지만, 굳이 ‘유일하신 아들’로 번역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고 주장했다.

셋째. 공교회적 신경과 ‘음부하강’ 부분

고신교회 새 헌법에 부록으로 실린 사도신경 새번역에는 ‘음부하강’을 포함시켰다. 우리가 받은 신조는 공교회 신경을 따라 ‘음부하강’을 받아들이고 있다. 사실 우리 대교리문답(1648년)의 50 문답은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그러면 이를 이후에 삭제한 감리교와 우리는 다른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교회 연합을 위하여 이미 받은 신조의 일부를 덮거나 침묵하게 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교회연합이나 합동은 교리에 기초하여야 한다.

넷째. 공교회성과 신학의 확립, 어떻게 해결할까?

예배에서 사용하는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의 새번역은 ‘번역’만의 문제가 아니라, 교리와 예배와 직결되어 있다. 이런 결정은 교회 회의의 책임이며, 예배와 믿음생활에도 교회 회의가 맡은 책임이 크다. 다른 번역으로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것은 교회의 하나됨을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다.

고신교회는 삼대 공교회 신경(사도신경, 니케아신경, 아타나시우스신경)을 헌법의 부록으로 취급함으로써 공교회적 면모를 갖출 수 있는 기회를 선용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한국의 어떤 교회와는 달리, ‘부록’으로나마 실은 것은 그나마 ‘진일보’한 것이라고 자위할 수 있겠다. 다음 개정에는 공교회 신경을 교리표준의 앞부분에 실을 수 있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새번역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에 대한 의견도 수집하여 더 나은 번역을 위한 준비를 계속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모든 일에 교회 회의가 책임을 지고, 모든 지역교회가 교리와 예배와 교회정치에서 하나일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하여야 할 것이다.

 

8.2. 변종길 박사의 견해

고려신학대학원 변종길 박사 역시도7) 기독교보 제1033호에 게재한 ⌈새 번역 사도신경, 검토가 필요하다⌋는 글을 통하여 번역의 오류에 대해서 주옥같은 글을 발표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7)기독교보 제1033호 2012년 7월 7일 발행, p. 3면 참조. 변종길 박사는 서울대학을 졸업하고, 고려신학대학원에서 M. Div. 과정을 마쳤다. 이후 자매교단인 화란의 31조 개혁파 교회의 직영 캄펜신학교에서 신약학을 전공한 후 현재 천안의 교단직영 고려신학대학원에서 교수로 사역하고 있다.

 

새로 번역된 사도신경은 어느 원본을 가지고 번역했는지 나와 있지 않아서 정확한 검토가 불가능하다. 라틴어 본을 대본으로 삼았는지 헬라어 본을 대본으로 삼았는지도 알 수 없고, 또 어느 시대에 누가 작성하거나 받아들인 것을 대본으로 삼았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고대의 여러 대본들을 참조해서 새번역 사도신경을 살펴볼 때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번역의 오류

우선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이란 표현은 어색하며 성경상의 용법에 맞지 않다. 헬라어본에는 ‘떼온 파테라 판토크라토라’라고 되어 있으며, 라틴어본에는 ‘데움 파트렘 옴니포텐뎀’(deum patrem omnipotentem)으로 되어 있다. 이 경우에 ‘전능한’이란 뜻의 ‘판토크라토라’ 또는 ‘옴니포텐템’이란 형용사는 문법상 ‘하나님 아버지’(떼온 파테라, 데움 파트렘) 전체를 수식한다고 볼 수 있다(전부 다 ‘대격’임). 이 중에서 한 단어를 지적하라면 ‘하나님’(떼온, 데움)을 지적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란 표현은 아주 많이 나오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엘 샤다이’ 곧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소개하셨으며(창 17:1, 35:11, 출 6:3), 이삭도 그렇게 불렀다(창 28:3). 때로는 간단히 ‘샤다이’(전능자)라고 말하기도 했다(창 49:25, 룻 1:20,21, 욥 5:17, 6:4, 8:3, 13:3). 신약 성경에서는 ‘호 떼오스 호 판토크라토르’(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불리기도 하고(계 4:8, 11:17, 15:3, 16:7,14, 19:6,15, 21:22), 또는 ‘호 판토크라토르’(전능한 자)로(계 1:8) 또는 ‘퀴리오스 판토크라토르’(전능하신 주)로 불리기도 한다(고후 6:18).

이상의 용례를 볼 때 ‘전능하신’이란 말은 단 한 번만 ‘주’와 연결되어 사용되고, 그 외의 경우에는 모두 다 ‘하나님’과 연결되어 사용됨을 알 수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특히 요한계시록에서는 하나님을 찬송할 때 사용하는 관용화 된 표현이다. 어떤 경우에도 ‘전능하신’과 ‘아버지’가 바로 연결되어 사용된 예는 없다. 따라서 새 번역의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은 문법적으로나 성경의 용례로나 잘못된 번역이며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가 옳다.

둘째. ‘유일하신 아들’ 번역의 어색함

‘유일하신 아들’이란 번역에 대해서는 좀 더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헬라어로는 (대격으로) ‘모노게네’이고 라틴어로는 ‘우니쿰’이다. 헬라어 ‘모노게네스’(주격형)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첫째로 ‘하나뿐인, 유일한’(one and only, only)으로 볼 수도 있고, 둘째로 ‘독특한’(unique)으로 볼 수도 있다(Bauer 사전). 두 번째의 경우엔 ‘독생하신’(only-begotten)으로 번역할 수 있다. KJV에서는 “only-begotten”으로 번역했으나 NIV에서는 “one and only”로 번역했다. 그런데 루터역에는 “eingebornen”(독생하신)으로 번역했으며, 화란국역에서도 “eeniggeborenen”(독생하신)으로 번역했다. 따라서 이 단어(모노게네스)의 번역에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

예수님은 단지 숫자적으로 하나뿐이라는 의미(독자, 외아들)가 아니라, 물론 당연히 이 의미도 포함되지만, 좀 더 나아가서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에 있어서의 독특성도 포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신약 성경에 사용되고 있는 다른 표현인 ‘먼저 나신 자’(프로토토코스)란 단어가 단지 출생 순서상 먼저 난 자란 의미만이 아니라 ‘영광 받으신 그리스도’, ‘높임 받으신 그리스도’에 대해 사용되고 있는 것(롬 8:28, 골 1:15,18, 계 1:5 등)과 같은 맥락이다(cf. Bauer 사전). 그래서 바우어 사전에 보면 이 두 번째 의미에 무게를 두고 많은 문헌을 소개해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고대의 라틴어 사도신경에도 보면 ‘모노게네스’를 그냥 ‘우누스’(하나의)로 번역하지 않고 ‘우니쿠스’(독특한)로 번역하고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필요하며 신중을 기해야 함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확실한 것이 밝혀질 때까지는 ‘독생하신 아들’ 곧 ‘독생자’로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된다. 여기에는 또한 한국 교회 성도들이 이미 ‘독생자’란 표현에 익숙해 있다는 것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셋째.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한국어 사도신경의 대표적인 오역인데 새 번역에서 개정되지 않고 이전의 오류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문은 “에피 폰티우 필라투”이며 라틴어 원문은 “숩 폰티오 필라토”(sub Pontio Pilato)이다. 여기서 헬라어 ‘에피’(+ 속격)는 ‘... 때에, ... 의 치하에’란 뜻이다(Bauer, s.v. epi, no. 18). 라틴어 ‘숩’(sub)도 마찬가지로 ‘... 의 치하에’란 뜻이다. 따라서 이것은 예수님이 ‘본디오 빌라도 때에’ 고난을 받았다는 의미이다. 곧 ‘본디오 빌라도의 치하에서’ 고난을 받았다는 의미이다.

물론 이 말은 본디오 빌라도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최종 판결한 사람은 빌라도이니 그의 책임도 크다. 그러나 사도신경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은 그러한 사실이 아니라 예수님이 ‘언제’ 고난을 받으셨는가 하는 것이다. 곧 ‘본디오 빌라도 때에’,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이다. 이런 중요한 오역이 고쳐지지 않은 것은 새 번역의 의미를 크게 퇴색시키는 것이라 하겠다.

넷째. 국어학적 제 문제들-생소한 용어 사용, 문체, 순화되지 아니한 언어, 불필요한 인칭 대명사, 간결성 부족, 어감 차이점

그 외에도 생각해 볼만한 작은 문제들이 있다. ‘거룩한 공교회’에 대해서는 이렇게 번역할 수도 있겠지만, 과연 한국의 성도들이 ‘공교회’란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겠는지를 생각해 볼만하다. 화란개혁교회에서는 ‘보편적 교회’로 번역했는데, 이것이 더 쉽고 분명한 말이 아닌지 검토해 볼만하다고 생각된다.

그 외에는 문체 문제와 국어학적 문제들이 있는데, 여기서 길게 논하지는 않겠지만 실제로는 중요한 문제이다. 위 새 번역은 딱딱한 문어체로 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말하자면, 중학교 영어 시간에 영어 문장을 우리말로 옮겨 놓은 듯한 감이 든다. 즉, 순수한 우리말이 아니라 번역체 어투가 너무 많이 묻어 있다. 이것은 예전의 사도신경과 비교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는 문장과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라는 문장을 비교해 보면 그 차이가 확연히 느껴진다.

사도신경은 예배 시에 사용하는 매우 중요한 신앙고백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단지 정확한 번역뿐만 아니라 순수한 우리말 문체로 다듬어져야 하고 순화되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도들이 암송하고 고백하기에 좋도록 최대한 간결하고도 시적이어야 하고 감칠맛이 나야 한다. 예를 들면 위 새 번역에서는 인칭대명사 ‘나’와 ‘그’, ‘그의’를 많이 사용했는데, 가능한 한 이런 인칭대명사를 생략하는 것이 우리말이다. 따라서 사도신경에서도 꼭 필요한 경우에만 인칭대명사를 사용하고, 가능한 한 생략하는 것이 우리말 어법에 맞다고 하겠다. ‘오르시어’도 껄끄러운 문어체이며, ‘믿습니다’와 ‘오십니다’도 너무 딱딱하다고 생각된다. ‘살아있는 자’도 ‘산 자’에 비해 간결하지 못한 표현이며, ‘죄를 용서받는 것’도 좀 생각해 볼만한 표현이다. ‘믿으며’와 ‘믿사오며’ 사이의 어감의 차이에 대해서도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이런 국어학적 문제와 문체 문제에 대해서는 국어학자들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그저 일반 국어학자가 아니라 오랫동안 교회생활을 한 믿음 좋은 국어학자로서 성경의 용어와 교회의 언어생활에 익숙하면서도 우리말에 정통한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몇 개의 번역 시안을 만들어서 각 교회에 돌려서 어떤 문체의 것을 더 선호하는지에 대한 조사도 병행되면 좋을 것이다.

사도신경은 단지 우리 교단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교회 성도 전체가 사용하는 공통된 신앙고백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나아가서 한국 교회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한국 사람들과 교포들 모두가 사용하는 가장 기본적인 신앙고백이기 때문에 내용상 올바를 뿐만 아니라 암송하기 좋고 사랑받는 고백이어야 한다.

지금 우리 고신교회가 우리 신학자들의 진언을 경청하지 않고, 어디에 장단을 맞춰 춤을 추고 있는가를 곰곰이 생각해 봐야할 중요한 시점이다.

혹, 번역의 옳고 그름을 떠나 어법(語法 말이나 글의 일정한 규칙이나 법칙)의 차이는 같은 말이라도 ‘아’ 다르고, ‘어’ 가 다르기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심중의 고백 자세는 아주 중요한 것이다.

알려지기로는 어릴 적부터 부모신앙을 이어받은 자들은 대부분 종전의 사도신경 문안을 선호한다는 정보가 있으나 정확한 통계는 아니다. 아마 어릴 적 처음 말을 배우면서 주기도문, 사도신경, 십계명을 익힌 자라면 이해가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변종길 박사는 또 다른 「선지동산」 2011년 제59호에 기고한 글을 통해 예수님께서 음부에 내려가셨는가에 대한 변종길 박사의 異見8)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8)변종길 박사가 『선지동산』 2011년 제59호에 기고한 글. “신약 난제 해설(1])”의 글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우리나라 사도신경에는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부분이 없다. 그냥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중략)”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화란개혁교회의 사도신경에는 “지옥에 내려가셨다”가 있으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도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 있다(제44문). 하지만 한국 장로교회가 받아들이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는 이 부분이 없다. 그냥 “장사 지낸 바 되어 죽음의 능력 아래 머물러 있었으나 썩음을 당하시지는 않았다”고 고백한다(VIII,4). 소교리문답에도 이 부분이 없다. 다만 대교리문답에서 “제 삼일까지 죽음의 상태에 머무르시고 죽음의 능력 아래 계셨던 것인데, 이를 다른 말로 ‘지옥으로 내려가셨다’고 표현했다”고 설명한다(제50문의 답). 고대교회의 신조들 가운데 니케아 신조에는 없지만 아타나시우스 신조에는 있다.

이처럼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고백은 신조들에 따라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다. 가톨릭교회의 사도신경은 물론 이 부분을 가지고 있으며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나 개혁교회의 신조들 중에는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이 부분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을 “그(예수님)가 그의 모든 고난 중에, 특히 십자가에서 겪었던 말할 수 없는 고통들과 슬픔들, 공포와 지옥의 고뇌”라고 설명하고 있다(제44문). 따라서 실제로 예수님께서 ‘음부’ 또는 ‘지옥’ 내려가셨다고 보지는 않는다. 단지 십자가에서 겪은 예수님의 고통을 나타내는 비유적 표현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 부분을 가지고 있는) 사도신경에서는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다음에 “음부(지옥)에 내려가셨다”가 나온다. 따라서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십자가의 고통을 겪었다고 하는 것은 시간의 순서상 잘 맞지 않는 점이 있다. 따라서 개혁교회 안에서도 많은 논쟁이 있었다.

그래서 이 부분은 여러모로 난제거리이다. 사도신경 본문도 시대마다, 교회마다 그 내용이 약간씩 다르다. 그러나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사도신경에 대한 기록인 히폴리투스 로마누스(Hippolytus Romanus. 215년 또는 217년 기록)의 사도신경에는 “음부에 내려가셨다” 부분이 없다. 그 후에 이어서 나오는 네 개의 문서에도 없다. 4세기의 튀라니우스 루피누스(Tyrannius Rufinus)의 기록에 처음으로 이 부분이 나오는데, 그 후 6세기 이후에 좀 나오며 그 외 대부분의 문서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cf. Denzinger-Schönmetzer, Enchiridion Symbolorum). 따라서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것은 원래의 사도신경에는 없었는데 후대에 들어온 것으로 생각된다.

중요한 것은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중요한 구절은 베드로전서 3:19이다. 베드로는 여기서 이렇게 말한다.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느니라.”(개역개정) 개역한글판에는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느니라.”고 되어 있다. 개역개정판에서 ‘가서’가 덧붙은 것은 진전된 번역이기는 하나 위치가 좀 잘못되었다. ‘옥에 있는 영들에게’ 다음에 와야 더 정확하다. 뿐만 아니라 두 번역 다 ‘전파하시느니라’의 시상(시제)이 잘못되었다. 이 동사(에케뤽센)는 아오리스트로서 ‘전파하셨느니라’고 번역해야 옳다. 영어 번역은 다 그렇게 과거로 번역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 구절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예수님이 죽으신 후에 실제로 지하 세계에 가서 복음을 전하셨다고 본다. 그러나 칼빈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이며, 따라서 믿지 않고 죽은 자들에게는 희망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영혼’이 내려갔다고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가셨다고 말하는 것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여기의 ‘필라케’를 ‘옥’으로 보지 않고 ‘파수대’로 본다. 즉, 경건한 영혼들이 구원을 소망하며 기다리고 있다고 풀이한다(벧전 3:19 주석 중). 그러나 여기의 ‘옥에 있는 영들’은 칼빈이 생각한 것처럼 ‘경건한 영혼들’이 아니라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임이 분명하다(20절). 한편, 개혁교회에서는 대개 그리스도의 승천 시에 그의 승리를 죽은 자들에게도 선포하셨다고 본다(Bavinck, Greijdanus 등). 19절의 ‘가서’를 22절에서와 같이 ‘승천’으로 보고, 또 ‘전파하다’를 복음 전파가 아니라 단지 부활로 말미암은 승리의 사실을 ‘선포’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 해석은 물론 교리적으로 문제없는 해석이기는 하지만 주석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19절은 분명히 ‘옥에 있는 영들에게 가서’라고 말하며, 22절처럼 ‘하늘로 가서’라고 말하지 않는다.

현대의 많은 주석가들은 이 구절을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에 ‘죽은 자들’에게 가서, 또는 ‘반항하는 천사들’에게 그리스도의 승리를 선포했다고 본다. 그러나 반항하는 천사들 곧 악령들에게 그리스도의 승리를 선포했다는 것은 이상하다. 그런 것은 외경에 나오는 사상일 뿐, 본문에서는 이들이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20절) 예수님은 바로 이 사람들에게 가서 전하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전하신 것일까? 19절은 ‘영으로’라고 말한다. 이것은 바로 앞 구절과 연결해서 살펴볼 때 ‘성령으로’이다. 곧 예수님은 ‘성령으로’ 노아 시대 사람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신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노아 시대를 가리킨다. 예수님은 구약 시대에도 계셨으며, 그 때 성령으로 노아를 통해 복음을 전하신 것이다. 이것은 고대교회의 어거스틴의 견해이며, 또한 베자와 고마루스의 견해이기도 하다. “그리스도는 노아를 통해 그 때 그의 영(성령)으로 전파하였다.”(Gomarus) 우리는 이 견해가 옳다고 보는데, 왜냐하면 베드로 자신이 20절에서 그렇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의 선재(先在)하심에 대해 생각해야 하며(요 1:1, 8:58 등), 또한 구약 시대의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벧전 1:11, 벧후 1:21). 성령은 구약 시대에 아브라함에게도 역사하셨으며 이삭과 야곱에게도 역사하셨고, 나아가서 모든 성도들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셨다(사 59:21, 63:11, 학 2:5, 느 9:20). 구약 시대 성도들도 ‘성령으로’ 거듭나서 천국에 들어갔다(cf. 요 3:5). 노아 시대도 마찬가지다. 성령은 노아를 통해 당시에 패역한 사람들에게 회개와 구원을 전파하셨다. 따라서 예수님은 구약 시대에도 성령으로 활동하고 계셨음을 알 수 있다. 노아는 이를 위해 사용된 한 도구였다.

그러면 왜 ‘옥에 있는 영들’이라고 말하였을까? 그 이유는 그들이 그때 노아의 설교를 듣고 불순종하여서 ‘지금’ 지옥에 있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이 편지를 기록할 당시에 그들은 지옥에 ‘영’으로 있었다. 이들이 노아 시대에 불순종하던 자들이었음은 베드로 자신이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20절). 지금 지옥에 있는 그들은, 그들이 땅에 있을 때에, 노아의 설교를 듣고도 회개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식의 표현은 베드로전서 4:6에도 나타난다.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 이것은 예수님이 음부(지옥)에 가서 죽은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다는 의미가 아니다. 지금은 죽었지만 그들이 살아 있을 때에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의미이다. 곧 베드로가 이 편지를 기록할 당시에 ‘살아 있는 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죽은 자들’에게도 - 곧 그들이 땅에 있을 때에 -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의미이다. 이런 식의 표현은 오늘날에도 흔히 사용된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하늘에 계신 우리 할아버지는 100년 전에 선교사를 통해 복음을 받았습니다.”라고 말할 때, 이것은 그 할아버지가 천국에서 복음을 받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지금은 천국에 계시지만 할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에 곧 이 땅에서 복음을 받았다는 의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베드로가 ‘옥에 있는 영들’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지금은 지옥에 있는 영들을 가리키지만 그들이 살아 있을 때에 그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베드로는 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말하다가(18절) 갑자기 노아 시대의 복음 전파로 넘어가는 것일까? 갑작스럽게 수천 년을 뛰어넘는 데에는 어떤 연결이 있는 것일까? 여기에 ‘그리스도의 선재하심’과 ‘성령의 역사’가 있음은 이미 말하였다. 베드로는 구약 시대의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도 매우 민감하였다(벧전 1:11, 벧후 1:21). 뿐만 아니라 또 하나의 중요한 연결고리가 있다. 그것은 바로 ‘물’이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는 표’이다(21절). 노아 시대의 ‘물’은 세상에 대한 ‘심판’을 의미함과 동시에 노아 가족에 대한 ‘구원’을 상징한다(cf. 벧후 2:5). 베드로의 머릿속에는 베드로 당시의 구원의 역사과 노아 시대의 구원의 역사가 나란히 놓여 있었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같은 원리의 사건으로 오버랩 되어 있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 중요한 것이 또 하나 더 있다. 베드로는 갈릴리 호수에서 물위를 걷다가 물에 빠져 죽을 뻔하다가 건짐 받은 경험이 있다. 이런 개인적 경험은 베드로에게 엄청난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물’은 보통의 물이 아니라 죽음에서 건짐 받은 구원을 의미하였다. 따라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말하다가(18-19절), 곧바로 ‘물’ 가운데서의 구원과 같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며(21절), 이를 위한 중간 다리로서 ‘노아 홍수’ 사건이 쉽게 떠올랐을 것이다.

어쨌든 신약성경 전체에서 볼 때 예수님이 음부 또는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사상은 근거가 없는 것이며, 죽은 자들에게 또 다시 회개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도 맞지 않다. 개혁교회는 이러한 견해들을 배척한다. 사도신경에 “음부에 내려가셨다”가 들어온 것은 후대이다.

초기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단순한 고백뿐이었다. 후에 “음부에 내려가셨다”가 들어온 것은 베드로전서 3:19에 대한 오해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에 “음부에 내려가셨다”를 추가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된다고 변종길 박사는 기술하였다.

 

9. 새번역은 한국교회일치라는 에큐메니즘 차원에서 시발된 위험한 출발이기에 개혁 주의 교회들이 동참하지 않고 있다.

전통적으로 개혁주의자들은 무분별한 교회연합을 ‘영적인 간음’으로 까지 확대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교회사가 일관된 하나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볼 때, 21세기 현존하는 오늘날의 우리교회 역시도 유구한 세계교회 역사와 연결된 연장선상에 있다는 점이 더욱 분명해 진다. 그런 점에서 사도신경은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신앙의 중요한 조목으로서 교리의 중심골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연합운동을 넘어 교회일치라는 형세(形勢)의 흐름에 동승하여 너무 쉽게 속단했다는 점이 우려된다.

오랜 세월동안 익히고 길들여 져 친숙해진 신조의 문안과 어구, 말의 마디나 구절을 바꿔 사용할 때는 충분한 사전 검토와 논의가 필요하다. 새번역문을 접해보면 어감(語感)이 달라져서 하나님 아버지께 진실 되고 깊은 마음으로 다가가지 못할 것 같다는 감정을 체감하게 된다. 새로 번역한 사도신경 문안은 원문에 충실하려는 세심한 노력을 기울였다고 하기보다는 로마가톨릭의 그것과 거의 흡사하면서도 지옥 강하 부분은 원문을 삭제했다. 내용은 종전의 것과 유사하나, 문장 형식은 로마가톨릭과 유사한 어법, 리듬 흐름이다.

현재 부산의 호산나교회(개혁, 미시행), 수영로교회(합동, 미시행), 부산영락교회(개혁, 미시행), 초량교회(합동, 미시행)는 시행하지 아니하는 것으로 파악되었으며 고신은 바꿔 사용하는 곳이 많으나, 개체 교회별로 보류한 교회들도 상당 수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예장 합동, 사당동 총신대학교 측 총회는 한 노회를 통해 새 번역문을 사용하자는 헌의 안이 상정되었으나, 총회가 부결시켰다고 총회본부 교육진흥국직원이 확인해 주었다. 앞으로도 원래 사용하던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계속 그대로 적용한다고 밝혔다.

아직도 침례교회는 세례를 ‘침례’로 순복음교회는 하나님을 ‘야훼’로 호칭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자신들 만의 정체성을 지키겠다는 것이라고 본다.

고신교회가 개혁주의 신학의 방향성 문제는 합동 사당동측이나, 합신(박윤선 계통) 측과 노선을 같이 해야 된다는 여론이 갈수록 탄력을 받는다. 사당동 총신대학교에는 고려신학대학 출신 들이 상당수 교수로 있고, 합신은 한 혈통이다. 지금 우리가 너무 좌 편향돼 가고 있는 듯하다.

 

10. 새 번역 시도는 교회일치 전략 및 교리 사상 대교란 전술

무엇보다 통합, 성결 교단은 아주 적극적으로 새 번역문을 수용하고 있다. 두루 퍼진 의문점은 ⌈W.C.C.를 반대한다.⌋는 성명까지 내면서도, 예장 통합과 KNCC가 중심이 된 새 번역문을 너무 쉽게 받아들이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두고, 순기능을 그르치는 착상 아니면 이중 잣대라는 의견들이 널리 발산되고 있다. W.C.C.에 소속한 교회들은 종교다원주의 자들로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과 공자나 석가가 믿는 신도 구원이 있다는 다신론 자(POLYTHEIST) 들이다.

 

가능한 도식화

한기총(KNCC 회원 및 통합 중심)+KNCC(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사도신경, 주기도문 새 번역 주역↔W.C.C.↔종교다원주의↔윌프레드 스미스의 제3의 만남↔종교신학↔자유주의 신학↔이성적 사유와 혼합↔부산세계대회↔주관자(KNCC 회원 9개 교파 )

※ 특징이 있다면, 한기총 중심세력 KNCC 회원교파=KNCC=WCC 세계교회 일치 운동 주체 세력

 

진보주의자들은9) 변혁을 요구하며 합리주의적 신념으로 성경을 해석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저들이 말하는 변혁은 신앙 사상의 대변환으로 이성적인 인식 과정을 통해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위험천만 한 사고다.

개혁교회를 침범하는 방법으로는 한꺼번에 몸뚱이가 다 들어오지는 않는다. 처음에는 슬며시 한쪽 발을 내밀고, 눈치를 보다가 다시 다른 한쪽 발이 들어온다. 두발이 다 들어오고 나면 자연스럽게 그냥 몸뚱이가 쑥 들어와 있다. 지금은 한쪽 발이 아니고 머리 부분이 먼저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다. 사상 침투 전술이 가장 교묘하고 무서운 전술 병법이다.

일제가 한반도를 침략했을 때 성씨를 개명하고, 일본식 이름을 짓도록 강요한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조선 고유의 문화와 예술을 말살하고 유물들을 부수고, 훔쳐가고 한 것 등은 한민족 개개인의 사상, 민족 고유의 국가관을 말살하려는 저의가 그 속에 깊이 숨어 있었다. 따라서 이번 새 번역 사용 문제는 신앙고백의 형식을 동일하게 만듦으로 써 교회연합이라는 미명 아래 실제는 WCC의 세계교회 일치운동에 동참하게 만들고, 신앙 중심 체계를 변형시키고 흔드는 ‘사상침투 작전’ 전략이라고 봐야 한다.

우리가 인간의 이성(rationalism)에 바탕을 둔 철학자들이 말하는 절대자(absolute being)로서의 신(gods)을 믿는 것이 아니다.

강영안 박사는10) 철학자들의 신과 성경의 하나님은 다르다고 언급한 바가 있다. 강영안은 스피노자가 ‘존재하는 것은 어떤 것이나 모두 신 안에 존재하고 신 없는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고 이해될 수 없다.’ 라고 한 말을 거론하면서 그를 범재신론(panentheism)자라고 일갈했다. 스피노자는 이미 루터가 한 말을 도용하였다고 보는 명언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하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말한 네덜란드 출신 철학자다. 그는 유물론적 형이상학 체계를 완성했다.

9)직관에 의해 인식하는 능력을 말한다. 칸트 철학에 있어서 선천적 인식 능력인 이론 이성과 선천적의지 능력인 실천이성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이성은 오성(悟性)과 구별되어 이데아에 관계하는 더 높은 사고 능력을 말한다. 칸트의 선험적 관념론은 ‘세계를 이해하려면 이성과 경험이 모두 필요하다.’고 한다. 이성은 ‘자기 방식대로 만들어낸 대상을 통찰할 뿐.’이며, 또한 ‘이성은 떨쳐 버릴 수도 대답할 수도 없는 질문에 시달린다.’고 한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성경 해석을 이성에 바탕을 둔다는 것은 사유하는 능력을 가진 이성이 진위와 선악을 구별하며, 바르게 판단하는 능력을 가졌다고 보는 어리석음 그 자체다. 혹 칸트처럼 이성이 감성, 오성과 구별되어 이데아에 관계하는 더 높은 사고 능력을 가졌다고 해도 인간은 유한할 뿐이다.

불교에서는 이성을 만유의 본성이라고 한다. 기독교 철학에 있어서 이성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으로 본다.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 the Critique of Pure Reason』은 선험적 인식, 선험적 분석, 선험적 변증으로 나누는데, 각각 감성문제, 오성문제, 이성문제를 인식한다. 선험적 가상이란, 일종의 착각을 경험으로 확인하는 것을, 순수 이성은 이론 이성을 의미한다.

10)강영안 박사는 서강대 철학과 교수이며, 고려신학대학 신학과 재학 시절에는 홍반식 박사가 총애하던 학생이었다. 화란 자유대학에서 유럽근대, 현대철학을 전공했다.

 

루터, 쯔윙글리, 칼빈 등 종교개혁 신학의 특징은 하나님의 본질, 삼위일체 위격, 한 위격의 지식,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 위격들의 인격적 속성에 대한 관심이었다. 오늘 우리교회가 받아들이는 삼위일체 론, 신인론, 구원론, 내세관, 속죄관은 다 저들이 물려준 사상 유산이다.  

그런데 자유주의자들의 이성적 사고와 변증법적 유물론에 의한 사유는 교의학의 체계와 본 바탕을 허물고 있다. 지금 이 시점에 우리가 유념해야 될 것은 상대를 잘 파악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는 점이다. 원래의 사도신경이나 주기도문 문안을 왜 다시 번역하여 고쳐 사용하고자 했겠는가? 여기에는 숨겨진 음모, 일종의 계략에 의한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새로운 이념 체계를 수립하므로 써 사상의 대변화, 신앙고백의 일원화를 통한 교회일치라는 고도의 전략적 기획 프로젝트가 현상에 접근한 것이라고 본다. 사도신경, 주기도문을 다시 번역한 것은 1,000만 한국교회 자체를 KNCC나 WCC 이념에 따라 일치시키겠다는 의도라고 보면 정확하다.

지금 새 번역문을 함께 사용하자고 우리교회에 가까이 접근하는 자들은 세계교회 일치를 지향하는 KNCC, WCC 세력들에 의한 고도의 사상침투 전술이다.

 

11. 개혁주의자들이 풀어가는 난제 해법 방안이 도입되어야 하는 이유

분명한 것은 ‘옳다는 전제가 없다면, 어떤 경우에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는 개혁자들이 모색했던 사고 방법이나 지향 기준은 ‘올바른 성경 해석’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리고 점하나 찍는 문제를 가지고 많은 지식인들이 투쟁한 역사는, 깨닫는 것만큼만 보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신앙인들이 자신이 깨달은 대로의 외길을 가다가 당한 수모의 역사가 개혁주의 교회의 기독교적 세계관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 고려파 선진들이 지켜온 신앙이다.

그냥 편한 대로 하면 좋은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이미 총회가 선언까지 하였고, 개체 교회들은 당회가 결의한 후 시행하고 있는 곳도 더러 있지만, KNCC와 WCC 세력들의 교회일치라는 대전제의 산물이라는 원리와 본질을 이해하게 되면 새번역 수용여부는 ‘아니요!’라고 해야 한다.

혹 부지중에 자신의 의식이나 판단이 부족해서 ‘자각이 정상에 이르지 못한 상태’에서 지은 죄과라고 할지라도 피할 수 없는 것은 나중에 ‘심판’을 받는 다는 사실이다. 왜 욥이 부지중에라도 자녀들이 죄를 지을까봐 안절부절 했겠는가? 고신은 처음부터 접근을 단절시켰어야 했다.

이제 잘 몰라서 따라가게 되었다는 말은 설득력이 없어졌다. 총회가 결정했기 때문에 시행한다는 주장도 말이 안 되는 것은, 자매 교단인 화란 31조 개혁파 교회 헌법이 말해주듯 ‘다수회의 결정이 성경에 위배된다는 증거가 없다면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개혁자들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헌법 조문을 되새겨 보면, 새번역의 취지와 목적 자체가 교회일치 운동자들에 의한, 위한 것이라는 분명한 위배성이 입증되었다. 오늘 우리 고신교회는 개혁자들이 걸오 온 길로 가야 된다.  

필자가 처음 새 번역 문안을 정독하고 나서 얼른 생각한 것은, 개혁신앙에 바탕을 둔 논리적 변증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여기에는 초기 고대 교회사적 사관, 교의학적 이론, 원어와 어원 이해, 한국교회의 전통 및 철학적 접근에 의한 반론을 제기해야 된다는 갈등이 교차되었다.

우리 학자들의 글을 읽고 의견을 나눈 후 번민이 더 심해졌다. 많은 사람들이 괘념 적하면서도 섣부르게 나서지 못하는 이유는 총회라는 권위와 강력한 주도 세력의 파워에 짓눌려 차마 입을 열 수가 없는 분위기다. 두세 사람의 반대 목소리는, 아주 먼 산에서 가냘프게 들려오는 작은 메아리 소리 정도로 들였다. 과거 초기에는 학자의 말 한마디, 글 한 구절에 귀를 쫑긋 세우고 귀담아 들었지만, 권위 시대는 지나가고 보편화로 인식되면서 별로 탐탁찮게 여기는 풍토가 조성된 지도 꽤 오래 된 듯하다. 학자의 권위와 학문의 위계질서가 무너져가고 있음이 안타깝다. 탈 권위 시대로의 사회 변혁은 교회로까지 번져와 개인 중심, 황금만능이 낳은 결과인지도 모른다.

이 시점에 문득 생각나는 것은 교부 아타나시우스가 삼위일체 교리를 지키기 위해, 다섯 번이나 유배 생활을 하였던 일들이 떠오른다. 고난이 있었기에 오늘 내가 여기 있다고 말하고 싶다.

최소한 고신은 좀 더 신중하게 대처하고 검토하는 세심한 분석과 협의 과정이 있어야 했지 않느냐는 의견들이 정체성을 중시하는 정통 고려파 성도들에게서 조금씩 나오고 있다. 순수가 파괴되고 무너지는 첫 번째 유혹은 시류, 한시대의 풍조나 유행에 물들거나 편성하는 것이라는 점을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일깨워 주셨다.

「와서 나하고 같이 놀자」고 손짓하는 친구가 누구인가를 잘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 교회연합 운동에 생각보다 고신이 적극적이라는 평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섞여 함께 일을 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동화되어 고유의 신앙이나 전통이 소멸돼 가는 것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아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동일한 신앙고백으로 교회일치에 동참하고 되며, KNCC와 WCC에 동조하는 세력으로 성큼 다가서게 된다는 점이다.

 

12. 교회연합 운동도 필요한 경우가 있긴 하나, 이것은 아니다

교회연합은 對 정부 정책 수립 공조나 대 사회 복음전파 역할 분담 등에 있어서는 가끔 필요한 경우가 인정된다. 그러나 KNCC나 WCC의 세계교회를 지향하는 교회일치 운동에는 참여할 수가 없다. 태생 자체가 다른 교파와의 교리, 신조의 통일이나 연합은 아예 처음부터 출반 선상에 서지 않았어야 한다. 우리 신학자들의 세밀한 분석과 검토 과정 없이, 총회 석상에서 신학부에 잠시 넘겼다가 ‘번역에 하자가 없다.’ 는 식의 허위 보고를 총회가 받았다는 분석이 나오는 만큼, 500여명의 총대 원을 우롱하는 처사임은 물론이고, 사도신경 원어 검정에 참여도 하지 아니한 무자격자의 전략적 보고를 모르고 받았다는 결과는 고신총회가 어떤 식으로 흐른다는 단적인 예다. 우리 총회의 결정은 분명하지 않고 어정쩡하다. 이후 총회장 명의로 개체 교회가 즉시 시행할 것을 공문 형식으로 시달한 것은 결의의 원칙과 시행 방법이 상반되는 그를듯하게 속이는 기만이다.

새로 번역한 주기도문 문안도 새로 출판된 개역개정판 성경책 앞장에 수록해 놓았다. 지금 우리교회가 사용하고 있는 [마태 6:9] 말씀의 구절과 새로 번역해서 배포한 주기도문은 분명히 같은 내용인데, 문장은 서로 동일하지가 않다. 이는 상당한 혼란을 가중시키는 신중하지 못한 이중성을 띠는 정책이라고 판단된다. ‘일점일획도 바꿀 수 없다.’는 원칙을 거슬리는 정서다. 말씀을 다룰 때는 신중해야 하는데, 그런 점들이 이해할 수 있는 선을 넘었다는 것이다.

한기총 내의 KNCC 세력과 교회일치를 주창하는 KNCC가 중심 역할을 한 가장된 교회연합이 숨어있는 교회일치 전략에 휘말려 든 것이다. 처음부터 「사도적 신앙 회복운동」 차원에서 전개된 것은 아니다. 깊숙이 뿌리내린 전통적 신앙을 고려하지 아니하고 한기총과 KNCC의 어떤 플랜에 의해 추진된 사업에 교단을 끌고 들어가서 분별없이 동승한 결과는 ‘교회연합운동이 때로는 진리 내지는 정체성을 훼손시키는 우(愚)를 범하게 된다.’는 점을 깊이 생각하지 못한 때문이라는 지적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말하자면 에큐메니컬 운동 형태의 접근에 깊숙이 빠져든 결과의 산물이 사도신경, 주기도문 새번역문 수용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성경을 ‘성서’로 표기하거나 칼빈을 ‘칼뱅’으로 표기하는 학자의 저서는 대개가 자유주의 신학자들임을 감안한다면 성경공회로 그 명칭을 바꿔야한다.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 신학의 한 유파로서 성경해석의 바탕을 이성에11) 두며, 성경의 권위로부터의 자유를 주장하고, 성경을 교의학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역사적으로 연구한다. 성경의 원 저자는 하나님 자신이며, 성경은 성경 자체로서 해석된다. 인간의 이성적 판단으로만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은 너무나 위험하다.  

11)이성(理性)은 개념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을 감각적 능력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이다. 철학에서는 진위, 선악을 구별하여 바르게 판단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따라서 절대자를 직관에 의해 인식하는 능력을 말한다. 칸트 철학에 있어서 선천적 인식 능력인 이론 이성과 선천적의지 능력인 실천이성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이성은 오성(悟性)과 구별되어 이데아에 관계하는 더 높은 사고 능력을 말한다. 칸트의 선험적 관념론은 ‘세계를 이해하려면 이성과 경험이 모두 필요하다.’고 한다. 이성은 ‘자기 방식대로 만들어낸 대상을 통찰할 뿐.’이며, 또한 ‘이성은 떨쳐 버릴 수도 대답할 수도 없는 질문에 시달린다.’고 한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성경 해석을 이성에 바탕을 둔다는 것은 사유하는 능력을 가진 이성이 진위와 선악을 구별하며, 바르게 판단하는 능력을 가졌다고 보는 어리석음 그 자체다. 혹 칸트처럼 이성이 감성, 오성과 구별되어 이데아에 관계하는 더 높은 사고 능력을 가졌다고 해도 인간은 유한할 뿐이다.

불교에서는 이성을 만유의 본성이라고 한다. 기독교 철학에 있어서 이성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으로 본다.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 the Critique of Pure Reason』은 선험적 인식, 선험적 분석, 선험적 변증으로 나누는데, 각각 감성문제, 오성문제, 이성문제를 인식한다. 선험적 가상이란, 일종의 착각을 경험으로 확인하는 것을, 순수 이성은 이론 이성을 의미한다.

13. 그리고 개역 개정판 성경 출판에 대하여  

세계적인 유수한 교회들은 어느 성경 번역문을 사용할 것인가를 결정할 때, 역사관이나 정체성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특히 구라파의 전통 있는 교회들은 개혁자 루터가 번역한 성경을 지금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왜 굳이 그럴까? 조금은 어색한 문장이지만, 개혁자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때 묻은 책을 소중하게 여기면서, 원 번역자들의 신앙과 정신이 담겨 있기 때문에 그 책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 교회가 선택해야할 성경이나 신앙고백 문 역시도 우리들만이 지향해야 할 방향이 잘 설정되었는지, 지킬 것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본다.

공자의 말이 아니라도, 자꾸 다듬으면 나중에는 엉뚱하게 변하고 후대에는 다른 뜻으로 전달될 수도 있다. 경전을 고어나 난 이한 한자식 표현보다는 쉬운 현대식 언어로 된 글발이 더 좋다는 주장도 있긴 하지만, 진중하지 못하고 가볍기 때문에 절대로 안 된다. 나중에는 Good news for Modern man(현대인을 위한 새 소식, 새번역 성경)과 같은 것으로 하자는 주장이 나올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은 ‘개역개정판 성경’은 원어에 충실한 새 번역문이라고 보기 보단, 글자 몇 자 바꿔서 시장의 경제논리에 의한 출판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라는 말을 교계 지도자들이 공공연히 한다. 킹 제임스 버전을 직역한 이전의 ‘개역판 성경’이 오히려 원어에 가깝고 훌륭한 전경이라는 의견이 더 많은 것 같다. 신실한 K 성도는 ‘나는 어릴 때부터 외우고 묵상하는 성경구절이 좀 많은 편입니다. 문구가 바뀌니 왜 그런지 마음이 불편합니다.’라고 말한다. 새 출판 명분으로 내세운⌈판권 시한⌋ 핑계는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여론이 두루 퍼져 있다.

경전 자체는 만고불변의 진리라는 원칙이 있기 때문에 쉽게 바꾸거나 수정하면 안 된다는 점은 매우 상식적이다. 학자들이 연구 과제로 이렇게 번역하면 성경 원어에 가깝다는 정도로 발표하는 것은 모르지만, 출판이라는 도구를 이용하여 원칙을 흔들고 한국교회 전체 시장을 지배하는 방법으로 신앙의 지침서인 경전을 완전히 바꾸는 일은 보다 신중하게 생각해야할 문제였다는 지적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일부에서 수익성에 의한 마케팅 전략에 교회를 끌고 들어 갔다는 주장은 확인할 수가 없다. 가정마다 수십 년간 사용하던 성경책이 이방 저 방 쌓여 있으며, 부모님들이 자식에게 물려준 책은 버릴 수도 없는 형편이 되었다. 원래대로 돌아가자는 여론도 팽배하다. 예장 합동은 총회에서 개역개정판 성경을 공식적으로 부정했다.  

14. 맺는 말 

최초의 헬라어 사도신경이나, 라틴어 원문 사도신경을 한국식 표현 방식으로 직역해서 그대로 사용하기에는 약간의 어려움이 있는 것 같다. 한글 표기법은 문장 구성을 주어, 술어, 목적어라는 형식을 갖춘다. 그러나 원문은 더 강한 이미지를 풍기는 목적격인 동사가 앞에 나온다. 그럼으로 현재처럼 원문이 손상되지 아니하는 범위 내에서 재구성하여 사용할 수밖에 없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한국의 기독교 전래 史는 선교사들에 의해 복음이 전파됨으로써, 주로 영문 자료를 번역해서 사용한 경우가 다반사였다. 지금 새 번역을 추진하는 이유도 어쩌면 한국형 교리 체계를 확립하기 위한 일환으로 작용했다고 한다면, 이 문제는 단순히 외래문화 배척 차원에서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새 번역문 선택 여부는 우리 교회의 입장에서는 신중해야 된다고 본다.

새 번역에 대한 과제는 일방적으로 추진하기 보단, 꼭 필연성이 전제되었다면 한국교회 전체가 총의를 모아 이 문제를 신중하게 검토하고 우리 신학자들도 참여하고 동의하는 중지(衆智)를 모아 합일 하에 추진해야 했었다. 충분한 의견 수렴이나 합의점을 찾지 않고 일부 지도층에서 결정하고 추진함에 따라, 개체 교회들의 반영 상태가 더욱 지지부진해 졌다. 왜 지금까지 우리 총회는 진실하고 정직하게 한기총 내의 중심세력 KNCC 회원 교파와 KNCC가 공동으로 새번역 특위를 구성하고 추진되었다는 점을 숨기고 있었는지, 새번역의 정체를 더러 내지 못한 데에는 상당한 이유가 있다고 봐야 한다. 한기총에 호의적이고 적극이었던 지도자들은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역사 앞에 올바른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의 환원을 선언하므로 써 더욱 존경받는 분들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진언한다.

헬라어나 라틴어 원문은 어원이나 어순이 한글과는 다르기 때문에 한국적인 표현 방식을 잘 하려고 하면 원문에 충실하면서도 우리 식으로 문장을 재구성 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오랜 세월동안 우리가 사용해온 원래의 사도신경 문안은 상당히 친숙해져 있고, 원문의 뜻이 잘 반영되었으며, 문장 흐름이 자연스럽다. 또한 이해도가 높고 간결하며, 점층법 식 수사법의 문장은 조리가 있고, 매우 적절한 단어 조합 구성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미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앙을 내 마음 깊숙이 담아 ‘나는 하나님을 믿사옵나이다. Credo in Deum’ 라고 고백하고 있는데, 방법이 틀렸다고 KNCC와 그 동조세력들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개혁교회의 전경이나 신조가 모종의 마케팅 전략에 이용되어서도 안 된다. 우리 개혁교회가 패러다임에의 순응을 거부하는 가장 큰 이유가 있다면, 기독교 이론의 테두리가 어떤 분야에서 특징적인 사고나 인식의 틀이 상황에 따라 그때마다 다변화하는 현상들을 반영하는 세속적 기류에 편성하게 되면 일단 변질의 한 형태로 판정하는데, 바로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의 새 번역 작업이 개혁신앙을 이탈한 비평적 자유주의로의 전향 사범과 같다는 주장은 소위 학자들은 ‘영적인 간음 행위’라고 단정한다는 점이다.12)

12)별도로 구성된 KNCC 여성번역 팀의 주기도문 번역문은 ‘아버지’의 칭호를 양성 평등적으로 바꾸려고 한다는 점이다. 양성이란, 남녀의 권리나 의무 신분 따위가 차별이 없이 고르고 한결같다는 의미를 주장한 것이다.

뉴스엔조이 2004. 12. 25. : 한기총과 KNCC (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가 공동으로 번역한 주기도문 문안은 그리스 원어 (σου) ‘당신의’ 뜻 그대로 번역한 것 외에는 그의 동일하다. (최영실 성공회대 신약학 교수)

뉴스엔조이 2005. 9. 13 최소란 기자 : 여성단체는 이순임·임희숙·최영실 등 여성 신학자·목회자 15명으로 특별연구위원회를 구성해 주기도문을 재번역 했다. 여성들은 △원문에 충실하되 △여성신학적 입장에서 양성평등 적으로 △21세기 언어에 맞게 번역한다는 원칙에 따라 아버지란 표현 대신 '하나님'과 '당신'으로 표기한 새로운 주기도문을 내놓았으며, 8월 30일 남성 신학자·목회자 초청 공청회까지 거친 상태다. 여성단체가 내놓은 주기도문 안을 한기총, ·KNCC 안 대신 각 교단 총회에서 채택하도록 어떤 방식으로 요청할 지는 아직 논의 중이다.

뉴스엔조이 2005.09.16 주기도문 새 번역 안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여성신학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그리스어 원문의 '당신의'를 모두 '아버지'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마태복음의 주기도문(마6:9-15)의 그리스어 원문에는 단 한번 '하늘에 계신 아버지'(마6:9)가 호격으로 사용되었고, 그 외에는 모두 2인칭 대명사와 소유대명사를 사용하여 '당신의 이름' '당신의 나라' '당신의 뜻' '당신의 것'으로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여성 신학적 입장에서 보면 이것이 바로 문제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언어가 남성성에 고정되어 사용될 때 일어난 언어의 성차별적 억압의 실상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는 것 자체가 여성억압"이기 때문이다. (최영실 성공회대신약학 교수)

뉴스엔조이 2005. 5. 11 최소란 기자 : '주기도 새번역안'의 하나님 '아버지'는 부당하다. KNCC 여성위 양성평등 시대 반영하고 보편적 하나님 상 담아야 한다고 주장하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가 지난해 12월 공동 발표한 ‘주기도 새번역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표기한 것에 대해 KNCC 여성위원회(위원장 한국염 목사)가 “양성평등의 시대적 흐름을 전혀 반영하지 않다”며 문제를 제기했다.

 

저자소개  金英壽   KIM YOUNG SOO

1946 慶北 金泉초곡교회 출신

스프린터 100m 경북 육상경기선수권대회 남고1

46회 전국체전 경북대표, 한미친선경기 한국대표

고려신학대학 졸업

Midwest University (M.C.E.)

Midwest University (D.C.E., candi.)

고신대학교 교무과장, 교무부처장, 기획부실장, 사무처장

부산 YMCA 이사(직능이사, 실행이사) 역임

청소년분과 위원장, 헌장개정위원장, 선거관리위원장 역임

국제 Y'S MANS CLUB 31대 부산지방장(지방총재) 역임

RSD-BF. TC. YMCA. LT., 법제위원 역임

예장(고신) 부산부평교회 장로

부산기독포럼 발기위원장

祖父김용목 김천군 훈장

父親김국린 김천군 서기. 공출수납 거부로 일제 항거 사직

대동(한골마을) 문맹자 야학교사

姑母夫유창덕 휘문고, 독립운동가. 대구칠성형무소 6년간 옥고

부산광역시 수영구 민락본동로 11번길 21 ) 613-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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